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블루스따즈
안즈른 단문
박로제
2016. 10. 28. 17:41
안즈. 일어나.
무리다. 안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는 무리라고 한소리해주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는 안즈에게는 지금 말을 하는 것도 무리였다. 분명히 듣기 싫게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것밖에 못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왜 당신은 아직까지 멀쩡한건데. 괜히 짜증이 나서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떠서 눈 앞의 남자를 노려봤지만 소용없었다. 레이는 일어나라는 말만 다시 할 뿐이었다.
이곳으로 올 때부터 레이는 좀 이상했다. 지금와서는 소용없는 말이지만 사쿠마 레이는 배려를 할 줄 알았다. 손목을 잡고 끌고가거나, 하지말라는데 억지로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남의 말을 그렇게 잘 듣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안즈가 하지 말라는 것은 들었다. 무엇보다도 주위에 사람이 없어도 선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폐쇄된 공간에서 둘만 남지 않는 이상 레이가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아직 파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안즈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자신을 잡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는 했지만 안즈는 알았다. 눈이 전혀 웃고있지않았다. 안즈가 아프다고 손을 놓아달라했지만 그것도 듣지 않았다. 한번도 강압적으로 자신을 대한 적이 없던 사쿠마 레이가 안즈에게 명령했다. 조용히 해. 평소와 다른 어조였고 이게 본 성격인가 싶어 안즈는 조금 소름이 돋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스위트룸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앞에서였다. 최상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이쪽으로 내려오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고, 레이는 그 순간도 참지 못했는지 안즈를 제 품으로 끌어 당기더니 목 뒷 쪽의 리본을 풀었다. 레이씨? 놀란 안즈가 다급하게 레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잠깐만요, 여기 카메라, 말도 안된다며 밀어냈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손목이 잡혔고 몸이 들려서 그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평소라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사쿠마 레이는 난폭하게 굴고 있었다. 이대로는 누가 올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장소에는 이즈미가 있었다. 이런 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것따위 관심없다는 듯 레이는 입을 맞췄다.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 키스하면서 피를 본 것은 처음이었고, 정신없는 입맞춤에 넋을 놓은 틈에 치마가 들리고 레이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왔다. 때마침 운좋게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마자 레이는 그 안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물론 그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입고 있던 드레스는 반쯤 벗겨졌고 중간에 멈춰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볼까봐 안즈는 소리를 내지도,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방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고, 문 앞에서 침대로 걸어가면서 안즈가 입고있던 것은 레이의 손에 벗겨졌다. 신발, 하고있던 목걸이, 머리장식, 속옷, 마지막으로 입고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드레스까지 바닥에 집어던진 뒤 레이는 안즈를 침대 위에 던져졌다.
"안즈."
레이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응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얼마나 울었고 얼마나 애원했는지 이젠 기억도 안난다. 안즈는 자고 싶었다. 이 남자가 뭣 때문에 화가 나서 저에게 이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게 한 시간 전인지, 아니면 방금 전인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쏟아지는 자극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안즈는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레이를 밀어내고 침대 머리맡으로 도망을 갔었다. 어차피 벗어나봤자 침대 위이고 이 방안에서는 도망갈 곳도 없어서 금세 잡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대로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서 조금이라도 레이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있던 레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도망가는 안즈의 발목을 잡았고, 다시 제쪽으로 잡아당겼다. 어딜 도망가. 평소와 다른 어조가 그때만큼 무서운 적이 없었다. 안즈가 울면서 무섭다고, 그만하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입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왔다. 입술과 목 안쪽이 말라가서 반가웠지만 입술 사이로 들어오는 혀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대로 혀를 깨물어버릴까 싶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물때문일까,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맞닿은 두 입술이 떨어지고, 안즈는 눈을 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힘든건 난데 왜 당신이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절망과 분노,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안즈는 왜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따지고 싶었지만 이제 한계였다. 감겨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잠들기 전에 레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은 결국 듣지 못했다.
***
건방진 애송이 새끼. 조심스레 뒷처리를 하고 샤워까지 마친 레이가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잠들어 있는 안즈를 보며 한 생각이었다. 오늘 그런 의도로 가지고 이 방을 예약한 것은 맞지만 이럴 생각은 없었다. 레이는 안즈에게 끝까지 상냥한 남자이고 싶었고, 이렇게 난폭하게 굴 생각도 없었다. 모든 계획은 파티장에서 만난 그 남자때문에 망해버렸다. 그녀가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헤어졌던 연인, 서로가 서로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고, 그 남자는 안즈에게 기다리겠단 말까지 했다.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안즈가 그 남자의 말에 돌아가겠다는 답만 하지 않았어도, 레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못들은 척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안즈는 그 남자의 손을 잡고, 약속을 했다. 돌아가겠다고, 이 일이 끝나면 사쿠마 레이와 헤어지고 다시 세나 이즈미에게 돌아가겠다고.
자신을 버리고 돌아가겠다는 말까지 들은 이상 더는 상냥해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 남자가, 세나 이즈미가 두 사람을 따라왔기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다. 분명히 안즈는 제 옆에 있었고, 일이 끝나기 전까진 사쿠마 레이의 연인이며, 이대로 방으로 올라가면 저 남자의 품이 아니라 레이의 품에 안길텐데 그와 눈이 마주친 이즈미는 웃고 있었다.
당신이 그래봤자 그녀석은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거야.
자신만만한 얼굴에는 그렇게 쓰여있었다. 그래서 안즈가 입고 있던 드레스의 리본을 풀었다. 안즈에게 키스하면서도, 싫다는 그녀를 힘으로 제압하고 억지로 다리를 벌리게 할 때도 레이는 이즈미를 쳐다봤고, 이즈미 또한 미소를 지우고 살기 가득한 얼굴로 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이번엔 레이가 웃으면서 이즈미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주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이즈미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들고있던 것을 바닥에 던지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이 싸움은 사쿠마 레이의 승리였으니까. 물론 승리의 기분을 느낀 것도 잠시뿐이었다. 어쨌든 안즈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이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사쿠마 레이다. 그는 안즈가 어떤 의도로 자신에게 접근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재미를 위해 모르는 척 연기까지 하며 안즈와 친해졌고, 그녀와 연애까지 하게 되었다. 안즈가, 레이를 정말로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 속고 속이면서 아슬아슬하게 관계를 이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안즈가 레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레이 또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변했다. 다가오던 안즈는 이래선 안된다고 생각했고, 레이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선을 긋던 사쿠마 레이는 이제 그녀가 정말로 가지고 싶어졌고, 그래서 도망가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감히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안즈를, 레이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도망가지마."
진심이었다. 레이는 그녀가 어떤 사람이어도 좋았다. 옆에만 있어준다면, 도망가지않고 계속 이대로 옆에 있어준다면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가면을 벗게 부추긴 건 안즈였다. 네가 나쁜 거다. 목적을 가지고 다가온 것도 너고, 그런 주제에 먼저 사랑에 빠진 것도 너다. 그런데 이제와서 도망가겠다고? 다시 그 남자에게 돌아가겠다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것이지만 상상만해고 기분이 나빴다. 자고 있는 안즈를 다시 깨우고 싶을만큼. 레이도 자신이 심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사과할 생각은 없다. 안즈가, 나빴으니까.
내일까지 여기에 안즈와 있을 생각이다. 유치하고 어린애같다는 거, 스스로가 제일 잘알고 있지만 안즈가 관련되면 정상적으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자신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레이는 안즈에게 이 기회에 제대로 알려줄 생각이다. 네가 건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미쳐있는지.
날 이해해줬잖아. 넌 내 사람이잖아. 넌 나만의 사람인데, 어째서 내가 아닌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니? 널 처음 본 사람도, 네가 이 학원에서 처음 본 사람도 그 남자가 아니라 나인데. 어째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니.
참고 참아왔던 감정이 드디어 폭발했다. 안즈를 붙잡고 모든 것을 쏟아 낸 에이치는 울고 있었다. 울음소리에 놀란 안즈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를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서럽게 울고 있는 에이치를 바라보았다. 천사같던 그 얼굴이, 가면을 쓴 것처럼 항상 웃고있던 그 얼굴이 눈물로 젖어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 학원에서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안즈는 이렇게 처절하게 무너진 텐쇼인 에이치는 본 적이 없었다. 에이치씨. 안즈가 다급한 목소리로 에이치를 불렀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분해."
그리고 증오해. 그 남자를. 안즈를 끌어안고 서럽게 울던 에이치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로 귓가에 울려퍼지는 에이치의 목소리와 말의 내용들은 무서웠지만, 안즈는 그것들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재능, 환경... 모든 걸 가진 그 남자가 부럽지 않은 건 안즈쨩, 너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너마저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거니?"
"....저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어요."
"아니."
너는 나를 버린거나 마찬가지야. 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안즈를 바라보며, 에이치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웃었다. 안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당신과 나의 사이는 그렇게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과 그러므로 자신은 처음부터 에이치를 가진 적도 없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의 에이치가 그 말을 들었다간,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텐쇼인 에이치는 위태로웠고, 안즈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망가져있었다.
하지만 안즈는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에이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고 많은 것을 알려 준 사람이지만 그게 사랑이 되지는 않았다. 아마 이 마음이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더는 에이치가 자신에게 기대를 하지 않게 안즈는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해야했다. 에이치씨. 안즈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더는 말할 수가 없었다. 차가운 입술이 부딪혀왔고, 안즈가 하려던 말은 그 난폭한 입맞춤에 삼켜졌다.
입고있던 가디건이 벗겨졌고, 밀어내던 손은 에이치에게 붙잡혔다. 지금은 방과 후이며, 모든 학생이 연습을 마치고 돌아갔을 시간이다. 그리고 그 사람, 사쿠마 레이는 지금 이 학교에 없다.
"그 남자가 돌아와서 너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응?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친구들을 구하고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 망가져있다면, 소중한 사람이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어떤 얼굴을 할까. 괜찮아. 겁먹지마렴. 나는 널 해치고 싶은 게 아니야.
에이치는 제 품 안에서 떨고 있는 안즈를 상냥한 목소리로 달래주며 교복의 리본을 풀었다. 제가 남기려는 것은 단순한 흔적이다. 에이치가 원하는 건 그 흔적으로 인해서 학생들에게 퍼질 소문이고, 소문으로 인하여 일어날 끔찍한 오해들이다.
오해. 그것만 있다면 충분했다.
***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텐쇼인 에이치와 아이돌과에 전학 온, 유일한 여학생인 안즈가 사귄다는 게 이상한 소문의 내용이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가는 걸 봤다던데? 나는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그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있는 걸 봤어. 하긴 전학왔을 때부터 그렇게 붙어다녔는데 당연하지 않겠어? 난 그녀의 목에 남겨진 흔적도 봤는 걸. 텐쇼인이 못본 척 해달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
레이가 오랜만에 귀국해서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도 이것이었다. 안즈가 에이치랑 사귄다고? 말도 되지않는 헛소문이다. 사쿠마 레이의 안즈가, 자신을 두고 다른 남자와 그럴리가 없었다. 자주 옆에 있어주지 못했지만 안즈는 괜찮다고 했다. 레이가 그런 사람이라서 안즈는 그가 좋다고 했었다. 공항에서 자신의 손을 잡고 무사히 다녀오라며, 인사해주던 안즈가 그 짧은 시간 안에 마음이 바뀌었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텐쇼인 에이치가 어떤 사람인지 레이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 속이 새까만 녀석의 계획이라고 레이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안즈가 레이를 만나러 오지 않자 아무리 믿고 있다고 해도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돌아온 날, 그 헛소문에 어이가 없어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반으로 찾아갔더니 같은 반 학생으로부터 에이치와 함께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방과 후에 찾아가보자, 그렇게 자신을 달랜 뒤 수업이 끝난 뒤 다시 찾아갔더니 에이치와 함께 돌아갔다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며칠 동안 계속 되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집 앞으로 찾아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고, 텐쇼인 에이치가 두 사람의 사이를 막는 거라고, 안즈를 협박했을 거라고 레이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거짓말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소문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레이가 해외로 나간 사이에 안즈가 정말로 에이치를 만나기 시작했다면? 차마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해서 자신의 옆에 있는 거라면? 정말로 레이에게 질린 거라면?
사쿠마 레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안즈가 그를 사랑한다고, 자신 외의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리가 없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레이의 그녀는, 사쿠마 레이의 안즈는 그런 불안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의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레이는 안즈의 소식을 소문으로 밖에 접할 수 없었다. 그녀가 텐쇼인 에이치와 무엇을 했다는, 그런 불쾌한 내용의 소문만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소식이었다.
오늘 늦는다는 연락을 받고 안즈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웬만하면 일찍 들어오는 레이가 늦는다고 연락을 할 정도면 기다리지 않고 자는게 낫다는 걸 안즈는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거실 쇼파에 앉아 레이를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고 씻고 잘 준비를 마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안즈도 쉬는 날이어서 좀 더 깨있고 싶었지만 며칠 동안 쉴 틈 없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럴 의욕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자고 아침이 되서 일어나면 침대 옆에는 레이가 누워있을 것이다.
피곤해.
안즈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몸이 무거웠다. 움직이고 싶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가위라도 눌린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숨막혀. 괴로워... 이대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 참지 못하고 눈을 떴더니 눈 앞에는 레이가 있었다.
드디어 깼구먼.
레이씨...?
안즈의 위에 올라타있던 레이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아직 상황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안즈의 입술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부딪히고, 거기에 놀라 입을 벌리니 그 안으로는 혀가 들어왔다.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키스에서는 지독한 술맛이 났다.
몇달에 한번씩 이렇게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레이는 술이 약한 편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편이었고, 술자리에서도 다른 사람이 취해 쓰러질 때 혼자 멀쩡히 깨있어서 뒷정리를 하는 타입이었지만 가끔 이렇게 술에 떡이 되서 집에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열에 아홉은 자고 있는 안즈를 깨워서 놀아달라며 그녀를 괴롭혔다.
술냄새나요.
그런 레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술냄새가 난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피곤하다, 나는 잘 거다. 같은 여러가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은 뽀뽀하지 못한 죽은 귀신이라도 씌였는지 이마, 콧등, 볼, 입술, 목, 가슴의 순서대로 쉴새없이 뽀뽀하며 안즈의 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레이는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며 안즈가 입고있던 잠옷단추를 풀었다.
안즈도 직업상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고, 이렇게 술에 젖어서 정신도 못차리는 정도로 취한 상대와 무얼하는 취미는 더욱더 없었다. 거기다가 요 며칠 계속 야근을 했던 안즈는 그냥 이대로 눈을 감고 자고 싶을만큼 피곤하고 졸렸지만 애초에 이건 안즈에겐 선택권도 없는 문제였다.
자지말고 나랑 놀아줘.
얼굴로도 반칙인데 귓가에 그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도 반칙이라구요. 결국 거기에 넘어가버린 안즈는 어쩔 수 없이 레이가 하자는 대로 이끌려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