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12200506
레이안즈 백업 본문
레이안즈....레이안즈를 이렇게 썼으면 이제 얘네 결혼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애들아 결혼 좀 해주라 해피에레 선생님 프듀 한방 좀 터뜨려주세요 우리 할로윈 좋았잖아....
리츠의 이야기는 리츠안즈예요 같이 올려버렸다(..)
술에 취해 집에 돌아 온 안즈는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일렁이는 호수같은 그 예쁜 두눈을 저 하늘에 떠있는 달처럼 접어 연신 웃어대던 안즈는 레이를 붙잡고 사랑한다고 했다. 들고있던 가방을 받아서 내려놓고, 가디건을 시작으로 입고있던 옷을 하나하나 벗겨서 바구니 안에 모조리 집어 넣을 때까지 안즈는 술냄새를 풍기며 사랑고백을 해왔다. 하나만 사서 나눠입고 있는 잠옷의 상의를 안즈에게 입혀주며 레이는 이만 자라고 속삭여주었다. 사실은 이렇게 취한 안즈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적고 계속 사랑한다 말하는 그녀를 계속 보고 싶어서 그대로 두고 싶었지만 안즈는 내일도 학교에 가야만 했다. 얼른 자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안즈는 레이의 손을 잡고 손바닥, 손등, 그리고 손끝에 입을 맞췄다. 열렬한 애정표현이구만. 기분이 좋아 웃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안즈는 지켜보며 가만히 있을 때, 그녀의 입에서 사랑해가 아닌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이름이었고, 그 이름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안즈는 사랑에 빠진 얼굴로 계속 그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술에 취했음에도 발음은 정확했다. 사랑해, 보고싶어. 울먹거리며 그 이름을 부르는 그녀를 바라보며, 사쿠마 레이는 아주 아름다운 얼굴로, 그러나 만들어진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안즈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즈야.
그래, 나도 사랑한단다.
그치만 오늘은 너무 많이 마신 것 같구만.
내 이름은, 그게 아니니까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안즈는 끝까지 다른 이의 이름를 부르며 잠들었고, 레이는 그저 웃으며, 잘 자라는 말을 남길 뿐이었다. 아마 안즈는 아침에 일어나도 기억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편이, 사쿠마 레이에게도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세나 이즈미는 그녀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젖살이 빠진 것 외에는 변한게 거의 없는 그 얼굴의 주인 또한 이즈미를 알아보았는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옆에 누가 있는지 깨닫고는 급하게 제 표정을 관리했다.
안즈는 흔히 말하는 보스의 애인, 같은 거였다. 그리고 세나 이즈미가 지금까지 안즈를 만나지 못했던 건 단순히 그가 말단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가 안즈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말단에서 중요한 위치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사쿠마씨 세낫치가 제법 마음에 드나봐.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못한 사람한테 그 사람의 경호를 맡기는 건 나도 처음이거든. 이곳에 와서 친해진 하카제 카오루가 보스의 명령을 전해주면서 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그런 사람의 경호를 나한테 맡기다니, 잘만하면 이곳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겠네, 이런 생각만 했었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건 세나 이즈미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이네요, 이즈미씨.'
언제부터 연락이 끊겼더라. 뭐 흔한 이야기다. 집안의 부도,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끌려가고, 야반도주를 하는 그런 삼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 이즈미의 주위에서 일어났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안즈는 말도 없이 사라졌고 이즈미는 안즈가 그저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웃는게 예뻤던 조그마한, 동생같았던 그 아이가 별 탈 없이 무사히 살아있기만을 바랐다. 그런 안즈를 이곳에서 만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사실 지금도 그다지 믿기지는 않는다.
'전처럼 부르고 싶지만, 그 사람 앞에서 말실수하면 곤란하니까요.'
둘만 남았을 때 안즈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도망치다가 잡혔는데, 그때 그 사람이 직접 자신을 만나러왔다고 했다. 남아있는 건 안즈와 모친 뿐이었고, 그는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도 아닌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같이 묶어 처리할 수는 없다고 했다. 허나 인질로 잡아두기는 해야겠다며, 두 사람을 끌고 갔다고 한다. 그때 어머니와 헤어졌는데 잘 살고 있다고 가끔 연락을 주고받긴 하지만 만나러 갈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어째서? 그 사람이 제가 나가는 걸 싫어하니까요. 연인 사이잖아. 글쎄요, 아직까지도 못미더운 가봐요. 왜? 몇 번 도망쳤거든요. 안즈는 그렇게 말하며 쓸쓸한 얼굴로 웃었다.
초반에 인질로 잡혀왔을 때, 정말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방 안에 가둬두긴 했지만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잘 챙겨줬거든요. 가끔 그 사람이 저를 만나러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가는 게 금지였을 뿐이지. 근데 그런 생활도 계속 하면 결국 질리고, 빠져나가고 싶잖아요? 그래서 도망갔어요. 무모하다고 생각하죠? 맞아요. 어렸으니까, 무모했죠. 바보같았고. 도망은 어땠냐구요? 당연히 잡혀왔죠. 사실 문 밖까지 나가서 골목을 달리는 중이었는데 운나쁘게도 그 사람이랑 마주쳤어요. 그대로 잡혀서 끌려갔죠.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절 방에 다시 집어넣더니 이러면 누가 곤란해지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어요. 협박이었죠. 하하, 이즈미씨는 여전히 저를 잘 알고 있네요. 그래요 그런 협박에 굴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제가? 당연히 또 도망쳤죠. 이번에는 문 앞에서 잡혔어요. 또 그 사람에게요. 그런 일이 세네번 정도 있었나? 지친 얼굴로 그 사람이 저한테 말했어요, 대체 왜 자꾸 도망가냐고. 물론 저는 그럼 이유도 없이 왜 나를 가둬두냐고 따졌죠. 사실 알고 있었거든요 그 사람이 내 가족을 어떻게 했는지. 뭐 어머니라도 살아있으면 됐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보면 자기 죗값을 치룬거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알고 있었냐고, 놀란 얼굴로 묻더라구요. 제가 모를 줄 알았나봐요. 나중에 알고보니까 숨기고 싶었던 거 같더라구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내가 받을 충격을 걱정해서. 정말 말도 안되지 않아요? 그 어린 애가 뭐라고. 이 뒤는 말안할래요. 애인의 꼴사나운 모습을 알려 줄 사람이 어딨겠어요? 연애는 그때부터 했냐구요? 으음... 아니요. 연애는 그 뒤에요. 그 사람이야 절 좋아했다지만 저는 아니었으니까요.
좋아하냐구요? 물론이에요.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이렇게 같이 어떻게 살아요. 다만... 아니에요,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그럼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즈미씨.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요.
모습을 아는 사람은 잘 없었지만 유명했다. 안즈는. 소문으로는 그 사쿠마 레이가 몇년을 매달려서 지금의 관계가 되었다 들었는데, 안즈의 말을 들어보니 어느정도는 소문이 맞는 것 같긴했다. 하기사 매일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마다 꽃까지 사다와서 주는 걸 보면 이즈미가 보기에도 안즈에 대한 애정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거의 10년이다. 이즈미는 안즈를 10년만에 만났고, 그 사이에 안즈는 많은 것이 바뀌어있었다. 예전처럼 웃었지만 그건 어딘가가 뒤틀려있었다. 행복하냐 물었더니 행복하다고 대답했지만 이렇게 반감금 생활이 행복할리가 없다고 이즈미는 생각했다. 그래서, 안즈의 존재를 알렸다.
애초에 이 일에 가장 적합한 건 아라시였다. 그러나 아라시는 이미 얼굴이 팔린 상태였고, 아이러니하게도 팀에서 가장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세나 이즈미였다. 쿠마군도 마찬가지잖아? 짜증을 내며 그렇게 말했더니 리츠는 신랄하게 웃으며 비꼬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경찰이 되겠다고 나갔던 동생이 갑자기 돌아와서 이제 집안일 도울게, 하면 잘도 믿어주겠다. 그치, 셋쨩? 우리 망할 형님이 아무리 나한테 정신 팔린 사람이라도 그건 안믿을 걸. 그렇게 그 곳에 잠입해서 수사하는 사람은 이즈미로 결정났고, 가기 싫었음에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1년을 여기서 버텨냈다. 이즈미는 여전히 빨리 돌아가고 싶었고, 그와 동시에 자신이 안즈를 데리고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즈. 돌아가고 싶어?」
도청 당할지도 몰라 종이에 그렇게 써서 물었을 때 안즈는 아니라고 대답했으나 그 미세하게 변하는 표정을 이즈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많이 변했음에도 여전히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안즈를 보면서, 이즈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건...불가능해요. 그런 거 가능할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실패했을 때가 무서워요.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걸요. 힘없이 웃는 게 안쓰러웠고, 이즈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든 안즈를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만 커져갔다. 왜 그랬을까. 어차피 안즈의 도움따위 필요없고 그녀의 일과를 손에 쥐고 있는 건 자신이니 빼돌리는 것도 쉽다. 그럼에도 안즈의 의사를 굳이 물어본 건...이유가 있긴했다.
상황을 이해했음에도 예전처럼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는 게 서운했다. 자신만을 알고, 무엇이든지 이야기해주던 그 동생은 사라지고 이즈미에게 숨기는 것이 있는,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된 안즈만이 남아있었다. 그게 싫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전처럼 안즈의 「오빠」 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이즈미는 안즈의 의사를 가장 첫번째로 두었다. 우스웠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남매놀이라도 해보고 싶었던 건가? 사태파악조차 못하고 옛정에 끌려서 그렇게 행동하는 자신이 꼴사나웠고, 이즈미는 결국 안즈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을 진행시켰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따졌을 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이즈미의 계획은. 안즈는 무사히 그곳을 빠져나와 보호받고 있었고, 이즈미도 1년간 그 밑에서 구르며 얻어낸 정보를 가지고 무사히 팀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 안즈의 어머니도 찾아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두었다.
안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몇년 만에 만나는 어머니를 두고 많이 울었었다. 어머니를 안전한 곳에서 보호할테니 걱정말라고 했더니 레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라시와 리츠가 함께 하는 취조에도 별 말 없이 응했다. 그런데 안즈의 입에서 나오는 형의 모습이 리츠에겐 좀 낯설었는지, 결국 취조이자 상담이 끝났을 때 있잖아, 그거 정말 내 형님맞아? 동명이인인 거 아니지? 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레오는 세나가 보호하는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다른 팀원들도 거기에 동의했고, 안즈는 결국 이즈미가 맡아 보호하게 되었다. 어차피 1차적으로 걸러지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집에 없는 척 하는게 좋다고, 자유롭게 해주겠다 약속해놓고 가둬놔서 미안하다 사과하니 안즈는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그 웃는 얼굴이 그제야 예전같아서, 이즈미도 편해질 수 있었다.
그 날도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안즈는 얌전히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몇년 뒤면 서른일텐데, 이즈미의 하나 뿐인 동생은 어딘가 모르게 어릴 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게 자신이 과거에 집착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엇이 됐든 이즈미는 좋았다. 방의 불을 끄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쇼파에 앉은 세나 이즈미는, 낮에 했던 전화를 떠올렸다.
「이렇게 전화로 대화를 하는 건 처음인 것 같구만.」
「세나군. 우리 아가씨는 잘 지내고 있는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잘 데리고 있어주게. 금방 찾아갈테니.」
「알고 있었냐고? 당연한 걸 묻는구만. 처음부터 다 알고 자네를 아가씨의 옆에 둔거라네.」
「내가 우리 리츠의 주위사람을, 조사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가? 뭐, 세나군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말이야.」
「아아, 걱정은 안해도 되는구먼. 아가씨를 그렇게 무작정 데리고 간 걸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더 묻고 싶은 건, 다시 만났을 때 이야기하게나.」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같이 듣고있던 리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무실을 빠져나갔었다. 그래, 애초에 모두 알고 일부러 두었던 거다. 정보도 마찬가지일 게 뻔했다. 안즈를 통해 얻은 정보가 있으니 작전을 실패로 볼 수는 없었지만 이즈미의 입장에서는 실패에 가까웠다. 사무실의 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걸어 안즈가 아직 집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즈미는 자신의 동생을 그 남자에게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고, 그럴려면 그 남자에게서 안즈를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잘 지냈는가 아가씨? 레이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얌전히 품에 안겨있던 안즈는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보았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기분 나쁜 것 같지도 않았고, 사쿠마 레이는 평소처럼 안즈를 대하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 혹시라도 그가 화가 나서 이즈미에게 무슨 짓을 할까 두려웠던 안즈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레이씨는 잘 지냈어요?
아가씨가 없는데 잘 지냈을리가 없겠지?
잠은 좀 잤어요?
글쎄...잔 기억이 거의 없구만.
가면 같이 자요. 그때까지 버틸 수 있죠, 레이씨?
그래, 나도 그러고 싶구만
그나저나 제가 나갈 때마다 안자고 기다리는 버릇,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거에요?
아가씨 말대로 이제는 버릇같은 거라 어쩔 수가 없다네.
사정이 생겨 안즈가 며칠 집을 비워야하는 일이 있었다. 반대하고 싶었으나 레이는 안즈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보내주었고, 안즈는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며 약속한 뒤 집을 나섰다. 정확히 삼일만에 돌아왔을 때, 멀쩡한 얼굴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레이를 보며 안즈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 다음에 멀쩡하던 사람이 자신의 품으로 쓰러져서 결과적으로는 더 놀란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정신적인 이유인지, 레이는 잠을 잘 수가 없다 말했다. 물론 조건이 붙었다. 안즈가 자신의 옆에 없을 경우. 정말 곤란하다고 생각했지만 레이가 어떤 마음인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안즈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같이 자요
저도 제대로 못잤으니까. 안즈는 뒷말을 삼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프면 얼마든지 상처를 남겨도 좋다고 했지만 안즈는 끝까지 거절했다. 레이는 그 이유를 알았고,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안즈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레이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고, 안즈는 밤마다 침대 시트만 힘주어 잡을 뿐이었다.
안즈야. 오늘따라 유달리 힘들어하길래 그만둘까 싶었지만 괜찮다고 매달린 건 안즈였다. 며칠 못보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레이씨가 나쁜게 아니라, 내가 욕심부리는 거에요. 그렇게까지 말하면서 웃는 안즈를 끝까지 말렸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던 건 사쿠마 레이 본인도 착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마와 뺨, 입술에 계속 키스해주며 힘들어하는 안즈를 달래주던 레이는 침대시트를 잡고 있는 손을 제쪽으로 끌어당겼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걸 느꼈는지 안돼, 싫어요. 그러지마요. 라는 말을 반복하며 거부했지만 애초에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에 안즈의 의사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니까. 무서워하지말고, 그래 착하구나. 다친다며, 상처가 난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안즈를 달래며 레이는 계속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지금 안즈의 손으로 등을 잡아봤자 상처가 날리는 없고 그냥, 빨간 손자국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레이는 직접 안즈의 손을 눈 앞에 보여주며 상처가 나지 않을 거라고 반복해서 말해주었고, 그제야 안즈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안즈는 손톱을 깎을 때 무의식적으로 살이 보일 정도로, 어쩔 때는 피가 날 정도로 자신의 손톱을 깎아왔다. 몇 번 그런 걸 본 뒤로 레이는 절대로 안즈가 스스로 깎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타인에게 그 손을 맡길 수가 없어 결국은 사쿠마 레이가 직접 안즈의 손톱을 깎아주게 되었다. 짧게 깎은 손톱에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지만 안즈는 만족했다.
안즈는 눈을 뜨자마자 주위를 둘러보았고, 아직 방안은 새카만 어둠이 자리잡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1시간 정도 잔 것 같았다. 다시 잠들어야 아침 일찍 나가는 레이를 마중나갈 수 있을텐데, 안타깝게도 잠이 오질 않았다. 또 비몽사몽인 채로 그를 배웅하는 건 싫은데, 눈을 감고 있을수록 더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레이를 끌어안으면 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그를 끌어안아보았지만 잠은 커녕 떠오르는 옛생각에 우울감에 빠질 것 같았다.
원인을 따지자면 말도 없이 나간 자신이었다. 흔한 일이었고, 이번에도 레이가 자신을 잡으러 올테니까 그 전에 갇혀지내면서 하지못했던 걸 최대한 많이 해보자는 게 그날의 목표였다. 열일곱에 잡혀와 3년을 그렇게 살았다. 안즈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았고, 레이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이걸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그날도 그랬어야했는데 그 남자의 어린 애인이라고 소문난 자신이 누구의 경호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걸 들은, 레이의 적들이 그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역시나 뻔한 이야기다. 안즈는 그대로 잡혀갔고, 당연히 그들은 레이에게 연락을 했다. 묶여진 상태로 맞으면서 요즘 이런 내용의 드라마를 쓰면 뻔하다고 시청자들에게 욕먹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픈 걸 잊게 해줘서 나름 좋았지만 머리를 발로 차이면서 그것도 못하게 되었다. 아, 나 이대로 죽는 건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안즈는 레이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때까지도 안즈는 그 남자의 애정을 믿지 못했었으니까, 당연한 거였다.
그러나 레이는 안즈를 구하러 왔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더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화를 냈었다. 누구의 승리였냐고? 이길 수가 없어 어린 여자애 하나를 납치해서 협박하는 놈들을 사쿠마 레이가 이기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래, 분명히 이겼음에도 그때 상처를 입었던 건 전부 안즈때문이었다. 그때의 기억은 끔찍했기에 더는 말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레이가 다친 건 전부, 안즈의 탓이다.
일주일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이마에는 꿰맨 자국이 남았고 등에도 상처가 남았다. 일주일이나 눈을 뜨지 못하는 건 역시나 심리적인 영향이 크지 않냐는 말을 했었다. 안즈는 그날부터 혼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고, 레이가 눈을 뜰 때까지 그의 방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주치의가 이러다가 쓰러지는 건 당신이라면서 뜯어말렸지만 일주일 그렇게, 자지도 않고 매일 매일 울면서 안즈는 그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여기 있게 해주세요.」
눈을 뜬 레이에게 안즈가 한 말이었고 그는 죄책감이냐고 물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뻔히 보이는 그 생각을 레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널 붙잡아둘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고.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7년이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안즈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슬프게도 그 사랑에는 죄책감과 연민이 섞여있었다.
미안해요. 모두 내탓이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밤마다 안즈는 자신을 붙잡고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나때문이라고, 내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레이는 안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사고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신이 팔려 안즈부터 챙기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로 안즈가 제 옆에 있어준다면, 무엇이든 좋았기 때문에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도 사쿠마 레이는 아마 똑같은 선택을 할 게 분명했다.
좋아한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 정확한 시작은 알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이 어색해 한 때는 일방적으로 밀어낸 적도 있었다. 이미 첫만남부터 어긋났음에도 그녀를 위해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다. 안즈가 자신이 그어둔 선을 넘으려고 하면 더는 오지 못하게 쳐냈으면서 안즈가 그 선을 넘어 자신에게 오길 바랐다. 이 모순가득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수백번, 수천번을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그래서 레이는 그 감정이 죄책감임을 알면서도 받아들였다. 어찌됐든 사랑이 있으니까, 거기에 애정이 있다면 그 어떤 게 섞여있어도 그는 좋았다.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안즈가 다시 잠든 것을 확인한 레이는 눈을 뜨고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이런 날마다 악몽을 꾸며 밤잠은 설치는 안즈가, 오늘만큼은 꿈 속에서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몇시예요?
눈을 뜬 안즈가 레이에게 물었다.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레이는 일어난 안즈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찬물을 건네줄 뿐, 원하는 답은 내주지 않았다. 아침인가요? 물을 받아든 안즈가 다시 물었지만 레이는 그 질문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을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는 묻는 말에 답조차 주지 않는 레이때문에 화가 났지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누운 안즈는 멍하니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등을 좋아했다.
두 사람이 연애를 하기 전에 안즈는 저 등에 업힌 적이 있었다. 새로 산 신발의 끈이 떨어져서 난감한 상황일 때 안즈는 신발을 새로 사오겠다고 했지만 레이는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괜찮다는 안즈의 말을 한귀로 흘려 듣고 등에 업고 다닌 적이 있었다. 정말 괜찮다고 몇번을 말했지만 레이는 듣지 않았고, 결국 안즈는 레이의 등에 업힌 채로 돌아다녀야 했다. 부끄럽고 당장 내려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레이의 그 넓은 등이 편안해서, 마치 푹신한 이불 위에 있는 것 같아 깜빡 잠들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안즈는 레이의 등을 좋아했다. 그 넓은 등에 기대서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으면 레이가 안즈의 손을 잡아주었다. 장난을 치기도 했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저 등이 왜 이렇게 미워보이는 걸까. 안즈는 레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고,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레이는 끝까지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으며 등을 돌려 자신이 하는 말조차 듣지를 않았다.
"레이씨."
아까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씨. 안즈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고, 레이는 그제야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왜 그랬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구나."
"말 돌리지 말아요. 어제 나한테 왜 그랬어요."
분노를 담고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레이는 서늘한 미소로 답해주었다. 뭐라고 더 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른 그 미소가 어젯밤을 떠올리게 해서 안즈는 저도 모르게 겁을 먹었다.
"안즈. 네 립스틱이 지워진 게 티만 나지 않았어도 조금은 참았을 텐데."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주 대담하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다른 남자랑 그런 짓을 할 생각을 다 하고."
봤구나. 눈치가 빠른 안즈는 레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고,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 시선을 외면하는 안즈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이 안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그녀가 이 파티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었고, 레이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척하며 눈으로는 계속 안즈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허튼 짓을 할 생각은 없었는지 얌전히 돌아다니는 안즈를 보며 이제는 내버려두어도 되겠지 싶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할 때, 낯선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얼굴은 알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의 동료, 유명한 사설 경호업체의 사람 중 한 명, 그리고 안즈의 헤어진 연인. 믿을 수 있는 정보원을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싫어서, 서로가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진 건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안즈는 연인보다 일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와 헤어졌고, 그 남자는 그걸 이해하면서도 기다리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주위를 살피더니 몰래 파티장 안을 빠져나갔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이도 천천히 그들을 따라나갔다. 평소라면 여유롭게 대처했을 그가 그렇게 충동적으로 행동 한 것은 단순한 질투심이었다. 사쿠마 레이는, 안즈의 일이 되면 이성적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서 레이는 많은 걸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세나 이즈미가 안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빌어먹게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일이 끝나면 다시 나에게 돌아올거지.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어보았고 안즈는, 레이의 기대를 저버리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그에게 약속했다. 분명히 안즈의 연인은 자신인데, 레이는 자신이 그들을 방해하는 비열하고 악랄한 악당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던 안즈가 떠올랐다. 순진하고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그녀가 자신의 연기에 속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레이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손을 놓아야 한다고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지만 사쿠마 레이는 그걸 놓지 못했다. 그때 놓지 못한 손의 댓가를 그는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되돌려받았고 그때부터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한 그는 이제 슬슬 이 연극을 끝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해도, 내 말 듣지 않을 거죠."
"변명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만...여기서 더 나를 화나게 할 생각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부, 들었나요?"
"안타깝게도 전부 들었다네."
이즈미와 나누었던 대화에는 안즈의 정체에 대한 것도 있었으니 그걸 전부 들었다면, 레이는 안즈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더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정체를 들켰으니 그녀는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작전은 실패했고, 안즈는 이대로 돌아가 레이와 남이 되거나-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서 이 남자에게 죽거나, 그 둘 중 하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안즈가 아니라, 사쿠마 레이가 해야만 했다. 지금 그녀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방금 전까지 자신의 연인이었던 눈 앞의 남자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는 구만."
"..."
"죽일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허나,"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보내줄 생각도 없지. 그렇게 말하며 제 위로 올라탄 레이는 안즈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죽일 생각도 없는데 다시 보내 줄 생각도 없다니,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몰라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던 안즈는 제 목덜미를 세게 물어뜯는 레이때문에 비명을 지르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레이는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는 손을 더 힘주어 잡으며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이를 세우고 달려들었고, 기어이 피를 보고 안즈가 그 아픔에 울음을 터뜨리고 나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얌전히, 얻어낼 것만 얻어내고 내 옆에서 사라졌다면 피차 서로에게 해가 될 것도 없이 좋게 끝났을 텐데."
아니지. 적어도 내 눈 앞에서 그 자식이랑 같이 있는 꼴을 보여주지만 않았어도 넌 얌전히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끝날 연극이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를 붙잡아 억지로 제 옆에 묶어둘지 고민를 하긴 했으나 그 선택을 했을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기에 제 욕심을 억누르고 그녀를, 안즈를 보내주려고 했었는데 그걸 걷어찬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안즈였다.
"실수한 거야."
따지자면 겁도 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것부터 실수였지만. 레이는 안즈가 깨어나기 전까지 많은 생각을 했고, 그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접근했으나 어이없게도 자신의 손으로 붙잡아야 하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안즈. 저만은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이는 그런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이 아슬아슬한 관계에 힘들어 하면서도 안즈가 제 옆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안즈가 돌아간다면 붙잡지 말고 보내주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끊임 없이 다독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언젠가는 끝날 이 연극 후에 그녀가 자신을 떠나면 보내주어야 한다고. 그래, 돌아갈 장소가 그 남자의 품만 아니었어도 아마 사쿠마 레이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안즈는 엄청난 실수를 했고, 안타깝게도 레이는 그 실수를 눈감아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리츠를 버티게 해주는 건 안즈였다. 리츠의 소중한 태양은 죽어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혼자 남은 그가 버틸 수 있도록 힘이 되주었다. 흡혈귀에게 이처럼 강한 햇빛은 분명히 독이었지만 리츠가 안즈를 잃어버리고 혼자가 됐던 그 날 이후로, 태양은 이 흡혈귀에게 더는 독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태양 아래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리츠를 보며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기이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처음 1년은 원망을 했다. 원망의 대상은 자신일 때도 있었고, 안즈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을 원망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리츠는 자신을 원망했다. 인간을 사랑한 건 자신이었고, 사랑했던 만큼의 댓가를 치루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안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저와 비슷한 무리의 녀석이 그런 말을 했었고, 예전같았으면 손을 올렸겠지만 상대할 가치도 없다 여겨 리츠는 그것이 무어라고 지껄이든지 신경쓰지 않고 무시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거겠지. 리츠는 안즈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안즈가 있기에 지금의 사쿠마 리츠가 있을 수 있었다. 현재의 리츠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모두 안즈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웃을 수 있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리츠는 안즈의 흔적을 버팀목 삼아서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에는 그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해서, 괴롭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피하고 도망가는 건 이제 질색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망가진 채로 지내는 걸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이 안즈이니까, 리츠는 안즈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은 흔적을 보고 우는 건 이제 그만두자. 안즈가 내게 남긴 그것들을, 내 소중한 보물들을 보면서 슬퍼하기 보다는 웃을 수 있게,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노력해보자. 방문을 열고 나왔던 리츠가 제 형을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목소리로 했던 말이었다. 그의 형은 자신의 동생이 다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죽어서까지 제 동생의 빛이 되어 준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해주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닿았다. 어? 안즈는 멍한 얼굴로 눈 앞의 남자를 쳐다보았고, 말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른 남자는 웃으면서 다시 한번 다가왔다. 물론 거기서 재빨리 정신을 차린 안즈가 본능적으로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막아버렸기 때문에 방금 전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급하게 손을 올려서 막은 거라 힘조절을 못해서 레이의 얼굴을 때린 것처럼 되어버렸고,
"...이게 무슨 짓인가 아가씨."
"사, 사쿠마 선배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예요?"
"이런 짓을 당할만큼 나쁜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안된다며 밀어내려는 안즈와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집념의 사쿠마 레이가 부딪혔다. 사실 가진 힘의 차이로는 안즈가 밀리는 게 당연했지만 사람이 놀라면 미지의 힘이 튀어나온다더니 안즈는 제 손목을 잡고 밀어붙이려는 레이를 가까스로 막아내며 버틸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관계다. 레이의 말마따나 그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둘만 있는 상황에서 가벼운 키스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은가? 뭘 더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본인이 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저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안즈는 안즈대로 레이의 행동이 불만이었다. 사귀고 난 다음에 처음 하는 키스인데, 이런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첫키스에 그다지 환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아무런 분위기도 없이, 마치 급한 걸 해치우는 것마냥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사절이었다. 계속되는 힘싸움에 정말로 화가 난 건지 계속 싱글벙글 웃고있던 레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지워졌고, 그게 무서우면서도 절대 이렇게 넘어가줄 수 없다는 생각에 안즈는 이를 악물었다. 사실 타인이 보기에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지금의 두 사람에게는 아마 들리지 않을 말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걸 지금 이때 하는 거냐구요!"
"그럼 거창한 이유라도 필요한가?"
"거창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좀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분위기?"
결혼식을 보러갔었다. 정확히 누군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당신이 거길 왜 가냐고 말렸던 것도 같았다. 왜 그걸 보러갔는지는 사쿠마 레이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거길 대체 왜 갔던걸까. 자신은 청첩장같은 것도 받지 못했다. 물론 안즈는 헤어진 연인에게 결혼한다고, 그러니 와달라고 청첩장을 보내는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레이도 그걸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몰래 찾아갔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무난한 디자인의 웨딩 드레스였지만 안즈에게 잘 어울렸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안즈의 옆에 있는 남자는 레이도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직접적으로 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눈에 애정을 가득 담고 웃는 얼굴로 안즈를 대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행복해보였고, 사쿠마 레이는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결혼 소식을 들을 이후부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고, 그걸 바라고 안즈와 헤어졌다. 레이는, 평범한 인간인 안즈가 함께 했던 그 과거를 잊지 못하고 평생을 자신에게 얽매여서 살지 않길 바랐다.
식은 순조롭게 끝이 났고, 사진촬영까지 모두 지켜 본 레이는 이만 갈까, 하다가 이왕 온김에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은 안즈의 모습까지는 보고갈까 해서 식장을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광경을 지켜본다면 아마 꼴사납다고 비웃을 게 뻔했지만 레이는 안즈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가고 싶었다. 어떤 말로 자신을 욕해도 상관없다. 이 결혼식이 제 눈으로 보는 안즈의 마지막 모습이 될테니까.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지워야 하니 이곳에 더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고,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다른 곳에서 지내야만 했다. 사진도, 영상도 남아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니까 레이는 최대한 많이, 아주 오랫동안 안즈를 제 눈에 담고 갈 생각이었다.
"그...혹시 오늘, 까만 머리에 빨간 눈을 한 키가 큰 남자를 보지 못하셨나요? 아뇨, 학교 선배인데...아, 그런가요...감사합니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안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조용히 그쪽으로 가보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안즈가 다른 사람을 붙잡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고, 아무래도 그 누군가는 레이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은 보지못했다는 말에 한숨을 쉬면서도 얼굴을 봐서 뭐 어쩔꺼냐고 중얼거리던 안즈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의 얼굴로 레이를 이름을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듣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애타게 내 이름을 불러. 속으로는 그렇게 안즈를 혼냈지만 사실 레이는 안즈를 그렇게 혼낼 처지가 아니었다. 잘 참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안즈를 불러서 자신은 여기 있다고,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멈추게 한 건 과거의 기억이었다. 참지 못하고, 순간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저질렀던 일이 후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누군가가 제 귓가에 속삭였다. 레이는 귀를 막고, 눈을 감은 뒤 매정하게 뒤돌아섰다. 더 오래 보고 싶었고, 더 많이 담고 싶었지만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그렇게, 레이는 자신을 찾는 안즈를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났을 때 츠바키에겐 말하지 않고 사진을 찍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와 비슷한 디자인의 웨딩 드레스를 입은 안즈는 그날과 똑같이, 아니 그때보다 더 예뻐보였다. 그날 레이가 사온 꽃은 붉은 장미였고, 안즈는 그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었다.
살면서 웨딩 드레스를 두번이나 입어볼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며 말갛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평생 숨길 생각이었는데,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멋대로 입이 움직였고, 레이는 그 옛날의 기억을 저도 모르게 털어놓고 말았다. 한참동안 말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즈는 복잡한 얼굴로 웃으며 레이의 손을잡았다.
알고있었어요.
언제부터 자신이 왔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그럼 너를 발견하고도 못본 척 돌아 선 나도 알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자신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묻고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그 말을 꺼낸 안즈는 그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결국 레이도 그에 대해서 묻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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