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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백 전력 썼던 것들 본문

이엑쏘

세백 전력 썼던 것들

박로제 2015. 12. 1. 23:17

1.

 

형. 우리 쇼파 바꾸자.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 주말이었다. 쇼파에 누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주말 낮의 그 나른함을 즐기고 있던 백현이 뜬끔없는 세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왜? 지금 백현이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 이 쇼파는 둘이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백현이 들고온 것으로 오래 사용했지만 푹 꺼진 부분도 없었고 길이나 넓이도 적당해서 백현이 침대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구였다. 물론 혼자 사용하던 거라 두 사람이 누울만큼은 아니었지만 세훈이 항상 백현에게 '노약자 우대'라는 말을 하며 자리를 양보했었다. 그래서 세훈은 쇼파에 앉고, 백현은 그런 세훈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우면 됐기 때문에 그런걸로 사소하게 다투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세훈은 평소에 이유없이 물건을 바꾸거나 새로 사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백현은 더욱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왜? "


" 너무 오래됐잖아요. 형이 앉아있기만 하면 상관없는데 매번 누워있잖아. 허리나 등에 안좋으면 어떡해. "


" 오래된 쇼파치고 꺼진 부분도 없고 튼튼하다고 한 건 너잖아. "


" .....그건 그때고, 지금은 아니에요. 봐봐 저기 푹 꺼진거. "



세훈이 쇼파 푹 꺼진거 보라며 가리킨 부분은 전혀 문제가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처음 이 쇼파를 봤던 세훈은 이거 비싼 브랜드라고, 일이년 쓴다고 해서 색이 변색되거나 푹 꺼지는 일은 전혀 없을거라며 굉장히 좋아했었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함과 동시에 같이 살게된지는 이제 반년이 넘었고, 그러므로 세훈은 반년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부정하는 셈이었다.


세훈은, 그러니깐 어린 제 연인은 집안에서도 막내였기 때문에 애교가 많았고, 막내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는 부모님 덕분에 조금은 자기중심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런 성격도 많이 바뀌었고, 이유도 없이 이거 하자, 저거 하자 떼를 쓰는 버릇도 없어졌다. 어릴 때부터 그 옆에서 성장을 지켜봤던 백현은 지금 쇼파를 바꾸자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세훈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도 나고 간만에 보는 떼를 쓰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냥 쇼파 바꿔줄까, 하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그런 버릇을 스스로 고쳐내고 어른스러워진 세훈이 대체 왜 이러는지 알고싶은 호기심이 더 컸다.



" 알았어, 쇼파 바꾸자. "


" 진짜? 진짜죠? "


" 대신에 이유 말하면. 쇼파가 낡았다거나 그런 이유는 안돼. 반년 전에 이 쇼파 굉장히 좋다고 한 거 너야. 그렇게 말했으면서 갑자기 바꾸자고 하는 이유가 뭐야? "



바꾸자는 말에 환해지던 얼굴이 뒤따라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럼 그렇지'라는 말과 함께 어두워졌다. 어릴 때부터 세훈을 봤던 백현은 그 어리광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았다. 이유만 알면 다들어줄게. 내가 납득만 할 수 있으면 되니깐 아무 이유라도 말해봐. 그런데 그 기준이라는 것이 까탈스러워 세훈이 그 기준에 맞는 이유를 말해 백현이 그 어리광을 들어준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었다. 심지어 세훈이 고백했을 때도 백현은 자신이 좋은 이유를 대라고 했었다. 물론 좋은데 이유가 어딨냐는 말에 웃으면서 고백을 받아주기는 했지만 세훈은 지금까지도 그때 그 고백을 어리광 취급한 것 같아 너무하다 투덜거렸고, 백현은 그래도 받아줬잖아,라는 말로 받아쳤다. 이번에도 진짜 이유 좀 그만 물으면 안되냐고 세훈이 질린다는 듯이 말했고, 백현은 그럼 쇼파 안바꿀거야. 라는 말로 받아쳤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저를 바라보는 백현이 얄밉고, 그 '이유'라는게 좀 부끄러웠지만, 결국은 세훈이 두손두발 다 들고 말았다.



" ....좁잖아. "


" 좁아? "


" 쇼파. 1인용이라서 우리 둘이 같이 있기에는 좁잖아. "


" 허어? 아무리 1인용이라지만 너랑 나 둘다 앉을 수는 있거든? "


" 그게 아니라....아, 정말. 쇼파에 누워있는 형 보고 있으면 나도 같이 눕고 싶단 말야. "


" 그러면 되잖아. 내가 너 위에 올라타면 되는 거 아냐? "


" 그러니깐 문제라고. "


" 뭐? "



형이 올라탔는데, 내가 가만히 있겠냐? 그 위에 올라가서 가만히 있지도 않고 계속 움직이는데?



저게 무슨 말이지? 세훈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백현은 머리를 굴렸다. 내가 세훈이 위에 올라타지, 그리고 내가 움직이지. 그러면 세훈이한테 자극이.....자극?



자극...이..이이...........어, 어어....?



드디어 세훈의 말을 이해한건지 방금 전까지 어,어...하던 백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백현이 조용해짐과 동시에 남들보다 조금 큰 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울 때마다 백현은 얼굴이 아니라 귀가 먼저 새빨개졌고, 세훈은 그게 너무 사랑스럽다며 귀를 깨무는 것을 좋아했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시계초침 소리, 그리고 백현이 보고있던 티비 프로의 말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세훈아 "



백현이 입을 열었다. 세훈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얼굴로 아직도 부끄러운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하얗고 예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백현을 바라보았다.



" 우리...쇼파 바꾸자... "




이제 세훈의 어리광을 받아준 횟수를 세려면 두 손을 써야했다.


 

 

 

 

2.

 

세훈은 탐미주의자다. 뱀파이어들이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세훈은 좀 달랐다. 그는 아름다운 것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 집착은 물건에 제한되지 않았다. 동물, 인간,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괴물'일 때도 있었다. 세훈이 살고있는 성에는 푸른 빛의 다이아, 시들지 않는 붉은 장미, 울음소리가 아름다운 카나리아 등 세훈이 좋아하는 아름다운 것들이 잔뜩 있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훈은 오래 전부터 잊고 살았던 행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세훈은 이제 그것들을 보지 않는다. 장미는 시들어버렸고, 카나리아는 새장을 떠났으며, 다이아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세훈은 그것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지구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자신의 성에서 살고있기 때문이었다.



" 세훈아. "


" 좋은 아침이야. "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수조 안에서 여유롭게 헤엄을 치며 웃는 얼굴로 세훈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창백한 피부, 아침 햇살을 받고 눈부시게 빛나는 지느러미, 그리고 길게 뻗은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서 색색깔로 빛나는 보석들.



세훈이 성으로 데려온 것은 바로 인어였다.






세백 전력 : 목덜미






백현은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도 쉽게 볼 수 없어서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상상 속의 존재인 인어였다. 뱀파이어와 비슷하데 영생을 살아가는 인어는 개체 수도 적고 불로불사의 몸이기 때문에 번식도 하지 않았고, 바다 속에서 자신들만의 공간 안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존재였기 때문에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런것 때문에 한때는 인어의 피를 마시면 아름다워진다는 소문이 돌았고, 많은 종족들이 인어를 사냥하기 위해 연합을 맺었다. 세훈도 그 사냥에 동참했다. 물론 아름다워지고 싶어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아름다운 인어를 두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걸 자신의 성에서 가둬두고 싶었다. 그래서 사냥에 나서기 전에 커다란 수조까지 사두었다. 애초에 사냥에 실패한다는 생각따위는 한 적도 없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세훈은 백현을 발견했고, 다른 것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제 성으로 데려오는 것까지 성공했다. 백현은 오래 살았기 때문에 굳이 물 속에 있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세훈이 물 속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기에 백현은 기꺼이 넓지만 제가 살던 바다보다는 좁은 그 수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청록빛의 그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물 속을 휘젓고 다녔다. 세훈은 백현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청록빛의 지느머리와 물 속을 벗어나면 예쁜 다리에 지느러미와 비슷한 색의 비늘, 영롱하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사랑했다. 물론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바로 색색깔의 보석이 박혀있고 가늘고 길게 뻗은 그 유려한 목이었다.



" 인어는 다 이래요? "


" 뭐가? "


" 다, 이렇게 목에 보석이 박혀있냐구요. "


" 아아- 다 그렇지는 않아. 이건 옛날에 부모님이 박아준거야. 목이 너무 예쁘니깐 보석을 박아넣으면 더 예쁠거라고. "


" ...아프지는 않았어요? "


" 어차피 아무는 상처잖아. "



그리고 네가 좋아하니깐 괜찮아. 백현은 웃으며 세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백현에게 있어서 '옛날'은 몇 백년을 살아 온 세훈도 태어나기 전의 일일테니 이제는 잊어버린 고통일테지만 그래도 세훈은 백현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훈은 그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백현의 목덜미에 하루에도 몇번씩 키스를 했다. 그 키스라는 것은 가벼운 뽀뽀인 경우가 많았지만 때때로 세훈은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며 자국을 남긴 적도 있었다. 보석을 박아넣는 것은 백현이 아프니 싫었고, 그 과정은 아름답지 않으니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보석을 박아넣는 대신 자국을 남겼다.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며 자신의 것이라는 표시까지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그 전까지 세훈은 자신이 모은 수집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그것을 만지거나 걸친 적이 없었다. 온갖 종류의 보석을 모으면서도 정작 끼고 다니던 것은 제 부모의 유품인 반지하나 뿐이었다. 동물을 가둬두고 보긴 했지만 그들을 필요이상으로 끌어안고 있거나 사랑을 준 적은 없었다. 아름다운 것들에 집착하고 그것들을 좋아했지만 세훈은 그것들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훈은 백현을 사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아름다운 인어니깐, 그리고 그 누구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인어니깐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훈은 백현 그 자체를 사랑했다.



" 형, 백현이 형. "


" 왜, 세훈아? "


" 사랑해요. "



그러니깐 어디 가지말고 여기 있어요. 내 수조 안에서 살아줘요. 무엇이든 다 해줄테니깐 돌아가지마요.


세훈은 말을 마치고 백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보석보다 제가 남긴 자국이 더 많은 그 하얀 목덜미에, 세훈은 또 제 흔적을 남겼다. 목덜미에 하는 키스의 의미는 집착이라 했던가. 이게 사랑이 아니고 집착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세훈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백현을 이 수조 안에 가둬두고 싶었다. 도망가면 잡아올 것이고, 그래도 또 도망간다면 묶어둘 것이다. 감정없던 황금빛 눈동자는 어느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나 어디 안가, 세훈아. "


" 여기 있을게. "


" 네가 떠나라고 하지 않으면 나는 네 곁에 있을거야. "


" 영원히. "



백현은 차가운 세훈의 몸을 끌어안았다. 물 밖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세훈의 차가운 몸은 백현에게 있어 독과 같았지만 지금은 세훈을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백현은 세훈이 어떤 마음으로 고백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외로움도, 쓸쓸함도, 사랑도, 그리고 집착도 알고 있었다. 나이는 많지만 세훈이 여전히 아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 품을 파고들며 목덜미에 입맞추는 세훈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현은 세훈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반항없이 끌려와 그의 성에서, 답답한 수조 안에서 헤엄을 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리고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맹세 또한 진실이었다. 하지만 백현은 세훈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 감정이 세훈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세훈이 착각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훈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은 어린 소년은 마치 엄마 품을 찾는 아이처럼 백현의 품을 파고 들었다.


 

 

 

 

3.

 

황제에게는 항상 고약하고 낯뜨거운 소문이 따라다녔다. 나라의 아버지이자 태양과도 같은 황제에게 그런 소문이 따라다니는 이유는 존엄하고 고귀하신 황제가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지존의 자리에 앉아 아랫것들이 만만히 보고 그런 것이 첫 번째였으며, 두 번째는 황제의 외모가 남자들마저 홀릴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황제에게 어쩌면 그런 낯뜨거운 소문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ㅡ 그 소문은 이러했다.


' 젊은 황제가 미천한 남자 무희에게 홀려 정사는 내팽겨치고 하루종일 침상에서 그 무희와 질펀하게 놀고있다고 하더라. '


' 그 남자 무희는 황제를 홀려 국고를 탕진하고 총명한 황제를 얼간이로 만들고 있다 하더라. '



물론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황제는 정사를 내팽겨친 적도 없었고, 국고를 탕진한 적도 없었다. 화려한 외모의 황제는 제법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경연도 꼬박꼬박 참여했으며, 조회또한 빠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말도 안되는 소문이라며 황제를 욕보이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


하지만 소문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젊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황제는 제 궁에 무언가를 꼭꼭 숨겨두었다.


저만을 위해 노래하고 춤추는 작은 무희를 말이다.






세백 전력 : 황제






꽃이 폈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황궁은 그 어떤 시인이 와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꽃들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와 새들을 보며 백현은 이 답답한 궁을 빠져나가 자신도 저들처럼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싶었다. 바람에 날려 비처럼 내리는 흰 꽃잎 사이에서 봄을 마음껏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 허리를 붙잡고 잠이 든 이 황제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아침 조회가 없는 날이었고, 경연도 없는 날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쉴틈없이 달려 온 황제에게 상이라도 주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꿈같은 하루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백현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설레었다. 황제가 없으면 저는 이 방에서 나갈 수 조차 없었고, 일이 바쁜 황제는 항상 늦은 밤에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가 쉬는 날에는 함께 저 매화 꽃을 구경하며 함께 꽃놀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마(睡魔)에 빠진 황제는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폐하...일어나보셔요, 네? "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황제의 팔을 간지럽혀도 보고, 도톰한 입술에 입도 맞춰보고, 버룻없이 양쪽 볼은 잡아 늘려도 보았지만 그래도 황제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어젯밤 혹사당한 것은 분명 백현이었고, 죽겠다고, 이제는 못하겠다며 엉엉 우는 백현이 쓰러질 때까지 몰아붙인 건 황제였다. 그런데 왜 자신이 먼저 잠에서 깬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억울하다, 억울해. 몰래라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황제는 백현이 허락없이 제 품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방법만은 정말, 죽어도 쓰고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쓸 수밖에 없었다.



" ....아ㅡ "


백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 훈, 아... "


마치 불에 데인 것 마냥 화끈거리는 제 귀를 두손으로 가렸다.


" 세훈아... 제에발... "




백현은 언제나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는 일이 항상 늦은 밤, 황제와 맨살을 맞대고 정사를 치룰 때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생각나 부끄러워 하는 백현이 제법 귀여웠던 황제는 오늘처럼, 부러 자는 척을 해서 이렇게 백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도록 했다.


 



 

 

 

4.

 

낮져밤이라는 단어를 들은 적이 있다. 낮에는 연인에게 다 져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밤에는 오히려 반대로 리드하면서 이기려한다는 뜻으로 제법 야릇한 의미의 신조어였다. 이 단어는 케이블 채널에서 하던 19금 방송을 통해 더 유명해졌고, 낮져밤져라던가 낮이밤져같은 단어도 만들어 자기 자신이나 애인의 성향을 설명하기도 했다.


백현은 스스로가 낮져밤져라고 생각했다. 뭐라고 딱 잘라서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보다 위에 있거나 리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그냥 애인이 맞춰주는대로 연애하는 것이 제일 편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져밤져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 아... 다리 좀 벌려봐요, 백현아. "



지금 백현의 몸 위에 올라타서 건방지게 이름을 막불러대는 제 연하남친은, 아무리 생각해도 낮져밤이였다.






세백 전력 : 낮져밤이






세훈은 예의바르고 착한 동생이었다. 집안의 막내 아들이어서 애교도 많았고 백현이 말을 편하게 하라고 해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었다. 그건 연애를 시작한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키도 크고 잘생긴데다가 귀엽고 예의바른 연하 남친은 백현에게 있어서 자랑이었다. 덕분에 친구들과 술마실 때 소주 3잔에도 취하는 백현의 18번 주사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애인자랑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백현은 세훈이 잠자리에서도 상냥할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다치는 건 넘어가도 백현이 아프거나 다치는 건 절대 못보는 세훈이니깐 첫경험도 부드러울 거라고. 첫키스 또한 안달나서 매달린 것은 저였고, 세훈은 끝까지 다정하게 행동했었다. 뭐 누군가에겐 다소 심심할 수 있었으나 백현이 맞는 것을 즐기거나 욕먹는 걸 즐기는 특이한 성벽은 아니었기에 그런 세훈에게 딱히 불만은 있는건 아니었다.


그러나 세훈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진 두 사람의 첫 섹스는 이러한 백현의 생각을 깨부수다 못해 아예 박살을 냈다.



' 백현아. '


' 왜 안울어...울어봐, 응? '


' 울리고 싶은거 참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어... '



백현은 그 때 다음 날 눈이 부어서 떠지지 않을 정도로 펑펑, 울었다. 꼬박꼬박 형이라 불러주던 연하 남자친구는 어디 갔는지 자연스럽게 백현의 이름을 불렀고, 존댓말은 개나 주라는듯 반말까지 해댔다. 세훈의 커다란 손이 제 살을 스쳐지나갈 때마다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고, 하얗고 길다란 예쁜 손가락이 제 안을 헤집어 놓을 때마다 아프면서도 더 깊숙히 들어와서 쑤셔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짐승처럼,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하는 세훈때문에 백현은 정말로 울고싶었지만 평소에 제 눈물에 민감한 세훈을 알았기에 입술까지 깨물며 울고싶은 것도 참았다. 그러나 세훈은 입술을 못깨물게 손가락까지 물리면서 울어달라고, 이 쳐진 눈꼬리의 끝이 빨갛게 짓무를 때까지 울어달라고 말하며 말도 없이 삽입을 했었다.


짐승과 교미하는 느낌이었다. 남자와 처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훈 이전에도 사귄 애인이 있었고, 그들과도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날 밤 내내 세훈에게 잡혀 시달리면서 백현은 육식동물에게 잡아먹히는 초식동물의 기분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로. 날개뼈와 목덜미는 세훈이 남긴 자국으로 가득했고, 너무 세게 깨물어 피딱지 나앉은 것도 있었다. 거기다가 입술 위의 점이 너무 예쁘다며 계속 깨물고 핥으며 키스해댄 탓에 입술은 퉁퉁 부었고, 눈도 퉁퉁 부어서 뜰 수 조차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날 밤 내내 울고, 소리 지르고 했던 목은 다 쉬어서 말하는 것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 너....너어..... '


' 이러는 법이 어디써어어... '



낮에는 안 이랬짜나아....강아지같던 게 왜 늑대가 되써어어....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세훈은 유쾌하게 웃었고 색달라서 좋지 않냐며 퉁퉁 부은 눈덩이에 입 맞춰주었다. 지난 밤 건방지게 이름 부르며 반말하던 오세훈은 어느새 다정하고 착한 오세훈이 되어있었고, 백현은 뭐라 더 따지지도 못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세훈은 자기도 처음이라 너무 흥분했다며 심하게 몰아붙여서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다음에는 안그럴게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백현은 그런 오세훈이 너무 얄미웠지만 순하게 웃는 제 어린 애인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어린 애인의 색다른 모습에 설레기도 했다. 마냥 착하기만 하던 애인이 반말도 하고, 스킨쉽에서는 적극적이기도 한 모습이 그런 부분에서 수동적인 백현에게는 새로운 것이라, 몸이 고생하는 것 말고는 세훈의 그런 이중적인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엄청나게 좋았다.



" 아무리 생각해도 넌 사기캐야. "


" 또 왜요. 뭐가 마음에 안들어요? "


" 넌 왜 이렇게 잘생겼는데 착해? "


" 네, 네. 그리고요? "


" 예의도 바르고 해달라는 거 다 해주고. 그런데 잘생기고 키도 크고 어깨도 넓지. 우리 세훈이 어깨에 치이고 싶다~하는 여자애 봤다 나. "


" 그랬어요? 이제 어깨 좁아보이게 하고 다녀야 겠네요. "


" 응. 너 앞으로 어좁이처럼 다녀. 아무튼 우리 세훈이 착하고 자상하지. "


" 그런데 밤에는 확 변하잖아. 강아지 어디가고 늑대가 되가지고 여기도 물어뜯고, 저기도 물어뜯고~ 요즘 제일 인기많다는 낮져밤이네 우리 세훈이. "



백현은 세훈의 앞에서도 이런 말을 자주 했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오세훈이라도 저런 낯뜨거운 애인자랑은 부끄러웠고, 그만하라고 해도 말을 통 안듣는 백현 덕분에 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이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몇 달 동안 듣다보니 나름 내성이 생긴데다가 그 자랑이 즐겁기까지 했다. 그만큼 자기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티를 내는 백현을 보고 있는게 세훈은 정말로 즐거웠다. 즐겁기만할까, 세훈 또한 백현처럼 좋아죽겠다는 표현을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 근데 그런 오세훈을 형이 가졌으니깐 승자는 형이네요. "


" 그렇지? "


" 네. 그러니깐 형이 제일 대단한 사람. "


" 나 대단한 사람 됐다! "



세훈은 정말로, 제 말 한 마디에도 행복해 하는 백현이 너무나도 좋았다.

 

 

 

 

5.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비밀은 뭐 신체적인 비밀일 때도 있고, 보편적인 기준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취향일 때도 있다.


세훈은 보편적인 기준에서 조금은 벗어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게 왜 변태적이고 문제가 되는 취향이냐고 따지고 싶지만 이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있는 친구 김종인은 그런 세훈을 '변태가 자기 입으로 변태라고 하는 거 봤냐?'라는 말로 조용히 시켰다. 억울하고 이해가 되지않았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제 취향은 그렇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세훈은 게이다. 근데 사실 이건 상관없다. 게이가 변태라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을 변태라고 부른 김종인도 게이이기 때문에 이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세훈은 남자의 다리를 좋아했다. 골반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전부. 그리고 게이니깐 당연히 여자 다리가 아니라 남자 다리를! 굳이 전체가 다 이쁘지 않아도 좋았다. 오세훈의 전 애인은 허벅지가 통통하니 예뻤고, 전전 애인은 발목이 굉장히 얇고 예뻤다. 그리고 첫사랑은 발이 예뻤다. 이 얘기를 들은 김종인은 다리에 페티쉬가 있는 변태라고 세훈을 놀렸고, 오세훈은 변태인 것은 부정했지만 다리에 페티쉬가 있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 야, 야 변태 오세훈. "


" 아 시발 변태아니라고! "


" 그래, 그래 오변태님. 저기 백현이형 오는데 그렇게 소리질러도 되냐? "


" 뭐? "



평소처럼 저를 변태라고 부르는 종인에게 짜증을 내던 세훈은 백현 선배라는 말에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인문대의 지옥같은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백현이 보였고, 세훈은 들고있던 전공서적을 종인에게 집어던진 뒤 백현에게 달려갔다. 제대로 못보고 던진 책이 종인의 얼굴을 맞춘 것 같았지만 그런 것 따위 알바아니었다.



" 형! "


" 세훈아! "



인문대의 명물 지옥계단(엄청난 경사와 엄청난 길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으로 악명이 높았다)을 올라오고 힘겨워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던 백현을 부르자, 그게 또 세훈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어 제 이름을 부르는 백현때문에 세훈은 오늘도 살아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 이제 와요? "


" 응! 오늘 오전 수업 휴강이라 기숙사에서 지금까지 자다가 왔어. 세훈이는? "


" 전 이제 수업 다 끝나서 집에 갈려고 했죠. 형 그럼 점심도 안먹었겠네요? "


" 밥먹는 것도 까먹고 잤지 뭐야. 세훈이는 밥먹었어? "


" 아뇨 저도 수업 들어간다고 아직이에요. 형 이번 수업 뭔데요? 장교수님 수업 아니에요? "


" 나 그거 정정기간에 뺐어. 지금 들으러 가는건 교양. "


" 교양이면 출석만 체크하고 나와요. 나랑 밥먹으러 가자. 응? "


" 으음... 나 출튀하면 오세훈이 밥 사주나? "


" 나를 뭘로 보고. 식후땡까지 책임지겠습니다. "


" 좋아! 그럼 여기서 담배라도 피고 있어. 형아 금방 갔다오마. "



그럼요. 충견처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세훈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백현은 착하다며 마치 강아지를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급하게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자다가 나왔다더니 연한 분홍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뛸 때 반바지가 펄럭이는 것이 볼만했기에, 세훈은 실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뒤에서 그 대화를 다 듣고있던 종인은 꼴값떤다는 표정으로 책에 맞은 코를 문지르며 바보처럼 웃고있는 제 친구에게 다시 책을 건네주었다.



" 아주 입이 찢어진다? 저 형은 네가 변태인거 알고있냐? "


" 내 좋은 기분 망치지 말고 당장 꺼져주지 않겠나 친구여. "


" 무서운 놈....백현이 형한테 오세훈은 이런 놈이라고 알려줘야 하는데. 형이 아는 귀여운 후배 오세훈은 구라에요!하고. "


" 1절만 해라, 응? "


" 그 귀여운 후배가 자기 다리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단 걸 알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백현이 형은 충격 먹는 거 아냐? "



세훈은 김종인은 다 좋은데 저 입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상황파악도 못하고 나불거리는 입은 재수없게도 항상 맞는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종인의 말이 맞았다. 세훈은 백현을 좋아했다. 귀엽고 애교가 많아 남자 선배나 후배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또 천성이 착하고 또 다정한데다가 훈훈한 외모 덕분에 여자 선배나 후배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백현을 세훈이 싫어할리는 없었다. 거기다가 유난히 저를 예뻐하며 항상 끼고 다니고 이것저것 챙겨주는데 좋아하지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훈은 그런 모습보다도, 더 좋아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그 보편적이지 못한 취향이었다.


백현은 다리가 예뻤다. 남자치고 넓은 골반, 여자 연예인도 울고 갈 꿀벅지, 얇고 한 손에 잡힐 것 같은 발목, 그리고 작은 발까지. 오세훈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변백현이었다. 복학하고 난 다음 친목차 갔었던 MT에서 세훈은 제 앞에서 옷을 갈아입었던 백현때문에 그걸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정말 백현이 학과 선배가 아니었고 클럽에서 만난 상대였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눕혀 허벅지에 입을 맞추고 그 발목을 깨물었을지도 모를정도로 백현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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