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블루스따즈
#1일_1레이안즈
박로제
2017. 3. 1. 21:07
작년 말부터 시작했던 하루에 한번씩 레이안즈 쓰기인데 3월 1일인 지금까지 10개도 못썼다니 해시태그 이름이 아깝다...
안즈쨩. 행복하니?
아라시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오늘까지 참아왔던 것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너는 정말 행복해? 안즈는 고개를 돌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자매같았던, 제 소중한 친구를 바라보았다. 안즈는 아라시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고있다. 자수정같은 보라색 눈동자에는 안즈를 향한 애정과 걱정이 담겨있었다. 아, 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안즈는 아라시 덕분에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안즈는 행복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긴 매우 길었고, 그 시간이 항상 행복했던건 아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많이 힘들었지만 안즈는 지금 자신이 행복하면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안즈는 제게 힘이 되어주었던, 누구보다 자신의 행복을 빌어줬던 소중한 친구에게 이 기분을 말해줘야만 했다.
응. 나는 행복해 언니.
안즈쨩.
너무 행복해서 이게 꿈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마주잡은 두 손을 통해 전달되는 온기에 아라시는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즈쨩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걸? 아라시의 말에 안즈는 수줍게 웃었다. 그 옛날보다 더 반짝거리며 빛나는 안즈는, 아라시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던 여동생은, 지금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신부보다 아름다웠다.
결혼 축하해 안즈쨩.
언니가 축하해줘서 나도 너무 기뻐.
**
"저기, 형님. 이혼은 언제할거야?"
"잠깐, 쿠마군! 지금 이거 생방송이거든?!"
"으, 으헝, 으어엉...누, 누님이...누니이임...."
"카사군도 그만 눈물 그쳐! 언제까지 울 셈이야?!"
"와하하! 인터뷰가 아주 엉망진창이로군!"
"아아 이 멍청한 왕같으니라고! 보고만 있지말고 카사군이라도 달래보라고!"
"어머 이즈미쨩. 아침부터 기운이 넘치네~?"
"나루군도 구경만 하지말고 좀 말려!!!"
신부 대기실에서 나온 아라시는 인터뷰를 위해 다른 멤버들을 찾는 중이었다. 신부대기실과 인터뷰를 하는 입구 쪽은 거리가 멀었지만 아라시는 쉽게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화내는 이즈미쨩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역시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나이츠의 멤버들이 모여 있었고, 생방송으로 나가는 인터뷰는 아주 엉망진창이 되었다. 물론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었다. 리츠는 소중히 생각했던 그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형에게 보내야하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고, 츠카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안즈를 동경하고 좋아했으니 어찌보면 이렇게 우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이츠의 왕인 레오도 마찬가지다. 특별하게 생각했던, 좋아했던 후배의 결혼식이니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인터뷰가 괜찮다는 건 아니었다.
"아니. 나는 안즈가 이혼을 해도 좋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깐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지말라고!"
"누,누님...누님이...누님이 결혼..."
인터뷰를 하러 온 리포터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이었고, 이즈미가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걸 말없이 웃으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아라시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안즈쨩이 지금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아라시의 입에서 나온 안즈라는 말에 울던 츠카사도, 쉴새없이 신랑에 대해서 험담을 하던 리츠도, 그리고 웃으며 방관하던 레오도 입을 다물었다.
"안즈쨩은 오늘 제일 행복해야하는 신부님인데 말이야. 이혼이니, 결혼하지 말라느니...그런 말을 들으면 안즈쨩은 슬퍼할텐데. 이런 날에 안즈쨩을 울릴 셈이니?"
응? 그건 기사가 해선 안되는 일이잖아? 방긋 웃으며 내뱉은 아라시의 말보다는 말과 동시에 들어올린 주먹의 힘이 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만 세 사람은 멀쩡한 얼굴로 인터뷰를 마쳤고 그 다음은 세 사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쓴 이즈미와 주먹 하나로 입을 다물게 한 아라시의 차례였다. 리포터는 그래도 이 두 사람이라면 평범하게 인터뷰 끝낼 수 있겠지,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안즈. 내가 너 연애상담해주면서 그렇게 헤어지라고 했는데 기어이 결혼까지 하는구나. 오빠가 충고하는데, 그 남자는 아니야."
마이크를 잡은 이즈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즈쨩. 언니는 항상 네 편이란다. 혹시 그 남자랑 싸우거나 널 서운하게 만드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야해?"
아라시는 반지를 끼고있는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아, 저 집에 가고 싶어요. 리포터는 초췌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을 그만 좋아하고 싶어요. 안즈는 레이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았다.
왜지?
레이는 웃으면서 그렇게 물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사쿠마 레이는 항상 모른다는 얼굴로 안즈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런 점이 너무 싫었고, 너무 비참했지만 안즈는 그래도 이 남자의 옆에 있었다. 좋았으니까. 그럼에도 좋았으니까, 안즈는 이 남자의 옆에 있고 싶었다. 지금도 소녀는 이 남자를 사랑한다. 그만 좋아하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소녀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건, 투정이다. 투정이라고 붙이기엔 이 감정이, 이때까지 받은 상처가, 너무 처절했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안즈는 레이를 좋아하고 있다. 아니, 이 감정은 사랑이다. 착각은 아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지만 그걸 착각할만큼 안즈는 어리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느껴보는 사랑을, 숨길만큼 어른도 아니었다. 소녀의 감정을 레이는 금방 알아보았으나 그는 모른 척 했다. 차라리 냉정하게 쳐냈으면 금방 포기했을텐데, 레이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게 안즈를 계속 옆에 두었다. 자신이 특별하다는 착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잔인한 사람. 레이는 선을 그었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선을 넘어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안즈를 지치게 만들었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를 보고 있으면 안즈는 그 모든 것들이 괜찮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안즈는 레이에게 약했고, 쉽게 무너졌다.
"알면서 묻지말아요."
"아가씨. 나는 사람의 마음 속까지 알지는 못한다네."
"다, 알고 있잖아요."
내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마음으로 당신 옆에 있는지. 안즈는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렇게 힘을 줘서 잡아봤자, 손톱으로 그 손에 자국을 내봤자 레이가 받는 타격은 얼마 없을 것이다. 이 남자는 그랬다. 세상에 당신을 진심으로 상처입힐 수 있는 존재는 얼마나 될까. 그 사람이 내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안즈는 레이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처절함과 끔찍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리가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가씨."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안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레이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안즈는 울고 싶었다.
당신을 그만 좋아하고 싶어요. 안즈는 레이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왜지?
안즈는 그걸 모르냐는 얼굴로, 원망의 눈빛을 담아 레이를 바라보았지만 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안즈를 다정한 눈빛으로, 사랑스러운 후배를 바라보는 것처럼 가면을 썼다.
사쿠마 레이는 학원의 유일한 소녀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레이 선배.'
안즈는 잘 웃지 않았다.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아이였지만 평소에는 멍한 상태일 때가 많았다. 그런 안즈가 레이 앞에서는 잘 웃었다. 레이는 안즈의 감정과 생각을 읽기가 무척이나 쉬웠는데, 그건 사쿠마 레이가 다른 사람보다 관찰력이라던가, 그런 시덥잖은 것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안즈에게 사쿠마 레이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학원을 바꾼 여신, 유일한 프로듀서, 안즈는 이 학원에 존재하는 모든 학생의 특별한 존재였고 그건 레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특별한 존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안즈는 레이 앞에서만 많이 웃었고, 수줍어 했으며, 말이 많아졌다. 좋아하는 것에 관련된 일에는 말수가 많아진다는 걸 쌍둥이를 통해서 알게 된 레이는 그 날 오랜만에, 아주 큰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웃었다.
레이는 안즈를 좋아한다. 이 감정을 그저 좋아한다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굳이 그 표현을 써야 한다면 쓸 수 있는 감정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에게 있어 안즈는 매우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선배, 저를 좋아해요?'
용기내어 그렇게 물어 본 안즈에게 레이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아가씨도 이 늙은이의 사랑스러운 아이들 중 하나구먼.'
그 순간 안즈의 얼굴에 스쳐지나간 절망의 감정을, 레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사랑하고 있음에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더 원해주었으면 하는, 이기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레이는 안즈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안즈가 모두에게 사랑받길 원했다. 다만, 그녀가 처절하게 애정을 갈구하는 상대는 자신, 사쿠마 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집착이었지만 레이는 이런 자신이 싫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애정에, 일방적으로 갈구하는 애정에 지쳐서 자신을 떠나는 일따위는 아마 없을 것이다. 안즈가 레이를 좋아하는 걸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도 이미 수십번이지만 그 말은 지켜진 적이 없었다. 레이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안즈에게 관심을 끊었고, 버티지 못한 안즈는 다시 레이에게 돌아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한다고 울면서 매달리는 안즈를 보며, 레이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그러게 왜 '나'같은 남자를 좋아한 거냐.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레이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집안의 모든 시종들이 주인님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없다고 헐레벌떡 달려와 매달렸지만 아무도 레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런 물건을 주문하고 가져오는 것은 주인이 해야할 일이 아니었고, 그의 취향과 어린 마님의 취향까지 고려하여 최상의 물건을 찾아본 뒤 주문을 하겠다고 거듭 말하며 가만히 있어달라 부탁했지만 이쯤되면 포기하고 져줬을 레이도 그의 소중한 애첩의 문제가 되자 이것만큼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는지 제 의견을 고집했다. 주인을 이기는 시종이 없다고, 레이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시종들은 결국 졌다며 두손 두발을 들고 포기해버렸다. 그제야 레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따라가겠다는 모든 시종들을 물리치고, 겁도 없이 어딜 혼자 나가냐고 시끄럽게 짖어대는 강아지 한 마리도 진정시키고 나서야 레이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오늘 레이가 시종을 시키지 않고 직접 포목점에 가는 이유는 늘 그렇듯 안즈때문이었다. 새로운 이불을 사야 했고, 레이는 안즈에게 어울리는 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장마 때마다 입고 다니는 그 옷도 레이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고르고 골라서 사온 물건이었다. 안즈가 하고 다니는 그 모든 것들은 레이가 안즈를 생각하며 고른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찌된 게 영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평소라면 안즈에게 어울리는 물건이 바로 눈에 들어왔을텐데, 오늘따라 레이의 눈에 모자란 것들 밖에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은고. 겨우 시간을 비우고 나온 거라 다시 이렇게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무엇을 찾고 계신지요?"
"첩에게 줄 이불을 찾고 있는데...자네가 추천 좀 해주겠는가? 오늘따라 내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말이네."
"첩이라면 저번에 데려오신 그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 기억하고 있구먼."
이 포목점의 주인은 레이와도 잘 아는 사이로, 레이가 여러번 신세를 진 사람이었다. 그녀라면 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포목점의 주인은 그 고민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뒤 웃으며 좋은 물건이 있다고 답했다.
"첩에게 줄 이불이라면 검은 이불이 최고지요. 마침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자양화가 수놓아진 이불이 있답니다. 보시겠어요?"
"검은 이불이라...너무 어둡지 않겠는가?"
"어머. 제가 언제 나쁜 물건을 레이님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나요?"
후회하지 않을 실겁니다. 저를 믿으세요. 소매로 입을 가리며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주인이 보여 준 이불은 나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음에 차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말마따나 포목점의 주인이 그에게 보여준 것들을 사서 손해를 본 적은 없었다. 레이는 이것을 사겠다고 대답했고, 그녀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히려 저한테 감사하실거라구요?
포목점을 나서는 순간까지 그녀는 그렇게 말을 했고, 레이는 빨리 이 이불 위에 안즈를 눕히고 싶었다.
***
서방님이랑 절대 같이 목욕하지 않을 거에요. 매정한 애첩은 그렇게 말을 했고, 레이는 어쩔 수 없이 먼저 씻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즈를 기다리며, 그녀를 위해 사왔던 검은 비단 이불 위에 누워있으니 레이는 소박맞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서방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애첩은 너뿐일게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워있던 레이는 지루한듯 몸을 뒤척이며 빨리 안즈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 작은 몸을 얼른 품에 안고 예뻐해주고 싶었다.
"서방님."
이제 왔는가. 등 뒤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사랑스러운 애첩의 목소리가 들렸고, 레이는 재빠르게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문 앞에 서있던 안즈는 뜨거운 열기에 복숭아빛으로 물든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담고 사뿐사뿐, 그를 향해 걸어오다가 레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안즈야? 갑자기 걸음을 멈춘 안즈가 이상해 레이가 침상에서 일어나자 안즈는 새빨개진 얼굴을 제 두손으로 가리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만큼 새빨개진 귀가 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부끄러워 하는 안즈가 사랑스럽기는 했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 레이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고개를 못드는 안즈에게 다가갔다.
"이 늙은 서방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만,"
"으으..."
"우리 애첩은 왜 이리도 부끄러워 하는고."
"그건...서방님이...!"
그 작은 몸을 제 품에 안아 올리니 안즈는 레이의 목에 얼굴을 묻고 레이가 나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자신을 나쁘다고 말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으니 레이는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그 당황스러움은 얼마 가지 못했다. 계속 부끄러워 고개를 못들던 안즈가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로 레이의 얼굴을 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레이도 이유를 묻는 걸 포기했고, 두 사람은 그대로 검은 비단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안즈는 레이가 사온 이불이 마음에 들었다. 서방님의 머리색같아서, 이걸 덮고 있으면 서방님에게 안겨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그 선물을 받고 안즈가 처음으로 했던 말이었고, 레이는 주위에 시종들이 있는 걸 잊고 그대로 안즈의 턱을 잡아 올려 사랑스러운 말을 하는 애첩에게 입을 맞췄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주위에 있던 시종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며 황급히 그 자리에서 도망갔고, 안즈는 한참 뒤에야 레이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레이는 이게 안즈에게 잘 어울릴 거라는 포목점 주인의 말이 있어서 사왔다고 했다. 안즈는 왜 하필 검은 이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레이가 안즈를 위해서 사온 것들은 화사하고 밝은 색이 많았다. 주인이 추천해준 것들도 그런 색이 많았는데 왜 이번에는 검은 이불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방에 들어 온 안즈는 이불 위에 누워있는 레이를 보자마자 그녀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서방님은, 햇빛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피부가 새하얀 사람이었다. 안즈보다 더 하얗고 빛나는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 가끔은 그게 부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검은 비단 위에 누워있는 모습은...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답고, 흐트러진 유카타때문에 묘하게 색정적이라서, 그녀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그대로 받고있었으니, 안즈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레이에게 이 검은 이불을 추천해주는 포목점의 주인에게 마음속으로 감사하면서.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쿠마 레이는 자주 학교에 나타났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자주 만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남은 후배들이 걱정되어서 자주 보러 오는 건가 싶었지만 (왜냐하면 코가가 입으로는 없으니 속이 편하다고 했지만 내심 그리워 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레이는 학교에 오면 경음부에 가지도 않았고, 언데드의 후배들을 보러도 가지 않았다. 안즈의 얼굴을 보고 근황을 물은 뒤에 안즈와 짧게 대화를 하고 갈 뿐 이었다. 바쁘지 않냐고 물으면 이럴 시간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럴 시간에 연습을 더 해주세요. 안즈는 그렇게 말했고 레이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코가군이 레이선배를 기다리는 것 같던데..."
그렇게 말해봤자 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늙은이가 온전히 아가씨만을 위해서 만들어 낸 시간이라네. 다른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구먼. 레이는 그렇게 말했다. 레이에게 안즈와 코가는 똑같은 후배일텐데. 아니, 따지자면 중요한 건 코가일텐데 자신을 위해서만 시간을 내는 레이가 안즈는 이상했다.
"안즈 선배!"
가든 테라스에 레이와 마주보고 앉아서 시간을 버리고 있을 때 저멀리서 프로듀서과의 후배가 달려왔다. 그러고보니 오늘 방과 후에 물어볼 게 있다고 했지. 이쪽으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더니 안즈를 발견한 후배가 빠르게 뛰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뛰어오며 안즈의 앞에 앉아있던 레이를 발견한 후배는 그에게 인사를 했고, 레이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후배의 볼 일은 곧 있을 칠석제에 대한 일이었다. 가져 온 기획서를 재빠르게 읽은 안즈는 펜을 들어 후배들이 준비한 기획서를 수정 해주었다. 수정한 부분에 대한 설명이나 대안방법에 대한 것도 잊지 않았고, 나머지는 학생회와 맞춰가는게 좋겠다는 말도 잊지않고 해주었다. 그 모습을 레이는 흐뭇하게 웃으며 지켜보았고, 후배는 감사하다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선배.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될까요?"
"어떤 거?"
"그...혹시 두 분, 사귀는 사이...인가 해서요."
뭐? 아니, 안즈선배 만나러 자주 오시고. 두 분이서만 함께 시간을 보내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사귀는 사이가 아닌가 해서요. 프로듀서과에도 그렇게 소문이 났는 걸요? 후배는 뒷머리를 멋쩍게 긁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요즘 후배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이상하더니. 안즈는 보기 드물게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쥐어뜯을 뻔 했다.
"아니...그럴리가 없잖아. 레이선배랑 내가 사귀는 사이라니."
"그런가요?"
"그럼.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 걸."
후배는 갑자기 이런 질문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이만 가보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내일부터 후배들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네. 한숨을 쉬며 안즈는 잊고있던 레이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오해를 받았으니 어지간히도 충격받았을 것이다. 레이선배. 불렀으나 답이 없었다.
"...레이 선배?"
레이는 답지 않게 충격 받은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사쿠마 레이는 정말 오랜만에 당황스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안즈의 후배로 보이는 남자가 두 사람이 사귀냐고 물어봤을 때, 레이는 안즈가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안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의 대답이었고, 아예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아까 전에 그렇게 키스했던건 꿈인가? 레이는 인사를 대신해서 안즈에게 키스했고, 그녀는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럼 대체 뭐란 말인가. 사귀지도 않는 남자의 키스를 받아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레이 혼자 안즈와 사귀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안다면 놀리다 못해 비웃을 정도로 황당한 일이었다.
"...아가씨."
"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안즈에게, 레이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레이는 답지 않게 무서워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키스를 받아준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안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레이의 손을 잡았다. 안색이 안좋아요. 어디 아프신 거에요? 그렇게 물어보는 안즈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어, 레이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느냐?
안즈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제 무릎 위에 앉은 애첩의 이마, 눈, 코, 그리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다시 물어보았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을 하라고. 그러나 안즈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 번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 대화가 이제는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릴 정도 였지만 그녀는 레이가 원하는 대답을 해준 적이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엇을 원하냐는 말에 안즈가 긍정의 답을 했던 적은 이 궁에 들어 온 첫 날, 레이와 같은 방을 쓰고 싶다고 말했던 그때 뿐이었다.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지아비의 마음을 어찌 이리도 몰라주는 게냐."
"그치만 정말 저는 원하는 게 없습니다 폐하."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애첩을 보며 한숨을 내쉰 레이는 지금까지 참고 참아왔던 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제 속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가 원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네 앞에 갖다 줄 수도 있고, 네가 원한다면 그 어떤 나라도 하루아침에 멸망시킬 수 있단다. 안즈야, 사랑하는 네가 원한다면 너의 원수를 가장 비참하게, 가장 잔인하게 죽여서 복수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네가 원한다면, 나는 역사에 폭군이라고 남아도 상관 없단 말이다. 자, 원하는 걸 말해보거라. 내 권력은 너를 위해 있는 것이란다, 안즈야.
붉은 눈을 빛내며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모습은 안즈가 보기에도 무서울 정도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는 자주 웃고, 항상 그녀의 고집에 져주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남자는 천하를 손에 쥐고 있는 황제였다. 잡힌 손목이 아팠지만 레이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폐하."
안즈는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고,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레이는 눈을 감았다. 그는 손목을 놓아주고 안즈의 손을 잡았다. 마주잡은 두 손이 따뜻하여, 레이는 눈을 뜨고 자신을 향해 웃고있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제가 그 어떤 무리한 부탁을 해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지요. 이 손 안에 천하를 쥐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또 저한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반려이십니다. 다시 태어나도 저는 폐하같은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거에요."
"그리고...폐하는 저만의 사람이지요."
저는, 폐하를 가졌어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아름다운...보물을 제 두 손 안에 가졌는데, 여기서 더 탐을 내면 신이 노하십니다. 분수도 모르고 큰 보물을 가졌는데 더 욕심을 낸다고 벌을 내리실까봐 저는 두려워요. 그래서 저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당신이 제 옆에 있으니까요. 저만을 사랑하겠다고 약속해주셨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차분하게, 그러나 엄청난 애정이 담겨있는 말을 레이에게 들려주며 안즈는 여름날의 태양처럼 밝게 웃었다. 아아, 너는 어찌도 이렇게나 사랑스러울까. 레이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안즈에게 사랑한다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 단어도 레이가 느끼고 있는 이 벅참을, 이 애정을 표현하기엔 모자랐다.
"그러니 매일 무엇을 원하냐고 묻는 건 그만둬주세요. 차라리 그 시간에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더 해주시거나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얼굴을 마주하고, 반짝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안즈의 두 눈동자에는 레이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래, 앞으로는 그래야겠구나."
붉게 타오르는 그 눈동자에도 가득 담겨있었다. 안즈는 정말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자신만을 사랑해주고,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자신만을 담고, 이렇게 부드럽게, 따뜻한 얼굴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자신만 알 수 있다면, 안즈는 그 무엇도 필요 없었다.
저는 정말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네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을 끌어안는 레이의 품에 안기면서, 안즈는 신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 어떤 벌을 내려도 좋으니 이 남자만큼은 저에게서 뺏어가지 말아달라고.
안즈는 술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매일 술을 달고 사는 그런 주정뱅이는 아니었고 그냥 술자리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마시는 술도 달콤하고,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도 별 무리 없이 마실 수 있는 도수가 낮은 것들을 좋아해서 꼴사납게 취하는 일도 잘 없었다. 술에 취해 전날 밤의 기억을 잊는 일따위도 안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상관이 없어야만 했다.
"그래,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느냐?"
"...혹시 제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실수... 실수라고 볼 수도 있겠구나."
어젯 밤 안즈는 오랜만에 레이와 단 둘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적당히 마시고 끊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어제는 술이 잘 들어갔다. 레이가 이제 그만 마셔야하지 않겠냐고 말렸음에도 괜찮다고 감히 황제의 말도 거역하고 되는 대로 입에다가 술을 쏟아 부어서 아주 절여진 상태였던 것까지 기억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웬만해선 저렇게 화를 내지 않는 레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 봐서는 아주 큰 실수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라서 사과를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실수를 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사과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는 없었다.
"일단은 물이라도 좀 마시거라. 속은 좀 괜찮으냐?"
레이는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을 들고와 안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따가웠는데 물을 마시니 조금은 괜찮아진 기분이 들었다. 물잔이 비워지자 레이는 더 필요하냐고 안즈에게 물었고, 안즈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물잔을 다시 건네받은 레이는 탁자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고 방안은 정적에 잠겼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은데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못마땅한 얼굴로 안즈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기, 폐하..."
그 정적을 참지 못한 안즈가 먼저 말문을 텄을 때 레이의 큰 손이 그녀의 뒤머리를 잡아끌었고,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안즈는 하려던 말을 입안으로 삼켜야 했다. 방금 마신 물때문에 차가웠던 입 안으로 뜨거운 혀가 들어와 난잡하게 뒤엉켰고, 레이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안즈의 손을 잡고 그대로 다시 침상 위로 쓰러뜨렸다. 이건 매일 아침마다 하는 인사같은 입맞춤이 아니라 명백하게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입맞춤이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는 없었으나 태양이 저렇게 떠있는 걸 봐서 아마 한낮일테고, 레이는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손으로 안즈의 옷을 벗기는 걸 보아하니 그만 둘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폐하. 안에 계시옵니까?"
안즈가 입고 있던 옷이 반쯤 벗겨지고 영문도 모른 채 레이의 분노를 받아내고 있을 때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즈에게는 그 내관의 목소리가 저를 구원해주러 온 구세주와 같았다. 보아하니 레이는 아침 조례도 가지 않은 것 같았고, 내관은 일이 쌓였으니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안즈는 레이가 잡고있는 손을 놓아주고 그대로 일을 해주러가길 원했다. 그리고 안즈의 얼굴에서 그 절박함을 읽은 레이는 화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관."
"네,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다. 나는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으니 이만 물러가거라."
밖에서 내관이 안된다고 소리쳤으나 레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황명이 우스운가? 낮은 목소리로 노여움을 담아 내뱉은 말에 내관도 더는 재촉할 수 없었는지 이만 물러가겠다는 말을 하며 사라졌다. 점점 작아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안즈는 이제 정말, 그 누구도 자신을 구해줄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안즈야."
평소와 다름없이 상냥한 미소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즈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있는 감정을 안즈가 모를 리가 없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된 원인이라도 알고 싶은데 아무래도 레이는 그걸 말해줄 생각이 없어보였고, 그녀는 얌전히 그 분노를 받아줘야만 했다.
"아직도 어젯밤이 기억나지 않느냐?"
"...송구하게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럴만도 하지. 어제 얼마나 마셨는진 알고 있고?"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폐하."
"당연히 그래야지. 어제 네가 한 실수가 무엇인지 듣고싶으냐?"
안즈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그녀를 노려보다가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안즈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화가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그 얼굴에 화를 풀기엔 레이가 홀로 보냈던 그 밤이 너무 끔찍했기에, 그는 풀어지려는 표정을 가다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어젯밤 안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레이.」"
"...?!"
"「저를 사랑하는 만큼, 안아주세요.」"
"아, 아 잠깐, 폐하. 아니요, 됐습니다. 그만하세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당신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녹아서 사라질정도로 꽈악, 안아주세요. 지금 당장.」"
"기억, 기억났습니다. 이제 전부 기억났어요!"
"「레이... 사랑해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줘요. 나를.」"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뒤에 바로 잠이 들었지. 아주 잘자더구나."
"..."
"지아비를 그렇게 유혹해놓고 아주 패기롭게 자는 애첩을 보니 아주 웃음이 나더구나. 덕분에 새벽을 뜬 눈으로 지새웠단다."
전부 기억났다. 술에 취해 무슨 짓을 했는지. 겁도 없이 레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저런 망측한 말을 잘도 지껄였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 처음 봐서 당황한 레이의 얼굴을 보고 깔깔 거리며 웃은 걸로도 모자라 그 손을 잡아 손수 치마 아래로 집어넣기까지 했었다. 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달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레이가 결심했다는 얼굴로 안즈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그대로 레이의 품에 쓰러졌다. 여기서 안즈의 기억이 끊겼으니 아마 잠든 것이 분명했다.
"더 할 말은 없느냐."
"...제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럼 이제 내가 무엇을 해도 불만이 없겠지?"
"폐하 마음대로 해주세요..."
자포자기의 상태로 그렇게 말하는 안즈를 보며 레이는 드디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자고 있는 안즈를 깨울 수도 없었으니 그대로 레이는 밤을 샜을 것이고, 아마 날이 떠서 일어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멋대로 자버린 애첩을 벌주기 위해서. 지은 죄가 있는 안즈는 그 벌을 달게 받아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을 끌어봤자 그녀에게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레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안즈를 기다려주었고, 드디어 결심을 한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그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이."
"저를, 엉...망, 진창으로 만들어주세요."
"사랑하시는 만큼, 예뻐해주세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푸른 눈동자에 눈물까지 고여있는 안즈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레이는 붉게 달아오른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내 하나뿐인 반려가 원하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들어주어야지."
마음껏 예뻐해 주마. 말을 끝낸 레이는 더는 참지 않고 눈 앞에 있는 안즈에게 달려들었다.
꿈에 자꾸 모르는 사람이 나왔다. 그것이 사람일 때도 있었고, 동물일 때도 있었으며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안즈에게 하는 말은 항상 똑같았다. 나랑 함께 가지 않겠느냐? 상냥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지만 안즈는 꺼림칙한 느낌에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더 붙잡지 않고 사라졌고, 그렇게 꿈이 끝나고 눈을 뜨면 아침이었다.
"좀 이상한 꿈같은 걸. 뭐 다른 건 없었니?"
"그게..."
한번은 아주 하얀 옷을 입고 어떤 방안에 앉아있었어, 내가.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어떤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이제 가야한다고. 아주 잘생긴 남자였던 걸로 기억해. 그런데 웃는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이 손을 잡으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여기에 있겠다고 했더니 남자는 아쉬워 하더니 하얀 천을 내 머리 위에 씌워주고 그대로 밖을 나갔어. 남자는 내가 따라가지 않는 게 아쉬운 것 같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이었어. 언젠가는 내가 자신을 따라올 거라고 굳게 믿는 얼굴이었지.
"그래서 그 하얀 옷은 어떤 디자인이었니 안즈쨩? 혹시 죽은 사람이 입는 소복같은 거였어?"
아니. 입어본 적도 없고 사진으로 밖에 본 적 없지만 그건 분명히 그거였어. 신부의상.
아무것도 없는 날이었고 바로 집에 들어가는 건 또 싫어서 학교 근처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바다 쪽은 이미 알고 있으니 평소와도 다른 방향으로 돌아다니는 중에 발견한 게 신사였다. 그 신사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잡은 것치고는 굉장히 크고 넓었으며 사람이 오지 않아 먼지가 쌓이고 지저분하긴 했지만 굉장히 화려한 신사였다. 더는 신을 모시지 않는 걸까? 엄청난 계단을 올라오느라 체력을 전부 다 쓴 안즈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아서 쉬다가 천천히 그 신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다행히 청소 도구가 있었고, 괜한 오지랖이겠지만 안즈는 그 도구를 이용해 신사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신이 없다 하더라도, 아무도 오지 않는 신사라 하더라도 신이 머물었던 자리이니 깨끗하게 치우고 싶었다. 아, 대충 끝냈다. 먼지를 치우고 거미줄이나 쓰레기같은 것들을 다 치워낸 안즈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참배를 드리기로 했다. 오늘 처음 왔지만, 이런 좋은 곳을 알게 되어서 매우 기뻐요. 때마침 기분 좋은 바람이 안즈쪽으로 불어왔고, 안즈는 신사의 신이 자신에게 고맙다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뒤로 안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신사를 방문했다. 신님. 이건 장미꽃이라고 하는 건데 오늘 학교의 선배에게 받은 거에요. 아직 봉오리인게 성장해가는 저를 닮았다고 해요. 신님. 이거 보이세요? 단풍잎이에요. 새빨갛게 물든 게 굉장히 예쁘죠? 선물이에요. 신님, 오늘은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신님, 신님, 신님. 참배를 드리고 나면 안즈는 항상 이것저것 신사의 신에게 털어놓았고 선물이라며 단풍잎이나 꽃잎, 그리고 먹을 걸 갖다놓고 오기도 했다. 다음 날에는 놓고 간 선물이 사라져있었는데, 바람이나 동물에 의해서 사라진 것일수도 있지만 안즈는 신이 그걸 가져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의 꿈은 학교의 일로 바빠져 신사에 가지 못하면서 꾸기 시작했다. 학교에 남아 의상 수선이며 서류를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밤 늦게 돌아갈 때가 많으니 자연히 안즈의 기억 속에서 그 신사는 잊혀졌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이 지나니 안즈의 꿈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함께 가자고 말을 걸었다. 그 누군가는, 그 무엇은 무해한 것처럼 안즈에게 상냥하게 굴었지만 그건 그저 겉모습일 뿐. 소녀는 그것이 매우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라시는 신사의 이야기까지 전부 들어주었고, 안즈에게 영험한 무녀를 소개해주었다. 아무래도 그 신사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가서 상담이라도 받아볼래 안즈쨩? 연락처와 약도를 받았음에도 바쁘다며 미루던 안즈가 급하게 그 무녀를 찾아가게 된 이유는 항상 권유만 하고 사라지던 그것이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고 입을 맞추려 했기 때문이었다. 온 힘을 다해 뿌리치고 도망치면서 눈을 뜬 안즈는 손목에 남아있는 붉은 손자국 때문이 빨리 무녀를 만나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곧바로 그날 방과후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그 무녀를 찾아갔다.
"네 뒤에 신이 있구나."
"신이요?"
"그래. 신이 너를 노리고 있어."
"어째서 신이 저를 노리나요?"
"그건 네가 자고 있는 신을 깨웠기 때문이지."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들은 무녀는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 그 학교가 이상할정도로 영적인 현상이 많이 일어나서 그 힘을 누르기 위해 신사를 지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리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 안의 학생들 때문인지 그 영력을 제어하려면 평범한 신으로는 택도 없어서 강력한 신을 신사에 봉인해둔 것 같구나. 그리고 신이 깨어나지 못하게 신사 자체를 출입금지 시켜놨는데 거길 네가 찾아서 들어간거고. 그치만 내가 알기론 그 신사는 일반인에겐 보이지 않아.
"하지만 신사가 눈에 보였어요. 심지어 얼른 이 계단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유혹한게로구나. 그래, 혼자 긴 세월을 보냈으니 외로웠는데 마침 신사의 입구를 볼 수 있는 아이가 지나갔으니 급한 마음에 힘을 흘려보낸거겠지. 거기다가 매일매일 와서 꽃이며 간식이며 선물같은 걸 주고 갔으니 어찌 이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누.
"그럼 꿈은, 제가 그 신사로 가지 않아서 꾸는 건가요?"
그런 것 같구나. 아마 네가 그 신사로 다시 찾아가면 그 꿈은 꾸지 않을 게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 신사에 다니는 걸 추천하고 싶지는 않구나. 계속 거기에 출입한다면, 너는 그 신에게 끌려갈게다. 이미 봉인은 오래 전에 풀렸고 신사에 그 신이 없어도 학교의 영력은 제어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자신의 신역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카미카쿠시 당하기 싫으면 가지 않는게 좋을게다. 최악의 경우에는 너를 죽여서 영혼을 데려갈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꿈에서 신이 같이 가자고 하면 무조건 거절해야 하고 주는 건 무엇이든지 받아서는 아니된다.
자, 부적이라도 써주마. 가져가면 꿈도 꾸지 않을테니 손에서 놓지 않도록 해라. 쯧쯧, 어쩌다가 신의 눈에 들어서 이 고생을 하누.
부적을 받은 안즈는 그걸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고, 놀랍게도 그 날 밤에는 그것이 안즈의 꿈에 찾아오지 않았다. 정말 간만에 불편함없이 푹 잘 수 있었고, 다음 날 안즈는 아라시에게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결혼까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신이란 건 굉장히 착각이 심한 존재구나. 할머니가 집에 있는 불단에 놔둔 할아버지 사진을 향해서 하던 걸 그대로 신사의 신에게 한 것 뿐인데 신은 안즈에게 사랑을 느꼈다고 했다. 원래라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받아야 할 신이 이런 학교 하나를 지키기 위해 봉인 되어있었으니 작은 친절에도 감동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지만 안즈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렇게도 내가 싫으냐?」
무녀를 만나고 온지 두달이 되었을 때, 꿈에서 그때 보았던 아름다운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상처받은 얼굴로 그렇게 물어보았고, 안즈는 당황하며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왜 나와 같이 가주지 않는게야. 저는 여기에 남아서 해야할 일이 있어요. 나와 함께 가면 그것들은 다 잊혀질게다. 싫어요, 잊고 싶지 않아요. 단호하게 말하는 안즈를 보며 그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좋다. 일단은 풀어주도록 하마. 왼손을 내밀어보겠느냐?
안즈는 별 거부감 없이 손을 내밀었고, 그는 왼손 약지에 들고있던 것을 끼워주었다. 남자의 눈과 똑같은 붉은 색의 보석이 박혀있던 반지는 매우 아름다웠고, 매우 무거웠다. 그리고 굉장히 꺼림칙한 물건이라서 바로 빼내려고 했지만 남자는 이것만은 제발 들어달라며 다시 반지를 제대로 끼워주며 손등에 키스했다.
「나중에 다시 데리러오마. 그때는 아가씨의 의견따위 물어보지 않을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걸세.」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안즈는 알람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들었다. 숨을 몰아쉬며 대체 무슨 꿈인가 고민할 때 안즈는 문득 왼손이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소녀는 제 손을 들어보았다.
아, 안즈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신사에서 홀로 지내는 것은, 매우 외로운 일이었다.
신사 아래에 있는 학교는 지어진지 매우 오래된 학교였다. 인간의 시간을 레이는 알 수가 없으니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오래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으며, 그 긴 시간을 레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이 신사에서 홀로 버텨왔다. 원하던 일이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이 자유로운 신은 인간을 사랑했고 인간을 지키고 싶었지만 이런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력을 가진 인간들은 레이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일을 진행시켰고, 신은 아무도 오지 못하게,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신사에 갇혀버렸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아름답고 자신감에 넘치던 신은 조금씩 망가져갔다. 그저 자신을 이 신사에 봉인해 둔 주술사가 하루 빨리 죽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주술사가 죽었을 때, 오랜 시간동안 그를 괴롭혔던 봉인이 드디어 풀렸지만 레이는 그 신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저주였다. 당신은 절대 그 신사를 떠날 수 없을겁니다. 레이를 봉인해둔 인간은 그렇게 저주를 내렸고 레이는 신을 이곳에 가둔 오만한 인간에게 단명의 저주를 내렸다. 네 녀석의 가문은 모두 단명할 것이다. 너도, 네 자식도. 네 놈의 피가 흐르는 인간들 모두. 푸른 눈을 가진 밝은 금발의 청년은 그 저주를 듣고도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레이는 신사의 입구를 발견한 그 아이를 붙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곳을 지나가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영력이 강한 인간이라도 신사의 입구를 찾을 수 없는데 그 아이는 아주 쉽게 신사의 입구를 찾아냈다. 신은, 소녀가 이곳으로 올라오길 바랐고 운좋게도 소녀는 높은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르는 것이 힘들어 도중에 포기하고 이곳을 떠날까봐 신기를 흘려보내는 일까지 저지를 정도로, 레이는 인간이 그리웠다. 아니, 굳이 인간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만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계단을 다 오른 소녀는 힘들었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다가 이내 천천히 신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녀는 레이도 모르는 장소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청소도구를 찾아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먼지를 털어내고, 거미줄을 치워내고, 쓰레기를 모조리 정리했다. 해가 떠있을 때 시작했던 청소는 해가 지기 시작할 때 끝났지만 소녀는 뿌듯한 얼굴로 신사를 둘러보며 뒷정리를 했고, 참배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신님이 머무는 자리가 이렇게 더러운 건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오늘 처음 여기에 왔지만, 이런 곳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뻐요. 참배를 마친 소녀는 웃는 얼굴로 다시 계단을 내려갔고, 레이는 잊고있던 추억을 알려준 인간 소녀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서 시원한 바람을 소녀에게 선물해주었다.
소녀는 자주 신사에 놀러왔다. 이름 모를 꽃을 가져와 선물할 때도 있었고, 먹을 걸 가져올 때도 있었다. 신님. 이건 장미꽃이라고 하는 건데 오늘 학교의 선배에게 받은 거에요. 아직 봉오리인게 성장해가는 저를 닮았다고 해요. 신님. 이거 보이세요? 단풍잎이에요. 새빨갛게 물든 게 굉장히 예쁘죠? 선물이에요. 신님, 오늘은 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신님, 신님, 신님. 레이는 소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고, 오늘은 어떤 이야기로 자신을 즐겁게 해줄지 기대하고 있었다. 신은 인간소녀가 좋았고, 될 수 있다면 소녀의 앞에 나타나서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외로움 때문에 이렇게도 변하는 구만. 이런 자신이 낯설었지만 레이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마음이 연모와 가깝다고 깨달은 계기는 소녀의 부재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바쁜 일이 있으니 못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매일 이곳에 올 수는 없겠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으나 소녀의 부재가 한달이 넘어가자 더는 느긋하게 기다릴 수도 없었고,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오랜 시간 버려져있던 자신을 찾아내고 관심을 가져주고 예뻐해준 것이 그 인간소녀였다. 본디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믿음과 관심, 존경, 애정으로 살아가는 존재인데 이 신사에 버려져있던 신인 레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준 인간은 그 소녀가 유일했다. 그런 소녀가 더는 자신을 만나러 와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자신을 잊어버린다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신부로 삼으면 되잖아?」
어떻게 해야할지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레이에게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인간인 소녀를 자신과 똑같은 존재로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처음에는 그 목소리를 못들은 척 넘기려고 노력했다. 소녀는 인간이었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일텐데 그걸 자신이 망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 레이를 유혹했다. 외롭지 않은거냐? 갖고싶잖아. 다시 또, 그렇게 살아갈거야? 누구도 오지 않는 이 공간에서 홀로, 외롭게? 결국 레이는 그 욕망에 지고 말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이 가여운 신은 너무 오래 세월을 고통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신은 결국 그 목소리를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이 신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원하고 기분좋은 바람이 불던 신사는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로 바뀌었고, 주술사가 남긴 그 저주는 사쿠마 레이를 이곳에 붙잡아두지 못했다.
함께 가자고 말했지만 소녀는 매번 거절을 했다. 죽여서라도 데려갈까싶었지만 신은 인간 소녀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녀는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매번 거절을 하더니 급기야 무녀를 찾아가서 받아 온 부적을 침대 머리맡에 붙여두는 몹쓸 짓까지 저질렀다. 소녀를 사랑해버린 신은 예전과 달리 감정이 풍부해졌다. 그는 소녀가 자신을 거절하면 슬퍼서 울었고,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에 화도 났으며, 기약없는 매달림에 지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소녀가 주고 갔던 것들을 하나 둘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부적 때문에 소녀의 꿈에 찾아갈 수 없게 된 신은 결국은 그 부적을 쓴 무녀를 제 손으로 죽여버렸다. 심한 처사라고 생각은 했지만 감히 인간 주제에 신을 방해했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했고, 그 벌이 과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소녀의 꿈에 찾아간 레이는 준비해두었던 반지를 소녀의 손에 끼워주는 것에 성공했다. 거절할 수 있음에도 한발 물러서서 기다리겠다는 레이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소녀는 결국 그 반지를 받아주었다.
기다리겠다 말은 했지만 반지까지 주었으니 이제는 그 무엇도 레이를 막을 수 없었다. 아, 드디어 혼자가 아니게 되는 구나. 신은 행복하게 웃으며 자신의 신부가 될 소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