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엑쏘 (24)
110212200506
쌍둥이라는 건 너무나도 불편했다. 단순히 얼굴이 똑같아서, 목소리가 비슷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오세훈과 오세희는 성별이 달랐기 때문에 얼굴이나 목소리로 두 사람을 구분하지 못 하는 일은 없었다. 세훈과 세희가 불편함을 느끼는 건 그것을 넘어서 불쾌할 정도로 똑같은 두 사람의 취향때문이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의 차이가 있으니 어른들은 어릴 때 세훈에게는 로봇을, 세희에게는 인형을 선물해줬는데 애석하게도 두 사람의 취향은 인형이었다. 그 날 인형을 두고 서로 가지겠다며 싸우는 도중에 열이 받은 세훈이 집어던진 로봇이 부서지며 만들어 낸 파편이 세희의 볼에 상처를 내는 것을 보고 식겁한 집안의 어른들은 그 다음부터 쌍둥이에게 줄 선물은 항상 똑같은 것으로 사오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
01. 아내에게 미안한 사실이지만 경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매일 다정한 미소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지만 그 ‘사랑해’의 주체가 단 한번도 아내였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경수가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경수가 느꼈던 그 두근거림과 설렘, 그러니깐 사랑을 하며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감정들은 23살의 도경수가 모조리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은 피어나지도 못 하고 저버렸지만, 그때 받은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단단해 졌지만, 경수는 잊을 수가 없었다. 3월의 캠퍼스를, 모르는 사람밖에 없던 강의실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던 저에게 손을 내밀던 그 남자를, 그리고 저에게 인사를 하던 그 남자의 목소리를, 그 목소리에 넋이 나가 아무 말도 ..
싱싱한 채소가 먹고 싶었다. 그것은 백현이 최근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절대 이루지 못할 꿈이기도 했다. 싱싱하고 맛이 좋을 것 같은 채소들은 비쌌고, 변백현은 그것을 살 돈이 없었다. 당장 하루에 세 끼라도 규칙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그런 것들은 사치였다. 참다못해 밖에 나가서 사 먹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이 빌어먹을 홍콩의 음식들은 모두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것들뿐이었고, 생으로 야채를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유학생활만 벌써 4년 차였고, 이제는 이국의 음식이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입맛에 맞았지만 가끔은 그런 기름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채소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차찬텡을 가도 가열하지 않은 채소를 먹는 것..
양파 - 본 아뻬띠를 들어주시면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__) 백현이가 밥을 먹지 않는다.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경수와 같이 먹는 아침을 거부한지 오래 됐으며 과제와 시험준비를 구실삼아 저녁도 집에서 먹질 않는다. 최근에는 중간고사로 경수도 바빴기 때문에 거기까지 신경 쓸 일이 없어서 내버려뒀는데, 중간고사가 모두 끝나고 당장 급한 과제도, 시험도 없는데 백현이 과제를 핑계로 저녁을 밖에서 먹고 들어오자 의심을 안하고 싶어도 안할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 건 줄 알았다. 여름만 되면 입맛을 잃어 고생하는 걸 경수가 제일 잘 알았고, 실제로 더위지기 시작하면 물만 마시고 아무것도 먹지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건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이주 넘게 지속된 적은 없었..
*양파-본 아뻬띠를 들으면서 봐주시면 제가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서 변백현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도경수다. 이건 도경수가 인정한 사실이었고, 변백현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백현을 사랑하면서부터 도경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변백현이었고, 이건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타인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도경수는 변백현을 통해서 알게되었고,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고 그저 연애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있는 친구들도 경수의 그 질척하고 무거워서 흘러 넘치는 백현을 향한 사랑이 납치나 감금으로 발전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다행히도 도경수는 자신의 사랑을 백현에게 요리를 해서 '먹인다.'로 발전시켰고, 변백현이 도경수의 밥만 맛있게, 아니 그냥 해주는 걸 그대로 받아..
변백현은 오세훈을 위해 홍콩에 남았다. 그 날, 이렇게 한국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었던 백현이 비행기 표를 제 손으로 찢어 버린 뒤 세훈을 뒤쫓아 갔고, 그를 붙잡았다. 억울하지만 당신보다 내가 더 용기 있고, 분하지만 내가 더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깐 말할게요. 옆에 있게 해줘요. 아니, 옆에 있을 거야. 싫다는 말 하지 말아요.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좋았다고 고백한 사람이잖아 당신. 숨을 몰아쉬며 그동안 참고 참으며 마음속에 쌓였던 것들을 세훈에게 따지듯이 말했지만, 그가 이것들을 무시하고 왜 돌아왔느냐며 소리칠 것 같아 백현은 불안했다. 그가 밀어내도 붙어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세훈은 그에게 소리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런 말 웃..
1. 형. 우리 쇼파 바꾸자.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는 주말이었다. 쇼파에 누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주말 낮의 그 나른함을 즐기고 있던 백현이 뜬끔없는 세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왜? 지금 백현이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 이 쇼파는 둘이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백현이 들고온 것으로 오래 사용했지만 푹 꺼진 부분도 없었고 길이나 넓이도 적당해서 백현이 침대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구였다. 물론 혼자 사용하던 거라 두 사람이 누울만큼은 아니었지만 세훈이 항상 백현에게 '노약자 우대'라는 말을 하며 자리를 양보했었다. 그래서 세훈은 쇼파에 앉고, 백현은 그런 세훈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우면 됐기 때문에 그런걸로 사소하게 다투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가 세훈은 평소에 이유없이 물건을 바꾸거나 새로 사..
저기요. 조상님이 덕을 되게 많이 쌓으셨네요. 저같은 남자가 작업도 걸어주고. 오후 수업이 휴강되서 갑자기 여유가 생긴 백현은 마침 자주가던 고서점의 주인아저씨에게 새로운 책이 들어왔다고 연락을 받았다. 몰아치는 과제와 시험 덕분에 그동안 못했던 취미 생활을 즐길 때라고 생각하며 백현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벗어나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교통카드를 꺼내 찍으려 할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제 팔을 잡았다. 어어? 백현이 상황파악도 하기 전에 잡혀서 끌려갔고, 개찰구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는 거지? 마침내 상황을 깨닫고 끌려가지 않게 발에 힘을 주자 백현을 끌고가던 사람도 멈춰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린 그 사람 덕분에 백현은 이..
어느 날부터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 안에서 꽃잎이 떨어졌다. 푸른색의 꽃잎이었다. 꽃잎을 내뱉을 때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꽃잎을 내뱉는다는 병 같은 건 여태까지 들어본 적이 없어서, 겁을 먹고 병원에 찾아 갔었다. 그리고 나의 증상을 들은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병명을 말해주었다. 구토중추화피성질환(嘔吐中枢花被性疾患) 어려운 이름과는 다르게 병의 증상은 간단했다. 짝사랑이 심해지면 꽃을 토해내는 병.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방법은 그 사랑을 이루는 방법뿐이라고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짝사랑이라고? 대체 내가 누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 외의 치료법은 없냐고 물으니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그것뿐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몸속에 꽃이 가득 차서 죽을 지도 모..
* 딕펑스-안녕 여자친구를 들으면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도경수와 변백현의 관계는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긴 시간을 트러블 없이 잘 지낸 좋은 친구 관계였고, 사정을 아는 사람이 봤을 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든 관계를 문제없이 이어온 대단한 연인 관계였다. 조용한 도경수와 활동적인 변백현. 상반되는 성격인 데다가 맞는 것보다는 맞지 않는 게 더 많은 두 사람이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할 수 있었느냐고 사람들은 자주 물어보았고,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백현은 일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해 애틋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는 시간이 1년 중 많게는 여섯 달, 적게는 두 달이나 석 달밖에 안 되는데 싸울 틈이 어디 있느냐고 웃었고, 경수 또한 백현의 말에 동의했다. 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