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마 레이는 하는 일이 아주 많았다. 그리고, 이런 "생물"을 관리하는 것도 자신이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인어?」
「네. 최상급이라면서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부르던 걸요.」
「인어라면 이제 수족관에서도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팔리지도 않는 걸 굳이 비싼 돈으로 살 필요는 없지. 돌려보내.」
「물건이 어떤지 확인은 안하셔도 되겠습니까?」
「흐음... 그 물건은 어디있는가? 내가 직접 가지.」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어떤 생물이 들어왔는지 확인을 하며 가격을 매기고 있을 때 담당자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와서 전해준 소식이 그거였다. 인어를 거래하고 싶다는 남자가 보스를 찾아왔습니다. 인어는 이제 너무 흔해져서 경매에 올려봤자 비싸게 팔 수도 없는 생물이었다. 그래서 그냥 돌려보낼려고 했으나 요즘 같은 시대에 인어를 비싸게 팔려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져서, 그리고 그 인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마음에 제 눈으로 한 번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는 걸 갖다 팔려고 했던 거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면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며 바다의 기이한 생물을 잡아왔을 때 가둬두는 작은 수조를 모아둔 방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어를 잡아온 것 같은 남자가 그 수조 앞에 서있었고, 레이는 웃는 얼굴로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인어는 어디있는가? 남자는 웃으며 바로 앞의 수조를 가리켰다. 여기있습니다. 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는 기대하라는 말과 함께 수조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냈다.
「최상급입니다. 요즘 어딜가도 인어가 있다지만 그래도 이것과 견줄 수는 없지요.」
「호오...」
「저 영롱하게 빛나는 비늘을 보십시오. 목의 박힌 보석은 또 어떻습니까.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그렇군. 과연 최상급이라고 할만하군.」
이 싸구려 조명 아래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지느러미와 하얗고 길다란 목에 박혀있는 여러종류의 보석. 물이 부족하여 호흡이 곤란하면서도 그 푸른 눈을, 바다를 닮은 그 두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까지 레이는 남자가 왜 이 인어를 최상급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장사를 한지도 벌써 10년이나 지났지만 이만큼 아름다운 인어를 본 적이 없었다. 대체적으로 흡혈귀 중에서는 탐미주의자가 많았다. 흡혈귀들은 아름다운 것을 사랑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사쿠마 레이도 그런 흔한 흡혈귀 중 하나였으며, 당연하게도 이 인어가 갖고싶었다.
「이 인어는 내가 사지.」
「정말이십니까? 그럼 가격은...」
「최상급으로 쳐주지. 이 문을 나가면 담당자가 안내해줄 걸세. 나가보게나.」
남자는 기쁜 얼굴로 문을 열고 나갔고, 레이는 닫히는 문을 보며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당장 여기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 아름다운 인어가 이곳에 오자마자 보게된 것이 피가 튀기는 살해현장이면 불쌍하니까, 레이 나름의 배려였다. 인어는 불신이 가득찬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하기사, 인간이 인어를 잡아들이기 시작한지 어느새 몇십년이 지났다. 그동안 친구나 가족이 잡혀가는 걸 봤으니 처음 보는 인간에게 호감을 가지기란 무리일 것이다. 물론 사쿠마 레이는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였지만 지상의 일에는 무지한 인어가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인어를 잡아온 남자를 죽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건' 자신의 것이었다.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신 뿐이어야 했고, 거기다가 이 남자가 혹시라도 밖에 나가 이 인어에 대해서 떠들어대면 곤란했다. 이 아름다운 인어에 대해서 알고있는 존재는, 사쿠마 레이면 충분했다.
「커다란 수조를 하나 준비해주겠나?」
전화를 걸어 그렇게 지시한 레이는 인어가 들어있는 그 수조를 다시 검은 천으로 덮었다. 헤엄을 칠 수 없는 좁은 수조, 바다의 물과는 완전히 다른 약품 냄새가 나는 수돗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검은 천, 부족한 물로 인한 호흡곤란까지 인어가 버티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재갈이 물린 입으로 웅얼거리며 우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집으로 옮겨지면서 누군가가 보게되면 큰일이니 말이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거기에서 해방시켜주마.」
레이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인어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 인어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레이의 계획과는 반대로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뭐, 그런 꿈을 꾸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들뜬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면서 레이는 제 인어를 가둬 둘 바다를 어떻게 만들어야할지 고민했다.
**
안즈야, 이리오려무나.
레이가 손을 내밀었지만 안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수조 안에 발을 담구고 장난을 치던 레이는 다시 안즈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인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레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헤엄쳐갔다. 흐음. 심각한 얼굴로 잠시 고민하던 레이는 지금 입고있는 옷은 검은 셔츠와 슬랙스이니 그리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고, 그대로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레이가 물에 뛰어든 것을 안 안즈가 그에게서 도망가려고 발버둥쳤지만 지상의 존재주제에, 물 안에서 인어보다 빠른 그는 도망가던 안즈를 붙잡아 제 품에 안고 그대로 물 위로 올라왔다. 점점 희박해져가는 산소에 안즈는 숨을 쉴 수가 없었고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인어는 물 밖에서도 살아갈 수는 있다. 지느러미가 마르면 인간의 다리로 변했고, 걸을 때마다 다리가 아프기는 했지만 인간처럼 숨을 쉬고 살아갈 수는 있었다. 허나 그 과정이 엄청나게 고통스러웠고, 지금처럼 상반신만 물 밖으로 나와있을 경우에는 바다에 사는 다른 생물처럼 숨을 쉬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이미 젖어버린 레이의 셔츠를 쥐고있는 안즈의 손이 지금 얼마나 절박한 심정인지 말해주고 있었으나 레이는 표정 없는 얼굴로 괴로워하는 인어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온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이것은 그다지 짧은 시간이 아님에도 그 반년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어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고문이었다.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던 레이는 안즈의 턱을 들어 그대로 입을 맞췄다.
여기서 자신이 어떻게 굴어야 다시 물 속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안즈는 알고 있었다. 팔을 들어 그의 목에 매달린 인어는 입을 벌렸고, 흡혈귀는 벌어진 입 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끔찍해도 지금 자신을 살릴 수 있는 건 이 남자 뿐이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게 끝나야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매달리는 인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때가 아니면 닿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으니 불쌍하지만 이런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이 인어가 나빴다. 잠시 입술을 떼니 새빨개진 인어의 입술이 보였다. 끝났으니 이제 놓아달라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어가, 레이는 괘씸했다.
여전히 학습능력이 없구만.
벗어나려고 바르작대는 인어를 힘주어 끌어안고 레이는 수조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서 안즈는 손톱을 세워 레이의 얼굴과 팔, 어깨 같은 곳에 상처를 냈지만 어차피 이런 것쯤이야 금방 나을 상처다. 숨을 쉴 수 없어 고통받던 인어는 결국 눈물을 흘렸고, 바다를 닮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진주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말,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인어였다.
거기서 반성하고 있거라.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레이는 안즈를 욕조 안으로 집어던졌고, 잔인한 흡혈귀는 그 안에 아주 적은 양의 물을 넣어주었다. 인어는 지느러미가 말라야지만 인간의 다리를 얻을 수 있었고, 인간처럼 숨을 쉴 수 있었다. 애매하게 젖어있는 지느러미는 인간의 다리로 바뀌지 않을 것이고, 안즈는 계속 이렇게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통받아야만 했다. 레, 이. 욕조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괴로워하던 안즈가 드디어 레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들었음에도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레이, 레이. 안즈는 다시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는 다시 안즈를 바라보았다. 인어의 얼굴에는 분노도, 원망도, 혐오도 없었다. 분하지만 이럴 때만, 안즈는 레이를 자신의 눈에 담았다. 평소에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면서 그 가녀린 목을 손에 쥐고 위협할 때만, 오로지 그 때만 레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사쿠마 레이는 이제 그만 인어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욕조에서 안즈를 꺼내 품에 안고 미리 준비해 둔 커다란 타월을 꺼내와 그것으로 젖은 인어의 몸을 감싸안았다.
그래, 내가 미안하구나. 많이 힘들었느냐?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며 눈, 코, 뺨과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는 레이가 무서웠지만 안즈는 가만히 몸의 물기를 닦아주는 그의 손길을 받아주었다. 더는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되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아침이었다.
물기가 사라진 다리에는 지느머리와 똑같은 빛의 비늘이 있었다. 사쿠마 레이는 그것을 좋아했고, 인간의 다리가 생긴 안즈가 집에서 입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 비늘이 잘 보이는 옷뿐이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아파 움직일 수 없는 안즈는 거실의 러그 위에서 얌전히 누워있었고, 레이는 블라인드를 올려 안즈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잘 수 있도록 해주었다. 태양은 흡혈귀의 적이다. 특히나 아침의 태양은 레이에게 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안즈를 위해 그것을 참고 버텼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침마다 그런 전쟁을 치르며 수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인어를 그렇게 괴롭혔으니 이정도 고통쯤이야 버텨주는게 예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아마 점심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안즈는 잠에서 깰 것이다. 그때 함께 식사를 하고나면 교육의 시간이다. 인간의 언어를 할 줄 모르는 안즈를 위해 레이가 마련한 시간이었고, 그때만큼은 안즈도 레이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인어는, 모든 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해갔다. 인간의 언어를 배울 때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워했지만 어느정도 알고나니 빠르게 습득해나갔고, 지금은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배운 안즈가 가장 처음으로 소리내어 말했던 것은 레이의 이름이었다.
처음 그 수조에 갇혔을 때, 인어는 필사적으로 반항을 했었다.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도착한 곳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오직 저만을 위한 감옥이었으니 레이는 그럴만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인어의 주인은 자신이었고, 슬프지만 그는 이 인어를 길들여야만 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외국의 어떤 정치가가 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가 사랑의 대상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 중에서 어떤 쪽이 바람직한가? 양자 모두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랑과 공포는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우므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안전하다. 누군가의 위에 서기 위해서 그렇게 교육받아 온 사쿠마 레이는 이번에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했고, 사랑스러운 인어는 자신의 주인인 이 흡혈귀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끌어안으면 몸을 떨었고, 웃는 얼굴을 보면 두려워했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자신과 레이 뿐이었으니 평범하게 지낼 수도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안즈에게 사쿠마 레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자신을 보며 웃어주지 않는 것은 조금 슬펐지만 레이는 이것이 자신을 위해서 가장 옳은 방법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꾸준하게 애정을 주었으면 아마 이 인어도 자신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허나 흡혈귀는 그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어도 인어는 바다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인어는, 영원히 이 수조 안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레이는 사랑받기 보다는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것을 선택했고, 이 결정에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인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오늘은 유독 날이 좋았고, 문득 레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었으면 이런 날에 함께 나가지 않았을까. 손을 잡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하고 다니는 그런 평범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쓸데없는 생각이다. 사랑의 대상이 되었어도 사쿠마 레이는 이 인어를 가둬두고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레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오늘의 메인은 인어라는 사회자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유를 던졌다. 시장으로 나가면 누구든지 싼값에 살 수 있는 인어를 이 자리에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생물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경매를 하는 이 비밀스러운 모임에서 인어가 이 단상 위에 올라온 건 거의 10년 전의 일이다.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자리를 뜨는 사람도 있었고, 사회자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사쿠마 레이는, 이 난리 속에서도 웃고있는 사회자의 얼굴을 보며, 이번 물건은 한 번 기대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노련한 사회자는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킨 뒤 사람을 시켜 검은 천으로 가려놓은 수조하나를 무대 위로 갖고오라고 지시했다. 인어 하나가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그 수조가 무대 위로 올라왔고, 사회자는 기대하라는 말과 함께 덮어두었던 천을 벗겨냈다. 어떻게 인어를 데려올 수 있냐며 화를 내던 사람도, 인어라는 말에 흥미를 잃고 그저 앉아있기만 하던 사람도, 그리고 어떤 인어가 나올지 궁금해하던 사쿠마 레이도, 천이 사라지고 문제의 인어가 조명 아래에서 모습을 나타내자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히 그 인어를 바라보았다.
사쿠마 레이는 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오래 살았고,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모임을 만든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다양하고 많은 생물을 이곳에서 보았고, 그것들을 샀으며, 또는 팔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만난 인어는 오랜 세월을 살아 온 사쿠마 레이조차도 처음 보는, 그런 희귀한 생물이었다. 단언컨대 그가 살아 오면서 봤던 인어 중 가장 아름다운 인어였다. 그 사쿠마 레이조차도 이렇게 놀랄 정도의 물건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회자는 조용한 장내를 즐기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찰을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 가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으며, 인어는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 초연한 얼굴로 수조 안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자, 자. 더는 없으십니까?"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갈 것 같더니 어마어마한 가격을 제시한 한 남자때문에 장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 남자는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나라에 무기를 파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이렇게 사들인 생물을 학대하거나 괴롭혀서 죽게만든다는 아주 고약하고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자였다. 그러나 가진 돈이 많았고, 그 질나쁜 사업을 눈감아주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고 뒤에서만 수군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회자는 카운트를 세며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그는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그 인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레이는 인어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는, 마주친 그 눈동자는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인어에게 있어서 레이 또한 다른 자들과 다름 없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레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회할텐데. 그것이 재밌어 입모양으로 그리 말했더니,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어는 괜찮다고, 그러니 도와달라고 다시 한 번 레이에게 부탁을 했다. 재밌구만. 어차피 레이가 이 인어를 살 생각이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상황이 재미있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니 내게 도움을 요청했겠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사회자가 1을 외쳤을 때 레이는 손을 들었다. 조용히 경매를 지켜보기만 하던 사쿠마 레이가 손을 들자 주위가 웅성거렸고, 그의 입에서 나온 금액을 듣자 다들 경악을 하며 말도 안된다 소리쳤다. 낙찰되기 전에 인어를 뺏긴 남자는 더 큰 금액을 불렀지만 이미 그정도는 예상했기에 결국 낙찰된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사쿠마 레이였다.
커다란 타월 하나를 가져다줄 수 있겠는가? 무대 위로 올라온 레이는 사회자에게 그리 말했고, 그는 곧 커다란 타월을 가져다주었다. 수조 안에서 인어를 꺼낸 레이는 타월로 그녀를 감싸안았고,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숨을 못쉬게 된 인어를 달래며 물기를 닦아냈다. 자, 입을 벌려보겠느냐? 이상한 짓을 하려는게 아니니 그리 경계하지 말거라. 마시면 푹 잘 수 있는 약이란다. 옳지. 타월과 함께 받은 작은 병의 뚜껑을 열어 인어에게 먹인 레이는 파란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잠에 빠져들자 다시 무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았다. 이제 사회자가 마무리를 하고 나면 경매는 끝나고, 모임도 끝난다. 잠들어있는 인어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이는 모임이 끝나기 전에 자신의 뒤에 서있던 남자를 손짓으로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는 지시를 받고 조용히 그 자리를 빠져나갔고, 이번엔 다른 남자를 불러냈다.
"코가야."
레이에게 이름으로 불린 남자는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바로 움직였다. 사쿠마 레이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불렀다면 코가에게 있어서 그건 듣지않아도 뻔한 명령이었다. 이것 참 믿음직하구만. 그의 성격대로 아주 화려하게 날뛰어주고 있는 자신의 믿음직한 충견을 보면서 레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약을 마셨으니 이런 소동에도 깨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그는 인어의 귀를 막아주었고, 두 눈을 가려주었다. 발밑으로 굴러 온 팔 하나를 보면서 적당히 하라고 잔소리를 해줄까하다가 그 팔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레이는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실내는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날뛰는 미친 늑대 한 마리를 피해 밖으로 돌아가봤자 그보다 더 한 괴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도망가는 건 무리였다. 이런 상황을 카오루가 본다면 제발 뒷일을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라고 화를 내겠지만 레이 입장에서는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살려, 주세요...
이게 끝나면 이 인어를 위해서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경매를 진행하며 자잘한 일을 도와줬던 소년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그리 말하며 레이 쪽으로 천천히 기어오는 소년에겐 다리가 한 쪽 없었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으니 방금 전에 도와달라고 애원하던, 인어가 생각이 났다. 「나」는 그다지 자선사업가도 아닌데 말이지. 이런 일이 하루에 두 번이나 일어나니 신기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살고싶으냐? 그럼 내 부탁을 들어주면 내 친히 너를 살려주도록 하마. 여기에서 본 걸 그 누구에도 말해서는 안된다. 할 수 있겠느냐? 소년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그 인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겠다고 레이에게 약속했다. 그 말을 들은 레이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손에 쥐고있던 고깃 덩어리 하나를 벽에 집어던지고 피가 튀었다며 짜증내고있는 코가를 불렀다.
미안하구나. 이 늙은이가 오래 살았더니 의심만 많아져서 말이다. 안타깝다는 얼굴로 그 소년을 바라보던 레이는 코가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먼저 내려가있을테니 마저 정리하고 오너라 멍멍아. 피가 묻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못하는 걸 아쉬워하며 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그 장소를 벗어나갔고, 뒤이어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뒤에 쓸데없는 말만 덧붙이지 않았어도 살았을텐데. 안타깝긴 하지만 굳이 자비를 베풀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자비나 연민같은 건 이 인어에게 베풀었던 걸로 충분했다.
**
레이.
인어는 레이를 어려워했지만 그가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임을 알자 아주 쉽게 마음을 열었다. 동화로만 봤던 흡혈귀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눈을 반짝이며 그리 말하는 인어는 매우 사랑스러웠다. 안즈는, 레이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잡혀오면서부터 바다로 돌아가는 건 포기했지만 그런 어두운 기운을 마구 뿜어내는 남자에게 끌려가는 건 죽어도 싫었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상대를 찾고 있었고, 그때 마침 눈을 마주친게 레이였다고 했다. 결국 그 상황에서 눈을 마주친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다른 사람에게 내게 한 것처럼 도와달라 매달렸을 거고, 결국은 누구라도 좋았다는 거구만. 그리 생각했지만 굳이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실수를 사쿠마 레이는 하지 않았다. 시작은 「누구라도 좋았다.」였지만 결국 최후에 선택받은 건 자신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레이, 듣고 있어요?
안즈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레이는 책 한권을 들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레이가 안즈에게 책을 읽어주는 날이었고, 안즈가 골라온 책은 키타하라 하쿠슈의 시집이었다. 메에메에 검은양씨, 양털을 가지고 있나요? 레이가 내는 양 울음소리가 재미있는지 그걸 듣고 있던 안즈가 웃었고, 레이도 웃는 얼굴로 마저 시를 읽어갔다. 가지고있어요. 세 자루에 한 가득. 한 자루는 주인님께, 한 자루는 마님께. 그리고 한 자루는 골목에서 울고있는 아가를 위해서. 거기까지 읽은 레이가 고개를 돌려 안즈에게 입을 맞췄고, 레이의 사랑스러운 인어는, 수줍어하면서도 그 입맞춤을 받아주었다.
인어가 바다를 이야기하는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좁은 수조 안에서 헤엄을 치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두고 온 다른 친구들이나 가족의 이야기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새 안즈의 세상은 레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쿠마 레이는,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사랑스러운 인어를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방법을 써서 제 옆에 두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지금의 평화가 계속 되길 바라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 전철에서 하품을 하며 봤던 기사였다. 그러나 제목만 봐도 매번 이 시기만 되면 올라오는 낚시기사인 것 같았고, 조회수나 댓글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었다. 애초에 그런 기사를 10년 째 보고 있는데 이제와서 동요할 리가 없잖아?
아게하🦋 : 엄청난 희소식이니까 당장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라구 www 지금 난리났단 말이야 오후 7 : 34
미유키❄️ : o(*`・ω・)o≡o≡○)`3゚) 별 거 아니면 가만 안놔둔다 아게하쨩 오후 7 : 34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이렇게 그 얌전하던 아게하가 난리를 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속는 셈치고 한 번 확인해보기로 했다. 어, 실시간 트렌드에 왜 이 사람 이름이 있지. 오늘 무슨 스케쥴이 있었나? 유닛 활동은 이미 끝났고 멤버 각자 휴식기를 가지고 쉬는 터라 이렇게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뜰리가 없는데. 뭔가 싶어서 눌러보니 검색창에 나오는 트윗은 '드디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맘놓고 저도 시집가겠습니다.' '낚시아니지? 어떡해 10년 동안 희망고문 너무 당했나봐 거짓말같아' '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기쁘냐 오빠 축하해요 행복하게 살아...' 같은 것들이었다. 여기서 미유키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에이, 설마. 학창시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그들이 스쿨아이돌이었던 시절부터 함께 해 온 미유키는 자신의 설마가, 진짜이길 아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엄청난 리트윗 수와 마음을 자랑하는 트윗 내용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아게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게하쨩!!!"
-응. 미유키쨩. 확인했어?
"오늘 술마시지 않을래? 어쩜 공개 타이밍도 휴일 전 날일 수 있지? 다 알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닐까?"
-그 사람이라면 왠지 그럴 것 같지않아? 좋아 어디서 만날까. 내가 미유키쨩한테 가는게 좋으려나?
"좋아. 아, 어쩌지. 기자회견 내일이라며? 아게하쨩 오늘 자고 갈래? 우리 같이 봐야해 그거."
-응응. 그러자. 그럼 나 준비해서 바로 나갈게.
아게하는 전화를 끊었고, 미유키는 다시 한 번 더 기사를 읽어보았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이건 전부 현실이었다. 7년간 고통받았던 것들이 떠오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초마다 올해 결혼할 것 같은 공개연인으로 제일 먼저 거론되었지만 다른 순위의 커플들이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는데도 그 두 사람은 그 어떤 소식도 들려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이돌이 어떻게 팬을 두고 공개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냐고 따지는 팬도 많았고, 미유키처럼 응원을 하는 팬도 있었다. 유메노사키 시절부터 그 두 사람을 지켜봐온 미유키는 오히려 결혼까지 갔으면 좋겠다는 찬성파였지만 인터넷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 '하아? 이봐 너 제정신? 머리 어디 부딪히지 않았어? 그 사람 아이돌이라구?www' 같은 말을 들으며 엄청나게 욕을 먹었지만 한 3년이 지나자 팬덤이 바뀌었고, 이제는 그의 연애를 반대하는 사람을 이상하다고 몰고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였다. 이제 슬슬 결혼하면 좋을텐데~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한 건. 공개연애를 시작한 게 10년차지 사실은 3년 동안 그 사실을 숨겨왔던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따지자면 연애만 6년을 해왔다는 건데, 보통의 연인이라면 그쯤에 결혼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도통 그런 소식이 들려오지를 않았다. 자리도 안정되었고, 겨우 결혼하나로 무너질 남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팬덤은 그가 얼른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갖길 바랐으나 그 후 7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를 두고 언론에서는 헤어진 거 아니냐는 추측이 돌고 온갖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심야의 토크쇼에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해 엄청난 애정을 과시해주었기에 그런 루머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두 사람만큼 써먹기 좋은 소재가 없으니 매번 '천생연분 두 사람 결혼임박....' 이라는 제목에 낚여 기사를 클릭하면 정작 나오는 내용은 '올해는 드디어 결혼하나' 같은 추측성이나 그랬으면 좋겠다, 같은 소위 말하는 '오타쿠'의 마음으로 쓴 것들 뿐이었다. 거기에 매번 속아서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이렇게 속이려 드냐고 화를 내기도 하였다. 급기야 희망을 버리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언젠가는 하겠지 축의금이나 모아두자, 같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오빠 올해는 그 분이랑 결혼할거죠?' 팬싸인회나 악수회를 가면 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였다. 옆에 다른 멤버들은 그걸 듣고 억지로 웃음을 참았으며, 그는 언젠가는 하지않겠누? 같은 말을 하며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화제를 완전히 돌려버렸다. 누군가는 뭐야 이 팬덤 무서워 같은 말을 했지만 그들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아이돌이, 얼른 그 '프로듀서'와 빨리 결혼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아 트릭스타의 그 프로듀서 말이죠. 제 첫사랑이었어요.'
'...좋아했죠, 아주 많이. 그런데 어떡해요. 다른 남자가 좋다는데.'
'사실 그 사람이랑 사귄다고 했을 때 다들 말도 안된다고 얼마나 화를 냈는데요~ 뭐,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모두의 프로듀서였는데 말이야~ 치사하게 먼저 선수친 거 있죠? 진짜 무서운 사람이에요.'
'저기, 프로듀서~ 언제쯤 헤어질거야? 나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지~'
'제가 그 남자는 아니라고 그렇게 설득을 했는데 말이죠...대체 어떻게 꼬신 거야 그 빌어먹을 흡혈귀?'
하루가 멀다하고 그 학교 출신 아이돌이 방송에 나와서 저런 말을 하는데, 대체 그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오래 그를 봐온 팬들은 그에게 있어서 소문의 프로듀서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누군가가 채갈까봐 얼마나 걱정했는가. 하물며 같은 그룹의 멤버도 '으음...우리 리더한테는 좀 과한 사람 아니겠어?' 라는 말을 농담삼아 할 정도였고 그 중 한 멤버의 첫사랑이 그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그래서 얼른 결혼을 해서, 프로듀서가 누구의 사람인지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주길 팬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은 그의 결혼을 축하하는 날임과 동시에 그 고통에서 모든 팬들이 해방되는 기념비적인 날이기도 했다.
<언데드의 리더 사쿠마 레이, 드디어 결혼...."여러분 꿈이 아닙니다. 현실이에요.">
-언데드의 리더 사쿠마 레이가 길고 긴 연애 끝에 드디어 결혼을 한다. 결혼기사가 난 것은 오늘 오전 9시였으나 매년마다 소위 말하는 '낚시'기사에 지쳐있던 팬들은 이번에도 낚시라고 생각하여 보지도 않고 넘겼으나 같은 날 오후 6시경 공식 계정에 올라 온 그의 긴 글을 통해 오전에 났던 기사가 진실임을 알게 되었다. 오래 기다려왔던 결혼이니만큼 축하의 물결이 이어졌으나 일부 사람들은 '이거 실화냐' '상대는 사쿠마 레이야 식장에 들어갔다는 기사가 뜨기 전까진 방심해선 안돼' '오늘 만우절이야? 아니지?' '자기야 사쿠마 레이 결혼한대! 우리도 식장잡자!' 같은 말을 하며 오랫동안 낚시기사에 시달려왔음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사쿠마 레이는 공식 계정에 올린 글에서 내일 생중계로 진행되는 기자회견을 통해 향후 계획에 대해서 밝히겠다고 말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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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는 화면을 통해 지금 기자회견 중인 미래의 남편을 바라보면서 땅이 꺼질만큼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기자회견에서 사고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미리 약속은 받아두었지만 그 청개구리같은 남자는 이런 쪽으로는 약속을 지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회사는 이미 포기상태였고, 언데드의 다른 멤버들도 신경쓰지 않을테니 마음대로 하라며 그에게서 관심을 끄는 바람에 거기에 겁을 먹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떠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안즈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결혼식의 일정,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 그리고 안즈와 관련된 별 쓰잘데기 없는 질문 몇개가 전부였고 레이도 프로답게 미리 준비한대로 기자들에게 대답해주었다. 이대로 끝나면 좋을텐데, 두 손을 모으고 기도까지 하던 안즈는 이제 마지막한 마디만을 남겨두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좀 편한 말투를 써도 괜찮을까요? 아, 감사합니다.'
'흠, 흠. 지금 이 기자회견을 보고있을 내 소중한 아가씨. 긴 시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나를 기다려준 것, 정말 고맙고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네. 힘들게 했던 만큼 행복하게 해줄터이니, 그 부분은 기대해도 좋을 것 같구만.'
'그런 의미로 오늘 밤에도 잔뜩 예뻐해줄 생각인데,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구먼? 아, 문을 잠그어도 소용없다네. 아가씨 집의 열쇠, 누가 나에게 줬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럼 이따보자, 안즈.'
...왜 그 마지막 한 마디에서 그런 폭탄 발언을 하는 걸까! 안즈는 지금 어딘가에 머리를 부닺혀서 모든 걸 잊고싶은 심정이었다. 폭탄발언을 했으니 다들 난리가 났을 거고, 안즈는 제 편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며 트위터를 들어가보았다.
드디어 결혼한다 만세 @weareundead
야 봤냐 역시 사쿠마 레이다www
나 적금깬다 말리지마 @undead_atm
어떻게 예뻐해주겠다는 거지? 아 남의 커플 연애사정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궁금해 미치겠네
[언/03] 결혼기념 배포본 나옵니다 @tomatolove
이게 기자회견이야 연애하는 거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자리야 물론 난 좋다 더해라
(´-`).。oO(이거 실화냐)@nikutaberu
그런데 열쇠말이지~ 사쿠마 레이가 저번에 심야라디오에서 자기가 달라고 떼썼다고 하지 않았어? 되게 프로듀서씨가 주고 싶어서 줬다는 걸로 들리는데www
ㄴ 이제 우리 프로듀서 노리지마라 @tampopo_1
@nikutaberu 그냥 그런 거 아냐? 떼를 쓰긴 했지만 직접 준 건 그래도 너라고 못박아두는 거w w w
이 팬덤 진짜 이상해! 이런 걸 말리기는 커녕 오히려 신나서 떠들고 있는 걸 보면서 안즈는 정말로 제 편이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아,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 집에 오면 당장 나가라고 쫓아내버릴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또 그렇지 않은지 아직 저녁도 못 먹었을 레이를 위해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달려갔다. 레이만 안즈에게 무른 것은 아니었다. 안즈도 그만큼 레이에게 물렀기 때문에, 몇 마디만 주고 받아도 문을 열어줄 게 뻔했다.
그리고 나도 보고 싶으니까. 이 기자회견을 위해서 며칠 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알기에, 그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기에 안즈는 그가 도착하면 숨도 못 쉴 정도로 안아 줄 생각이었다.
노동성에 신고할 거에요 이렇게는 못살아
아니 이 경우에는 주인님한테 말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저런 남자를 고용하고 있는 주인님도 한 패라구요!
응 안즈쨩 일단은 진정해줘 주인님한테 그러면 큰일나...
훌쩍 거리고 있는 안즈에게 차마 저 집사장이 우리 주인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어 메이드 A는 입을 다물었다. 저택의 사용인 모두가 강제적인 명령 하에 이 신입 메이드에게 주인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안즈를 괴롭히는 그 집사장과 주인이 동일인물이고 너는 이미 찍혔으니까 얌전히 있는게 미래를 위해서 좋지않을까...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본인의 미래를 위해서 그것만은 참아야만 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치마 안에 얼굴을 집어넣으셨어요."
"응 그렇구나 치마 안에....뭐?!"
아 주인님 제발...
"제가 오늘 실수로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그때 집사장님이 옆에 있었거든요...발목도 접지르는 바람에 그거 확인하겠다고 데려가셨는데, 처음에는 발목도 봐주고 응급처치까지 해주시길래 아 이런 좋은 점도 있는 분이셨구나...했는데..."
"응...그런데...?"
"갑자기 치마를 들춰보시더니 허, 허벅지에..."
아 주인님 진짜 제발...
"그, 저 솔직히, 싫은 건 아닌데..."
"....뭐?!"
"저도 집사장님이 좋긴 한데...그래도 이런 건 좀 절차를 거쳐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 그건 맞는데, 집사장님이 너한테 그런 짓 하는게 싫지 않다고?..."
"그게...좀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니까 그것만 고쳐주시면 좋겠어요. 아니 그전에 여, 연애부터 하자 말했으면 저도 받아줬을텐데..."
"저기, 안즈쨩. 너 그럼 대체 뭐가 문제니?"
"사귀자는 말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언제 욕했냐는듯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말하는 안즈는 메이드A의 눈으로 봐도 매우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러니까 결국 사귀자는 말도 하지 않고 손부터 댄 게 마음에 안들 뿐 인 거잖아?! 덧붙여서 사람 많은 곳에서 그러거나 일하는 중간에 건드리는 게 싫은 것 뿐이고! 대체 집사장님의 어디가 좋냐고 물으니 얼굴이라는 답이 단박에 날라왔다. 주인님 축하드려요. 두 사람 다 첫 눈에 반한 포인트가 같네요. 메이드A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아니 애초에 주...아니 집사장님이 너한테 그런 짓 하는 걸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물론 좋아서 그러는 게 맞지만 뭔가 곱게 키운 막내 여동생을 몹쓸놈한테 시집 보내는 기분이 들어 메이드A는 그렇게 따졌다.
"....안좋아하는데 그런 짓 하는 거면 지금 당장 경찰청에 신고해도 괜찮은 거죠?"
"아니 그 분이 그래보여도 거기까지 최악인 건 아니니까 진정해 안즈쨩."
"다행이다 노동성이랑 경찰청에 동시에 신고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저기 정말 노동성에 신고할거야? 안즈쨩 좋아한다면서..."
"공과 사도 구분 못하고 일하는 시간에 그러는 건 아무리 좋아도 넘어가면 안되는 거잖아요?"
"나 안즈쨩의 그런 점 정말 좋아해..."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안즈쨩은 집사장님을 좋아하고 있으며 그 분이 고백만 하면 받아줄 것이고 파렴치한 짓을 하는 것도 지금도 물론 좋지만 연인사이가 되면 완전 좋으니까 무엇이든지 받아줄 수 있다는 건데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자꾸 일하는 시간에 그러니까 신고하고 싶다 그런 거야? 언니 숨 안차요? 죽을 것 같으니까 나 물 한 잔만 줄래? 메이드A는 찬 물 한 컵을 받아서 그대로 쭉 들이켰고, 여기에 뭐 덧붙일 만한 내용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안즈는 정리한 게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메이드A는 이 환장할만한 관계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쨌든 주인님이 고백만 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 아냐?!
내가 왜 주인님 연애사업까지 도와줘야 하는 거지. 메이드A는 사직서를 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 환장하게 만드는 두 사람이 얼른 이어지길 바랐다. 안즈쨩. 나는 네가 좋기때문에 저택의 안주인이 되어도 좋거든? 그러니까 제발 너라도 먼저 고백해... 그렇게, 내뱉지 못한 속마음은 찬 물과 함께 삼켜질 뿐이었다.
**
이 집에서 집사장 사쿠마 레이가 주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새로 들어온 신참메이드 안즈 뿐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본인이 직접 새로 들어오는 사용인들의 서류를 확인하더니 일 잘하고 있던 집사장을 휴가 보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그 집사장인 것처럼 배우도 울고 갈 연기로 지금 몇달 째 이어오고 있었다. 왜 저런가 싶어서 이 집안에서 가장 오래 된 메이드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용인 전체에게 그런 명령까지 내리시면서 한 사람을 속이려드냐고 따졌더니 대뜸 날라온 답이 토끼사냥이었다.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진실을 밝힐테니 다른 사람들 입단속이나 확실히 시켜주게나. 몇 십년 동안이나 그를 보필해 온 메이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저택의 정원사나 요리사, 메이드와 집사들은 엄청나게 신경쓰며 그 사실을 숨기려고 애를 썼다. 뭐라고 따지고 싶어도 주인이 어딘가의 집사처럼 일을 너무 잘하는 바람에(대체 어디서 배워온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다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 토끼사냥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새로 온 메이드인 안즈는 착하고, 일을 잘했고, 일을 좋아했다. 제 몸만한 빨래 바구니를 들고도 척척 잘 걸어다녔으며 제 몸이 더러워지거나 다치는 궂은 일도 거리낌없이 잘 해내서 단 시간 내에 저택의 아이돌이 되어 사랑받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저택의 사용인들은 빨리 이 토끼사냥이 끝나 평화를 찾았으면 마음도 있었지만 저런 애를 속에 시커먼 구렁이가 들어있는 주인에게 보내야한다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정원사B : 주인님이야 잘생기고 능력도 좋고...뭐 돈도 많고 좋은 분이신 건 저도 아는데, 뭐랄까...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성에 안차서 짜증이 나는 장인어른의 마음이랄까...
메이드H : 애초에 연애하겠다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속이는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요? 사람관계에 신뢰가 없어지잖아요! (메이드A:안즈쨩이라면 받아주지 않을까?) 그래도 안돼 제가 싫어요
요리사T : 그 꼬마아가씨가 행복하면 된 거 아닐까 싶은데...주인의 연애사업을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 거짓말같은 거 못하니까 더 그런 것도 있지만 말야~
집사M : 솔직히 말해서 안즈씨를 속이는 일 자체가 너무 죄책감이 듭니다. 주인님때문에 왜 저희까지 사기ㄲ...아니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하나요. (집사K:저녀석 방금 사기꾼이라고 하려던 거 맞지?) 그치만 맞지 않습니까? 저정도면 사기꾼이죠.
메이드장Y : 뭐 집사장의 일까지 하고 계시고 본인 일도 잘 하고 계시니 문제될 건 없지 않습니까? 다만 업무시간에 안즈양을 데리고 사라지는 건 좀 그만 두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세요. 어쩜 40년 전이랑 바뀐 게 하나도 없습니까?
사용인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던 건 녹음되어서 그들의 주인에게 넘어갔고, 충분히 기분 나쁠만한 말이 포함되어있음에도 사쿠마 레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덫이 토끼를 물 것 같으니 조금만 더 버텨주게나. 이제 곧 잡힐 것 같은 토끼를 떠올리며 그들의 주인은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부탁을 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부모님이었다. 기본적으로 사쿠마 가家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게 가풍이었고, 자식교육도 거기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정착도 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집을 비우는 날이 잦은, 후계자인 첫째 아들을 붙잡고 이제 그만하라며 혼내거나 그가 돌아오는 날에 맞춰서 기다리고 있거나 하는 일을 그의 부모님이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여행가방을 대충 방에 던져두고 나오니 온 가족이 모여서 진지한 얼굴로 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서 집안에 큰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덩달아 긴장해서 의자에 앉으니 그의 어머니가 평소와 다름 없는 얼굴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긋나긋하게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져서 불편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걸 느끼고 도망갔어야 했는데, 그래도 별 일이 있겠나 싶어서 느긋하게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결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어디 한 곳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외국을 돌아다니는 것이 더 좋았다. 이 나라는 너무 좁았고, 그의 생각과 이상을 펼치기엔 모자란 곳이었다. 좀 더 많은 걸 보고 싶었고, 많은 걸 배우고 싶었다. 운좋게도 그 모든 걸 머릿 속에 저장하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가졌으니 아무도 사쿠마 레이를 막지 못했다. 집안의 친척들은 이제 정착하고 가문을 이어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그는 그런 곳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굳이 자신이 아니어도 아들은 많았다. 굳이 자신이 이을 필요도 없었고, 정계에 나가는 건 더더욱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의 부모님도 거기에 동의했기에 여태까지 들어오는 혼사를 그들 선에서 잘라내고 거의 방관했던 것인데 이제와서 갑자기 결혼이라니? 레이는 말도 안된다며, 자신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그의 부모님은 답지 않게 아들의 말을 흘려들으며 이미 결정난 사항이니 준비하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이제 너도 나이가 있으니 정착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론 그리 말하는 그의 어머니도 본인이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다는 자각이 있었는지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반정도는 진심인 것 같았다.
기가 막혀서 도대체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텐쇼인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라고. 후처가 낳은 딸인데 집안 전체가 예뻐하는 귀한 고명딸이었다. 그런 귀한 자식을 나같은 사람에게 줘도 괜찮냐 물으니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얌전히 맞선 준비나 하라는 말이었다.
이대로 풀어놓지도 않은 제 짐을 들고 집을 나가면 해결되는 일이긴 했지만 상대가 텐쇼인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화족 집안 중 하나였으며, 현재 황족과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식으로 막나갔다가는 큰싸움을 번질 가능성이 있었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 집안의 후계자인 텐쇼인 에이치가 어떤 사람인지 레이는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이 혼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쿠마, 씨가, 아, 미치겠다. 결혼이라니, 아 잠시만, 나 진짜...웃겨서 기절할 것 같아."
"시끄러워요, 카오루~"
"그치만, 푸흡. 이제 얼굴만 봐도 웃긴데 어떡해!"
배를 잡고 몇십분 동안이나 쉬지않고 웃어대던 카오루는 이제 진정했는지 차게 식은 차를 들이키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냈다. 정략결혼을 하게 생겼다는 말을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대충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에 심기가 불편했지만 만약 입장이 바뀌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게 분명했기에 레이는 화를 억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치만 레이 형도 이제 정착해야하지 않겠어?"
"낫쨩의 말이 「맞아요」, 레이."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는 것이다. 레이, 넌 정착해야할 필요가 있어."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당분간은 머무르는 게 어떤가요 레이?"
"내가 이런 말 하기도 뭣하긴 한데, 그만 좀 돌아다녀. 봐, 이번 일도 밖으로 돌아다니는 사이에 멋대로 결정된 거잖아. 사쿠마 씨만 손해라니까?"
친구라는 것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한 마디씩 끼얹는 것이 하나같이 짜증나는 말들 뿐이라 뒤집어 엎고 나갈까 하다가 레이는 여기가 자신의 집, 자신의 방임을 깨달았다. 전부다 꺼지라고 말해봤자 한 귀로 흘려듣거나 그의 말대로 꺼지면서도 속을 뒤집어놓을 인간들 뿐이니 뭘 해도 본인의 손해였다. 만남이 가까워지자 평소와 달리 여유와 느긋함을 잃은 레이는 다섯명의 좋은 먹잇감이었고, 그들은 이제 정착할 때도 됐다며, 오히려 잘 됐으니 얼른 결혼하라고 부추겼다. 생글생글 웃으며 속을 1등으로 뒤집어놓던 와타루는 괴로워하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레이, 걱정말아요. 그녀는 좋은 사람이랍니다."
"...만나보기라도 한건가?"
"그럼요. 에이치가 항상 그녀를 데리고 나오니까 모를 수가 없죠."
"항상 데리고 나온다고?"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요."
"아름답고 멋진 여성이랍니다. 레이도 만나보면 생각이 바뀔 겁니다. 기대해도 좋다구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가 야박한 히비키 와타루가 저렇게까지 말하니까 그래도 말을 하면 어느정도는 알아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것이긴 했지만 레이는 이 결혼을 할 생각이 없었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설득시켜서 이 혼인을 무효화시킬 생각이었다. 그럴거면 어느정도 말이 통하는 사람인게 좋으니까,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말로 사람을 회유시키지 못한 적이 없으니 아마 이번에도 성공할 것이다. 사쿠마 레이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믿었다.
여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소녀는 조금 짧은 머리에 푸른 눈이 인상적인, 귀엽게 생긴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제 눈을 피하지 않고 인사를 하는 소녀의 눈을 보고 텐쇼인 에이치를 떠올렸지만 자세히 보니 에이치의 눈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라 다행히도 얼굴을 보면서 그 인간을 떠올리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다. 아무 무늬도 없는 붉은 색의 기모노를 입고 얌전히 인형처럼 앉아있던 소녀를 보면서 와타루 말과는 달리 꽤나 귀찮은 성격의 아가씨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소녀는 레이가 걱정했던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대화를 나눈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세 편해진 레이는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냐고 물어보았고 소녀는, 안즈는 살풋 웃으며 안그래도 제가 알던 그 말투가 아니라 이상했다면서 편하게 말해도 괜찮다고 했다.
"텐쇼인 군이 말해주던가?"
"와타루 씨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오라버니는 레이 씨 이야기를 잘 안하세요."
"의외구만."
"오라버니는 이 결혼을 끝까지 반대하셨는걸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에이치가 하나 뿐인 여동생을 아낀다는 소문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문이었다. 그래도 이 결혼을 통해서 본인이 얻는 것도 분명히 있을테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서로에게 이득이기 때문에 오히려 결혼를 부추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안즈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예상도 못했던 말이었다. 그 남자는 안된다고, 세상에 좋은 남자가 그렇게 많은데 어째서 그 남자냐고. 그 말을 듣고나니 조금 불쾌했지만 자신과 에이치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라서 참고 넘어가주었다. 에이치가 반대하니 집안의 다른 사람들도 반대를 했다고 한다.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더 적은 남자에게 시집갔다가는 외로워질거라고, 더군다나 소문도 좋지 않은데(사쿠마 레이는 자신의 외모와 성격때문에 대충 사교모임에서 어떤 소문이 돌고, 자신이 어떤식으로 보여지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분명히 후회할거라고, 원하는 사람과 만남을 주선해줄테니 그 남자는 안된다고 말리는 가족들을 설득한 사람은 안즈였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나니 레이는 의문이 생겼다. 집안의 강요로 억지로 나온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족들이 나서서 말렸다고 하니 분명히 이건,
"먼저 결혼하자고 말하는 여성은 싫으신가요?"
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말해서는 안된다는 걸 알기에 레이는 속으로 집어삼키며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걸 흠이라고 생각할만큼 꽉 막힌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걸 이 나라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텐쇼인 가의 딸에게 들을 줄은 정말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기에 당황스러웠고,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안된다는 오라버니를 붙잡고 떼를 썼어요. 나는 이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무작정 그렇게 혼담을 넣으면 당황하실까봐 그전에 제 생각을 정리한 연서를 보냈는데 보아하니...읽지는 않으신 것 같네요."
레이는 자신의 방 안 책상에 쌓여있던 수많은 편지를 떠올렸다. 애초에 여자들에게서 오는 편지가 한두통도 아니었고, 그걸 읽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기에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뭐...이 자리에 나와주신 것만으로도 저는 괜찮아요. 이렇게 결혼을 전제로 시작하는 연애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소매로 입을 가리고 얌전히 웃는 얼굴을 보면서 레이는 자신이 제대로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집안이고 뭐고 처음부터 도망갔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고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일은 저질러졌으니 도망갈 수도 없었다. 생긴 건 전혀 다른데,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에이치를 닮은 것 같아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다가오는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예 이 상황을 벗어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 안즈가 한 말로 흥미가 생긴 레이는 당분간은 이 소녀에게 어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특별했던 그 연애는, 끝도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끝났다. 아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흔한 삼류연애소설과도 비슷한 이별이었다. 그는, 안즈를 위해서 헤어지는 거라고 했다. 아가씨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힘든 것이니까, 아프지 않길 바라니까, 이런 나를 받아주기에 너는 아직 너무 약하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그 말을 하는 당사자의 얼굴에 그때 들고있던 커피라도 부어주고 왔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그와 맞췄던 반지를 버리지 못한 건, 인정하기 싫지만 미련이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차마 손에 끼고 다닐 수는 없어 줄에 걸어 옷 안으로 숨겨 둔 그 반지는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와도 같았다. 그런 비참한 상황을 겪고도, 그를 완전히 놓아주지 못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 그걸 알면서도 안즈는 끝내 그 반지를 버리지 못했다.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그다지 겹치는 일을 잘 없었다. 어느정도 경력이 쌓인 안즈는 현장에서 직접 뛰는 것보다 회사에서 앉아있는 일이 더 익숙해졌고, 레이는 여전히 현역이었기 때문에 마주치는 일은 잘 없었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 방송국에서 얼굴을 볼 때도 있었지만 일부러 무시했고, 티나지 않게 연기를 하며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 물론 그런 연기를 해봤자 레이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는 그런 것들로 안즈를 붙잡아 따질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안즈는 이 남자가 술에 취해 제 몸도 가누지도 못하면서 저를 끌어안고 끊임없이 보고 싶었다 말하는 것을 보면서 그 말에 홀려서 이 취중진담을 진지하게 받아줄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어차피 술에서 깨면 기억도 하지 못할 일인데, 한 여름 밤의 꿈같은 일이 될 게 뻔한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주냐며 계속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 남자가, 그 사쿠마 레이가 그 얼굴에 그리움과 애정, 그리고 욕망을 가득 담고 저를 바라보고 있으니 단 한 순간의 꿈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헤어질 때는 그렇게 저주 했으면서, 이 세상에 당신만큼 이기적이고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라며 이제 그 누구도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거라는 끔찍한 저주를 내뱉었으면서.
손바닥, 손등, 뺨과 이마, 눈과 코, 그리고 입술. 차례대로 입을 맞추며 저를 받아달라 애원하는 눈빛으로 끊임없이 안즈를 유혹하던 레이는 기어이 그녀를 침대 위로 밀어눕혔고, 안즈는 그 손길을 밀어내지 않고 저를 내려다보는 레이의 탁해진 붉은 눈을 말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다. 오랜 시간 그를 봐왔고, 헤어진지도 오래되었지만 저 눈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오늘 아침 왠지 불안하여 목에 걸린 반지를 일부러 빼고 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즈는 입을 열었다.
'...지금 이러면, 내 얼굴 다시는 못봐요.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도 못돌아가요. 그래도 괜찮아요?'
다급한 손길로 셔츠단추를 풀던 레이는 안즈의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상관없다는 듯 마저 셔츠의 단추를 풀어나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생을 그 선택으로 후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겠지.'
그답지 않은 바보같은 답이었지만, 안즈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일까. 왜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몇시간 전의 일을 되돌아보기? 아니면 옆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를 해보기? 아니, 둘다 틀렸다. 지금 안즈가 해야할 건, 대화나 몇시간 전의 일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가 깨기 전에 도망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어제는 에이치가 주관한 유메노사키 학생들만 모인 동창회가 있었고, 안즈는 그곳에서 이 사람을 아주 오랜만에 만났었다.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고, 트릭스타와 활동기간이 딱히 겹치지도 않아서 더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따로 연락할만큼 깊은 사이도 아니었고, 그는 안즈에게 언제나 좋은 선배였지만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된 입장에서는 그런 이유로 연락하기가 조금 힘든 것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동창회가 잡혔고,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사실 몇 명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도 전부 간만에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안즈는 어제 매우 많이 들떠 있었고, 평소라면 당연히 했을 주량조절도 하지를 못했다.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론은 술을 마시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고, 단지 일어났을 때 자신이 속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사고를 쳤구나,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차라리 옆에 누워있는게 친한 친구였다면 그냥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둘러대거나 하룻밤의 실수, 같은 걸로 넘어갈 수 있을텐데 왜 하필이면 이 남자인지 안즈는 신이 있다면 신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였다.
"왜 하필 이 사람이야..."
자는 얼굴도 왜 이렇게 잘생겼는지. 안즈는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레이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답답해서 머리를 붙잡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왜, 하필, 좋아하는 남자랑, 이런 일이 생긴건데! 자는 사람이 깰까봐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어 속으로 그렇게 외친 안즈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와 옷을 챙겨입었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상자라거나, 근처 휴지통에 버려져있는 불투명한 무언가 따위 나는 모르는 물건이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왔다.
안즈는 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은 트릭스타 뿐이었고, 네 사람은 내심 잘되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안즈는 지금처럼 혼자 좋아하는 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레이가 저를 좋아한다는 확신도 없었고, 설사 기적적으로 그와 이어진다고 해도 그 관계를 잘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인기 아이돌이랑 숨어가면서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자신이 레이의 발목을 잡는 짐꾼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혼자 좋아하다가, 나중에 아주 나이가 많아졌을 때 그냥, 당신을 좋아했어요. 라는 한 마디만 전할 수 있다면 안즈는 충분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거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 위로 쓰러진 안즈는 이제 앞으로 레이 얼굴은 어떻게 봐야할지, 그리고 레이가 일어나서 옆에 안즈가 없는 걸 알고 연락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같은 것들을 고민해야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라 그런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차라리, 정말 차라리 그 밤의 기억이 있기라도 하면 덜 억울할텐데 그때의 기억은 누가 가위로 잘라낸듯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질거면 후에 두고두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주던가. 대체 이게 뭐야... 숙취 때문에 머리는 깨지겠고, 몸은 찌뿌둥하고, 온몸이 아파서 그대로 자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씻고 자야한다는 생각은 있는지 안즈는 결국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오늘부터 며칠 간 휴가를 받았고, 휴일 내내 집에 틀어박혀서 안나오면 되는 일이다. 휴가가 끝나면 트릭스타 아시아 투어로 일본을 떠나야 하니까, 레이와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망칠 계획을 짜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안즈는, 씻기 위해 옷을 벗다가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는 말도 안된다며 다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기분좋게 눈을 뜨고 팔을 뻗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과 분노는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자신보다 일찍 눈을 뜰 줄은 몰랐고, 이건 레이의 판단미스였다. 안즈가 누워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침대 위를 보면서 레이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물론, 이럴 때를 위해서 마련해둔 대책이 있었고, 레이는 웃는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여져있는 물건을 들어올렸다.
"아가씨도 참. 여전하구만."
가장 중요하게 챙겨가야할 물건, 프로듀서라면 잊어서는 안되는 휴대전화를 이렇게 놓고가서야 되겠나 싶었지만 어젯밤에 이걸 미리 빼둔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레이가 깨기 전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급하게 뛰쳐나간 안즈가 자기 가방에서 무엇이 없어졌는지 알아차리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는 길에 없어진 걸 알아차렸다고 해도 레이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 것도 무리일테니 안즈는 어쩔 수 없이 레이와 만나야만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미리 빼두길 잘했지. 물론 이게 아니라도 레이는 갖가지 핑계를 대서 안즈를 만나거나 찾아갔을테지만 그래도 명분이라는 건 중요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비밀번호조차 해놓지 않은 안즈의 휴대전화 속 배경화면을 다시 한번 확인한 레이는 재미있다듯 얼굴로 웃었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비밀번호조차 없었던 휴대전화의 잠금화면이 애써 숨기고는 있지만 누가봐도 자신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해보니 배경화면에는 떡하니 레이의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최근에 발매된 화보였고, 사진을 보아하니 직접 찍은 것 같았다. 이미 일은 저질렀지만 자신이 잘못생각한 거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조금은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레이는 다시 한번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안즈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애써 숨긴다고 노력한 것 같았지만 안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레이의 눈을 속이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고백을 하지 않고 모른 척 했던 것은 안즈가 그걸 원했기 때문이었지, 레이가 원해서는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으니까, 그는 안즈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천천히 기다려줄 생각이었다.
그랬던 자신이 이렇게 태도를 바꾸게 된 건 그 이유때문이었다. 안즈는 절대로 고백하지 않겠다며, 이대로 짝사랑으로 남는게 소원이라 말했고 안타깝게도 우연히 지나가던 레이가 그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그 말을 들으니 무언가가 머리를 세게 내려친 기분이 들었고,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안즈가 이쪽으로 스스로 걸어 오길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머무른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조금 비열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간신히 손에 들어온 걸 놓칠 수는 없으니까.
취중진담이라고, 취한 얼굴로 웃으면서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너무 좋아서 사실 지금도 죽을 것 같다면서도 마음껏 하지 못해 자신의 손가락만 잡고 있던 안즈가 떠올랐다. 취하면 묻는 대로 전부 성실히 대답해주는 그녀는 레이의 질문을 하나도 피하지 않고 답해주었고, 마지막에는 대담하게 안아달라는 말까지 했었다. 그리고 자신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면서도 이대로 없던 일로 한 채 모른 척 넘어갈 사람은 죽어도 아니었다.
몸에 상처를 낼 수 없다면서 밀어내다가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깨물었던 안즈가 낸 상처에 입을 맞추면서, 레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없는 척 하지말고 문 열게나.
바깥에서 들려오는 레이의 목소리에 안즈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절대 안열어주겠다는 듯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실수로 레이인지 모르고 문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안에 자신이 있다는 걸 들킨지는 오래였지만 그래도 안즈는 필사적으로 사람이 없는 척 연기를 했고, 체인 때문에 완전히 열리지는 않았지만 살짝 열린 문의 틈 사이로 그런 안즈의 모습을 보면서 레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포식자를 피해서 숨은 소동물 같구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떻게 이 문을 열게할까, 고민하던 레이는 조금 사악한 얼굴로 웃으며 주머니에서 '그 물건'을 꺼냈다.
-아가씨. 그러고보니 놓고간게 있던데...그다지 필요가 없는 모양이지?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보면서, 안즈는 아침에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가방에 자신의 물건이 들어있는지, 뭐가 없어졌는지 그런 걸 생각도 않고 도망쳤던 자신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지금와서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즈는 결국 현관문을 열었고, 문 앞에는 웃고있지만 누가봐도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쿠마 레이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쿠마 선배..."
"흐음...「사쿠마 선배」라..."
"그...그야 선배니까, 평소에도 그렇게 불렀잖아요."
"매정하구먼. 어젯밤에는 그렇게 이름으로 불러주더니..."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얼굴을 보자마자 날라오는 충격적인 말에 안즈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까지 더듬으며 무슨 소릴 하냐고 따졌지만 레이는 느긋하게 웃으며 현관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틈에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뺏을 생각이었지만 레이가 더 빨랐고, 인질인데 쉽게 줄 수는 없지 않냐며 그는 얄밉게 웃었다. 어떻게든 피할 생각이었는데 전부 다 망했다. 집에 들인 이상 안즈는 어제의 일을 마주해야했고, 이렇게 찾아온 걸 보아하니 레이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가씨.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없는데요 선배..."
"그럼 왜 도망갔는가, 아침에."
"..."
"아가씨?"
안즈.
얼른 답하라는 듯 레이는 평소와 달리 안즈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그 목소리를 들으니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어젯밤의 조각이 머릿 속을 스쳐지나갔다. 레이는 그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저도 평소와 달리 「사쿠마 선배」가 아니라 '레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던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른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안즈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레이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왜 아침에 자신을 두고 도망갔는지 물어보았다.
"...당연하잖아요. 제가 거기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는 걸요."
"흐음."
"민망한 상황을 피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그래서 도망쳤어요."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아마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어도 안즈는 먼저 자리를 떴을 게 분명했다. 민망한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단지 상대가 레이였기 때문에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급하게 도망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안즈의 대답이 레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고, 그녀는 그런 레이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그냥 어젯밤에 대해서는 잊어주면 좋겠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왜 굳이 자신을 이렇게 찾아왔는지부터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배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분명히 곤란할테고, 안즈가 이 날에 대해서 잊고 싶어하는 것처럼 레이도 그럴 것이라고 안즈는 생각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실수로, 같잖은 책임감에 의해서 관계가 변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수때문에, 그 실수에 대해서 책임지기 위해서 관계가 변해봤자 비참하기만 할 뿐이다.
그냥 하룻밤의 실수로 넘겨버리면 되잖아. 안즈는 진심으로 레이가 그래주길 바랐다.
"제 물건이나 빨리 주세요. 그거 전해주러 오신 거잖아요."
"안즈."
"그냥 없던 일로 하고 가주세요. 굳이 이럴 필요 없잖아요."
아, 말해버렸다. 문에 기대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괜히 울컥하는 바람에, 어울리지 않게 속에 있던 것을 숨기지 못하고 결국 내뱉고 말았다. 안즈의 말을 들은 레이는 얼굴에 웃음을 지우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안즈는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서 시선을 피했다. 멈춰야 하는데 안즈의 입은 서늘해진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도 아니면 머리로는 그만해야한다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멈출 생각이 없었는지 안즈는 멈추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렇잖아요. 그냥 실수였을 뿐인데 사쿠마 선배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어요. 그냥...그냥 잊으세요. 저도 잊을게요."
"..."
"물건 주고 그만 가주세요. 그런... 같잖은 책임감으로 저를 굳이 책임 질 필요 없으니까요. 저는 더 할 말이....아, 잠깐만 사쿠마 선배!"
그 말을 얌전히 들어주던 레이는 더는 듣기 싫다는 듯 안즈의 손목을 잡더니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부딪힌 등이 아팠고, 잡힌 손목이 아팠다. 안즈는 레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같잖은 책임감」?"
"..."
"이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읏,"
"내가 그런 책임감때문에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대체 왜 저를 찾아온건데요. 왜 찾아와서 이렇게 화를 내는건가요. 안즈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울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물이 나왔다. 지금은 레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이 제발, 자신의 집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레이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골치 아프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던 그는 안즈의 손에 휴대전화를 쥐어준 뒤 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한달이면 되겠지."
"한달동안, 잘 생각해보게나."
"내가 과연 그런 책임감따위로 여길 왔을 것 같은지."
그때는 안봐줄테니까,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게다. 감정이 하나도 담겨있자 않은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은 레이는 뒤도 돌어보지 않고 집을 나갔고, 그가 제 집에서 나가자마자 다리에서 힘이 풀린 안즈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고 말았다.
"...책임감이 아니면 뭔데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설사 정말로 그렇다한들,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감정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안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매일 밤마다 외출하는 것도 모자라 물에 빠진 생쥐꼴로 돌아오니 배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추운 겨울에 바닷 속에서 수영이라도 하는 거야 사쿠마 씨? 측근 중 하나가 그 이상한 소문 중 하나를 들고와 레이에게 말해주었고,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을 뿐이었다.
소문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 레이는 밤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고, 그렇다보니 당연히 옷이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흡혈귀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 다는 거였고, 그 얼음장같은 바닷물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부하들은 레이를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오해을 살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레이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기에 이 밤외출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해적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았지만 찾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마을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 인어는 이 넓은 바다 어디든지 돌어다닐 수 있는 존재였으니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레이는 이곳에서 다시 만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한달이 넘는 시간동안 꾸준히 이곳을 찾아왔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그러나 포근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부르던 인어를 만난 곳이 여기였다. 달빛 아래에서 그 빛을 받은 청록빛의 지느러미가 반짝거렸고, 인어는 즐거운 얼굴로 끊임없이 노래를 이어나갔다. 그 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가지였지만 기이하게도 모두 자장가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숨어서 그 노래를 계속 듣고있던,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왔던 레이는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비록 잠든 장소가 모래사장의 바위였으며 잠든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는 오랜만에 불편함없이 푹 잘 수 있었다. 몇번을 그렇게 만나러 갔고, 레이는 그 인어와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할 때는 어떤 목소리인지, 어떤 성격을 가져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고 취미는 무엇인지. 처음은 호기심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감정은 그것과는 매우 다른, 스스로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감정이었다.
그래서 인어가 오자마자 제 기척을 드러내고 말을 건 것인데, 그것에 놀란 인어가 바다로 돌아가 한달 동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계속 숨어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그 인어를 지켜봤을 것이다.
"...오늘도 안오는 구먼."
젖은 셔츠를 벗어 물기를 짜낸 뒤 대충 털어내고 그걸 다시 입은 레이는 한숨을 쉬면서 이제 여기에 오는 것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지도 않는 이를 기다리는 것만큼 미련한 건 없었고, 자신도 이 바다 위에서 계속 살아갈테니 살아생전 언젠가 운이 좋다면 한번쯤은 만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들리지도 않을 작별인사를 한 뒤 그곳을 떠날려고 할 때, 바위 틈에서 빼꼼, 하고 익숙한 머리가 나타났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던 인어는 천천히 그가 있는 쪽으로 헤엄쳐왔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과정을 멍하니 지켜보던 사쿠마 레이는, 오늘은 신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배워왔어요. 사람 말.
서투른 발음으로 사람의 말을 내뱉은 인어는 베시시 웃으며 레이에게 이리오라 손짓했다. 그 웃는 얼굴과 목소리, 손짓에 그는 홀린듯이 그곳으로 걸어들어갔고, 인어는 물 속으로 들어와 자신의 앞에 선 레이의 손을 잡고 제 이름을 말해주었다.
나는 안즈. 안즈예요.
수줍은 얼굴로 웃는 인어를 보면서, 레이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자신이 미련하게 지금까지 이 소녀를 기다렸는지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처음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안즈가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나 이제 어떡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엉터리 가사로 온갖 노래를 부르며 혼자서 연극까지 했는데, 인간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그대로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거기다가 왠지 그 인간 남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건지 매일 같은 시간대에 그곳으로 와서 안즈를 찾아다녔다. 일주일 동안 숨어서 그걸 지켜 본 소녀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실수를 탓하는 남자를 보면서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왜 날 기다리는 거지?
그러고보니 그때도 내게 말을 걸려고 했었지. 안즈는 그가 어떤 의도로 자신을 지켜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바다로 돌아가 바다의 무시무시한 마녀이자 저의 소중한, 하나뿐인 친구인 아라시를 찾아가 인간의 언어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부탁했다. 자신은 인어이며 그는 인간이었으니까 당연하지만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었고 인간이 인어의 언어를 배우는 것보다 안즈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더 빨랐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가끔 인간세상으로 올라가서 육지 위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아라시는 그들의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는 흔쾌히 안즈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원래는 대가가 필요한 일이지만...배우려는 이유를 알려주면 그냥 가르쳐주도록 할게.'
그 남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말해야했지만 언제 그 남자가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사라져버릴지 몰랐기 때문에 안즈는 자존심 부끄러움, 수치심은 잠시 버려두고 모든 것을 아라시에게 털어놓았다. 사랑이네, 사랑이야~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그리고 엄청나게 즐거운 얼굴로 그렇게 말한 아라시는 안즈를 도와주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했고, 안즈는 제 친구에게서 인간의 언어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그 사이에도 틈틈히 바다 위로 올라가 그 남자가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안즈는 잊지 않았다. 오지 않는 자신을 기다리며 한숨 쉬는 그를 보는 건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바위 뒤에 숨어서 그렇게 말한 안즈는 다시 바다 속으로 돌아갔다.
아직 서툴기는 해도... 이정도면 합격이네. 아라시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 이제 그 남자를 만나러 가도 괜찮다고 했다. 이즈미 쨩이 이것저것 가르쳐 줄 때는 배우는 게 느리다고 엄청 혼났었잖아. 후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배우는 거라 그런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면서 웃던 아라시를 보면서 안즈는 고개를 갸웃했다. 있지, 언니. 저번에도 사랑이라고 말했었지? 그치만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닌 걸.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 거일 뿐이야.
'아직 모르나보네. 안즈 쨩. 만약 오늘 그 인간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잘 생각해봐. 안즈 쨩은 똑똑한 아이니까,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거야.'
그럼 행운을 빌게. 아라시는 바다 위로 올라가는 안즈를 배웅해주었고, 소녀는 빠르게 헤엄쳐 올라기면서 친구가 했던 말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어떤 기분이 드냐고? 지금은 그저 빨리 제 이름을 알려주고, 그때의 일에 대해서 변명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정말로 그것 뿐이었는데,
"...내 이름은 사쿠마 레이라네."
아가씨가 먼저 이름을 알려줬으니 내 이름도 말해주는 게 예의겠지.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게나.
손등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운 남자는 붉은 눈을 반짝이며 안즈를 바라보았다. 잡힌 손이 뜨거웠고, 그 시선을 받고 있으니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고, 그제야 안즈는 아라시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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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난입이지만 별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제 이야기를 조금 해도 괜찮을까요?
124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어차피 이 스레에 있는 녀석들 전부 한가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125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무슨 이야기할건데?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어 재밌게만 해준다면ㅡ
126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저번의 그 폐가체험 이후로 이 스레 한동안 조용했으니까 말이야~ 좋지 않아?
127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고정닉이랑 간단한 스펙 부탁할게 w
128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정닉은 이거면 될까요?
12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리얼충이냐 w w w
130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자택 경비원(笑)이 많은 스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데
131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보다 왜 존댓말? 편하게 말하라고ㅡ
132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는데 문득 학창시절부터 자주 불리던 별명이 떠올라서... 존댓말은 일을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굳어진 거라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테니 아래를 비워주세요
133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특정될 수 있으니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저는 연예계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연예인과 이런 오컬트적인 현상은 떼어놓고 볼 수 없는 관계라, 새로운 작품을 들어갈 때 반드시 신사를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귀신이 이걸 방해하지 못하게 해주세요」라는 것을 빌기 위해서요
제가 맡고 있는 연예인이 찍은 영화도 마찬가지여서, 주연인 저의 담당 연예인과 감독님, 작가와 제가 점쟁이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빠져도 되는데, 제 담당 연예인이 제가 없다면 가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이지만요
134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찾아간 점쟁이는 유명한 사람으로, 이런 곳에 문외한인 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영화는 별 탈없이 무사히 개봉되어 대박은 치지 못하더라도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서 흥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 영화, 감독님의 복귀작이었으니까요
이야기를 들었으니 이만 가봐야겠다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점쟁이가 할 이야기 있다며 저를 붙잡았고, 저만 놔두고 나가보라고 소리쳤습니다. 방금 전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서 무서웠던 감독님과 작가님은 바로 방을 나갔고, 제 담당 연예인은 끝까지 버틸 생각이었으나 자신을 노려보는 그 매서운 눈빛을 이기지 못해 차에서 기다리겠다며 엄청나게 못마땅한 얼굴로 마지못해 방을 나갔습니다
모두가 나가고 인기척이 사라지자 점쟁이가 제게 한 말은 그거였습니다 「지금부터 장례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뜬끔 없는 말이라서 다시 말해달라 했더니 「당신이 입을 수의를 준비해. 너, 얼마 못살테니까. 부모에게 당신 수의를 준비하라고 할 거야? 길어봐야 3년이야.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걸.」
135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어이가 없어서, 제가 왜 죽나요? 라고 물어봤더니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 이유라는 게 조금 어이가 없었습니다 「신이 너를 마음에 들어하시니까. 어쩔 수 없어.」 라는 말만 계속 할 뿐이었어요
더 듣고 있으려니 기분이 나빠서 간다고 했더니 갑자기 제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요 더 말해주고 싶지만 말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너무 무서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 점쟁이의 얼굴이 정말 공포에 질려있어서 더 뭐라하지 못하고 나왔어요
136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 점쟁이가 이상한 거 아냐?
137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하지만 유명한 점쟁이라며
138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전문가라도 실수같은 거 할 수 있지 않을까?
13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궁금한데, 넌 그 점쟁이 말을 믿어?
140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139 솔직히 말해서 유명한 분이고 저도 그 분이 말한대로 일이 해결된 걸 본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 헛소리라고 넘기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 많아요
141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너희들 뭘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거야 이런 거 낚시잖아? 신의 사랑을 받는다니 우습지도 않고 w w w
142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실 저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으니까요
143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신에게 사랑받으면 일찍 죽는다」같은 거려나 이 스레에서 몇 본 본 적은 있는 것 같은데
144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행방불명(*神隠し : 어린이와 아이의 행방불명와 실종을 신적인 무언가가 숨겼다는 뜻) 같은 거?
145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거랑은 좀 다름 행방불명은 일상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걸 뜻하고, 위의 경우는 말 그대로 죽는 거니까 말이지
146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사랑하는 인간이면 그냥 두라고 왜 죽이는 거야 w w w
147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워커홀릭의 가족들은 이 이야기를 알고 있어?
148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부모님은 모르시고 남편만 알고 있는데,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감히 누굴」 이라는 말과 함께 옛날 성격이 나와버려서 그만...
거실의 테이블이 원래는 유리였는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튼튼한 나무로 바꿨습니다 www
14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ロ゚)
150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잠깐만 남편www
151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테이블www부순 거냐www
152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옛날 성격 대체 어땠던 거야
153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지금은 온화한 이미지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이 몸俺様 캐릭터 였기 때문에 w w w
154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이건 웃지 않을 수가 없다
155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덕분에 스레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었잖아w w w
156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런 남편이면 어쩔 수 없네ㅡ 그 점쟁이는 무사해?
157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사실 남편도 같은 업계 종사자라서, 그 점쟁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점쟁이에게 화가 난게 아니라 그 신이라는 존재에게 화가 난 것 같아서w w w
158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웃을 일이 아니잖아 웃지마 w w w w
15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뭐 점쟁이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그 신에게 화가 날만도 하지
160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래서 워커홀릭이 이 스레에 글을 남긴 이유는 뭐야? 다른 신사나 점쟁이를 만나본 적은 있어?
161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158 죄송합니다 그치만 저희 남편이 귀여우니까 어쩔 수 없어요 (笑)
>>160 남편 말을 듣고 다른 신사에 가본 적은 있어요 다만 모두들 「더는 말 못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야. 그 신이 당신을 갖기 위해서 목숨을 노리고 있어.」 라고 하거나, 「3년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행복하게 살아요. 이건 아무도 막을 수가 없어요.」 같은 말만 할 뿐이어서...
마지막으로 갔던 신사에선 그래도 조금 자세하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거기서도 결론은 똑같았어요
162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싫다 이 워커홀릭 팔불출이잖아
163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남편을 좋아한다는 건 알겠으니 그만 둬w w w
163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래서, 그 신사에서는 뭐라고 했는데?
164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대뜸 결혼을 잘했다고 하길래 저도 알아요. 라고 했더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금 남편이 제가 그 신에게 끌려가고 있다는 걸 막아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잘 만났다고 하더라구요 자세하게 이야기 해달라 했더니, 결혼 전에 사고가 난 적이 있지 않냐고 물었어요
좀 오래 전 일인데, 남편을 만나러 가다가 지하철 사고가 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거의 죽을 뻔 했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아서 그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미루던 남편이 더는 안되겠다면서 프러포즈를 했었는데...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어쨌든 이건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라 그 신사의 분이 이 이야기를 할 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 지하철 사고가 신이 저때문에 일으킨 사고였는데, 제가 그때 남편을 만나러 가던 길이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참고로 그때 사고 이후로 저는 다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게 됐어요
165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신 쓰레기잖아
166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한 명 데려가기 위해서 도대체 몇 명을 다치게 한 거야
167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10년 전의 그 사고 말이지? 그 지하철 사고 사망자는 없었지만 부상자는 엄청 많았었지
168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근데 이번에는 남편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해요 결혼을 해서 이어졌으니 그전보다 나은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이제는 인간이 그걸 지켜낼 수준이 아닌데다가 이쪽으로 수행도 하지않은 인간이 지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하셨고...
16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
170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래 남편이 그만한 힘이 있다면 아내를 위해서 수행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171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무리예요w w w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남편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라서 괜히 시간낭비라고 하셨거든요
그리고 미리 말안해서 죄송합니다 올해가 그 3년째였답니다\(^o^)/
172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잠깐
173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어이
174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3년째라고 올해가?
175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만둬 장난이라고 해줘 제발
176 이하, 무명의 워커홀릭이 보내드립니다
괜히 마음 무겁게할까봐 말 안하려고 했는데 저때문에 하지 않을 고생을 하실까봐, 고민하다가 결국 말씀드려요
스레를 남긴 목적은 그냥 제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줬으면 해서 거의 충동적으로 결정한겁니다 지금도 이 사실은 남편 밖에 모르는데, 이게 전부 쓸데없는 걱정이었을 경우를 생각해서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뭐 죽고나면 다 소용없으니 남편에게 다 이야기해도 좋다고 미리 유언을 남기기는 했지만요
3년 동안 남편이랑 여기저기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봤어요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그 시간동안 정리는 다 했으니까요
살아있으면 다시 이 스레에 와서 글 남기도록 할게요 돌아오지 않으면 뭐...가끔씩 한번 생각은 해주세요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었지, 하고
177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화내지 않을게 거짓말이라고 해줘
178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낚시지? 이런 게 사실일리가 없잖아
17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제발 그렇다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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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다들 워커홀릭 기사 봤어?
990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연예뉴스에서 매일 말해주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을리가
991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래도 아직 혼수상태니까 가능성은 있는 거 아닐까
992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나 그 사람 팬인데, 갑자기 활동을 쉬고 여행을 다닌다길래 굉장히 원망했었거든 그런데 이런 이유가 있는 줄은 몰랐어
993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사진 뜬 거 봤는데 얼굴이 반쪽이더라
994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저기 방금 연예뉴스에 워커홀릭 관련 뉴스가 뜬 것 같은데
995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낚시아냐?
996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그런 쓰레기 기사랑 뉴스 그 사이에 너무 봤다고
997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잠깐 >>994 말 진짜인 것 같아
998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잠깐 나 확인하고 올게
999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길
1000 이하, 무명의 오컬트 마니아가 보내드립니다
이 스레는 더 이상 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스레를 세워주세요
인터뷰 대상이 저인가요? 업계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전 뒤에서 그들을 빛나게 해주는 서포터일 뿐이고, 평범한 일반인인데 인터뷰 대상으로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네? 아... 죄송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더 받아들일 수 없겠는데...
(잠시만요 이건 사실....)
방송에 내보낸다는 건 똑같잖아요...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그런 부끄러운 말을 하라구요? 무리예요, 저는 못합니다. 랄까, 저는 그 사람 앞에서도 그런 말을 안하는데. 물론 놀란 얼굴이야 보고 싶죠. 그치만 그 사람 이미지를 생각하면 방송에 내보내는 건 좀... 하하. 담당은 아니지만 당연히 신경은 쓰고 있죠. 지금이야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옛날엔 저도 그 사람의 「프로듀서」였으니까요.
(두 분은 같은 학교를 나오셨죠? 학창시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은근슬쩍 대화를 그런 쪽으로 끌고가시네. 아 잠깐만. 그런 표정 짓지마세요 제가 나쁜 사람같잖아요... 그래요, 제가 졌어요. 이미 카메라도 켜진 거, 어디 한 번 이야기 해봅시다. 거창해보여도 그다지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적당히 잘라주세요.
네, 학교선배였어요. 저한테 있어서 그 학교의 선배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들이었어요. 동급생이나 후배들과는 달리 선배들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1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거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인 저를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손을 잡아준 사람들을 제가 싫어할리가 없잖아요? 물론 그중에서 그 사람은 더 특별한 사람이긴 했지만요. 제게 스승같은 선배들은 많았지만 그 사람은... 잠시만요,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니 조금 웃음이 나서. 그때는 정말 당황스러웠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사람 취향이... 이건 말 안 할 거예요. 저만 알건데? 그런 표정으로 봐도 소용없어요.
(취향이 매니악하신가봐요.)
매니악...하긴 했죠. 그땐 왜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더 이야기 안 할 거예요. 방송에 나가는 모습은 모두의 것이지만, 그런 건 저만 알 거라구요. 의외로 독점욕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가 본데... 제가 진짜로 독점욕이 있었다면 아이돌인 그 사람의 모습도 저 혼자만 볼려고 욕심내지 않았을 까요.
애초에 전 그 사람의 아내라구요. 무대 아래의 모습은 당연히 제 거 아닌가요? 아, 방금 발언 좀 아슬아슬하네요. 전 그냥 사생활 부분은 전부 제 거라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하하. 팬분들도 이해는 해주실 거예요. 축복 받으면서 한 결혼이잖아요? 좋아요, 그럼 질문을 바꿔볼게요. 좋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잠깐만요. 이거 그 사람한테도 한 번도 말한 적 없는데. 어...음... 얼굴보고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뭔가 대단한 걸 바라시는 눈빛인데, 그 기대를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만 저 그 사람 얼굴이 좋아하게 된 계기랍니다... 사실 그런 얼굴이 취향인 건 아닌데 어디 취향을 타는 얼굴인가요 그 사람이. 지금도 얼굴 보면 자꾸 마음이 약해져서 무리한 요구같은 것도 다 들어주게 된다구요.
얼굴말고 다른 이유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 다른 이유도 그다지 재미는 없을 걸요. 가장 가까운 선배에 스승이었잖아요. 뭐... 동경이 어느순간 깨닫고 보니 사랑이 되어있는 거고, 든든하고 멋있는 선배를 다른 시선으로 보는 건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에게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잖아요?
비오는 날 안경을 찾으러 그 사람이랑 같이 학교를 돌아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쩌다 비에 젖은 얼굴을 봤는데 그걸 보자마자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는 거예요. 평소엔 그 얼굴을 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아 참. 그 컨셉으로 이번에 화보 찍었죠. 그 화보랑 똑같냐구요? 무슨 소리예요. 화보는 발끝에도 못미치는 걸요? 아 또 그런 표정하시네. 저만 알 거예요 저만! 큼, 큼. 아무튼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지고 자꾸 그 얼굴이 생각나길래 친구한테 상담을 했더니 좋아하는 거 아니야? 라는 답이 날라오더라구요. 내가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서 되물었더니 생각을 정리해보라는 숙제가 떨어졌어요. 뭐, 그때 집에 돌아가서 하루종일 그 사람 생각만 했었는데... 한 일주일 정도 고민하니까 답이 나오더라구요. 좋아하는구나. 애초에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친하고 기댈만한 믿음직한 선배를 일주일 내내 생각할 리가 없지만.
(짝사랑의 시작이었네요.)
그때만 해도 별로 그 사람이랑 다른 관계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아이돌이랑 프로듀서가 어떻게 연애를 해, 이런 마음이었거든요. 혼자 좋아하다가 그만 둘 생각이었어요. 그 사이에 희망고문같은 것도 많이 당했어요. 이뤄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포기상태로 받아주기는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ㅡ주 나쁜 남자예요. 그게 의도된 행동이어서 다행인 거지...
의도된 행동이 무슨 말이냐구요? 아아. 알고보니 그 희망고문은 의도된 거였어요.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러다가 오해가 생겨서 일이 좀 커졌어고. 뭐, 그때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본심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아주 나빴던 건 아니었어요. 그 일이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이 방송 미성년자도 시청하잖아요? 부적절해서 신고라도 들어오면 어떡해요.
제가 말을 똑바로 하고 있나요? 메모장 없이 이야기할려니 자꾸 이야기가 정리가 안되는 것 같아서. 사실 지금 이만큼까지 말한 것도 저 많이 노력한 거예요. 아니 진짜. 제가 말을 이만큼이나 많이 했다는 거, 그 사람이 알면 엄청 놀랄 걸요. 안할 수는 없으니까 일하면서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면 말수가 줄어들더라구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하고 있어요! 이 분이 나를 뭘로 보는 거지 대체.
(고백은 누가 먼저 했나요?)
그 사람이...했다고 말하길 기대하시나 본데, 제가 했거든요. 저희 부부한테 무슨 환상을 가지고 계신 거예요 대체. 뭐 따지자면 제가 고백을 할 수 있게 유도를 한 건 맞지만요. 어떻게 고백했냐구요? 그건....
"여러분 보이시나요? 그 사쿠마 레이 씨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못들고 계십니다. 아주 귀한 광경이니까 지금 맘껏 즐기세요!"
"귀까지 새빨개지셨는데요, 평소랑 너무 다른 모습아닌가요 레이 씨~"
"..."
레이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눈 앞의 정지된 화면 속 안즈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안즈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 다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생방송이었고, 주어진 대본에도 없는 영상편지에 당황해서 이게 무슨 일인가 따지려고 했다가 안즈가 자신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하길래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계획되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게 안즈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던 레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느긋한 얼굴로 웃으며 영상 속의 안즈를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저희는 레이 씨 이야기로 밖에 전해들을 수 없으니까 레이 씨가 아내 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잖아요?"
"그렇죠. 처음에 이 영상 받았을 때 깜짝 놀랐어요. 물론 다 보고나서는 역시 부부는 닮는구나 싶어서 엄청 웃었지만요."
"이 뒤의 영상 보시면 레이 씨보다 더 할 걸요, 아내 분이. 여러분 뒷 내용 궁금하세요?"
방청객들은 너도나도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고, 레이도 조용히 끄덕였다. ...마저 보여주게나. 조용히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든 레이의 얼굴에는 아직 새빨간 부끄러움이 남아있었고, 두 명의 진행자는 그게 굉장히 재밌다는 듯 웃었다. 항상 여유롭고 느긋하던 그 사쿠마 레이가 저렇게까지 부끄러워하고 당황스러워한다니, 아무래도 특별편를 맞이해서 제작진이 준비한 깜짝선물은 대성공인 모양이었다.
"저희도 바로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말이죠~ 레이 씨의 이야기가 없다면 아무래도 다음으로 넘어가기 힘들 것 같네요."
"편지를 받았으니 그 편지를 되돌려주는 게 예의 아니겠어요? 자, 짧게라도 좋으니 아내 분에게 영상편지 한 통 보내시겠어요 레이 씨?"
대본에도 없는 내용을 시킨다며 눈치를 주었더니 닮은 외모만큼 하는 행동도 비슷한 사회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얼른 말해보라고 레이를 부추겼다. 아내 분이 기다리실텐데요. 저렇게 용기내서 말씀하셨는데 레이 씨도 받은만큼 돌려드려야죠. 방청객들 마저 레이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박수까지 치며 부추기자 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나 듣고 싶은가? 내 이야기는 그다지 재미가 없을텐데. 무엇보다 이미 다른 방송에서 전부 이야기했지 않은가?"
"뭐, 두 분의 로맨스같은 거 인터넷에 이미 널리 퍼져있긴 하죠. 그렇지만 저희 방송에서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잖아요 「사쿠마 선배」?"
"이것 참... 그 호칭은 반칙이지 않은가, 히나타 군?"
정말 어쩔 수가 없구먼. 레이는 결국 두손두발 다 들며 항복을 외쳤다. 짧게라도 좋다고 했으니 그다지 기대는 하지 말게나.
"...생방송이라서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정리도 안되고... 결혼한다고 알렸을 때도 이런 걸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이런 낯간지러운 짓을 하려니 부끄러워 죽겠구만.
그때의 내가 한 짓을 희망고문이라고 하는데...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고백도 안하고 그냥 포기했을 거 아닌가? 그 상태로 내가 고백해봤자 상황은 똑같았을테고. 변명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때의 나는 그렇게 밖에 행동할 수 없었다네. ... 다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다만 내 아내가 그때 얼마나 귀여웠는진 나만 알아도 충분하니 그렇게 야유해도 소용없구만.
그리고 몇 개는 내가 모른다는 걸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아가씨에게는 굉장히 미안한 일이지만 다 알고 있었다네. (유우타:그럼 얼굴 붉히신 건 뭔가요?) 다 알고 있어도 이렇게 직접 전해 듣는 건 말이지... 아무리 나라도 부끄러운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주게나. 뭐, 물론 그때 내 얼굴을 보고 좋아하는 걸 깨달았다는 이야긴 처음 들었다만 그런 생각을 아예 안해본 건 아니어서 그다지 놀랍지는 않구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냐고 묻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아내에 대해서 모르는 일이 있을리가 없지않은가?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는데 여기까지 해도 되겠지? 지금 난 저 영상의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서 그러니 조금만 봐주게나.
아.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처음 만났을 때 그거, 일부러 그랬다네."
얼굴이 취향인 건 아가씨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지. 자, 내 이야기는 끝이네. 레이는 후련하다는 얼굴로 웃었고,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쌍둥이들은 그를 향해 역시 사쿠마 선배라며 두 손을 맞잡고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고백이요... 사실 고백 이야기를 하면 좀 부끄러운 게, 그때 할 말을 전부 정리해서 갔는데도 다 못했어요. 좋아한다는 말이랑 우는 것밖에 못했거든요. 주머니에 할 말을 정리해둔 메모가 있었는데 그거 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을 걸요? 하고 싶은 말은 엄청 많았는데 얼굴 보고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안나고 눈물밖에 안나왔어요. 물론 좋아한다는 마음이 컸지만 그때는 원망도 커서... 아마 그래서 그렇게 울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그때 마음고생 시킨 만큼 레이 씨가 잘해주세요?)
이건 제가 굳이 말 안해도 알지 않아요? 저 알고 있거든요 그 사람 결혼 관련 랭킹 매길 때마다 1위 하는 거. 엄청 잘해주죠. 근데 연애하기 전에도 잘해줬어요 저한테는. 아니 이건 자랑은 아니고... 자랑 맞나? 아무튼 저한테 못한 적은 없어요. 옛날에는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는 게 맞나 싶어서 고민도 많이 했고 힘들어한 적도 많은데, 결혼하고나서는 그런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부럽네요. 저도 그런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기도 하고.)
세상에 사쿠마 레이같은 사람이 둘이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 꿈은 포기하시는 게...아, 죄송합니다. 레이 씨 자랑을 시작하면 제가 주체를 못해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자유롭게 말하라고 분위기를 만들어주시니까, 조금 흥분했나봐요.
(아뇨, 괜찮아요. 다른 사람에게 듣던 거랑, 제가 봤던 모습이랑 많이 달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는 한데 보기 좋으니까요.)
일할 때는 당연히 안이러죠. 공과 사는 당연히 구분 짓는 게 맞는 거고, 이런 모자란 모습 일하면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걸요. 저도 알아요. 제가 그 사람 이야기할 때 어떤 모습인지... 옛날에는 안이랬는데 나이 먹을수록 좀, 주체가 안돼요. 그 사람한테 매일 나잇값 좀 하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죠 제가...
으음...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네요. 한 게 별로 없다구요? 제가 지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한 게 몇 개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어요.
(하하. 벌써 끝나는 게 아쉬워서 제가 그만. 자, 그럼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방송에서 제 이야기 좀 그만해요.(웃음) 처음에는 안한다고 튕겨놓고 신나게 이야기한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속은 후련하네요.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정리가 또 안되네요. 이거 끝나고 집에 가면 레이 씨가 있을텐데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도 모르겠고... 저 얼굴에 다 티가 나서 거짓말을 못하거든요. 뭐,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볼게요.
레이 씨.
좋아한다는 말은 실컷 했으니까 마지막 인사는 다르게 할게요. 너무너무 보고싶어요. 그러니까 촬영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요.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제 두서없는 고백 들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리고 트릭스타가 다음달에 새 싱글이 나오니까 많이 들어주세요. 트릭스타 짱!
영상의 마지막 멘트가 끝나고 멈추자 객석은 나들 웃음을 참지 못하고 너도나도 큰소리로 웃고 있었고, 레이도 허탈한 얼굴로 웃고있었다. 저 홍보 때문에 인터뷰 응한 거 아니죠? 아아, 안즈 씨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니까.
"방송 끝나면 어떡하실 건가요?"
"당연한 걸 묻는구만."
"네, 네. 바로 집으로 달려가시겠죠? 안전운전 하시는 거 잊지마세요."
"그럼 슬슬 마무리할까요?"
방송이 끝나자마자 레이는 스텝들과 방청객, 그리고 사회자인 히나타와 유우타에게 수고했다며 인사한 뒤 재빠르게 방송국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방송이 있었던 그날의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는 레이의 이름과 트릭스타 새 싱글이 함께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학교가는 건 평범하게 걸어서 가면 안될까요?
그건 겁이 많은 안즈가 용기를 내서 그 남자에게 처음으로 부탁한 것이었고, 간접흡연은 나쁘다며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던 그는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안돼. 물론 곧 표정이 풀어져서 평소와 다름없는 웃는 얼굴로 그건 안되겠다며 안즈를 설득했지만 이미 무섭게 굳은 얼굴을 본 소녀는 더는 매달리지도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위험해서 그런다며, 요즘은 특히 예민한 시기이니 등하교는 절대로 혼자해서는 안된다며 제 등을 토닥이는 남자때문에 안즈는 울고 싶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울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학교 앞에서 그런 인사라도 하지말라고 해주세요, 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도 말못했어... 학교에서 오늘 해야할 말을 정리하고 달달 외워서 내일은 절대로 혼자 등교하겠다는 안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물론 알고는 있다. 자기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고,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그러니까 어느정도는 감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쯤은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이해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면 이렇게 겁먹고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학교에서 우연히 들은 같은 반 친구들의 대화가 안즈를 더 힘들게 만들었는데,
'있잖아...매일 안즈 쨩을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데리러 오는 사람들 야쿠자야?'
'그렇다던데? 그 사람들이 안즈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봤어.'
'되게 착하게 생겼는데 의외다... 무서워서 옆에도 못가겠어 이제는...'
...이런 말을 들었는데 누가 버티겠는가. 차마 부정을 하고 싶어도 그 사람들이 야쿠자인 건 맞았고, 제 위치상 그렇게 불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서 안즈는 결국 화장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교실로 도망가고 말았다. 가까운 친구들이야 진실을 알고 있으니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사정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안즈는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차로 데려다주는 게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냥 얌전히 고개만 끄덕이면 될 것을 굳이 교문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큰 소리로 우렁차게 인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잘 다녀오십쇼 누님! 그렇게 외치고 제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 교문을 떠나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안즈는 쪽팔려서 그대로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등교길만 그러면 괜찮은데, 학교가 마치는 시간에 맞춰서 그들은 안즈를 데리러 왔고, 그나마 다행인 건 집에 가는 길에는 그런 쪽팔리는 인사는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면 뭐해. 사람들 제일 많이 돌아다니는 시간에 그러는 걸. 그런 인사가 거진 몇주 내내 이어지자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안즈가 야쿠자의 딸이라는 그런 이상하고 괴상망측한 소문. 사실은 너무 싫었지만, 우리 부모님은 평범하게 합법적인 일을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걸 부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야쿠자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안즈는 그냥 딸로 소문나는 게 그나마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은 또 학교에 어떻게 가지... 자리에 누우니 그런 걱정이 들기 시작했고, 아픈 척이라도 할까 싶었지만 자신이 아프다고 했을 때 집안이 어떻게 뒤집히는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겪어보았기 때문에 안즈는 꾀병핑계만은 대지 않겠다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결혼식을 올리고 같이 살면 안되냐고 암만 설득해봤자 그쪽 집안은 듣지를 않았다. 어차피 같이 살거면 미리 살아보는 게 좋지않은가? 누가 들어도 말도 안되는 이유로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게 한 사쿠마 집안 덕분에 안즈는 거의 팔리듯이 이 집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양쪽집안의 조부들간의 내기로 시작된 이 결혼의 전말은 그러했다. 젊은 시절 안즈의 조부가 내기에서 졌고, 가진 돈을 몽땅 잃어버려서 내가 딸이 생기면 너희 집안에 보내줄테니 그건 어떻냐며 설득을 했고, 안그래도 집안에 시커먼 아들놈밖에 없어서 우울했던지라 옳다구나 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돈 없다고 딸을 판 거나 다름없지만 아무튼 그때는 안즈의 조부도 밑에 아들 둘 밖에 없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테고, 그건 몇십년 후에 안즈가 태어나면서 부메랑이 되어 뒷통수를 치게 된다. 이미 계약서까지 쓴 마당에 무를 수도 없는지라 안즈가 태어났을 때 양쪽 집안은 암묵적으로 합의를 보았고, 집안의 어른들은 전부 다 아는데 결혼을 하는 당사자 둘만 모르고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이었다.
그 집안의 장손이자 이미 권한을 넘겨 받아 모든 일을 처리하는 후계자인 사쿠마 레이는 아직 성인식도 치루지 않은 애랑 무슨 결혼을 하냐며 따졌다가 사진 한장에 넘어가서 빨리 데려오자는 제 아버지의 말에 더는 반대 없이 그러자며 동의를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안즈는 말도 안된다며 울었으나 집이 좀 그럴 뿐(물론 이게 제일 문제다.) 전부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며 설득 시켜서 형식적인 맞선 자리에 내보내게 되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비싼 기모노를 입고, 화장까지 해서 도착한 곳에는 험악하고 무섭게 생긴 남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내 남편인가봐...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며 애써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라, 안즈는 덜덜 떨면서 그를 불렀고, 그 남자는 안즈가 도착한 것을 보자마자 문을 두드리며 아가씨가 도착했다는 말을 하고 형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얼른 들어가보라며 등을 떠밀었다. 저 사람이 아니었어? 얼떨떨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니 도저히 야쿠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잘생기고 온화한 분위기의 조금 독특한 할아버지 말투를 쓰는 레이와 대화를 하면서 안즈는 이런 사람이라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하고 경계를 풀었다. 그 상태로 헤어졌으면 다행이었을텐데, 안즈가 잠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을 때 안에 있던 인내심과 참을성 다정함과 친절같은 것을 끌어와서 있다보니 지칠대로 지쳐서 부하를 상대로 본 성격을 드러내는 바람에 기껏 좋은 첫인상을 주고도 그걸 망쳐버리는 짓을 레이는 하고 말았다.
생긴 것도 위압감을 주는 인상이라서 정말로 많은 고민을 하고도 그 순간의 짜증과 힘듬을 못참아서 실수했다는 걸 전해 듣자마자 카오루는 배를 붙잡고 쓰러졌다.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웃겨서 너무 웃다가 쓰러진 것이었고, 차마 제 파트너를 죽일 수는 없어 화풀이를 할 겸 그 주위에서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던 부하들을 집 뒷 뜰에 목만 내놓고 묻어주었다. 이번 결혼 파토나면 그대로 생매장 해버릴테니 각오해라. 그렇게 협박을 했지만 결국 결혼은 성사되었고, 아직 보호가 필요한 미성년자이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안즈는 레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으나 사쿠마 레이는 막무가내였다. 원래 호스트들은 다 그래요? 제 말은 죽어도 들어주지 않는 이 건방진 남자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했더니 레이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아시면 다 큰 처녀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혼날 거예요. 민망함을 벗어나기 위해 생각 없이 안즈가 내뱉은 말을 들은 레이는 재미있어하며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겨우 발 하나 보여준 거에도 그렇게 말하는 분에게 아가씨와 내가 한 짓을 전부 보여드렸다간 그대로 쓰러지시겠구만. 쓰러지면 다행이지, 레이 씨랑 한 짓을 보셨다가는 유언장에 제 이름도 지워버리고 돈 한 푼 안주고 쫓아낼걸요. 그리고 돈밖에 없던 제가 가난뱅이가 됐으니 제 돈을 사랑하는 레이 씨한테도 버려지겠죠. 아아, 그리고 저는 길거리에서 쓸쓸하게 죽어버릴거야. 피곤해서 그런가, 평소에 하지도 않던 말이 줄줄 나온다. 전부다 이런 상황을 만든 레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페디큐어의 색으로 뭐가 좋은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다 저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에게 잡혀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친한 척 인사를 하고 웃느라 얼굴근육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관심도 없는 남자들이 잠시 이야기 하자거나 춤을 추자며 손을 내미는 것도 귀찮아서 모두 거절했다. 그녀가 올 필요도 없는 자리였으나 원하는 남자가 있으면 그 남자와 결혼하게 해주겠다는, 아버지의 쓸데없는 간섭으로 인해서 억지로 끌려온 곳이었다. 아버지 딸이 매달마다 수천만엔을 쏟아 붓는 호스트가 있는데, 이런 평범하고 생기다 만 남자가 눈에 들어올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올라간 안즈는 레이를 불러냈다. 오늘은 못만날 것 같다더니. 전화 너머로 들리는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들으니 조금 기분이 괜찮아졌었다. 그래, 그 남자가 두 손 가득 들고 온 물건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안즈의 기분은 괜찮았을 거다.
'...이게 뭐예요?'
'오늘 오랜만에 낮에 외출을 했는데 말이야...보자마자 아가씨에게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사버렸구먼.'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그래요, 구두는 그렇다치고 그 페디큐어들은 왜 가져온 거예요.'
'당연히 이 몸이 아가씨에게 해주려고 가져온 거라네.'
자, 그럼 일단은 씻어야겠지? 도와줄테니 얼른 일어나게나, 아가씨. 레이의 손에 잡혀서 억지로 침대 위에서 일어난 안즈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이 제 발을 만지는 걸 싫어해서 샵에 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안즈였다. 그런 사람들이 만지는 것도 불편한데 사쿠마 레이가 직접 제 발을 만진다고? 그가 씻겨주는 내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설득을 해보았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발은 손과 다르다. 손은 항상 노출되어있지만 발은 보통 신발이라거나 양말, 스타킹, 뭐 그런 것들에 숨겨져있으니 상대적으로 노출이 적은 신체부위이다. 적어도 안즈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레이에게 발을 보여주는 것이 꺼려졌다. 더 민망한 모습도 보여줬으면서 겨우 이걸로 부끄러워한다고 누군가가 자신을 놀려도 반박은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안즈는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진지한 얼굴로 제 발을 붙잡고 페디큐어를 바르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민망했다.
"...쉴려고 부른 건데, 더 피곤해졌잖아요."
"..."
"이젠 내 말은 듣지도 않아..."
돈주는 사람이 누군데, 맨날 내 말은 듣지도 않죠? 매달마다 거액의 돈을 쏟아붓는 사람은 분명히 고객인 안즈였고, 레이는 그런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했지만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늘 제멋대로 굴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한텐 그렇지 않아서, 그게 너무 억울해서 화를 냈었고, 아가씨는 특별하니까 그런 거라며 그 야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게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안즈는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먼저 반한 사람이 죄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사랑한다는 말을 돈만 주면 아무렇지 않게 해치우는 가벼운 남자를 진심으로 좋아한 자신이 나쁜 거다. 물론 레이는 항상 아가씨에게만은 진심이라고 말하며 웃지만 알게 뭔가. 호스트놈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설사 그게 진심이라고 해도, 이런 사이에서는 안즈처럼 생각하는 게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았다.
이런 거 한 번도 안해봤을 것처럼 생긴 남자가, 생각보다 솜씨가 좋았다. 아가씨는 역시 분홍색이 어울리는 구먼. 그렇게 말하며 오른발을 놓아준 레이는 왼발을 잡더니 이번에도 발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들어올리고 저를 쳐다보면서 웃는 게 또 어찌나 얄미운지. 결국 안즈는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레이가 할 일에 집중하는 동안 다른 거라도 하자며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책을 펼쳐들었다. 글자나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릴 수 없다면 거기에는 신경을 끄고 싶은 안즈의 최선이었다.
아침부터 붙잡혀서 시달렸던 게 쌓이고 쌓여서 피곤했던 모양인지, 안즈는 편안한 자세로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다 끝났으니 깨워야할지, 아니면 이대로 자도록 내버려둬야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아직 해줄 것이 남아있었기에 레이는 그녀를 깨울 수밖에 없었다. 안즈. 일어나. 누워있던 걸 일으켜 세워 등을 토닥여주자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레이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10분만 더요... 잠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랑스러워 결국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지기 싫어서 바락바락 대들고 약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그녀가 유일하게 모든 걸 내려놓을 때가 막 잠에서 깼을 때라, 사쿠마 레이는 할 수만 있다면 매일 밤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잠들고 싶었고, 매일 아침마다 자신이 직접 그녀를 깨워주고 싶었다. 물론 말도 되지 않는 망상이었지만, 꿈꾸는 것에는 죄가 없으므로 레이는 종종 그렇게 생각하고는 했다. 다, 끝났어요? 레이가 건네 준 컵을 받아 마시고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안즈가 그렇게 물었고, 그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며 당당하게 웃었다
"와아...어디서 따로 배우기라도 했어요?"
"일을 할 때 필요한 것 같아서 배우기는 했지."
"진짜 못하는 게 없네..."
안즈는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고, 레이는 이제 마지막 순서라며 오늘 자신이 사온 신발을 박스에서 꺼냈다. 안즈의 취향과는 조금 동떨어진, 굳이 따지자면 레이의 취향에 가까운 신발이었다. 이거 레이 씨 취향이죠? 화려한 신발을 보며 안즈는 그렇게 말했고,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웃으며 그것을 신겨주었다.
"잘 어울리는 구만."
"나쁘지는 않네요."
"이런 화려한 디자인의 신발을 하나쯤은 갖고 있느 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렇기는 해요."
그런데 레이 씨. 신발을 선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요? 그 예쁜 신발 신고, 더 좋은 사람 만날까봐 연인 사이에는 신발같은 거 선물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레이 씨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요? 당신같은 남자가 아니라? 아... 우리는 연인 사이같은 게 아니라서 그런 건 해당 안 되나? 안즈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레이는 역시나 말이 없었다. 아, 너무 선을 넘어버렸나. 오늘따라 자꾸 말실수를 하는데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농담이라고, 내 말에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할 때 계속 침묵을 유지하던 레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신발을 선물하는 거에는 그런 의미만 있는 건 아니라네."
장난으로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나. 아가씨가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니까. 자주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자신에게 키스하는 레이는 역시나 평소에 제게 보여주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어차피 전부 거짓말이면서. 내가 누굴 만나도 신경도 안 쓸거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계속 빠져나와, 안즈는 바보처럼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