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안즈 단문
짧은 거 많음
너무 많아서 나눴다....
청첩장 필요해요?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 이틀 전이었고, 막 씻고 나온 레이는 질색을 하며 필요없다고 짜증을 냈다. 그게 방금까지 침대에서 같이 뒹굴었던 남자한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즈는 결혼소식도 비슷한 상황에서 전달했기 때문에 레이는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안즈 또한 더 권유할 생각은 없었는지 레이에게 주려고 준비해 온 것 같은 청첩장을 찢어버렸다. 결혼식 오긴 할 거죠? 드레스도 내가 골라줬으니 보긴 봐야겠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지독한 워커홀릭이었고, 그런 부분에서 묘하게 잘맞아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게 기억이 났다. 아무튼 일이 바빠서 신부의 웨딩 드레스를 함께 보러가는, 그런 꾸며진 연출조차 해줄 수 없었던 신랑때문에 안즈의 웨딩 드레스를 함께 보러간 건 다름아닌 사쿠마 레이였다. 나 어디가 예쁜지는 레이 씨가 제일 잘 알고, 뭐가 잘 어울리는 지도 레이 씨가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가줘요. 자길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다른 남자와 결혼할 때 입을 드레스를 같이 보러가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안즈를 보면서 레이는 할 말을 잃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드레스를 보러가주었다. 그렇지만 또 막상보니 웨딩 드레스를 입은 안즈가 예쁘기도 예뻤고, 이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그 순간조차도 그녀에게 제 흔적이 남아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질려서 한숨이 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는 과정이.
그거 알아요? 그 사람한테도 애인있대요.
뭐라고?
내가 레이 씨 이야기하니까, 밖에서 연기만 잘해달래요. 자기도 어차피 만나는 사람있으니까.
내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그럼요. 당신이랑 결혼할 여자는 사실 달마다 호스트한테 수천만엔씩 뿌리면서 살고있고, 결혼해도 그걸 관둘 생각은 없다고 하니까 자기도 어차피 밖에 애인이 있으니까 상관없다고 했어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는 걸요.
...참하고 얌전하던 우리 아가씨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구먼...
그 원인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그날도 만나서 일 이야기를 하고, 시간이 남아서 결혼해서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이런 부분에 주의해달라고 이야기 하다가 나온 주제였다. 남자는 정말 잘됐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말했다. 안즈 씨는 저와 정말 잘 맞는 사람이군요. 둘다 일을 중요시하고, 몸을 사릴 줄도 모르고, 그런 것들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라고 배우면서 자라 온 두 사람은 첫만남에 결혼을 결정지었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양가의 부모님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혹시라도 그들의 마음이 변할까봐 일사천리로 결혼을 진행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밖에 애인을 둔 것까지 똑같았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그는 밖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신경쓰지 않을 거고, 거기에 대해서 간섭도 하지 않을테니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완벽하게 연기해달라고 부탁했고, 그건 안즈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렇듯이 이런 결혼은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었고, 안즈는 그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완벽하게 자신의 남편을 연기해준다면 밖에서 누구를 만나도 신경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걸 전부 전해들은 레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도 여태까지 봐온 것들이 있었기에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고정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놀이가 재밌는 것도 아니었지만 안즈는 불면증이 있었고, 그 불면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잠드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와 수많은 남자를 만났고,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서 자고 싶을 때마다 이곳으로 와 남자들을 베개삼아서 자곤 했었다. 그러기만 해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니 그녀가 오면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소란이 일어날정도였다. 그 자리가 레이로 고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아까워했었고, 이미 가진 놈이 더 욕심을 부린다며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했지만 어쨌든 레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레이는 내가 아니라도 좋았던 거냐고 물었고, 안즈는 그렇다고 답했었다. 그냥 누구라도 좋았는데 그날 레이 씨가 들어왔고, 레이 씨랑 같이 누우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잘 수 있으니까 계속 부른 것뿐이라고. 레이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들어왔고, 그 사람이 만약에 당신같았으면 나는 그 사람을 계속 불렀을 거라고. 그 말을 들은 사쿠마 레이는 쓰게 웃으며 그날 우연히도 시간이 비어 소문의 그녀를 만나러 간 과거의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그때 내가 듣고도 그냥 넘겼다면, 네 옆에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누워있었겠지. 그녀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 날, 레이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여자의 번호를 지웠고, 그녀 이외의 손님은 이제 더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안즈는 그 사실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레이도 굳이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안즈는 레이가 옆에 있으면 편하다고 했다. 혼자서 잘 수 없다는 그 아가씨는, 자신의 옆에서만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불면증으로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레이만 옆에 있으면 중간에 깨는 일도 없이 숙면을 취할 정도였고, 그렇다보니 만나지 못할 때는 전화를 하거나 일 때문에 자리를 오래 비울 때는 아예 목소리를 녹음해간 적도 있었다. 그래도 녹음한 목소리보다는 전화로 듣는 목소리가 더 좋았기에 그녀는 늘 밤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이 씨. 뭐해요? 대화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보면 어느새 안즈는 잠들어 있었고, 레이는 혹시라도 중간에 깨는 일이 없도록 전화를 끊지 않고 혼잣말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거나, 때때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으나 어쩌다 잘못눌려서 통화가 녹음되고, 일어나서 그걸 들은 안즈가 다음 날 그를 만나서 새빨개진 얼굴로 굳이 그럴 필요없다고 말렸지만 먼저 잠든 안즈를 위한 레이의 배려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다.
방은 하나를 잡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침대가 따로예요.
그것 참 다행이구먼.
다행이예요?
그럼.
공식적인 옆자리는 양보했지만, 같은 침대의 옆자리까지는 양보한 기억이 없어서 말일세. 그녀가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레이는 정말 잘 알고 있었고, 상상해본 적은 있지만 그게 현실이길 바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공식적이고 법적인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남자를 질투한 적은 없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사쿠마 레이는 거기까지 바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게 보여주기 위한 결혼이고, 그 남자와 평범한 부부생활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 남자에게도 애인이 있었고 안즈가 결혼 후에도 자신을 계속 만난다면, 지금 이 침대 위의 옆자리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가서, 밤에 전화할게요 그래도 괜찮죠? 나 없다고 다른 여자 만나면 안돼요.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하는 말은 귀엽다고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지만, 레이는 짜증내지 않고 그 모든 걸 받아주었다. 전화할테니까 걱정하지 말게나. 다른 여자는...다 끊어낸지가 언젠데. 언제쯤 믿어줄겐가? 이미 잠들어버린 안즈는 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아직도 필사적으로, 이제는 별 쓸모도 없는 선긋기를 하며 밀어내는 그녀가 굳이 자신의 철없는 투정을 듣지 않아도 괜찮다고 레이는 생각했다.
와... 어떻게 결혼식에 흰색 수트를 입고와요.
대기실에 들어 온 레이를 보면서 안즈가 했던 말이었고, 레이는 뭐 어떻냐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오늘 가장 빛나야 할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이 불청객은 화려하고 붉은, 탐스럽게 피어있는 장미 꽃다발을 화장대 위에 올려두며 제가 골라 준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말해 준 모습으로 꾸미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신부에게 다가갔다. 잘 어울리는구만. 진심으로 한 말이었고, 안즈도 고맙다며 웃었다. 저 봤으니까 이제 갈거예요? 깍지 낀 손으로 장난을 치던 안즈가 그렇게 물어왔고, 레이는 피로연까지 보고갈지 고민 중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냥 신혼여행까지 따라올래요? 옆 방으로 잡아줄게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 입이 괘씸하여 턱을 붙잡고 키스했더니 밀어내지도 않고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주는 안즈를 보며 레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럴 의도로 일부러 들어올 때 대기실 문을 잠그고 오긴 했지만 말이야...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주면 아무리 나라도 당황스럽긴 하지. 물론 당황스럽지만 싫진 않았고, 자신이 직접 골라준 립스틱이 지워지고 번질 때까지 레이는 안즈를 놓아주지 않았다.
화장 지워졌잖아요.
이 몸이 고쳐줄테니 걱정말게나.
레이 씨가요?
그래.
그럼 얼마든지 엉망으로 만들어도 좋아요.
순진한 얼굴로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만.
레이 씨 덕분이예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레이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
임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낳고싶다, 였다. 누구 아이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안즈는 제 남편과 한 번도 같은 침대에 누워본 적이 없었고,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결혼식 당일날 대기실에서 했던 불장난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으면 좀 더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는 건데. 물론 후회해봤지 이미 늦은 일이었고, 안즈는 이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제 남편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안즈는 이 아이를 낳고 싶었다. 바라지도 않았던 일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니 욕심이 생겼고,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전화에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은 안즈의 말을 듣더니 한숨을 쉬었다. 조심하셨어야죠. 차마 결혼식 당일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는 말할 수 없어 대충 기간을 속여서 말했으나 그에게는 「언제」 일이 벌어졌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태어난 아이가 당신과 닮았다면 우리 아이로 키워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닮지 않았다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여 물어보았고, 그는 냉정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그 남자한테 보내세요.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안즈는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나 임신했어요.
그 말을 전했을 때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가 배신당했다는 얼굴로,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물어보았다. 그 남자? 짧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알 수 있었고, 안즈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을텐데 평소에는 그렇게 냉정하고 여유롭던 남자가 멍청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게 어색하여서 거짓말이었다고 진실을 말해줄 뻔 했지만 안즈는 가까스로 그것을 참아냈다.
결혼하자마자 임신 이야기가 나와서, 더 귀찮아지기 전에 인공수정했어요.
....
나 그 사람이랑 안잤어요.
전부 다 거짓말이었지만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내가 당신을 두고 다른 남자랑 그럴리가 없잖아요. 레이 씨. 그래서 내가 싫어요? 나 이제, 보기 싫어요? 그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잡은 손의 끝이 매우 차가웠다. 긴장했구나. 많이 놀랐구나. 안즈는 그 손을 힘주어 잡으며, 고장난 인형처럼 삐그덕 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레이 씨. 차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그 말을 씹어 삼키며, 안즈는 억지로 울음을 참았다.
사실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안즈는 레이에게 그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게 비슷한 성격과 자라 온 환경이라고 말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그 남자는, 안즈의 남편은 레이와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물론 사쿠마 레이가 더 잘생겼지만, 어쨌든 그 남자는 레이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레이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었고, 제 남편에게도 걱정하지 말라며 당당하게 굴 수 있었다. 태어난 아이는 까만색 곱슬머리에, 빨간 눈을 한 아주 예쁜 여자아이였다. 병원으로 찾아 온 남편은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이 아이가 자신을 닮아서 다행이라 말했고, 안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당신을 닮은 게 아니예요. 레이 씨를 닮은 거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안즈는 레이를 닮은 제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내려오자마자 쓰고있던 모자를 집어던지고, 자켓까지 벗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놨지만 아무도 레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언데드가 내려오자마자 유성대가 무대 위로 올라가서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통 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사람은 현장의 열기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이기에 건드리지 않는 게 좋기 때문이었다. 카오루가 건네준 차가운 물병을 받은 레이는 뚜껑을 따자마자 그대로 머리 위로 부어버렸고, 찬물을 뒤집어 쓰면 좀 진정될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열기때문에 곤란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그러지말라고 카오루가 잔소리를 해왔지만 레이는 한귀로 흘려들으며 물에 젖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사실 지금 제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빠서 자리를 비웠고, 바쁘지 않다 해도 제 옆에 붙잡아 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녀가 제 눈 앞에 있다한들,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도 감이 오지 않았기에 아예 제 눈에 보이지 않는게 나았다. 대기실에 가서 좀 누우면 괜찮아질려나. 엔딩 무대에 올라가야 했으므로 그렇게 길게는 쉴 수 없었지만 여기서 이렇게 이도저도 못하고 서있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눈앞에 마른 수건 하나가 보였다.
"괜찮아요?"
이게 뭐예요. 다 젖었잖아. 허리 좀 숙여주세요, 머리 말려드릴게요.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제발 눈 앞에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왔고, 이성은 여기서는 안된다며, 제발 참으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몸은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사쿠마 레이는 도망가지 못하게 안즈의 손목을 잡았고, 주위에서 자신들을 쳐다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참고 참아왔던 것을 기어코 저지르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안즈는 레이를 밀어내지 못했고, 설사 그랬다고한들 작정하고 달려드는 그를 밀어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손목이 잡혔고, 허리에 제 팔까지 둘러서 도망가지 못하게 막고있는데 이걸 어떻게 밀어내. 무대 위에서 유성 레드가 아주 큰 성량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어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주위의 사람들이 그 쪽쪽 거리는 민망한 소리를 다 들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아주 진하게, 보기 민망할정도로 키스 중이었다.
"아오 진짜..."
"상관은 없는데 때와 장소는 좀 가려서 하지 그러냐..."
"세나 선배,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손을 치워주세요."
"조용히 해 카사 군.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야."
"우와...진심으로 기분 나빠..."
"후후후..."
평소랑 똑같은 얼굴로 웃고있는 아라시의 손에 들려있던 물병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이 자리에 아키양이 없는 게 다행이지.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사가미는 그걸 태평한 얼굴로 보고있었고, 사실 별로 말릴 생각도 없었기에 그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반면에 아라시는 여기서 그딴짓을 하는 네놈을 죽여버리겠다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레이를 노려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안즈가, 안즈가 그를 밀어내지 않고 소심하게나마 받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치가 보여서인지 적극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둘다 똑같았고, 그래서 이즈미는 츠카사의 눈을 가려주었다. 어린 애는 이런 거 보는 거 아니지. 그럼, 그렇고말고. 스오는 어린애지. 저는 child가 아닙니다! 별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고 다들 이 사태의 원흉인 레이에게 여기서 무슨 짓이냐며 한소리하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러지를 못했다.
"카오루 군."
30분만 자리 비울테니 다른 녀석들한테 말 좀 잘해주게나. 카오루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안즈를 데리고 나가버린 레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이 씨.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안즈가 그의 이름을 불렀고, 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 다시 혀가 들어가고,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흘러내리고, 더는 무리라며 뒤로 도망가보지만 안즈를 기다리고 있는 건 막혀있는 벽이었다. 레이에게 잡혀서 온 곳은 비어있는 탈의실이었고,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키스만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다가 숨막혀서 죽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깨물었더니 그제야 레이는 물러났고, 몸에 힘이 다 빠진 안즈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연신 기침을 해댔다. 레이도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탁해졌던 붉은 눈이 평소와 똑같은 빛으로 돌아와있었고, 안즈는 그걸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시 현장에 복귀해야하는데 이런 꼴로 어떻게 들어가지. 정말 말그대로 '키스'만 했기에 옷이 벗겨지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만 얼굴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그런 상황이었으니 더 민망한 것도 있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한소리 해줘야 하는데, 힘들었냐며 저를 안고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하는 이 남자를 보고 있으니 도무지 그런 마음이 들지를 않았다.
나 어떻게 현장에 돌아가요...
잘됐구먼. 가지말고 여기서 계속 나랑 놀아주게나.
레이 씨도 엔딩 무대 올라가야하잖아요.
아직 한참 남았으니 걱정안해도 된다네.
다음 무대 트릭스타란 말이예요...
그건 어쩔 수 없군.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싫어요. 더는 못해요. 한참을 그렇게 신경전을 하다가 그럼 입술이 아닌 다른 곳에 하는건 괜찮다는 걸로 이해해도 되겠지? 사쿠마 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안즈의 교복 셔츠의 단추를 잽싸게 풀었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제 흔적을 남겨서 기어이 안즈가 화를 내게 만들었다.
아 진짜, 우리 프로듀서 데리고 중간에 사라지는 것 좀 하지 말랬죠!
결국 스바루가 화를 내며 레이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빨개진 얼굴과 부어있는 입술, 그리고 목덜미에 붙어있는 밴드를 보고 대충 상황을 파악한 다른 사람들은 혀를 차며 파렴치하다고 욕을 했다.
억울하구먼.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네~?
물론 당사자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그리 답했고, 레이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째는 뱃속에 들어있을 때부터 먹는 걸 좋아했고, 먹는 걸 가리지도 않았다. 입이 짧은 아빠와 먹지 않는 엄마 사이에서 어쩌다 이런 애가 생긴 건지, 이해는 할 수 없었으나 레이는 이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안즈가 아침을 먹었고, 점심도 먹었고, 심지어 저녁까지 먹었다. 삼시세끼 다 챙겨먹는데 대체 그게 무슨 문제인가? 거기다가 임산부들은 피해갈 수 없다는 입덧까지 운좋게 피해가서 그런 걸로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었다.
'레이 씨 진짜 행복해보여요...'
아이를 가진 게 좋은 건지, 그도 아니면 안즈와 결혼을 해서 이제는 당당하게 함께 살 수 있어서 기쁜건지, 아니면 안즈가 삼시세끼 다 챙겨먹어서 기쁜건지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저 얼굴을 보아하니 제 남편이 행복해하는 이유의 90%는 아마 마지막 이유일 거라고, 안즈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좋은가 싶었지만 레이가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했으니까, 그리고 먹는 걸 가리지 않는 아이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먹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에 안즈는 지금 이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가 살면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 기쁨을 느꼈던 적은 또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 먹고 다니니 볼살이 오르고, 전체적인 외형이 동글동글해지고,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통통해졌지만 딱히 안즈는 거기에 스트레스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만큼 잘 먹고 다녔으니까 살이 찌는 게 당연한거고, 그렇다고 건강이 위험할정도로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남편인 레이가 귀엽다고 해주는데 굳이 살을 빼야할 필요가 있을까? 안즈가 이렇게 말했더니 이즈미는 질린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너도 물들었구나. 나쁜 뜻으로 한 말같았지만 레이를 닮았다는 말은 안즈에게 칭찬이었지, 나쁜 말은 아니었다.
30년 넘게 살아 온 제 인생에서 겪었던 행복한 일들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보라며 누군가가 자신에게 자리를 만들어준다면, 가장 첫 번째는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상위권에는 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쿠마 레이는 현재 분에 넘치는 행복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혼을 발표하고 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말도 많았고, 힘들기도 했으며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계속 일어나서 괴로웠지만 그것도 이제는 다 지난 이야기였다. 결혼이라는 게 이리도 좋은 줄 알았다면 진작에 할 것을. 이제는 더는 신경쓰지 않고 합법적으로 안즈와 같은 집에서 살며 그녀와 함께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게 기뻤고,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긴 것도 너무 기뻤으며, 안즈가 삼시세끼를 다 챙겨먹는다는 게 정말, 너무나도, 미치도록 행복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마지막의 이유가 아마 지금 느끼는 행복의 80% 정도는 될 거다. 그정도로 레이는 지금 이 상황이 행복했다.
아이는 건강했고, 엄마를 닮아서 얌전한건지 속을 썩이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안즈는 쉬는 것을 미루고 좀 더 일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쉬겠냐며 주위의 모두가 매달리는 덕분에 일찌감치 육아휴직계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예전에는 서로 바빠서 심할 때는 이른 아침이나 새벽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안즈가 일을 쉬고, 레이도 당분간은 집에서 쉬며 여론이나 팬덤이 잠잠해질 때까지 이미지 관리나 하라는 회사의 명령이 떨어져 하루종일 붙어다니며 안즈를 챙겨줄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다.
'나 살 오른 거 보기 좋대요, 하카제 선배가.'
'...내 눈에는 그대로인데?'
'나 살쪘는데, 티 안나요?'
'으음...'
남들은 다 보기 좋게 살이 올랐다고 하는데, 레이의 눈에는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였다. 누가봐도 티가 날 정도라는데 왜 자신의 눈에만 별로 변화가 없어보이는지, 처음에는 남들 다 아는 안즈의 변화를 저만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거슬렸지만 다행히도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저 안즈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신경 쓰지 않고 항상 귀여워해주니까, 예쁘다 해주니까,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제 눈에는 항상 사랑스러우니까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었다. 왜 부끄러움은 저의 몫인가요. 이 말을 들은 안즈는 부끄러워하며 수면양말을 신은 작은 발로 허공에 발차기를 했지만 레이는 당당하게 그걸 말하고 다녔다.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코가에게 욕먹기는 했지만 레이는 정말로 그게 왜 부끄러워할 일인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어난 아이는 레이를 많이 닮은 여자아이였고, 아픈 곳 없이 건강했으며,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 튼튼한 아이였다. 입이 짧은 아빠와 지금이야 고쳤다지만 잘 먹지 않는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어찌도 이리 잘 먹고 다니는지, 레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아이가 안즈를 닮지 않고(이 말을 들은 안즈는 어이가 없었다) 더 먹을래,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게 큰 기쁨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싫어하는 건 없는지,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억지로 먹는 건 아닌가 싶어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아빠가 만드는 건 다 좋아. 라는 답을 들려주었다. 이런 부분이 안즈를 닮았다며 레이는 도저히 현역 아이돌이라고는 볼 수 없는 풀어진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고, 안즈는 제 남편이 도대체 무엇을 보고 닮았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예쁜 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안즈는 둘째를 가졌다. 라디오 생방송 도중에 그 소식을 전해들은 레이는 책임감 없는 행동임을 알지만 지금 얼른 가봐야겠다며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라디오 부스를 뛰쳐나갔고 그날 실시간 트렌드 1위는 사쿠마 레이 라디오 생방 탈주였다. 안즈는 책임감없이 무슨 짓이냐며 집으로 달려온 레이를 혼냈지만 급하게 달려오다가 계단에서 넘어져(왜 이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았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까진 무릎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학창시절에는 조금 멋있었던 것 같은데. 결혼한지 7년차, 연애 기간까지 합치면 10년이 넘었다보니 그때는 보지 못한 부분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멋있는 사쿠마 레이와 거리가 멀었다. 뭐, 그래도 귀여우니까 괜찮지 않을까. 다친 무릎에 빨간약을 발라주면서 안즈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둘째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레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첫째를 닮았으면 둘째도 고생시키지 않고 얌전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 놓고 있었는데, 첫째가 안즈를 닮은 것과 반대로 둘째는 레이를 닮았는지 아이는 얌전히 있지를 못했다.
"...안 먹고 싶은데."
"안즈."
"그치만 나 속도 안좋고, 냄새도 그렇고, 으음."
"여전히 거짓말하는 게 서툴구먼. 그런 점이 귀엽기는 하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런 서툰 거짓말이 오히려 역효과라는 걸 알텐데."
"레이 씨이..."
둘째 아이는 가리는 게 많았고,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덩달아 왕성했던 식욕까지 죽어버렸다. 먹을 수가 없는데 먹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게 만들어버리니 안즈는 점점 식사량을 줄여갔고, 이게 계속 되자 결국에는 결혼 전의 식습관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전국투어 때문에 자리를 비웠던 레이는 저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며 집안을 뒤집어 엎었고, 안그래도 워낙 말썽이라 일찍 육아휴직계를 낼 생각이었지만 안즈는 레이의 잔소리에 휴직계를 한달이나 일찍 내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첫째 아이 밥만은 어찌나 잘 챙겨줬는지, 챙기는 김에 본인도 그렇게 먹었으면 얼마나 좋냐고 레이는 답지 않게 투덜거렸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그런 말을 덧붙어봤자였다.
오늘도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에 아침 먹을 때가 됐다며 레이는 트레이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고, 안즈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으나 결국은 턱이 잡히고, 입이 강제로 벌려지더니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와 닫을 수 없도록 막고 있었다. 입덧이 심하다고 핑계를 대봤자 그것도 처음에나 가능한 일이지, 이제는 이게 정말 입덧인지, 아니면 그 핑계를 대고 먹지 않겠다는 건지 알 수 있게된 레이는 후자일 경우 더 가차없이 행동을 했다. 바로 지금 처럼. 정말 오랜만에 겪는 일에 안즈는 당황했으며, 이 짓을 나이 먹고 또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레이는 더 단호하게 나갔다.
"첫째는 안그랬는데, 둘째는 왜 이렇게 속을 썩이는지 모르겠구먼."
"...그게 다 우리 애가 싫다는 데 억지로 먹으라고 몰아붙인 레이 씨 때문이잖아요!"
"말은 똑바로 하게나. 그걸 핑계 삼아서 안 먹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애가 싫다는 데 왜 이리도 강압적이냐고 화를 내봤자 그걸 핑계 삼아서 거짓말을 해왔던 안즈를 레이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들어주지 않을게 뻔했고, 역시나 오래동안 함께 해 온 만큼 그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안즈는 안 먹겠다고 반항하는 것을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렇게 모든 음식을 먹기 싫다며 밀어내서 아빠를 슬프게 만들고 엄마를 힘들게 하더니 사쿠마 가家 아침식사 고정메뉴인 토마토 스프만은 입에 맞았는지 이것만은 냄새도 역하지 않았고, 입에 들어오는 게 싫지도 않았다. 아 정말, 누가 사쿠마 레이 핏줄 아니랄까봐. 같이 준비해온 빵은 아직 먹기에 무리인 것 같았지만 이것만은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이제는 자신이 직접 먹을테니 숟가락을 달라며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웃으면서 흔쾌히 그것을 내주었다.
잘 먹으니까 얼마나 좋아.
와아...역시 레이 씨 성격 엄청 나쁘다니까...
그래서 이런 내가 싫은가?
싫었으면 아까 입에 손가락 들어왔을 때 깨물었죠.
내가 더 많이 사랑해서 봐주는 거예요. 어느새 토마토 스프 한 그릇을 다 비운 안즈가 그렇게 말하며 평소와 똑같은 느긋한 얼굴로 돌아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어주는 레이를 노려보았고, 사쿠마 레이는 안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고 조용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굳이 따지자면 성격 다 죽이고 봐주고 있는 건 이쪽이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으며 레이는 흐뭇한 얼굴로 안즈가 커다란 사탕과 씨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자신이 이상하다거나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성인소설작가라는 걸 딱히 숨긴 적도 없었고, 제 직업을 밝히는 게 부끄럽지도 않았다.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부끄럽다기보다는 그냥, (다른 사람이 들으면 재수없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사실이었으므로) 본인의 얼굴이 일반적인 평균보다 높은 수준의 외모였기에 귀찮아질까봐 숨긴 것 뿐이었다. 어쨌든 사쿠마 레이는 제 직업에 대해서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의 연인을 사귀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의 레이의 연인인 안즈는 레이의 데뷔 때부터 팬으로, 소설의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담당자의 소개로 신작의 일러스트를 그리게 되면서 알게되었고, 그 인연이 길게 이어져서 지금의 관계가 되었다. 첫인상은 그저 작고 귀엽게 생긴, 사랑스러운 인상의 동업자, 정도였다. 나이도 제 동생과 비슷하다보니 그런 쪽으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도서관에서 레이의 데뷔작(놀랍게도 그의 데뷔작은 서정적인 문체의 신파로맨스였다.)을 읽게 되었고, 원래는 그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읽고 난 다음에 엄청난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팬이었다고 말하며 수줍게 웃는 얼굴이 자꾸 시도때도 없이 떠올라서 일이 없을 때도 부르고, 일을 핑계로 불러내서 밥을 사주고, 신작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조사를 나갈건데 시간이 있냐며 불러내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다보니 안즈가 고백을 해오고, 정신을 차려보니 연인관계가 되어있었다.
좋고 싫고를 따지면 당연히 좋다. 자신이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안즈의 무언가를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고, 일적으로도 이만한 파트너는 없었기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저와 계속 만나주는게 고마울 정도였는데, 정말 딱 한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다.
"방금 레이 씨가 한 말 무슨 뜻이예요? 아... 잠시만요. 나 이 대사 레이 씨 책에서 본 것 같아요."
"아니...다른 뜻은 없네만..."
"그럴리가 없잖아요. 레이 씨가 하는 말인데!"
정말 아무런 의미 없는 밥 먹고 가라는 뜻을 대체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건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런 거 아니라고 말을 해봤자 안즈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레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추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즈가 레이의 열성적인 팬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가 쓰는 글의 문제일까. 둘 중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레이는 지금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안즈는, 레이의 사랑스러운 그녀는 제 연인이 하는 말과 행동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알아듣는 일이 많았다. 가령 예를 들어 지금처럼, 늦었으니 밥 먹고 가라는 말도 분명히 이 말에는 다른 뜻이 있을 거라며, 제가 쓴 소설의 장면과 비교하며 이런 뜻으로 말한 거죠, 라고 오해를 했는데 사쿠마 레이는 절대로, 단 한 번도, 그런 파렴치한 뜻으로 말을 한 적이 없....었지는 않지만, 아니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쨌든 전부 내 탓인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간의 상황을 생각하면 정말로 자신의 탓이 컸다.
'그렇게 생각안하려고 해도 말이죠...레이 씨가 하면 자꾸 다른 뜻으로 들려요.'
한 번은 이걸로 진지하게 대화를 해본 적이 있었는데, 안즈는 저렇게 말했고 사쿠마 레이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대화가 종료된 적도 있었다. 편견인 것도 알고, 그게 나쁜 것도 알지만 레이 씨니까 어쩔 수 없지 않아요? 그리고 밥 먹고 가라고 해놓고 다른 거 먹은 적도 있잖아요. 순진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안즈 앞에서 레이는 죄인이었고, 그 이후로 이 주제로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이런 고민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더니 그럴 만도 하지 않냐는 답이 날라왔다. 아, 제 편은 아무도 없구나. 이런 얼굴과 이런 목소리와 이런 성격으로 태어난 게 원망스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안즈가 이럴 때마다 스스로의 외모를 원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안즈가 오해하게끔 그런 상황으로 몰아간 제 탓도 없지는 않았다.
"알았다. 이거 <한여름 밤의 그림자>에서 나온 그 장면이죠?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이런 말하고 집으로 가서 그 뒤에 xx를.."
아 제발. 레이는 할 수만 있다면 안즈의 입을 막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홀려서 이제 다른 아이돌은 눈에도 안차게 만들었으면 책임지고 디너쇼까지 해야하는 거 아니냐? 이 모임이 술자리를 갖게 되면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그거였고, 너도나도 흥분하여 술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그 말에 동의했다. 누가 결혼하고 활동하면 잡아먹는데? 아니 그런 인간이 있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진짜 은퇴는 아니지 않냐고. 아니 은퇴를 해도 일본에서 살면 큰일이 난다냐? 그래 큰일이야 나겠지. 물론 그렇다고 소식조차 들을 수 없는 외국으로 떠버린 건 용서할 수 없어. 야 오늘 은퇴 기자회견 연지 7주년이야. 미친아 그런거 기억하지마라. 빌어먹을 그 인간 은퇴 기자회견도 자기 생일에 했어. 야 나 이번에 카오루 팬싸가서, 진짜 용기내서 그 인간 살아는 있냐고 물어봤더니 뭐라는지 알어? 그 인간 이 나라 뜨기 전에 누가 자기 안부 물어보면 이제 없는 사람이니까 잊으라고했대. 진짜 욕하고 싶다 그럴거면 사람을 꼬시지나 말던가... 나 오늘 데뷔 싱글 들으면서 출근했는데 회사 도착하니까 마스카라 다 번져있더라 울어서... 야... 나 첫콘 허니밀크 무대 보고 싶어... 나 그거 지워졌는데 누구 보내 줄 사람... 1080p? 아니면 4k? 240p도 감사하게 받습니다...
전무후무한 아이돌이라고 추앙받았던 그 남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기록을 갱신하고 갈아치운 뒤에 아무런 미련도 없이 결혼과 함께 은퇴를 했다. 잔인하게도 생일날에 기자회견을 열어 결혼소식을 알린 것도 모자라 은퇴소식도 함께 전한 사쿠마 레이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은 많았으며, 한편으로는 얼마나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고 아이돌을 구속하는 게 많으면 저 슈퍼스타 아이돌이 결혼과 동시에 은퇴를 하냐며 옹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대부분의 팬들은 그 갑작스러운 은퇴소식에 모두 충격을 받았으며, 얼굴이라도 보게 결혼식 사진이라도 보여달라며 간절하게 바랐으나 그 남자는 이미 은퇴한, 일반인의 사진에 왜 그리들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며 결혼식도 철저하게 비공개로 치룬 뒤 일본을 떠났다. 빌어먹을 나도 이제 너같은 놈 잊고 새파랗게 어리고 귀여운 아이돌 좋아할 거다! 팬덤에서는 그렇게 말하며 씨디를 부수는 등의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나타났으나 결국은 눈에 차는 애가 없다며 돌아와 부서진 씨디를 애처롭게 테이프로 붙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다보니 남은 멤버들에게도 원망의 화살이 쏟아질 법도 한데, 코가가 뭘 알겠냐 쟤는 그냥 레이 말이면 다 듣는 애가 아니냐 우리 강아지는 죄가 없다, 아도니스야말로 뭘 알겠냐 우리 애는 착하고 순해서 들어줬을 뿐이다, 우리 카오루는 죄가 없다 쟤는 레이가 밀어붙이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애가 아니냐. 결국 모든 일의 원흉은 레이였기에 남은 멤버를 향한 비난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팬들도 사쿠마 레이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온 말을 종합해보면 그당시에 빨리 결혼을 해야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연애만 해도 난리가 날 멤버가 결혼까지 한다고 발표하면 팬덤이나 여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거기서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한 것뿐이라고. 열애설이 났던 여자연예인을 어떻게 욕하고 몰아세웠는지 팬덤 내에서도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이 나오자마자 전부 불평불만을 그만두고 입을 다물었고, 아마 그때부터 팬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미 아이돌로는 모든 걸 이루었던 사람이니 거기에서 오는 매너리즘도 있었을 것이다. 유닛의 미래, 개인활동,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호기심같은 것들이 섞여서 이런 결정을 내렸으리라. 그당시에 레이는 인터뷰나 방송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었고, 그 상황이 너무 빨리, 그리고 전혀 생각도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뿐이었다. 어쨌든 시간이 흐르니 다들 안정을 찾아서 예전만큼 과격하게 구는 사람들도 없어졌다. 물론 술만 마시면 디너쇼까지 하고 은퇴하라고 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들 어른이 되었다.
"야, 잠깐만."
"뭔데? 코가 콘서트 양도표라도 떴냐?"
"그건 이미 양일 스탠딩으로 구했거든? 잠시만 라인방에 주소 올려줄게. 미친. 야."
이건 다같이 모여서 볼 게 아냐. 너네 다 따로 봐야해. 다들 저게 양일 스탠딩 티켓을 구하다가 드디어 미쳐버렸나, 하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스마트폰을 들어 라인을 확인했고, 정체불명의 주소를 눌러서 뜨는 영상의 썸네일 보자마자 동시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야 내가 꿈을 꾸냐? 잠시만 이게 뭐야. 아젠장 우리 오빠 영어도 잘해 영국식영어는 언제 배웠는데 야 근데 7년이 지났는데 왜 얼굴이 그대로냐? 이 인간 지금 마흔아냐? 오빠 나이는 어디로 먹었어요 아 내가 먹었나? 너 이거 어디서 찾았어? 나 영국에 사는 친구있다고 했잖아. 근데 걔가 이거 네가 자주 보여줬던 그 아이돌 아니야? 하고 링크 보내줬는데 오빠가 인터뷰를 하고 있잖아. 영국?! 영국까지 갔어??? 미친 그래서 영국에서 뭐하는데? 나 영어 뭐라는 지 모른다고... 영국에서 연극배우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게 됐는데, 미친! 우리 오빠 로미오래! 하아아아아아아 로미오..... 이것들아 말 좀 끊지마! 아 너무 잘생겼어... 나 연차내고 영국갈래 우리오빠 만나러가야해 영국행 비행기 예약 지금하면 되냐? 너네 이럴 줄 알고 친구한테 부탁해서 표 구해달라고 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는 오늘 술값내지마라.
부끄러워서 싫은데, 눈앞의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주색 망토 사이에 초록색 망토는 너무 눈에 띄잖아요. 민망함을 담아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레이는 괜찮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우리 관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전교생이 다 알고있는 사이인데 그깟 망토 좀 바꿔 입는 게 뭐가 문제냐는게 레이의 입장이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틀린 말도 아니라서 안즈는 뭐라고 반박조차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요즘 학교에서는 연인끼리 망토나 목도리같은 것들을 바꿔 입는 게 유행이라서, 그렇게까지 문제될 일도 없었다. 너무 크잖아요. 꼭 입어야 해요?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레이의 교복 소매를 잡으며 그렇게 올려다보았지만 제 남자친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것을 무시했다. 좋게 말로 할 때 입고가는 게 좋을텐데. 웃으면서 말은 하고 있지만, 저 말의 뜻이 어렴풋이 짐작갔기에 안즈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두 사람은 덩치 차이가 좀 나는 편이었고, 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은 것처럼 우스운 모양새가 됐지만 레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머플러까지 까먹지 않고 둘러주었다. 소매가 길어서 간신히 손끝만 보이는 제 꼴을 보면서 분한 마음에 나만 부끄러워지는 건 불공평하니까 레이 씨도 뭔가 하라며 말하는 도중에 고개를 돌리니 이미 안즈의 머플러는 레이의 목에 둘러져있었다. 대체 언제 가져간거야.
"...그러고 수업 들으러 갈 거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어깨에 그걸 걸치고?"
레이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고, 안즈는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이냐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마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작은 안즈의 망토를 입을 수는 없었는지 그걸 제 어깨에 걸치고 있는 레이를 말리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수업을 들으러갈 수밖에 없었다.
**
"안즈, 너 그거..."
"...모른 척 넘어가주면 안될까 마오 군..."
이미 수업을 들으러 오는 길에 이즈미를 만났고, 대체 누구 망토를 입은 거냐고 엄청나게 잔소리까지 듣고 오는 길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지. 중간에 그런 생각이 들어 도망쳐오기는 했지만 마오가 안즈를 보자마자 이야기를 꺼내서 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딱히 레이가 감시하는 것도 아니니 굳이 수업 중에는 입고있을 필요가 없음에도 소매에 얼굴을 묻고 레이 씨랑 같은 냄새가 난다며,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으면서 벗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안즈 또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레이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을 남매라고 보기에도 조금 문제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연인으로 보기에도 조금 문제가 있었다. 저런 분위기를 보통 서로 죽고 못사는 연인이라고 하지는 않지. 레이와 안즈를 본 사람은 너나 할 거 없이 그렇게 말했다. 진짜 남매들은 저런 분위기 안풍겨. 사쿠마 레이의 눈을 보라고. 자기 동생을 저런 시선으로 보면서 남매라고? 말도 안되지. 더 웃긴 건 저건 연인을 보는 눈도 아니라는 거야. 대체 두 사람 사이는 어떤 사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이었지만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그걸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중에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리츠에게 그걸 물어본 사람이 있었고, 리츠에게 욕을 한 바가지로 들어먹은 건 물론, 그게 레이의 귀에도 들어가서 결국은 불려갔다고 한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았으나, 불려갔던 이들이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돌아와서 다시는 그쪽에 관심가지지 않을 거라며 말하는 모습을 보고 난 후, 그 누구도 레이와 안즈의 사이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았다.
학생 A는 본의아니게 그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관심을 끊고 그냥 지나가면 되는 것을,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가던 길을 멈추고 몰래 숨어서 그 모습을 훔쳐보고 말았다. 안즈는 레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자는 중이었고, 제법 피곤했는지 사쿠마 레이가 쉴새없이 머리카락이나 귓불을 만지며 괴롭히는데도 미동도 없이 작게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저럴 때는 보통의 남매같구나. 뺨이나 귓불을 만지는 손길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학생 A는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며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데.'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는 거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여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어떤 말인지는 들리지 않았고, 단지 「좋을텐데...」라는 말만 계속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
텐쇼인집안이면 오히려 안심이지. 우리 딸이 시집갈 집안인데, 그정도는 되야하지 않겠니?
그렇게 소중하다고 싸고 도는 딸을 당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 만들거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어찌됐든 눈 앞의 여자는 제 어머니였고, 레이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게 행복인 줄 알고 있는 제 어머니를 힐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적어도 텐쇼인 집안의 외동아들에게 시집을 가면 무시당하면서 살지는 않을테니까. 더군다나 텐쇼인 에이치는 안즈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사이도 학기 초와는 달랐으니 결혼생활이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스스로가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안즈는 오직 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저와 같은 감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안즈의 우선 순위는 레이였고, 그녀는 본인의 감정보다 레이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빌었다. 그러니까 제가 저지른 짓도 별 말 없이 받아주고 용서했던 거겠지. 그래서 사쿠마 레이는 안즈가 언제나 제 옆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약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별 말 없이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인 안즈에게 배신감같은 것을 느꼈다.
'...하지만 절 이렇게까지 키워주신 건 어머님인데, 제가 어떻게 그 분 뜻을 거스를 수 있겠어요.'
낳아준 친모와 별 문제없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너를 억지로 여기까지 끌고 온 사람이 누군데. 대체 뭣하러 그런 사람의 말을 들어. 결국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레이는 처음으로 안즈에게 큰소리를 화를 냈고, 안즈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왜 저에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이길래. 안즈가 그렇게 말했을 때, 레이는 참지 못하고 제 동생을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대체 왜 몰라. 내가 너에게 어떤 마음인지, 내가 무슨 마음으로 너를 안았는지, 그리고 왜 내가 지금 너에게 화를 내는지. 그때 그날의 밤처럼 저를 밀어내는 안즈의 손목을 잡고, 그날의 밤보다 더 애절함을 담아서 키스하는 자신을, 제 동생은 매정하게 밀어내지를 못했다.
아주 가끔, 선장이 늦은 밤에 보초를 설 때가 있다. 밤에 보초를 서는 일은 보통 2인 1조인데, 선장은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저 혼자로도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함께 하겠다는 선원들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다들 말렸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따지자면 혼자는 아니라고, 자신의 옆에는 든든한 경호원이 있으니 걱정하지말라며 작은 인어 아가씨를 가리켰다. 그리고 선장님은 자신이 지킬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해사하게 웃는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배에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그 인간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인어 쨩 뿐일 걸? 선장의 측근 중 하나는 그렇게 말했고, 이 배의 선장이 싸울 때는 어떻게 변하는지 대부분의 선원들이 알고 있었기에 더는 반대하지 않고 선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인어 쨩이랑 아무도 없는 배 위에서 데이트하고 싶은 것 뿐이잖아?'
'이런. 들켰구먼?'
그런거였냐. 별 거 아닌 이유에 다들 어이없어했으나 능청스러운 얼굴로 웃는 선장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배에 아무도 없었다.
저 한 번만 헤엄치고 오면 안돼요?
아래를 내려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안즈를 보고있자니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내가 옆에 있는데 저 바다로 갈 셈인가? 유치한 질투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더니 이제는 바다를 질투하는 거냐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지만 딱히 그게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이렇게 보초를 선다고 한 건 안즈와 별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밖에 보초를 서는 선원들이 있으니 밤에는 레이의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는데, 슬슬 그게 답답했는지 안즈가 레이에게 그런 부탁을 해왔다. 레이 씨랑 별이 보고 싶어요. 그러고보니 한 번도 밤에 이렇게 둘이 나온 적이 없었지. 안즈가 하는 거라면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줬을테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저와 무언가를 함께 싶다는 부탁을 레이가 들어주지 않을리가 없었다. 날이 춥다는 게 걸리기는 했지만 그정도야 해결할 수 있으니까.
커다란 담요를 뒤집어쓰고 팔을 벌렸더니 안즈가 웃으면서 달려와 안겼다. 저는 추위를 못느끼니 사실 필요없었지만 주변 온도에 민감한 안즈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한참을 목에 팔을 두르고 대롱대롱 매달려서 장난을 치던 안즈가 자세를 고쳐잡고는 레이의 뺨에 뽀뽀를 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레이 씨 엄청 따뜻해요. 보통 흡혈귀는 체온이 낮았고, 레이도 다른 흡혈귀들과 마찬가지로 체온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땀도 잘 나지 않는 체질이었으니 따뜻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좀 서늘할텐데도, 차갑다고 느껴질텐데도 안즈는 따뜻하다고 말해주었다.
이 세상에서 내게 그렇게 말해주는 건 너뿐일게다.
그치만 내게는 레이 씨가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사람인걸요.
달빛아래에서, 태양같은 미소를 지어주며 그리 말하는 안즈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레이는 오늘도 행복한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사실 저는 실감이 안나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제 품에 안겨 있어서 자는 줄 알았던 안즈가 대뜸 내뱉은 말이었다. 모든 게 꿈같아요. 레이는 답하지 않고 얌전히 그녀가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들을 들어주었다. 있잖아요, 저는 레이 씨한테 프러포즈를 받았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꿈을 꾸는 것 같아요. 내일이 결혼식인데 이러는 거 이상한 거 알아요. 그렇지만 정말 코앞에 다가오니까 더 불안해서, 어디다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이래요. 레이 씨. 정말 저로도 괜찮아요? 전 당신이랑 결혼해서 잘…잘, 응. 잘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당신이 저랑 결혼하는 게 옳은 건지도 모르겠구요. 아이돌인데, 모두의 우상으로 있어야 할 사람이잖아요, 레이 씨는. 그런데 제가 독차지를 해도 괜찮은 건가, 하고…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자꾸 하게 되요. 게다가 연애랑 결혼은 많이 다른 건데, 연애할 때는 괜찮았지만 결혼하고 나서 맞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니까 더 걱정되는 것도 있고…. 거기까지 들은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즈를 안은 팔에 더 힘을 줬다. 괜찮으니까, 자신이 그 불안을 전부 다 들어줄 테니까, 겁먹지 말고 천천히 다 털어놓으라는 뜻으로 등을 토닥여주었더니 진정됐는지 아까 전보다는 편안한 목소리로 안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는요, 레이 씨. 아직도 당신이 저를 선택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당신이랑 함께 하는 모든 하루하루가 제 망상 같아요. 눈을 뜨면 그건 전부 네 꿈이었다고, 이제는 깨어나서 현실을 봐야한다고 할 것 같아서 어쩔 때는 밤에 잠을 자는 것도 무서울 때가 있었어요. 밤에 잠을 자고 눈을 뜨면 아침이 오고, 그건 꿈에서 깨야한다는 뜻이니까. 이런 이야기 정말 아무한테도 해본 적 없어요. 레이 씨한테 처음 하는 건데, 하필이면 결혼식 전 날에 하게 되네요. 결혼하는 게 싫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저는 자신이 없어서…자신이 없어요, 레이 씨랑 살아가야 한다는 게. 우리가 싸웠는데 화해를 하지 못하면 어떡해요? 서로에게 지치거나 이 감정이 식으면 어떡하나요? 아이는요. 제가, 아니지. 레이 씨랑 제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저는 이런 게 너무 걱정이 돼서, 레이 씨.
“안즈.”
레이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떨리던 몸이 진정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이름만 불러주었을 뿐인데 안즈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뺨에 입을 맞추고, 차갑게 식은 손을 잡아주면서 레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안즈가 했던 그 혼잣말을, 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토해낸 그 불안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지금까지 함께 해왔던 것보다 더 많은 세월을, 긴 시간을 같이 살아가야하는데 항상 좋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싸우기도 할 거고, 오해하고 틀어질 때도 분명히 있을 테지. 그런 것들을 두려워 말게나. 이야기하고 풀어가면서 서로에 대해 더 알아가고 알게 된 만큼 배려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니까, 당연히 서로에게 지칠 수도 있겠지, 감정이라는 게 영원한 것도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이 사랑도 조금은 변할 테고. 안즈야. 나도 네가 뭘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단다. 만약에…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오지도 않을 미래를 왜 그리도 겁먹고 두려워하는지 나는 모르겠다만, 만약 그런 때가 오면 두 사람이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봐야지. 잃어버린 그 감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아이 문제도…으음, 누구나 처음 부모가 될 때는 실수를 하지 않는고.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함께 실패도 해보고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고 고쳐가면서 살아가는 거지.
“…그리고 이게 전부 꿈이라면, 그런 걱정 말고 그냥 영원히 나와 함께 그 꿈속에서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나.”
그러니까 너무 걱정말게나. 이게 꿈이라면 깨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이게 현실이라면…나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면 되는 것이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걸까, 안즈는 말을 하면서도 수십번을 고민했다. 결혼식 전 날인데, 기쁘게 웃는 얼굴로 내일 함께 식장으로 가야하는데 괜히 자신이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든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하면서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레이는 그것들을 전부 들어주었고, 안즈를 탓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불안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주었다. 이 대화만으로 오랜 시간 그녀가 갖고 있었던 불안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레이가 이렇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안즈는 충분했다.
사실은 아직도 내일 이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게, 자신의 성이 달라진다는 게, 더는 연애할 때와 같지 않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즈는 이제 더는 내일이 오는 게 무섭지 않았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젖으면 안되는 물건은 다시 교실로 올라가서 사물함에 넣어두었고, 내려오면서 교실에 혹시라도 남은 우산이 없나 싶어서 뒤져보았지만 고장난 우산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 큰일났네. 지금은 장마기간이라서 늘 우산을 챙겨다녔는데 하필이면 이런 날에 우산을 두고 오다니.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한숨을 쉬던 안즈는 냉방병을 대비해서 챙겨 온 가디건을 꺼내서 머리 위에 뒤집어 썼다. 아예 아무것도 없이 가는 것보다는 이거라도 있는 게 낫겠지. 아직 학원에는 남아서 연습하는 학생들도 있을테고 학생회실이라던가 스튜디오 쪽으로 가면 우산을 빌려주거나 같이 쓰고 갈 사람이 한 두명쯤은 있겠지만 안즈는 그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이돌이 일반인 여학생과 같이 우산을 쓰고가는 건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까.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서, 밖으로 나와서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안즈는 금세 온몸이 젖고 말았다. 축축해서 기분 나빠. 집에 가면 따뜻한 물로 바로 샤워를 하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말고 일찍 자야지.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분명히 한여름에 열기를 식혀주기 위해서 내리는 장맛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차가워서 안즈는 할 일을 미루고 일찍 자기로 결정내렸다. 감기라도 걸리면 여러모로 문제가 되니까. 조금 걸음을 빨리하며, 지나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쓸모는 없겠지만 우산이라도 하나 사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걸어갈 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이 학원에서 자신을 저렇게 부르는 사람은 단 두 명 뿐이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은 오늘 여동생 일 때문에 조퇴를 했다고 같은 반의 칸자키 소마에게 들었으니 남은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으나 이 시간에, 그것도 이렇게 비가 세차게 오는 날에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올 리가 없었다. 나를 유혹하려는 귀신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걸어갈 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구두를 신고 이런데를 걸으면 큰일날텐데. 상황에 맞지 않지만 그 발소리를 듣고 있으니 바보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엄청나게 혼이 나야 할텐데, 그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그리고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화가 났다는 걸 숨기지도 않는 엄한 얼굴로 안즈의 앞에 서서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우산은?"
"…어, 안 가져왔어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마른 수건을 하나 꺼내 안즈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집에 가는 날이에요? 가방을 들고 있길래 그리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점심시간에 생햄샐러드가 나왔으니까, 목요일은 아니구나. 그럼 왜? 궁금함을 담은 얼굴로 올려다 보았더니 그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얼굴 좀 비추라며 잔소리를 하길래 하는 수 없이 가는 거라네. 하교시간은 한참 지났잖아요. 가기 싫어서 좀, 방황했더니 시간이 이렇게 됐구먼. 방황이요? 가든 테라스에 수국이 피어있길래, 그걸 보고 왔다네. 그의 말을 들으면서 기침을 했더니 단번에 표정이 바뀌어서, 괜찮으니 걱정말라는 뜻으로 웃었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그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가든 테라스에 수국이 피었다고 했지. 학생회 일을 도우러 갔더니 케이토가 그런 말을 했었다. 가든 테라스에 수국이 잔뜩 피었다고. 좋아하세요? 대뜸 그런 말을 꺼내길래 좋아하나 싶어서 물어보았더니 그런 건 아니라고했다. 그저, 절에서 정원수로 자주 심어 어릴 때부터 봐와서 제 눈에 익은 불두화와 비슷하길래 눈길을 줬을 뿐이라고.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고, 자신은 금방 그걸 잊었으나 방금 전 레이의 말을 들으니 안즈는 그때 케이토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수국 보고 싶다. 많이 피었다고 했지. 어떤 색으로 피어있을까. 이 사람의 눈색을 닮은 붉은색 꽃이면 좋을텐데. 제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는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주며 곰곰히 생각하던 안즈는 역시, 이대로 집에 가지 않고 수국을 보러가는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눈앞의 이 남자와 함께.
"보고싶어요, 저도."
"무엇을 말인가?"
"선배가 보고왔다는 그 수국이요."
홀딱 젖어서, 당장 집에 들어갈 생각은 않고 답지않게 눈을 빛내며 그리 말하는게 거슬려서 데려다줄테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으나 안즈는 레이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또 아파서 제 속을 썩일 생각인가 싶어서 따끔하게 혼내려고 했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안즈의 목소리에, 레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집에 가기 싫잖아요."
저 지금 선배한테 집에 가지말라는 핑계 만들어주는 건데. 자세한 사정같은 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레이가 가기 싫다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속마음을 읽어낸 안즈는 그에게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주었다. 언제는 집에 좀 들어가라며 그렇게 짜증을 내더니? 가기 싫으면 어쩔 수 없잖아요. 안즈는 레이의 손을 잡았고, 자신은 꽃이 피어있는 곳의 위치를 정확하게 모르니 앞장서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성은 이런 상태의 안즈를 데리고 다녀서는 안된다고, 슬슬 공기도 차가워지고 있으니 빨리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으나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물론 평소라면 얌전히 제 이성의 목소리를 들었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 몸과 같이 가주겠나 아가씨?"
사실 혼자서 그걸 보고 있으니 조금 쓸쓸했거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레이는 그 꽃을 보면서 안즈를 떠올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