110212200506

오백 : 봄 完 본문

이엑쏘

오백 : 봄 完

박로제 2017. 11. 4. 14:10


*노래를 들으시면서 봐주세요.






봄이라서 미쳐버린 건 아닐까.


백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날씨도 좋고, 꽃은 예쁘게 피었고, 그리고 술은 맛있으니 살짝 미쳤다고 생각했다. 물론 축제기간인 탓도 있었다. 그래서 미친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자꾸 미쳤다고 자기 세뇌를 하는 이유는 그거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같은 과의 남자 선배가 잘생겨 보일 이유가 없잖아? 그것도 술에 취해 이상한 토론을 하고 있는 선배가! 백현은 지금 저기서 풀린 눈으로 제 동기인 종대와 함께 열변을 토하고 있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아 잘생겼다.


큰일났다. 밤톨같은 뒤통수마저 귀여워보인다니, 취해서 그랬다고 정신 승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백현은 막걸리 한 잔밖에 안 마신 상태였다! 아무래도 정말 도경수한테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오백 : 봄 完






그냥 연애가 하고 싶은거 아닐까. 봄이니깐 연애가 하고 싶은데 자주 만나는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기고 가장 정상인 사람이라서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물론 도경수도 취하면 제정신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백배, 아니 천배정도는 나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수랑 연애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백현은 동기를 꼬드겨서 소개팅을 나갔다. 제 동기인 찬열과 종대도 같이!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예쁜 애들 많다는 모 여대의 무용학과랑 소개팅에서 백현은 그 어떤 두근거림도 느낄 수 없었다. 그나마 눈길이 갔던 여자는 꼭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였다. 크고 흰자가 많은 눈에 웃을 때는 입술이 하트가 되는 그 누군가를. 그래서 백현은 소개팅 중간에 나오는 매너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 예의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 자리에 더 있고싶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연애가 하고 싶은 건 맞았다. 봄이니깐, 애인이랑 손잡고 꽃구경도 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애인이 경수였으면 했다. 아무나하고 연애가 하고 싶은게 아니라 도경수랑 연애가 하고 싶었다. 저기서 술 취한 준면을 들쳐 업고 나가는 도경수랑! 손잡고 꽃구경도 가고! 같이 밥도 먹으러 가고! 다가오는 시험기간에는 같이 인문대 카페 구석진 곳에 앉아서 공부하다가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싶었다! 내가 게이였던가. 백현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이렇게 남자가 좋은 건 처음이었다. 고등학생 때 사귄 사람은 모두 여자였고 남자랑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엄청나게 고민 했었다. 이게 정말 좋아하는 감정인지, 단순히 친한 선배에 대한 깊은 우정이 아닌지, 그리고 그냥 봄이니깐 아무나 붙잡고 연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한창 즐거워야 할 신입생 백현은 그런 고민 때문에 하루하루가 말라갔고 백현을 귀여워하던 준면 선배는 그런 백현이 안타까워 매일 점심 때 마다 고기를 사먹였다. 고민있으면 말하라고 고기쌈을 싸주는 준면에게 차마 '형이랑 같이 다니는 경수 형아가 너무 좋아요ㅠㅠ' 라고 말할 수는 없어 백현은 맨날 고기쌈을 먹다가 울었고, 준면은 그런 백현을 달래주다가 같이 울었다. 그리고 고기가 슬슬 지겨워질 때 쯤 백현은 제 감정을 인정했다. 남자면 어떻고 이렇게 좋은데 그게 우정인지 사랑인지 뭐하러 따지냐고! 그리고 소개팅 사건으로 아무나가 아닌 경수와 연애를 하고 싶다는 걸 깨달았기에 백현은 다시 기운차릴 수 있었다. 국문과의 마스코트인 백현이 다시 돌아오자 준면은 그동안 사먹인 고기가 아깝지 않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다들 보는 눈은 있어서 경수 주위에는 항상 여자가 많았다. 밥 좀 사주세요, 오빠 그 수업 시험은 어떻게 나와요? 오빠 조별과제 저랑 같이 해요 등등. 누가봐도 뻔히 보이는 작업에 백현은 여우같은 제 동기들과 선배들을 매일매일 껌처럼 씹었다. 망할 기지배들! 하지만 그래도 도경수가 엄청난 철벽, 봄잠바였기에 백현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수는 여자 후배들에게 밥 사준 적은 없지만 저하고는 (물론 찬열과 종대 포함해서) 몇번이나 밥을 먹으러 갔고, 중간고사가 끝난 날에는 고생했다며 치킨도 사줬었다. 그리고 1학년 국어학 개론 수업 족보도 줬다! 친한 후배는 백현과 종대, 찬열 외에는 없었고 수업도 매일 준면이랑 들었고 조별과제도 준면이랑만 함께 했다. 백현은 저를 예뻐해주고 고기까지 사주는, 거기다가 들러붙는 여자들까지 처리해주는 준면이 너무 고마웠다.



"준면이 형!"

"응?"

"좋아해요!"


그래서 술마시다가 뜬끔없이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다. 준면은 그런 앞뒤 잘라먹은 고백도 좋다고 웃으며 백현에게 제일 큰 두부에 김치를 올려주었다. 그걸 또 입을 벌려 받아먹는 백현이 귀여워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런데 알까, 그런 백현과 준면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째려보고 있는 사람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사람이 도경수라는 걸!






*****






도경수는 소울메이트라고 생각했던 형을 처음으로 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참고로 도경수는 신생회 때 영문과에 인사하러 가서 학생회장 주제에 술 퍼먹고 꽐라가 됐을 때도 화 한번 낸 적 없었고, 그런 준면을 집까지 데려다준 것도 모자라 해장국까지 끓여줬던 사람이다. 별 고생은 다시키고 죽어도 하기 싫다던 학생회 일을 억지로 떠맡기고 부학회장을 시켰을 때도 화낸 적이 없었다. 도경수는 김준면을 좋아했고, 존경했으며, 그런 형을 챙겨주고 그를 도와주는건 당연하다 생각했다. 김준면과 도경수는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도경수는 제 친형보다 더 형같았던 김준면의 동글동글한 뒷통수를 들고있던 <표준국어문법론>으로 치고싶었다.


이유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분명했다.


"준면이 형 좋아해요!"


그래, 남의 속도 모르고 꼬리를 흔들면서 김준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 변백현때문이었다! 아 시발 오늘따라 소주가 존나 쓰구만?


경수는 백현을 좋아했다. 도경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니면서 자신의 취향을 한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는데, 사실 귀여운 것에 환장을 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두 사람 중 하나인 김조교는 귀엽게 생긴 놈이 자기랑 똑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웃었고, 김준면은 형은 동생의 그런 취향도 이해한다며 막걸리를 원샷했다. 아무튼 도경수는 귀여운게 좋았고 이제 갓 미짜티를 벗어난 새내기 백현은 당연히 경수의 취향이었다. 얼만큼 취향이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오티때 보자마자 잘사귀고 있던 애인과 헤어지고 혼자 애타서 난리 칠만큼, 헤테로였던 자신이 남자와의 연애, 키스, 그리고 섹스까지 상상하게 할만큼 좋았다. 도경수는 정말로 진심이었다. 빨리 자기 우리 안에 가둬놓고 예뻐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애가 다른 놈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른 놈이 주는 두부김치까지 받아먹는데 화가 안날리가 있나? 아 짜증나게 오뎅탕은 또 식었다. 우동사리는 퉁퉁 불어가지고 맛도 없었고 쑥갓만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박찬열은 취해서 자기 기타를 끌어안고 울고 있고, 김종대는 김조교랑 대작 중이었다. 그리고 김준면과 변백현은 시뻘건 얼굴로 두부를 가지고 장난치는 중이었다. 아무도 신경안써주는 오뎅탕의 쑥갓이 마치 저같다고 도경수는 생각했다. 백현의 좋아한다가 그냥 순수한 의미인건 자신이 제일 잘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준면이 형."


"응?"

"이거 마셔요. 형이 좋아하는 요거트 막걸리 시켰어."

"하하 역시이~ 우리 겨엉쑤가~~최고지이~~"


준면은 신나하며 막걸리를 들이켰고 빈잔을 머리 위로 털자마자 장렬하게 전사했다. 김준면은 술이 약했고 도경수는 그래서 요거트 막걸리에 소주를 탔다. 소심한 복수였다.



미안해 형...그래도 해장국은 끓여줄게...





***






백현은 잘먹었다. 오티 때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고기며 안주를 아작 낸 일화는 국문과에서 유명했다. 안먹는 음식도 많았고 가리는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건 아주 잘먹었다. 그래서 선배들은 백현에게 자꾸 먹을 걸 줬다. 고학번들이 주머니에 맥스봉이며 커다란 눈깔사탕, 초콜릿 등을 쑤셔넣고 다녔다. 국문과의 마스코트이자 귀염둥이인 백현은 선배들의 예쁨을 받으면서 아주 잘먹고 다녔다. 특히나 선배들이 선호하는 간식은 눈깔사탕이었는데 그 커다란 걸 입안에 넣으면 안그래도 말랑한 볼이 볼록, 튀어나왔고 그게 햄스터같아서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경수는 아직까지도 심기가 불편했다. 백현이는 왜 사랑스러워서 도부학을 힘들게 하는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백현이를 보고 있으면 경수는 뿌듯하면서도 빨리 제 우리에 가둬서 저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백하고 깔끔한 연애가 모토인 도경수는 이런 집착과 소유욕은 처음인지라 더 괴로웠다. 변백현이 문제다. 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백현이가! 소고기를 먹이면 볼이 빨개지는 백현이가! 눈깔사탕을 입안에 넣고 핥아먹는 백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진짜로 문제였다.


"경수 형?"


그래 내 눈 앞에 있는 백현이 너요 너.(⊙♡ㅠ)


"왜 멍때리고 있어요. 맛없어요?"

"어? 아니...아니야. 잠시 딴 생각한다고."

"헐...어떻게 이 쌀국수를 눈앞에 두고 딴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고기가 맛있는데? 차돌박이두 들었는데? 형 실망이야..."


정말 실망했다는듯 입술을 내밀고 부루퉁하게 있는 백현에게 다 너때문이잖니...라고 하고 싶었지만 경수는 간신히 자유를 되찾으려고 날뛰는 제 입을 차돌박이로 막았다. 아, 맛있다.


오늘은 경수와 백현 둘이서만 하는 점심이었다. 준면은 오늘 휴강이었고, 찬열과 종대는 과제를 까먹었다며 중도로 달려갔다. 결국 남은게 백현과 경수였고, 마침 저번 중간고사 때 신세졌던 거 갚는다며 백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베트남 요리집으로 경수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경수는 월남쌈을 커다랗게 싸서 작은 입에 집어넣고 오물오물 씹는 백현을 바라보다가 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빡이쳤다. 이렇게 귀여운데 나랑 사귀지 않는다니 이게 지금 말이 되는가? 응. 말이 된다.


"형아, 경수 형아."

"으...응..?"


헐 형아래. 존나 귀여워.


"내가 쌈사줄까?"

"어어?"

"왜 시켜놨는데 먹지를 않는건데... 내가 싸줄테니깐 잠깐만 기다려봐요 형아."


말을 마친 백현은 물에 적싴 라이스 페이퍼를 접시에 펼쳐서 야무지게 쌈을 싸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많이'ㅅ' 형아 새우 좋아하니깐 많이'ㅅ' 아보카드 들어가야 맛있으니깐 넣구, 파프리카랑 양파랑'ㅅ' 그리고 숙주를 빼면 안되지'ㅅ'! 병아리처럼 삐약삐약거리며 쌈을 싸던 백현은 그걸 돌돌 말아 마지막으로 소스까지 찍어서 경수에게 내밀었다.


"자 아아~"

"아니, 저기...백현아. 내가 먹을테니깐..."

"소스 떨어져요 얼르은~"


결국 받아먹었다. 백현이 싸준 월남쌈은 너무 많은 재료가 들어가 볼이 터질 것 같았고, 한번에 삼킬 수도 없었지만 경수는 그래도 좋았다. 너무 두근거려서 내가 먹겠다고 거절했지만 그래도 직접 먹여주니 좋은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경수의 동그란 귀는 칠리소스만큼 빨개졌다.


그리고 애교있게 먹여주기까지 한 백현의 커다란 귀는 저기 저 파프리카만큼 빨개진건 도경수만 모르는 비밀.

 

 

 

 

 

2.

 

막걸리 먹기 싫어요.


형 저 막걸리 못먹겠어요.


우리 오늘은 맥주 마시면 안되요?



김준면은 풀이 죽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후배들이 막걸리 마시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준면은 와인이나 양주만 마실 것처럼 생겼으면서 막걸리를 굉장히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모자르다. 김준면은 막걸리를 사랑했다. 덕분에 학생회의 잦은 술자리는 막걸리집에서 이뤄졌고 가게의 이모는 작작 좀 오라며 잔소리를 하면서도 항상 해물파전과 빈대떡을 서비스로 챙겨준다. 2차도, 3차도 없었다. 항상 그 가게에서 끝을 봤다. 안주는 이모가 챙겨준 해물파전과 빈대떡, 두부김치와 오뎅탕이었고 술은 준면의 취향을 고집한 각종 막걸리였다. 그렇게 반년을 다니면 지겨울 법도 한데 왜 군말없이 따라가서 마셨냐면 계산은 항상 준면이 하기때문에 따질 수가 없었다. 1학년 새내기들은 자본주의 시대에서 누구의 말을 잘들어야 하는지 아주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말고사를 바라보고 밀린 과제의 제출기한이 다가오는 지랄같은 5월의 말, 1학년 비글 셋은 드디어 못마시겠다며 백기를 들고 준면에게 항의했다. 우리 오늘만이라도 호프집가서 생맥주 좀 마시면 안되냐고. 고기집 가서 소주마셔도 좋으니 막걸리는 그만 좀 마시자고! 안되면 우리끼리라도 마시러가겠단 말에 김준면은 눈물을 참으며 허락했고 아직도 백현이 일로 삐진 도경수는 김준면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다섯사람은 새벽까지 한다는 호프집으로 가서 치킨을 비롯한 기름진 튀김류와 과일화채, 그리고 생맥주를 시켰다. 술집에서 과일화채 시키는건 미련한 짓이지만 백현이가 먹고싶어하니 시켰다. 돈을 쓰는 사람은 준면이고 1인자는 도부학이다. 그 둘의 사랑을 받는 백현이 먹고싶어하는 걸 시키는게 당연했다.


그날 술자리도 장소만 다를 뿐 평소와 똑같았다. 다만 박찬열이 드럼 대신에 치는 것이 막걸리 잔에서 맥주 잔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김준면이 마시는 맥주 잔에 소주를 콸콸 쏟아붓는 도경수가 있을 뿐이었다.


사실 1학년 비글즈에게 슬슬 막걸리가 지겹지않냐고 부추긴 사람은 경수다. 그렇다. 경수는 사실 아직도 삐져있었다.






***






백현인 오이를 싫어했다. 근데 여름엔 무조건 냉면을 먹어야 했고 냉면엔 오이가 들어갔다. 냉면 주문 전에 오이를 빼달라고 미리 얘기했지만 빌어먹을 식당들은 그러면 맛이 없다며 백현의 요구를 씹었다. 돈내는 건 나인데 대체 왜?! 결국은 오이와 함께 냉면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종대나 찬열에게 대신 먹어달라 하고싶었지만 친구들은 편식하는 버릇을 고쳐야한다며 아무 구해주지 않았다. 친구따위...나이 스무살, 냉면을 먹다가 우정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 변백현이었다.


하지만 경수는 달랐다. 주문 전에 오이는 무조건 빼달라 부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를 넣은 냉면이 나오면 말없이 그 오이를 가져갔다. 그리고 자기 냉면의 통통한 계란 반개를 백현의 계란 반개와 합쳐주었다. ' 백현이 오이 가져갔으니 내 계란도 줘야지. '라고 말하던 도경수는 또 지나치게 멋있고 잘생겨서 백현은 그에게 또 반해버렸다. 아이돌한테 하루에 수십번씩 덕통사고 당하는 빠수니 마음을 백현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도경수는 냉면을 좋아했다. 그러나 냉면 위의 계란은 굳이 따지자면 불호였다. 왜냐하면 냉면 위에는 계란따위가 아니라 고기가 올라가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경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냉면집은 고명으로 다들 계란을 삶았고, 경수는 뭐라 따지지도 못하고 계란을 씹어먹었다. 자기가 안먹으면 다른 사람을 주면 될텐데 왜 본인이 먹어치우냐하면 경수의 주위 사람, 즉 준면과 김조교 또한 냉면 위에는 고기!를 외치기 때문이었다. 대신 먹어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먹어치우는건 당연했다.


여름에는 당연히 냉면이라고 외치는 백현을 보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안타깝게도 도경수의 과거 여친들은 여름에는 이열치열이라며 냉면을 거부하고 삼계탕을 찾았고, 삶은 닭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더운 여름 날에 땀을 내며 음식을 먹어야 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도경수는 밥만 먹으러 가면 여자친구와 싸웠다. 냉면이니 삼계탕이니 싸우다가 그자리에서 헤어지자고 외친 적도 있을 정도로 예민한 문제였다. 물론 백현이가 삼계탕을 먹자고 한다면 도경수는 군말없이 가줄 생각이다. 변백현이니깐. 그런데 기특하게도 백현은 여름에는 냉면이라며 맛있는 냉면집이 있으니 같이 가자며 자기를 끌고갔다. 솔직히 이쯤되면 그만 반해야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안타깝게도 도경수의 심장과 본능은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또 반해버리고 말았다.


"백현아."

"네?"

"계란...좋아하니?"


백현이는 왜 계란 노른자랑 흰자를 분리하는 것도 귀엽지?



"좋아해요! 형은요?"


응...나는 계란을 먹는 네가 너무 좋아 백현아...






***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났다. 학생회 멤버의 시험일정은 제각각이었지만 가장 먼저 끝난 것은 백현이었다. 그리고 시간표가 겹치는 찬열과 종대가 그 다음이었고, 경수와 준면이 마지막으로 시험을 끝냈다.


경수는 조금 짜증이 났다. 백현이는 수요일날 시험이 끝났고, 저는 준면과 같이 듣는 교양 덕분에 금요일날 시험이 끝났다. 그말은 즉 도경수가 변백현을 보지 못한지 벌써 3일 째라는 것이다! 수요일도 점심이라도 같이 할까 싶었는데 백현이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저는 시험을 치러가야했고, 그 수업 또한 김준면때문에 듣는 시발같은 <문예사조>였다. 경수는 다음 학기에는 죽어도 김준면과 같이 시간표를 짜지않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런 경수의 짜증을 알기라도 했던건지, 준면과 경수의 시험이 끝난 금요일날 준면은 1학년 세명과 경수를 불렀다. 학생회끼리 종강파티를 하자는게 겉으로 보이는 이유였지만, 까놓고 말해서 학기도 끝났으니 술마시고 죽어보자는게 속뜻이었다. 처음에는 에 뭔 종강파티냐고 투덜거리던 1학년들도 고기 먹고싶지않냐는 말에 혹해 오겠다 했고, 준면과 경수는 과방에서 1학년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선배! 우리 무슨 고기 먹어요? 소? 닭?!"

"준면 선배 우리 소먹어요 소!"


학교와 집이 가까웠던 찬열과 종대는 비교적 빨리 학교로 달려왔고, 이제는 준면에게 소고기 먹자면서 쫑알쫑알거리고 있었다. 물론 경수는 무슨 고기를 먹든지 상관이 없었다. 단지 소고기면 백현이가 쌈싸먹는게 귀여울 거고, 닭고기면 닭다리를 뜯어먹는게 귀여울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 저 지각이예요?"


머리 속으로 세번 째 쌈을 싸서 백현에게 먹여주던 경수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고개를 들었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백현을 보자마자 안그래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뜨며 백현을 쳐다보았고 그건 준면과 찬열, 종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표정이 왜 그래요?"

"야 벼...변백! 너 머리 왜그래?"

"응? 아아 방학이니깐 기분전환 삼아서... 안어울려?"


보통 스무살이 된 새내기들은 가장 먼저 머리부터 바꾸기 시작한다. 형형색색의 색깔로 머리를 물들이거나 파마 등을 하기도 하는데 학생회의 1학년들은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평범하게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간에 찬열이 새빨갛게 염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이 없었으며, 백현은 그중에서도 제일 무난한 검은색 머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현이 염색을 해왔다. 무난한 갈색도, 흔하게 하는 빨간색이나 주황색도 아닌 파격적인  분홍색으로!


"언제 한거야? 종강날?!"

"어어. 그 날 시험 끝나고 바로 가서 했어."

"백현인 얼굴이 하얀 편이라서 분홍색도 잘받네~"


저도 처음 해보는 색이라서 아직까지 어색한데, 다행히도 반응을 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실은 조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19년 동안 유지해온 검은 머리를 파격적인 색깔로 염색한 것은. 시험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헤어샵이 눈에 보였고, 어떤 색으로 할지 골라달라며 직원이 가져다 준 것들 중에서 이 분홍색이 유독 눈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탈색에, 염색까지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했지만 결과가 제법 맘에 들었다.


이제 백현이도 왔으니 슬슬 고기 먹으러가자며 짐을 챙기고 과방을 나가는 제 친구와 준면을 보면서 백현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저를 쳐다보고있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다들 한 마디씩 하는데 경수만 아무 말이 없었다. 안어울리는 걸까. 예쁜 머리였지만 경수 눈에 예쁘지 않으면 소용없었다. 결국 끝까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경수때문에 풀이 죽은 백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다른 사람을 따라서 과방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니깐, 경수가 그 뒤에 조용히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면 백현은 실망한 얼굴로 과방을 빠져나갔을테지만, 도부학의 목소리는 조용한 과방에서 생각보다 크게 울려 백현의 귀에도 바로 전달되었다.



예쁘다. 딸기맛 솜사탕같네.



도부학은 생각보다 크게 내뱉은 제 말에 놀라 급하게 입을 막았고, 백현은 자기 귀에 들려온 그 말을 의미를 생각하며 제 청각능력을 의심했다. 그러니깐 도부학은, 도경수는, 분홍색으로 염색한 백현이 너무 예뻐 할 말을 잃었고, 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속마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것도 엄청 낯간지러운 단어를 써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두 사람은 빨리 오라는 준면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고, 그런 말을 한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처럼 재빨리 문을 잠근 뒤에 다른 사람을 뒤따라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백현은 조금 큰 귀가, 그리고 경수는 목 뒷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3.


오늘의 메인 안주는 김치찌개다. 고기집에 가서 등심 안심 차돌박이 소갈비...를 끊임없이 먹어놓고 지치지도 않는지 매일 가는 단골 술집으로 가 김치찌개까지 시켰다. 기름을 먹고 왔으니 매콤한 국물을 먹어야 한다가 준면의 주장이었지만 김치찌개 국물은 돼지고기 기름이 둥둥 떠있었다. 매콤한 게 먹고싶었으면 차라리 김치만두전골을 시키지 그랬어요 준면이 형. 찬열은 그렇게 시비를 걸고 싶었으나 김치찌개 육수를 리필한 것도 모자라 공기밥을 두개나 시킨 사람은 김준면이 아니라 박찬열이었다. 


형, 들어봐요. 국어학개론 시험이 얼마나 개같았는지 알아요? 중세국어 엿먹으라고 해. 

평소엔 늦게까지 살아남아 뒷처리하러 오는 김조교와 대작을 하는 김종대가 시험에 지쳤는지 오늘은 제일 먼저 취했다. 소주를 막걸리 잔에 부어 원샷하더니 이제는 김치찌개에 왜 참치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들어갔냐며 찡찡거렸다. 처음에는 후배의 이런 모습이 귀여워 응, 그래, 힘들었지,를 반복하며 들어주던 준면도 그게 30분 내내 계속되자 지쳤는지 김치찌개에 참치는 이단이야 종대야.라는 말을 남기고 막걸리를 담은 병에 소주를 섞어 건네주었고, 김종대는 그걸 받아마시고 기절했다.  그리고 박찬열은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다며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준면이 해물파전을 시키자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오늘은  종강이니 특별히 도토리묵도 함께 시킨 준면이 배불러서 안 먹는다며?라고 묻자 찬열은 숟가락을 놓았지 젓가락은 놓지않았습니다. 라는 대답을 하며 막 구워서 따끈따근한 파전을 크게 찢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도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소주만 마시고 있었고, 변백현은 준면이 시켜 준 생크림 요거트 막걸리(김준면이 가장 사랑하는 술, 도경수는 이걸 소주와 섞어 김준면 전용 수면제로 사용한다.)와 함께 기본 반찬으로 나온 비엔나 소세지만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술에 취한 도경수는 시뻘개진 얼굴로 준면을 붙잡고 장교수는 대체 미국가서 뭘 배워온거냐 고양이 이름 영어로 짓기? 미국인의 미소가 아름다운 이유? 이딴 헛소리나 하며 찌개에 찬물을 집어넣어 끊임없이 재탕을 했을 것이고 백현은 빠알간 볼을 얼음물로 식히며 찌개에 있는 돼지고기를 전부 건져내 자기 입 안으로 넣고 있었을텐데 오늘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물론 그 이유는 한참 전의 그 이유때문이다. 

경수는 백현이 염색한 머리를 보고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여태까지 잘 숨겼으면서 왜 이제와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해봤자 이미 저지른 일이고 돌이킬 수 없었다. 잘피지도 않는 담배를 피우며 타임머신을 찾았지만 그딴 거 존재할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주 못할 말은 아니었다. 같은 남자끼리 그런 간질간질한 단어같은 거, 잘 쓰지는 않지만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변백현이니깐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현이는 사랑스러움을 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의인화한 존재니깐. 이미 여기까지 생각했다는 점에서 도경수는 구제받지 못할 변백현 덕후였지만 술에 취했고,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충격받아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백현은 경수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한다고 고기는 많이 먹지도 못했고 준면이 싸주는 쌈만 몇개 받아먹었을 뿐이다. 물론 이것도 백현의 기준이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다른 점은 없었지만, 아무튼 백현은 정말로 심각했다. 평소에 저런 말을 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게 그런 말을 하는 대상이 '여자'였을 뿐이었다. 형들이나 친구들한테도 예쁨받기는 했지만 저런 낯간지러운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딸기맛 솜사탕'같다니. 도경수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가? 준면이 접시에 덜어 준 말랑말랑한 도토리묵을 젓가락으로 흉폭하게 난도질하며 백현은 지금까지 경수가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았으나 다른 동기들한테 폭언을 퍼붓는 것에 비해(박찬열에게 웃으면서 죽으라고 말하던 경수를 백현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저에게는 상냥하고 예쁜 말들만 써왔지만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의도하지않았다는 것은 그 뒤 경수의 반응과 평소라면 쉴 틈 없이 제 입에 고기를 넣어주던 경수가 겉절이만 뒤적거리고, 김치찌개도 국자로 가득 퍼서 담아줬을 사람이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이런 행동때문에 본인도 의도치않게 내뱉은 말이라는 것을 백현은 알 수가 있었다. 

백현은 조금 서러웠다. 말실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경수의 입장에서는 실수같으므로)는 경수가 했고 백현은 기분전환 삼아서 파격적으로 염색을 한 것밖에 없다. 근데 왜 나는 고기도 못 먹고(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백현의 기준이다.) 김치찌개도 박찬열한테 다 뺏기고 예쁘다 귀엽다 이거 먹자 저것도 먹자하며 챙겨주던 도경수는 남처럼 데면데면하게 굴고있다. 물론 백현이 현재 가장 서러운 것은 준면이 자기는 먹지도 못하는 해물파전을 시켰다는 것에 있었지만, 어쨌든 서럽고 짜증나고 눈물나는 이유의 구십은 도경수에게 있었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진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었다. 나 집에 갈래...형아랑 엄마랑 아빠 보고 싶어ㅠㅅㅠ몽룡이도 보고싶어...ㅠㅅㅠ 찔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경수가 아닌 준면이 퍼다 준 김치찌개 속의 김치를 잘게 찢고 있을 때, 경수가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한 대만 피고 올게요. 마시고 있어요."
"그래, 그래. 밖에 모기 많으니깐 빨리 들어와."
"형도 적당히 마셔요. 오늘 김조교님 못온다고 했으니까."

그러고는 준면이랑만 대화하더니 백현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갔다. 정말, 시선 한 번도 주지 않고! 가게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멍청히 앉아있던 백현은 울음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으로 분노인지, 아니면 섭섭함과 슬픔인지 모를 감정에 몸을 떨면서 옆자리에 앉아있는 준면의 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혀엉..."
"응? 잠깐, 우리 백현이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요....그러니까..."
"눈은 왜 이렇게 새빨개! 누가 뭐라고 했어?!"
"아니, 그거 말구..."
"그럼 왜 그래! 말해봐 형이 해결해줄게!"
"....말고, ....줘요..."
"응? 뭐라구?"
"....나 해물파전말고오...치즈계란말이 시켜줘요..."

밖에 나간 도경수는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으니 백현은 그것을 제외하고 가장 서러웠던 것을 준면에게 속삭였고, 코까지 훌쩍거리며 말하는 백현을 위해 준면은 치즈계란말이 두 접시를 시켰다. 백현은 쭈욱 늘어나는 치즈를 감상하며 자기 얼굴 한 번 쳐다보지 않고 밖에 나간 도경수때문에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했다.





*****





그리고 도경수는 지금 자기혐오에 빠져있었다. 미친놈! 모자란 놈! 벼락맞아 죽을 놈! 먹이를 노리며 달려오는 하이에나같은 모기가 팔뚝과 목, 얼굴에 안착해 피를 빨아가는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내어줄만큼 도경수는 지금 정신이 나갔다. 그래서 경수는 나올 때 자신이 백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고, 팅커벨이 들러붙은 가게 문과 벽에서 최대한 떨어져 줄담배를 피우면서 본인이 내뱉은 말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별 거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말에 도경수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유는 그 말이 자신의 마음을 흘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평범하게 예쁘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경수에게는 꽁꽁 숨기고 있던 마음을 흘러보낸 것이었다. 그런 말을 별 거 아니라고 넘기거나 그런 말로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은 백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욕보이는 짓이었다. 그래서 경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미치겠네..."

벌써 마지막 담배였다. 아, 백현이 담배 냄새 안 좋아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백현을 먼저 생각하는 자신때문에 도경수는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담배라도 피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경수는 마지막 담배를 다 피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여기서 취했다가는 또 실수할지도 모르니 술보다는 담배가 나았다. 담배사러 편의점이나 갔다와야지. 간 김에 백현이 줄 메로나나 하나 사올까, 정말 구제받지 못할 정도로 변백현을 좋아하는 도경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길 때, 가게 문이 열리며 지금 도부학이 가장 보고싶으면서도 보고싶지 않은 사람이 튀어나왔다.

"어디가요 형?"

백현이었다. 예상 외의 인물이 문을 열고 나온 것도 당황스러웠는데 말까지 걸었다. 경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멍한 얼굴로 쳐다보니 백현이 새초롬한 눈으로 흘겨보면서 경수의 셔츠 끝자락을 잡았다.

"어디가는데요."
"아, 그... 편의점. 담배사러."
"그럼 나도 같이 가요. 메로나 먹고싶어요 나."
"내가 사올테니깐 안에 들어가 있어. 밖에 더워."
"싫어요. 그러면 내가 형한테 심부름 시키는 것 같잖아요. 그런 거 싫으니깐 나랑 같이 가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제 옷 끝자락을 잡고있는 백현을 보며 경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백현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같이 편의점에 가는 걸로 결정이 났다. 

"담배 사지마요. 지금도 냄새 장난아닌데 더 피울거예요?"
"...백현아..."
"입에 뭐라도 물고 있어야 하는 거면 내가 사탕 사줄테니깐, 담배는 안돼요."

고집 쎈 거로는 백현을 이길 사람이 없었다. 결국 경수는 담배를 포기했고, 계산대에 놓은 것은 메로나 4개와 츄파춥스 딸기우유맛 2개였다. 무슨 맛이라도 먹으니 마음대로 고르라고 했더니 이게 맛있다며 백현이 통 안에서 그것을 꺼내왔고, 그게 또 백현의 머리색과 너무 잘 어울려서 경수는 또 무의식적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네 머리색같은 거 골라왔네. 경수는 급하게 제 입을 막았지만 말을 이미 흘러나왔고, 백현 또한 그걸 들었는지 놀란 얼굴로 경수를 바라보았다. 거스름돈 500원입니다, 직원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있었을 지도 모른다. 방금 전까지는 그래도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경수는 분위기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자유롭게 나불거리는 이 입을 때려주고 싶었다. 올 때와는 다른 어색한 분위기로 편의점을 나온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편의점은 후문 쪽에 있었는데 경수와 백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술집과는 꽤나 거리가 있었다. 이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경수는 가도가도 끝이 나오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를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경수 형."

그리고 백현이 경수를 불렀다.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하면서도 조금은 무서웠다. 자신이 과하게 걱정을 하고 반응 하고 있다는 것도 도경수는 알고있다. 백현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닌, 그것도 자주 들어봤을 것 같은 말을 했다고 평소보다 어색하게 굴고 말도 걸지 않은 것은 누가봐도 이상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도경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짝사랑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도경수도 멍청이로 만들었다. 경수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백현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백현이었다.

"형은 내가 예뻐요?"
"...어? "
"예뻐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어....그래, 응."
"염색한 머리가요?"

아니면 그 머리를 하고 있는 내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경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예상도 못했던 말을 내뱉은 백현은 평소와 다름없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그 공간에서 오직 도경수만이 멈춰있었다. 여기서 뭐라고 해야하는 거지, 어떤 말을 해야하는 걸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답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냥 염색한 머리가 예쁘다고, 그 색깔이 예뻐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또 같은 이유로 경수는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백현은 지금 짜증이 났다. 치즈계란말이 한 접시를 다 먹어치우고 김치찌개에 밥까지 두 공기나 먹었는데 경수는 들어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형한테서 담배 냄새 나는 거 싫어한다고 했더니 그럼 이제 줄여보도록 하겠다며 담배와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버리던 도경수가 생각이 나서 죄없는 박찬열의 등짝을 후려쳤다. 맞은 등이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제 친구를 무시하고 백현은 편의점에 간다는 말만 남긴 채 술집을 나왔고, 술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도경수를 볼 수 있었다. 담배를 사러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고집을 부려 편의점까지 따라갔다.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백현은 경수가 오늘 하루 동안 그랬던 것처럼 무시할 줄 알았는데 경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담배 사려는 것을 말리고 사탕을 손에 쥐어줄 때만 해도 기분이 매우 좋았었다. 

그때 경수는 또 머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네 머리색같은 거 골라왔네. 그 말에 놀라 쳐다보니 경수는 또 실수했다는 얼굴로 제 입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편의점을 나서서 술집으로 가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바닥을 치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백현이 염색한 머리가 예뻐서, 그 색깔을 좋아해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경수는 이상하게 말을 아꼈다. 아니, 아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점이 짜증났다. 도경수는 백현을 좋아한다. 그것이 후배에 대한 정인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랑인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경수는 지금 그 어떤 것보다 백현을 우선시하고, 백현만을 생각하고 있으며, 백현을 위하고 있다. 그런 주제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좋아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하는 말은 그런 얼굴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뿐이었다.

아니, 정정한다. 백현은 도경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냐하면 스스로 깨달은 건 아니었고, 준면을 통해서 들은 것들과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종합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준면은 경수가 항상 백현을 보고 있다고 했다. 멍하니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어서 뭘 보나 싶어서 그 시선을 따라가면 항상 거기에 백현이 있었다고. 그럴리가 없다고 했더니 도경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니 믿으라며 준면은 웃었다. 경수를 제일 잘 안다고 자신하는 모습은 조금 부러워서 질투가 났지만 그래도 그런 준면을 믿고 그때부터 백현은 경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실, 바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수는 백현을 편애하고 있었기에 아무리 눈치가 없는 백현이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경수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나 사랑받고 있었구나. 옆에 붙어서 하루종일 그를 관찰하고 난 다음에 백현이 내린 결론이었다. 다만 형이 나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귀여운 후배를 좋아하는 감정이면 어쩌지? 당당하게 굴고 싶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고, 백현의 불안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 이도저도 못하고 경수가 하는 말과 행동에 휘둘리기만 하고 있을 때, 오늘 같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사건사고는 항상 작은 것에서 시작하고, 경수와 마찬가지로 백현도 제 머리때문에 이런 일이 날 줄은 정말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백현아, 나는..."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형 이렇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내 귀여운 백현이가 너무 단호해...

도경수는 지금 좀 울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탈출버튼을 눌러서 여기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속마음을 이야기하면 우리 사이가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을까. 사랑에 빠져서 굳어버린 머리가 드디어 이성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건 술의 힘인지, 아니면 백현이가 맛있다고 추천해 준 딸기우유맛 츄파춥스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도경수는 지금 제 생각을,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전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머리를 하고 있는 네가 예뻐서 그랬어."

백현아, 나는 네가 너무 귀여워. 사랑스럽다는 말은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딸기맛 솜사탕같아서 너무 만져보고 싶었어. 그 머리가 예쁜 게 아니라 그 머리를 하고 있는 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죽을 것 같아 백현아. 평소처럼 속으로만 말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네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나와버렸어. 애도 아니고 다 큰 남자후배를 이렇게 귀여워하면 안되는 거 나도 알아, 아는데... 그런데 네가 너무 귀여워서 어떡하냐. 너만 보면 자꾸 뭐라도 사서 먹여주고 싶고, 옆에 앉혀두고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싶고, 손을 잡고 어디든지 가고싶고, 같은 침대에 누워서 네가 하는 말을 전부 들어주고 싶은 걸. 아니, 잠시만. 마지막 말은 정말 실수야. 잊어주라. 그러니까 백현아...

"아... 알겠으니까 잠시만요..."

제 손을 잡고 쉴새없이 저가 귀엽다고 쏟아내는 경수를 보고 있던 백현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급하게 그 입을 막았다. 아니, 듣고 싶었던 건 맞는데. 이러면 내가 너무 부끄럽잖아요. 일반인보다 귀엽기는 했지만 어쨌든, 군대도 가지 않았지만 아무튼간에 건장한 스무살의 남성이었던 백현은 경수의 그런 고백이 아주 많이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기다리고 기다렸던 도경수의 속마음을 이제야 들을 수 있었기에, 변백현은 지금 당장이라도 만세삼창을 하며 경수 형이 나 좋아한대! 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울리지 않게 저 앞에서만 소심해져서 도망만 다니던 도경수의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저 속마음을 들었으니 이제는 그의 귀염둥이인 백현이 그에 대한 답을 들려줄 차례였다. 

"형, 있잖아요..."
"응?"
"우리 연애할래요?"
"....응?"
"아니다, 우리 연애해요."

거절은 거절할 거니까 형한테 선택지는 없어요. 자요. 내 사탕 줄테니까 나랑 연애해요. 

백현은 들고있던 사탕을 건네주며 그렇게 말했고, 도부학은 안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그 사탕과 백현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백현이가, 지금 나보고 연애를 하자고, 했어? 

"백현아."
"네."
"...나 좋아하니?"
"...형은 바보예요?"

형은 내가 사탕을 주는 의미를 모르겠어요? 먹는 걸 누구보다 사랑하는 변백현이,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남에게 양보한다는 것부터가 큰 일인데. 그걸 받으면서도 나한테 그런 걸 물어봐요? 좋아해요. 이 마음을 깨닫기 전에 소개팅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무의식적으로 경수형 닮은 사람을 선택할 정도로 좋아하고 있다구요. 더 듣고 싶어요?

도경수는 지금 이게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길 바랐다. 그는 백현이 주는 사탕을 받았고, 아직도 현실인지 감이 오질 않으니 볼을 꼬집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멋있던 사람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망가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백현은 그런 도부학도 너무너무 좋았기 때문에, 아프지 않게 그 볼을 꼬집어주었다. 꿈 아니예요. 경수형. 우리 오늘부터 1일이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경수는 백현의 손을 잡아 제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어디 가지 못하게 품안에 꽉 끌어안았다. 

"이제 자정이니까 우리 2일 째야 백현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경수는 그렇게 말했고, 백현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 웃으며 더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하이에나같은 모기가 달려들어서 피를 빨아들이고, 한 여름에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남자 둘이 끌어안고 있으니 답답하고 더웠지만 두 사람은 마치 원래 한 몸이었던 것마냥 그렇게 한참을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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