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 몇개(커플링 섞여있음)
01.
아내에게 미안한 사실이지만 경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매일 다정한 미소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지만 그 ‘사랑해’의 주체가 단 한번도 아내였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경수가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경수가 느꼈던 그 두근거림과 설렘, 그러니깐 사랑을 하며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감정들은 23살의 도경수가 모조리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은 피어나지도 못 하고 저버렸지만, 그때 받은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단단해 졌지만, 경수는 잊을 수가 없었다. 3월의 캠퍼스를, 모르는 사람밖에 없던 강의실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던 저에게 손을 내밀던 그 남자를, 그리고 저에게 인사를 하던 그 남자의 목소리를, 그 목소리에 넋이 나가 아무 말도 못 하던 저가 뒤늦게 말을 더듬으며 인사를 하자 환하게 웃던 그 남자를,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김민석이라고 소개하던 그 남자를.
어쨌든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애초에 도경수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경수의 작고 단단한 몸 안에 있는 그 모든 감정들은 이미 김민석이 가져가버렸는데 다시 사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속이 비어버린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경수는 자신이 그런 껍데기라고 생각했다.
02.
경수야.
경수야 있지, 나는 네가 만드는 노래가 진짜 좋아.
그래서 말이야, 사실 나는 조금 질투가 나.
네가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네가 만드는 노래를 들을 거 아냐.
이런 노래를 그 사람만 듣는 건 조금 억울한 것 같아.
그러니깐, 나한테도 들려줘야 된다. 알았지?
약속해. 네가 만든 음악은 나한테 제일 먼저 들려주겠다고. 사랑보다 우정. 오케이?
어, 야 웃지 말고. 나 진지한데?
웃으면서 내가 만든 음악을 들어주는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웃어주는 것이 다였을 뿐이었다. 사실은 입을 열어 아무 말이라도 지껄이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민석아.
네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나는 너에게 제일 먼저 내가 만든 음악을 들려 줄 생각이야.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지만,
있잖아, 민석아. 너는 말이야.....
사실은 네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러나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나는 이제 너를 떠올리지 않으면 그 어떤 음악도 만들 수가 없어.
그러니깐, 이 모든 말을 생각 없이 지껄였다가는 네가 도망가 버릴게 분명하니깐. 나는 오늘도 입을 다물고 웃을 뿐이다.
03.
누가 그랬더라. 우연이 세 번이면 필연이라고. 이것이 그냥 사람을 꾀기 위해 만들어 내는 감언이설이라도 상관없었다. 경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사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10년 동안 저를 괴롭히던 인물과의 만남치고는 담백했었다. 물론 자신의 옆에는 아내가 있었고, 민석의 옆에도 부인이 있었으니 그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쳤지만 간단한 눈인사만 하고 지나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 또한 흐지부지 지나갔던 것 같았다. 아, 그때는 말을 주고받았었던가. 사실 경수는 처음도, 두 번째도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다. 민석이 다시 제 눈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김민석이 나타났다. 그것도 둘 모두의 옆에 그 누구도 없을 때.
남자는 서른이 넘으면 오히려 어려지게 된다고, 애가 된다고 했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도경수는 극도로 혐오했지만 오늘부터는 그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경수는 주위 사람의 눈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민석의 손을 잡아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멋드러지게 세웟던 머리가 흐트러지고, 아내가 아침에 손수 매어 준 넥타이가 보기 안 좋게 휘날렸지만, 그리고 제게 손이 잡힌 민석이 여전한 그 목소리로 제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그것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경수에게는 사람이 없는 곳,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비상구 계단의 문이 보이자마자 경수는 그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갔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두컴컴한 비상구로 들어가자마자 민석을 문에다가 밀쳐 버린 뒤 무작정 입을 맞추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생각 없는 지도 알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도경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경수는 지금 당장, 김민석의 입술에 키스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내가 떠올랐다. 오늘 아침, 임신이라고 수줍게 웃던 아내가. 임신이라고 수줍게 말하던, 처음으로 사랑스럽게 보이던 아내가 떠올랐다. 밀어낼 것만 같았던 김민석이 조심스럽게 제 목에 팔을 둘렀다.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아내가 수줍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경수씨, 나 임신이래요. 잠시 입술을 뗐을 때 민석이 제게 속삭였다. 경수야. 도, 경수. 그 작은 입술로 제 이름을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워 동그란 뒷통수를 잡고 다시 한 번 더 입을 맞췄던 것 같다. 경수씨, 나 임신이래요. 여기, 우리 아이가 있어요. 그녀는 작은 손으로 제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깐, 아내가.
아침에 무엇이라고 말을 했더라.
백현은 인어주제에 추위를 제법 많이 타는 편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 온 몸뚱아리는 물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변화했지만 그 대가로 백현은 추위를 굉장히 잘 타는 체질이 되어 버렸다. 물론 물 속에 들어가면 언제 추웠냐는듯 다시 몸의 체온이 돌아오지만 백현은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인어인 백현이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물에는 경수가 따라 올 수 없으니깐. 물에 들어가 있는 것보다는 따뜻한 경수의 집에서, 경수의 침대 위에서, 호랑이 가죽과 털로 만든 푹신한 요로 몸을 감싸 안고 경수의 품 안에서 여유롭게 낮잠을 자는, 그런 평범하고 나른한 일상이 더 좋았기에 백현은 물로 돌아가지 않았다.
" 디오. "
" 응. 백현아, 필요한거 있어? "
" 나 졸려....자도, 되지? "
" 그럼. 목은 마르지 않고? "
" 으응.... 그냥, 일어났을 때 디오가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 "
경수의 목에 얼굴을 묻고 뭐라 웅얼거리더니 백현은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오래 살아 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백현은 모든 일에 무감각하고 항상 무기력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것이 저를 만나고부터는 조금씩 변하여 이제는 조금은 생기 있는 표정을 짓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고 말아 경수는 항상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라고, 그런 백현도 잠에 들기 전에는 평소와 달랐다. 아이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비몽사몽 눈도 제대로 뜨지 못 하고 칭얼거리는 것이 다섯 살 난 아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이런 무방비한 모습을 오세훈도 봤을거란 생각에 얼마나 유치하게 질투를 했던가. 어쩔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훼방을 놓은 것은 누가 봐도 저였으니 말이다.
1.
" 풀어줘. "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예전에는 이런 추위 쯤이야 거뜬하게 이겨냈는데 이제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조금만 날씨가 변해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만다. 물론 이런 말을 백현에게 한다면 어린놈이 못 하는 소리가 없다며 혀를 찰 것이다.
" 세훈아. 풀어줘. "
백현은 오랜 세월을 살아 왔다. 인어는 정해진 목숨이 없기 때문에 본인이 원한다면 영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사는 것이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죽고싶지는 않았던 백현은 그냥 그렇게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세훈이 만난 백현은 그런 이였다. 살아가는 것에 욕심이 없는 이. 그리고 오세훈은 그런 백현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사람,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인어가 무기력하게 늘어져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닌 그저 '보내고' 있다는 것은 꽤 보기 좋은 예술이었다. 세훈은 탐미주의자 였다. 그래서 백현을 사랑했다.
" 세니....세니야아..... 이거 안 풀어줄거야...? "
그렇지만 저렇게 애원하는 백현은 사랑스럽긴 커녕 밉기만 하다.
" 풀어주면 도망갈 거 잖아. "
" 안갈게. 네 옆에 있을테니깐 풀어줘. 응? "
" 싫어. "
" 제에바알... 세니. 응? "
" .....디오에게 갈 거잖아. 싫어. "
디오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백현은 풀어달라는 칭얼거림을 멈추었다. 그는 정곡을 찔리거나 누가 제 속마음을 읽으면 그걸 숨기질 못 한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세훈은 그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그저 밉기만 하다.
거짓말로 백현을 불러낸 뒤 그를 제 저택에 가두었다. 발목에는 그의 힘을 봉인하는 수갑을 채웠다. 그런 뒤엔 싫다는 백현을 억지로 가졌던 것 같다. 처음에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저를 거부하는 백현이 괘씸해 더 험하게 다루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후회하기에 늦을만큼 일이 진행되어 버렸지만 그런 세훈의 속마음을 알아차린건지 백현은 그 모든걸 용서했다.
사실 세훈도 알고 있었다. 입버릇처럼 풀어달라고 하지만 진심으로 그러는 말이 아니며, 풀어 줘도 디오에게 가지 않을 거라는 걸. 디오를 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을 버리지 못 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세훈이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세훈은 부모님을 잃었다. 사실 세훈은 영국의 한적한 시골마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었다. 자상하신 부모님과 듬직한 형과 다정한 누나. 그리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던 마음씨 착한 마을 주민들. 그렇게 조용하게 살고 있는 그의 마을에 든 불청객은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들은 제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 것도 모자라 아무 죄도 없는 마을 사람들까지 말살했다. 세훈이 살고 있던 조용하고, 아름답던 작은 마을은 피바다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차라리 그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죽었으면 행복했을 텐데,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어린 저를 잡아다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세훈은 그렇게 제 가족을 죽이고 제 아름다운 일상을 부셔버린 것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었다 본능적으로 피를 원하는 제가 너무 혐오스러웠으나 그것도 백년이 지나고, 이백년이 지나니 아무렇지 않아졌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할만큼, 이 저주받은 운명을 그냥 납득할만큼 성장을 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 세훈아, 나는 항상 네 옆에 있어. 어디 가지 않아. "
" 거짓말.... "
" 나 요즘 우리 세니한테 엄청나게 미움 받고 있구나.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믿던 우리 아가가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
" 형 안 믿어. 차라리 디오새끼를 믿을 거야. "
" 진짜로? 디오 믿을거야? "
제 말에 놀란 척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백현이 사랑스러웠다. 연기인거 다 티난다고 이런 짓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도 이렇게 귀엽게 연기를 하는 백현 좋아서, 세훈은 백현을 끌어 안고 그 품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백현의 몸에서 희미하게 나던 늑대냄새가 이제는 온전하게 사라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어 유려하게 뻗은 목선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니 간지럽다며 웃는 모습이 좋아 저도 웃어버리고 말았다.
세훈은 백현을 사랑한다. 그런데 사실 이 감정이 어떤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백현이 저에게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2.
1.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더 옥죄여 오고 있었다. 이렇게 상처받는 일 하루이틀도 아닌데 이 놈의 마음은 익숙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군다. 그치만 오늘은 정말.
2.
" 나도 당신처럼 만들어줘. "
또 시작이다. 찬열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하며 팩에 들어있는 피를 남김 없이 빨아먹었다. 그리고 오세훈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을 번복했다. 나도 뱀파이어로 만들어 줘요. 처음에야 귀여웠지 계속 반복되니 이것도 고문이 따로 없었다. 텅텅 비어버린 팩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 안된다고 했지. "
" 왜. 어째서. 뭐가 두려워서 나를 계속 사람으로 두는건데요? "
" 네 원망 듣기 싫어서 그런다. 그리고 야, 피만 보면 기절하는 놈이 뭔 뱀파이어야. "
" 아 그땐 사정이 있었다니깐! "
" 사정이고 나발이고 세훈 어린이, 이제 집에 슬슬 가시죠? 열두시가 다 되어 갑니다만? "
벽시계를 가리키며 찬열이 귀찮으니 얼른 꺼지라는 뉘앙스로 중얼거리자 세훈은 상처 받았다는 포즈를 취하며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이래서 어린애는 싫었다. 당장 한두살 어린 놈도(여기서 찬열이 말하는 한 두살은 인간의 시간개념으로 치면 100년이다.) 어린 티가 나서 징글 맞은데 저와 세훈의 나이차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났다. 인류의 역사를 시작부터 보고 살아 온 찬열과 이제 겨우 18년을 살아 온 오세훈. 솔직히 말하자면 찬열은 그런 세훈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찬열은 세훈을 자신처럼 만들 생각이 없다. 긴 세월을 살아 온 찬열은 시간 앞에선 모든 것이 무력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훈의 이런 감정도, 그리고 찬열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덩 또한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는 것을 이미 앞선 사랑으로 인해서 뼈저리게 깨달았다. 연인의 그런 달콤한 말에 속아 그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준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후회 했으며, 사람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고 그렇게 만든 찬열을 저주했다. 그리고 그런 괴물같은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 하고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찬열은 연인들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오세훈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 앞에서 사그라들 사랑이라는 감정이지만 찬열은 정말로 진지하게, 그리고 제법 낯간지러운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깐 세훈이 제 수명대로 살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나이가 들어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으면 좋을 것 같다.
" 세훈아. "
" 뭐. "
" 넌 나이가 들어도 잘 생겼을 거야. "
" ......무슨 뜻인데 그거? "
" 그러니깐 제 명대로 살다가 죽어야 된다. 알았지? "
" 이,이....야!!!! "
" 백발의 오세훈이라....상상만 해도 너무 섹시해서 가버릴 것 같은데. 몇십년을 기다려야 하는거야 대체. "
그 말에 화가 난 듯 오세훈이 누워 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씩씩거리며 찬열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찬열은 제가 했던 말이 뭐가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세훈을 바라보았다. 방금 내뱉은 말들과 표정은 정말로 진심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 너 그럼 시발, 내가 너 말고 딴 년 만나서 결혼하고 애를 낳아도 괜찮다 이거지? "
" 어.....그건 아니지. 근데 너 닮은 아들이면 괜찮을 것 같다. 오세훈 피가 반쯤 섞였으니 예뻐할 순 있을 거야. 나 네 피냄새 좋아하잖아? "
연애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리고 변백희는 지금 손해보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귀여운 얼굴과 활발한 성격, 본인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타인에게 사랑스럽게 보이는 행동들로 인해 인기가 많았던 변백희는 제법 인기가 있었고 고백도 많이 받는 편이었다. 당연히 연애도 많이 해봤지만 저를 좋아하는 남자들과의 연애에서 백희가 손해보는 일따위는 없었다. 항상 모든 연애가 공평과 거리가 멀었다. 남자들은 열정적으로 좋아함을 과시했지만 백희는 그러지 않았다. 제 남자친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들만큼 열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연애는 더 좋아하는 남자들이 지쳐서 끝이 났고, 백희는 그런 헤어짐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모든 연애가 이런식으로 진행이 되었고 그럴거면 뭐하러 고백을 받아주냐는 원망도 들었지만 백희는 그런 관계가 좋았다. 더 많이 좋아해서 항상 져주는 일이, 너무너무 싫었다. 백희는 상대가 자신을 더 사랑해주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변백희는 앞으로도 제가 좋아해서 먼저 고백을 하는 일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다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백희는 고백을 했다. 누구한테? OT때 봤던 같은 과의 학생회장 김민석 선배에게. 고백했던 날은 짝사랑이 주는 열기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던 초여름의 종강날이었고, 거절당할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민석은 백희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평소 자신을 대하는 행동으로 볼 때 자신은 그저 친한 여자 후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석의 대답에 놀란 백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으며, 민석은 그런 백희를 달래주었고 둘의 연애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다 좋았다. 좋아하던 선배랑 연애를 한다는 그 사실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민석은 말수가 적었고 필요한 말만 하는 성격이어서 두사람이 만나면 항상 백희가 대화를 주도했지만 그래도 제 말을 잘들어주는 민석이 좋았다. 부끄러워서, 혹시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손도 못잡고 민석의 소매자락을 잡고 뒤따라가면 먼저 손을 잡아주는 민석이 좋았다. 반년의 짝사랑은 그저 김민석이 변백희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 너ㅡ진짜 제대로 된 연애하는거 맞아? '
불안감은 저와 처음으로 연애를 했던 남자이자 오랜 친구인 찬열의 한 말에서 시작됐다.
' 아니, 상식적으로 연애라는 건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좋아해요.'를 보냈는데 '그래'란 답이 맞다고 생각해? 적어도 '나도'라는 대답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
' 선배가 자기는 그런 표현에 서툴다고 했단 말이야...그래서, 이해..해달라고 했어... '
' 변백희 이거, 연애 고순 줄 알았더니 그냥 바보네. 아무리 그런 표현에 서툴다고 해도 정도라는게 있지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런 말 한마디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사랑해는 고사하고 좋아한다는 말조차 듣기 힘들다는 거, 누가 들어도 아니라고 말릴거야. '
' ..... '
' 내가 네 친구이기도 하지만, 너랑 사귀었던 사람이라서 더 말리는 거야. 그 남자는 아니다. 사랑받아야 할 애가 왜 주는만큼 받지도 못하고 연애해. '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자기가 더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민석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변백희는 참았었다. 거절하지 않고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라고, 먼저 손잡아주고, 저와 만나주고, 먼저 손잡아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라고. 하지만 찬열의 말을 들으니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겨두었던 불안감과 서운함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왜 먼저 전화 안해줘요? 왜 카톡이나 문자는 단답이에요? 왜 먼저 만나자는 말도 해주지 않아요? 왜, 왜 선배는 내게 좋아한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아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백희는 정말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쉴새없이 흘러내렸고, 찬열은 그런 백희를 안아주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런 민석의 태도가 아니었다. 백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민석이 좋았고, 헤어지고 싶지않았다. 이런 상태여도 좋고, 좋아한다는 말을 듣지않아도 좋으니 김민석에게 버림받지만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다.
초여름에 끝난 줄 알았던 짝사랑의 열기는, 자신이 짝사랑하던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뜨겁게 타올라 열대야의 열병으로 자라있었다.
전체적으로 다 짧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