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그렇게나 재수가 없더라니, 이 때를 위한 전초전같은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오늘 운세를 저주하며 안즈는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저렇게 화가 난 모습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고, 한편으로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뭐가 잘못이었을까. 레이가 자주 오는 요정임을 알면서도 맞선장소를 여기로 잡은 것일까 아니면 오기로 맞선을 수락한 자신일까. 어쨌든 모든 잘못은 안즈로 통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었고, 회피하고 싶었다.
"아가씨."
"...네."
항상 이름을 불러주던 레이가 아가씨라는 호칭을 쓸 정도면 엄청나게 화가 났다는 증거였다. 정말 망했네. 울고 싶은 심정이었고 이대로 쓰러지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일이니 참아야만 했다.
"긴말은 않겠네. 당장 정리해서 나왔으면 좋겠구만."
"..."
"차 대기시켜놓을테니 거기서 기다리게나."
도망가지는 않을 거지? 웃는 얼굴로 안즈의 어깨를 잡은 손에힘을 주는 레이를 보며, 안즈는 정말로 망했다고 생각했다.
오기였다. 자신이 하는 말은 듣지도 않고 매일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는 레이를 보며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가만히 있을 거야? 라는 심정으로 홧김에 받아들인 맞선이었는데 효과가 너무 대단해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번에도 사실 그냥 넘길 줄 알았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레이는 안즈에 관한 일이라면 언제나 자신만만이었다. 이 세상에 나만큼 너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재수없었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휴일 내내 얼마나 화를 낼지 보지 않아도 뻔했고, 그렇기 때문에 도망가고 싶었지만 지금 여기서 도망가봤자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람 찾는게 직업인 사람들 앞에서 도망가고 숨어봤자 잡혀서 끌려가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도망가봤자 붙잡힐 것이고, 여기에 도망갔다는 죄목까지 붙어버리면 정말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에, 안즈는 우선 자신의 맞선을 끝내기 위해 돌아갔다.
'아쉽네요. 저는 안즈씨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데.'
맞선 상대는 굉장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친구로라도 지낼 수 없을까요? 준수한 외모의, 자신과 취미도 비슷하고 누구와는 다르게 예의바르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남자에게 어느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었던 안즈는 그 제안을 거절 할 수 없었다. 좋아요. 결국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했고, 그렇게 맞선 자리는 끝이났다. 남자는 자신이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레이가 나오는 걸 기다려야 했던 안즈는 그걸 거부했고, 더 강요할 수는 없었는지 남자는 아쉬운 얼굴로 인사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아 정말 괜찮은 남자였는데. 솔직히 말해서 저 남자가 아무리 잘나도 능력이나 얼굴(이 부분은 요즘 잘나간다는 배우 세나 이즈미를 데려와도 이길 수가 없겠지만)이 사쿠마 레이를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지만 같이 있으면 편했고 자신을 배려해준다는 느낌을 정말 오랜만에 받아서, 안즈는 레이가 아니었다면 그 남자의 교제신청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남자가 대체 뭐가 좋아서.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을 붙잡고 자기 멋대로, 자기 좋을대로 갖고 노는 남자였다. 레이가 안즈를 사랑하는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가 하는 짓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걸 알면서도, 좋아하니까 받아주는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레이는 봐주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라는 말을 했었다. 대체 무엇을 봐줬는지는 안즈도 몰랐다. 다른 남자와 만나겠다는 말을 숨쉬듯이 한 거?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면서 뭘 봐줬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얌전히 레이가 만들어 둔 작은 새장 안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기 때문일까? 그러나 때가 될 때까지 마음껏 즐기라며 자유를 준 것은 그였고 안즈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이가 만들어 둔 그 새장 안에. 그도 안즈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기에 더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뒀을테니 이것도 틀린 답이었다. 대체 사쿠마 레이는 뭘 그렇게 봐주고 있었을까.
한창 생각에 빠져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 드디어 끝났나. 한숨을 쉬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레이가 차 문을 열고 서있었다. 운전석이 아닌 뒷좌석의 문을 열고 서있다가 들어오는 그를 보며 안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차는 레이 개인의 차라서 뒷좌석에 탈 이유도 없을텐데?
물론 궁금증은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안즈는 정말로, 오늘 운세가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 얼굴을 잊었을 리가 없다. 매일 밤 꿈에 그녀가 나왔다. 너무 그리워서, 너무 보고싶어서, 그리고 너무 반가워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으면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마치 그날처럼.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이용해서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어찌나 잘 숨었던지 그 유명한 텐쇼인이 나서도 그녀의 행방을 알 수는 없었다. 5년을 그렇게 살았다.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가면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 자신을 그녀라고 소개했다. 그런 날에 집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잠만 잤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지언정 진짜 그녀가 자신의 눈 앞에 서있었으므로.
그래서 처음 그녀를 발견했을 때, 레이는 드디어 자신이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미쳤구나. 그리움에 미쳐서 헛 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의 끝에 서있는 여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녀가 맞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인파를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갈 때, 어떤 여자아이가 달려와 그 품에 안겼다. 그 아이의 뒤에는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웃고있었다. 그 둘은 손을 잡았고, 곧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 이유였던건가. 아이는 아빠보다는 엄마를 닮은 것 같았다. 언젠가 보았던 사진 속 안즈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었다. 머리색만큼은 아빠를 닮아 검은색이었지만 그게 문제가 어니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났던 그녀가 다름 남자와 함께 있었고 그 남자와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원래라면, 레이가 들어가야 했던 그 자리에. 따라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패배감이었다. 눈에 보이면 다시 잡아오겠다고, 이번에야말로 떠나지 못하게 잡아두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아주 쉽게 무너졌다. 편안한 얼굴로 웃는 안즈를 억지로 끌고 올 용기따위 레이에게는 없었다.
이대로 끝인 줄 알았는데, 레이는 다시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는 그 옆에 아무도 없었다. 그 남자도, 아이도. 붙잡아야 한다면 지금이다.
"레이...씨?"
그때처럼 제 눈 앞에서 사라질까봐 황급히 달려가 붙잡으니 놀란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눈 앞에 서있는 던 걸 확인 하자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안즈의 얼굴을 보니 잠시나마 옛생각에 잠겨있을 때 잡힌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려는 필사의 움직임을 레이가 그냥 넘길리가 없었다. 애초에 체력싸움에서 안즈가 레이를 이길 방법이 있을리가 없다. 이번에 놓치면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달렸다. 잡힐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즈에 짜증이 나서 어떻게 하나 머리를 굴릴 때, 발을 헛디뎠는지 안즈가 중심을 못잡고 흔들거렸다.
"...감사 합니다..."
"감사할 일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거칠게 숨을 내쉬는 레이의 모습은 굉장히 힘들어보였다. 안즈도 오랜만에 달린 거라 힘이 들기는 했지만 해가 떠있을 때의 레이만큼은 아닐것이다. 그래서 안즈는 더는 반항없이 레이의 손에 잡혀주었다. 둘 사이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먼저 그것을 깬 건 레이였다. 시간 많이 잡아먹지 않을테니 이야기 좀 하자며. 그렇게 쳐다보는 얼굴이 애절하여, 그러겠다고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차로 가지.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게 주차장이니까. 잡힌 손을 꽉 쥔 손이 차가웠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걸까 이 손을. 안즈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꾹꾹 눌러담아야만 했던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저와 찍은 사진을 차에 둔 레이때문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다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은 레이는 운전대를 잡고 조용히 있었고, 안즈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날."
그리고 역시나 침묵을 깬 건 레이였다.
"왜 하필이면 그 날에 말도 없이 떠났어."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분노, 증오, 원망. 온갖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한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로 레이는 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즈가 레이의 앞에서 사라진 건, 두 사람의 결혼식 전 날이었다. 혼자 있고 싶어요. 긴장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안즈를 보며 메리지 블루인가? 같은 장난을 치며 레이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침에 보자며 웃는 얼굴로,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주는 레이를 보니 안즈는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압사할 것 같았다. 그가 떠난 방안에서 한참을 숨죽여 울던 안즈는 미리 준비해 둔 작은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났다. 충동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오래 생각해둔 일이었다. 이 도망은. 기차역에서 울면서 레이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찢으며 안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일부러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갔다. 그를 잊기 위한 도망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안즈는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계속 거기서 살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유명한 연예인인 그를 자가같은 평범한 사람이 길거리에서 만날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는데 이렇게,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어째서 신은 또 나를 버리시나요. 도망가려 했지만 그에게 붙잡혔고 이제는 그의 차안에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함께 있어야 했다.
"말해. 대체 왜, 무엇때문에,"
나를 버리고 도망간거야. 5년이면 긴 시간이고 안즈는 레이가 자신을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때보다 더 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정에 원망과 증오가 섞이면 이렇게 될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안쓰러웠지만 안즈는 그 이유를 레이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사쿠마 레이는, 더는 자신과 엮이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에겐 잔인한 말이겠지만 안즈는 사쿠마 레이의 미래에, 자신이 없길 바랐다.
"...내가, 당신한테 그걸...설명할 이유는 없어요."
"어째서!"
"나는 그 결혼이 싫었고, 당신이 싫었어요. 그러니까 떠난 거에요. 이유는....그것, 뿐이에요."
더는 할 이야기 없으니까 돌아갈게요.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해요. 그리 말하고 차에서 나가려던 안즈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럴려고 차로 데려온 거구나. 그의 연인이던 시절부터 자주 있는 일이었는데 깨닫지 못한 자신이 멍청했다.
"아니."
"그런 거짓말, 하나도 믿지않으니까."
"오늘 '나'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너를 보내줄 생각따위 없으니까."
숨기지 말고 전부 다 말해. 왜 나를 떠난거지?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그리 말하는 레이를, 안즈는 이길 수가 없었다. 드러난 뒷목에 닿아오는 입술이 뜨거웠다. 그를 사랑해서 떠났던 안즈는,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은 결혼하고 난 다음에 두 사람이 함께 살기로 한 집이었다. 그리고 이 집의 시간은 안즈가 떠났던 5년 전에 머물러있었다. 결혼식 전 찍어두었던 사진마저 그대로 벽에 걸려있었다. 들고있던 가방을 떨어뜨렸고, 레이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벙쪄있는 안즈의 고개를 제쪽으로 돌려 급하게 입을 맞췄다. 이러지 말라고 밀어냈지만 탁해진 그 붉은 눈을 보고 있으니, 안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밀어내는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가지마. 셔츠단추가 뜯겨나가고 다시 입술이 다가왔다. 레이는 자연스럽게 안즈를 침실로 끌어들였고 안즈는 , 정말로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당신을 버렸는데도, 이런 나를 아직도 사랑하나요?'
안즈는 울면서 그렇게 물었다.
'내가, 너를 잊었으면,'
애초에 여기에 데려오지도 않았어. 처절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 레이를 보며 안즈는 오늘만은, 지금만큼은 모든 걸 잊고 다시 이 남자의 연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안즈도, 그리고 레이도 이 밤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