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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이즈 : 유리어항

박로제 2016. 10. 28. 17:31



점심시간이었다. 이즈미는 유닛과 관련된 문제로 안즈에게 상의할 것이 있어 그녀의 반으로 가고 있었다. 원래라면 리더인 레오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골칫덩어리 임금님은 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즈미가 맡게 되었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마코토도 볼 수 있으니 이즈미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안즈.‘

 

2학년 A반에 도착해서 이름을 부르며 그녀를 찾았지만 안즈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붙어 다니는 트릭스타 또한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식당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타이밍 나쁘네. 한숨을 쉬며 돌아가려고 할 때 뒤에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렸다. 이즈미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코토였다.

 

'이즈미 씨?'

'안녕 유우군~'

'으으 여긴 무슨 일이에요?'

'안즈가 안 보이는데 어딨는지 알고 있어? 유닛 일로 상의할 게 있어서 말이야.'

'안즈쨩이라면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작업할 의상을 들고 가든 테라스로 갔으니까 그쪽으로 가보세요.'

'그래? 고마워 유우군.'

 

마코토에게 고맙단 인사를 한 뒤 이즈미는 바로 돌아서서 가든 테라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코토를 붙잡고 이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금 우선시해야하는 문제는 유닛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점심도 먹지 않고 작업 중이라니 그 녀석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점심시간은 쉬라고 있는 시간인데 밥도 먹지 않고 일을 하다니. 안즈가 어떤 성격인지는 두 계절을 함께 보냈으니 이제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알면 알수록 한숨이 나왔다. 만나면 일단 그거부터 뭐라고 해야겠네. 자기 몸을 생각하지 않는 '여동생'때문에 머리가 아파진 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좀 더 빠르게 걸어갔다.

 

10월의 가든 테라스는 가을 햇살과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츠의 말을 빌리자면 낮잠을 자기 좋은 장소였다. 거기다가 사람도 잘 오지 않는 장소이니 조용해서 작업하기도 좋았을 것이고, 그래서 안즈도 의상을 들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이즈미는 가든 테라스를 뒤지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아무리 찾아도 안즈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엇갈린 건가. 그렇게 되면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 완전 짜증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이즈미는 안즈에게 문자를 보내려고 했다. 마코토가 자신을 봤으니 안즈에게 대충 이야기는 전달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러나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 이즈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 사람은'

사쿠마 레이. 같은 유닛에 속해있는 리츠의 형이자 세나 이즈미 자신과는 그다지 친분이 없는. 리츠에 듣기로는 낮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관에서 보낸다던데 해가 떠 있는 이 시간에 깨있는 걸로도 모자라 가든 테라스로 나와 있는 모습이 낯설기는 했지만 그다지 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대로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 남자의 옆에 익숙한, 그리고 자기가 찾던 사람이 있지 않았다면.

 

안즈였다. 여태까지 계속 찾던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에도 이즈미는 안즈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단순히 사쿠마 레이의 옆에 있기 때문도 아니었고, 그녀가 자고 있어서 그걸 깨울 수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안즈가, 사쿠마 레이의 품 안에서 아주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안즈를 사쿠마 레이가, 그 남자가 아주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즈미는 그대로 얼어버린 것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쿠마 레이가 어떤 남자인지는 세나 이즈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바보처럼 웃고 다닐 때는 그의 동생인 리츠가 앞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때도 저런 얼굴로 리츠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저건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볼 때의 얼굴이었다. 레이는, 안즈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이였나.

 

이즈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곧 점심시간이 끝날 테니 저 남자는 안즈를 깨울 것이고, 그러다가는 마주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상황은 사양이었다. 교실로 돌아가자. 이야기는 방과 후 레슨에서 해도 괜찮으니까. 이즈미는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가든 테라스를 벗어났다.

 

프로듀서가 연애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물론 연애를 하는 상대가 아이돌이긴 하지만 자신의 유닛에 속한 멤버도 아니니 이즈미 본인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사실 이즈미는 그 날 안즈를 찾으러 가든 테라스로 갔던 것을 조금 후회한다. 보답 받지 못할 감정의 시작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가 시작이었으므로.

 

 

 

유리 어항

 

 

 

세나 이즈미는 방과 후에 만난 안즈에게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 대신 안즈의 언니라고 말하고 다니며 실제로도 그녀의 고민 상담을 잘 들어주는 나루카미 아라시와 둘만 있을 때 한 번 떠봤을 뿐이고, 고맙게도 아라시는 거기에 걸려주었다. 사귀기 시작한 건 좀 됐다고 한다.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리츠, 그리고 트릭스타와 언데드의 하카제 카오루 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서로의 입장이 그렇다 보니 나름대로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듯했다.

 

'그렇지만안즈쨩은 좀 어설프지. 전혀 숨기지를 못하거든.'

 

그때는 레오와 이야기의 주인공인 안즈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와 더는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아라시의 말을 이즈미는 이해하지 못했다. 안즈는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이었고 종종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표정관리를 잘하는 편이었다.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도 잘하는 그녀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다음 날, 레이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고 아라시의 말을 이즈미는 이해했다.

 

레이와 그 옆에는 카오루가 있었고, 언데드의 활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카오루를 대할 때는 평소의 안즈였지만 레이와 이야기할 때는 달랐다. 뺨이 발갛게 물들었고,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레이가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에 손이라도 올리면 크게 몸을 들썩거리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옆에 두 사람이 사귀는 사실을 아는 카오루가 있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아라시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사쿠마 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귀를 쫑긋, 하고 대화하는 것도 멈추고 그쪽에 집중한다고 한다. 사랑에 빠진 소녀는 귀엽지만 그러다가 들킬까 봐 걱정이야. 걱정된다는 듯 말하는 아라시를 보며 이즈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다간 금방 들킬 게 분명했다. 물론 아이돌과 사람들이라면 알아도 모른 척 넘어 가줄 테니 그렇게까진 걱정되지 않았다.

 

이즈미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그 남자, 정말 괜찮은 거야? 본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이즈미는 그 남자가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옆에 둬도 괜찮은 남자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 남자가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도 그랬고, 동생인 리츠를 통해서 듣는 이야기도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니 더 그랬다. 무엇보다 같은 유닛에 있는 리츠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리츠는 틈만 나면 안즈를 스튜디오에 만들어 둔 잠자리에 끌어들여서 같이 잠들었으며, 피를 달라면서 목이나 팔을 깨무는 건 기본이었다. 그러니까, 편견이 있었다. 편견으로 사람을 대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오해해서도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즈미는 사쿠마 레이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의 모습이 잊히지 않고 계속 떠오르는 것도, 그걸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나쁘고 불쾌해지는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걱정되니까, 옆에 있는 남자가 그런 남자니까, 연애고 뭐고 전부 다 처음인 안즈가 험한 꼴을 당할까 봐. 그런 이유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즈미쨩?"

"뭐가?"

"정말, 그런 이유로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거?"

"이즈미쨩이 깨닫지 못했다면 나도 더 뭐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생각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 불쾌함이 뭔지?

 

아라시와 함께 화보를 촬영하는 날이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에 어쩌다 안즈의 이야기가 나와서 이즈미가 자기도 모르게 그 날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했는데, 그걸 들은 아라시가 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럼 뭔데? 이즈미는 그게 단순히 오빠가 하는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오빠가 여동생을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 그리고 옆에 되먹지 못한 녀석이 붙어있다면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한데, 그게 뭐가 어때서?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났고, 아라시는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긴 뒤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즈미는 자기가 생각한 게 맞다 여겼고, 아라시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이즈미는 레이와 안즈를 다시 만났다. 그 가든 테라스에서. 저번과 똑같은 장소였지만 그때와 반대로 안즈는 의상을 만들고 있었고 레이는 그녀의 무릎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어차피 잘 거면 경음부실에나 있지 왜 가든 테라스까지 나와서 저러는 거야? 괜히 짜증이 나서 이대로 지나칠 생각이었다.

 

"레이 씨, 일어나세요. 저 교실로 돌아가야 해요."

"으음...조금만 더..."

"깨있는 거 다 알거든요? 얼른 일어나요.“

 

얼른 일어나라면서 엄한 척 굴기는 했지만 안즈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를 바라보는 웃는 얼굴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안즈는 일어나기 싫다며 나이에 맞지 않게 투정을 부리는 사쿠마 레이를 다독이는 손길이, 그 와중에도 잡고 있는 손은 놓지 않고 그 손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전부 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안즈를, 이즈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죽어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안즈는 그때 봤던 레이와 똑같은 눈이었다. 정말로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로 레이를 바라보는 안즈의 얼굴에는 녹아내리는 설탕과 같은 애정이 담겨있었다.

 

왜 저게 나를 향하지 않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즈미는 자기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황급히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이건 분명히 질투였다. 안즈의 그런 얼굴을 저 남자가 독점한다는 것에 대한 지저분한 질투였고, 이건 '오빠'가 느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말도 안 돼."

 

안즈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는 것이, 자신을 향해 그렇게 웃지 않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안즈의 애정을 독점하는 그 남자에게 분노마저 들었다. 터져버린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하고 있지만 세나 이즈미 본인도 잘 알고 있다. 부정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이제야 그때 느꼈던 과한 불쾌함과 짜증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라시도 이즈미는 깨닫지 못했던 이 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확한 답은 주지 않고 생각해보라는 말만 했던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세나 이즈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분명히 질투였고, 이제 이걸 부정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 단어가 아니면 자신의 감정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쿠마 레이를 질투하고, 안즈를 독점하고 싶다. 이건 사랑인가? 이즈미는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이 감정은 음습한 독점욕에 가까웠다. 누구에게 털어놓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할 수도 없었다. 본인이 느끼기에도 이 감정은 비정상적이었다. 그 얼굴을 독점하고 싶다는 걸 넘어서서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바라는 건, 그래서 안즈를 아무도 못 보는 곳에 가둬두고 싶다는 이 감정은 그 세나 이즈미가 느끼기에도 비정상적인 감정이었다. 이런 이야기, 아무한테도 할 수 없었다.

 

꿈에 안즈가 나왔다. 옆에 그 남자도 함께. 눈앞에서 멀어지는 안즈를 잡으려고 발버둥 쳤지만 잡을 수 없었고, 이즈미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끔찍한 꿈이었고,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즈미는 밤마다 그런 꿈을 꿨고, 이젠 눈을 감으면 자연스럽게 그 날 봤던 안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늘어갔다. 이제는 밤이 오는 것이 괴로웠다.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니 안즈를 보는 것도 괴로웠다. 다행히 나이츠와 함께할 일도 없었고, 학년이 다르니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즈미는 의도적으로 가든 테라스로 가는 일을 피했다.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은 꿈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만나지 않는다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즈미의 꿈에는 두 사람이 나왔고, 괴로운 마음에 수면제까지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즈미쨩, 요즘 잠은 자는 거야? 아라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봤지만 신경 쓰지 말라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이즈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독점욕도 사랑이라고. 단순한 독점욕이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괴롭힐 리가 없다고. 꿈에서까지 자신을 괴롭히는 이 감정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세나 이즈미는 그것들을 애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당화시켰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문제가 많았지만, 사랑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즈미는 자신이 안즈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래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날밤에도 안즈가 꿈에 나왔다. 하지만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었고, 이즈미는 오랜만에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었다.

 

 

 

***

 

 

 

"안즈.“

"세나선배?"

"너 져지는 어디 두고 교복만 입고 다니는 거야?"

"오늘은 깜빡했어요."

"그렇다고 이 날씨에 그러고 다녀?"

"괜찮아요. 계속 뛰어다니니까 오히려 더운 걸요?"

 

정말 못 말리는 녀석이라니까. 이즈미는 한숨을 쉬었다. 11월이다. 아무리 학교가 난방을 한다고 해도 교복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기엔 추운 날씨였다. 그것도 실내에만 있는 게 아니라 프로듀서 업무로 계속 밖을 돌아다녀야 하는 안즈에게는 더욱더. 하지만 등굣길에 우연히 만난 안즈는 교복만 입은 상태였고, 이즈미는 그걸 못 본 척하고 갈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괜찮아요. 저 튼튼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안즈에게 어디서 선배에게 말대답하냐며 혼내주려다가 이즈미는 포기하고 제 가방에서 옷을 꺼냈다.

 

", 이거 입고 다녀."

"? 아니에요, 저 괜찮은 걸요!"

"혹시나 싶어서 챙겨온 건데 나보단 네가 더 필요한 것 같아서."

"그렇지만 이건 세나 선배가 입으려고 챙겨온 건데"

"프로듀서.가 그러고 다니다가 감기라도 걸려서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너는 이 학원의 유일한 프로듀서야. 아이돌의 건강만 관리해야 하는 게 아니라 너 스스로도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안즈는 망설였지만, 이즈미가 계속 프로듀서라는 걸 강조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즈미의 가디건을 받아들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춥긴 추웠는지 가디건을 입은 후에는 얼굴이 조금 풀어져있었다. 멍청한 얼굴. 그런데도 귀여워서 이즈미는 웃음이 나왔다.

 

"고맙습니다. 사실 조금 추웠는데"

"내일은 제대로 챙겨오라고. 멍청하게 또 잊어먹지 말고."

"가디건은 드라이해서 돌려드릴게요."

"됐어. 그냥 내일 갖다 줘."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안즈와는 신발장 앞에서 헤어졌다. 제 가디건을 입은 안즈가 교실로 걸어가는 모습은 생각보다 보기 좋은 모습이라, 이즈미는 계속 웃음이 나왔다. 정말 추워 보여서,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돼서 빌려준 것도 있었지만, 사실은 그냥 제 가디건을 입은 안즈가 보고 싶었다. 저대로 두면 그 남자가 어떻게라도 해줬겠지만 운 좋게도 먼저 만난 사람은 자기였고, 이즈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안즈라면 애인이 아닌 다른 남자의 가디건을 입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프로듀서가 아이돌의 옷을 빌려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 뻔했고, 이즈미는 그걸 노려 프로듀서임을 강조해 제 옷을 입혔다.

 

"아아, 저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사쿠마 레이가 저걸 보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물론 안즈에게는 절대 티를 내지 않겠지. 그리고 안즈는 늦어도 오늘 점심때쯤엔 제 가디건을 돌려주러 올 것이다. 그 남자의 옷을 입고. 자신의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긴 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이즈미는 레이를 화나게 하고 싶었고, 그 남자라면 이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 나도 성격 정말 나쁘다니까. 그렇지만 이런 도발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즈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안즈는 점심시간에 3학년 A반에 와서 이즈미에게 가디건을 돌려줬고, 그녀는 레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예상한 일이었다.

 

"잠깐,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만 가봐."

", 그럼 가볼게요. 감사했습니다, 세나 선배."

 

안즈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반으로 돌아갔다. 입고 있는 가디건은 안즈에게 지나치게 커서 오히려 불편해 보였지만 그 남자는 억지로 입혔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마치 누가 봤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안즈의 목에는 붉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거기다가 그녀에게서는 짙은 향수 냄새까지 났다. 어떻게 봐도 그런 상황이 있었다는 걸 오해할 수밖에 없는 흔적들에 이즈미는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받아칠 줄은 몰랐는데. 예상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 이 정도는 되야 나도 더 노골적으로 굴 수 있지. 어떻게 봐도 이즈미가 이기는 방법 따위 없었지만, 이즈미는 지금 이 상황이 즐거웠다. 다음에는 어떤 거로 그 늙은 흡혈귀를 괴롭혀줄까. 당한 만큼 나도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 아무래도 자신은 정말 성격이 나쁜 것 같다고 이즈미는 다시 한 번 느꼈다.

 

 

 

***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있긴 있었다. 안즈와 저의 관계는 변했다. 안즈에게 있어 이즈미는 많은 선배 중 한 명이었지만 이제는 고민을 이야기하는 믿을 수 있는 상대로 바뀌었다. 안즈는 이제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이즈미를 찾아왔다. 모두 다 이즈미가 들인 노력의 결과였다. 프로듀서 업무로 지쳐가는 안즈에게는 애인이 아닌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한 선배는 필요했고, 옆에서 계속 도와주던 이즈미가 그런 존재가 되기는 쉬웠다. 자주는 아니지만 안즈는 이즈미를 오빠, 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안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남자였다. 분했지만 이즈미는 일단은 여기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 남자가 해줄 수 없는 것들은 자기가 해줄 수 있으니까. 그 정도면 짧은 시간에 큰일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안즈를 찾으러 가든 테라스로 간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이즈미에게 있어서 그곳은 가고 싶지 않은 장소 중 1순위였지만 이번에는 정말 급한 일이었다. 나이츠가 찍기로 했던 화보와 관련된 일 이야기였고, 이건 안즈와 상의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곳에서 두 사람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 보기 싫은 모습이었지만.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도망가지 않고 이즈미는 그 모습을 뚫어지라 쳐다봤고,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즈미가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레이는 조금 대담해졌다. 학교에서 저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네가 그렇게 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경고이기도 했고, 과시이기도 했다. 기분 나빴지만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도망가면 지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거기다가 사실 이딴 걸로는 이제 어림도 없었다. 이즈미의 꿈속에서 두 사람은 많은 걸 했고, 빌어먹게도 꿈에 익숙해진 이즈미에겐 그 어떤 타격을 줄 수 없었다. 그렇게 이즈미는 끝까지 그 장면을 지켜봤고, 마치 아무것도 못 봤다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그 두 사람에게 걸어갔었다.

 

'이즈미씨. 지금 온 거 맞죠...?'

'나 없는 사이에 이상한 짓이라도 했나 보지?'

', 그게 아니라...!'

'봤어도 모른 척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거 봤다는 이야기잖아요!'

 

물론 받은 만큼 되돌려줬지만. 상의할 게 있어서 왔고 이건 나이츠의 일이라는 이유로 안즈를 데려가겠다고 했더니 그 남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지 아무 말 하지 않고 안즈를 보내줬다. 지금 온 게 맞냐, 아니냐로 옥신각신하다가 뒤를 돌아서 험악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가 보는 앞에서 안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상큼한 얼굴로 웃어주는 것도 이즈미는 잊지 않았다. 항상 여유롭던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즐겁던지, 그때만큼 유쾌한 적도 없었다.

 

아마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것이다. 사쿠마 레이는 안즈의 옆에 있을 거고, 자신은 유치한 도발을 계속 할 것이다. 솔직히 그래 봤자 당장 기분만 상하게 할 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세나 이즈미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안즈는 이즈미에게 많은 걸 이야기했고, 그중에는 레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다. 무서워요, 그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두고 떠날 것 같아요. 영원이 있다고 믿지 않아요. 그냥, 당장 주어진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에요. 안즈는 레이와 만나면서 느꼈던 불안감을 이즈미에게 이야기했고, 그것들은 이 싸움에서 이즈미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언제가 될지 모른다. 안즈가 착각한 것 일수도 있고, 레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즈미는 그 가능성에 걸어보기로 했다. 긴 싸움이 될 것이고, 그저 기댈 수 있는 선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신이 졸업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것이 뻔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안즈가 꽃다발을 들고 자신에게 걸어왔다. 노란색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웃으면서 걸어오는 안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이즈미씨. 졸업 축하드려요."

 

사랑스러운 안즈.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릴게. 그 남자에게 버림받은 네가 나에게 손을 내밀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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