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110212200506

레이안즈 : sweet sweet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sweet sweet

박로제 2017. 11. 5. 22:04





딱히 동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사실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집을 나와 혼자 살고 있으니 더 키우기 애매한 것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사축으로 집에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긴 안즈였고, 자신이 외롭다는 이유 하나로 동물을 데려와서 외롭게 두고 싶지않았다. 그냥 다른 친구들의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안즈는 그 고양이를 만났다.

그날도 야근을 했고, 장마기간이라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으며, 저녁도 못먹어서 편의점에 들려 도시락을 사서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마음같아서는 식재료를 사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안즈는 지금 집에 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편의점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걸어갈 때, 집근처 전봇대에서 버려진 고양이를 발견했다. 커다란 상자 안에서 세차게 내리는 장맛비를 맞으며 처연하게 울고 있는 고양이에게서 안즈는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그냥 못본 척 지나쳤을텐데, 특이하게도 새빨간 눈을 가진 고양이가 자신을 쳐다보자 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말았다.

나...나는 너 못데려가...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그 불쌍한 고양이를 억지로 외면하며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새까맣고 눈이 새빨간, 한눈에 봐도 귀하게 생기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그 고양이는 뚫어져라 안즈를 쳐다보았고, 그 조막만한 얼굴에는 걸려든 인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보였다. 안즈는 귀여운 것에 약했고, 귀여운 것들에게 약했으며, 그렇게 귀엽고 잘생겼으며 사랑스럽기까지 한 고양이를 외면하고 버리고 갈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결국 안즈는 고양이가 버려진 상자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팔을 벌렸고, 그 고양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

귀여우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

속았다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도 애교를 부리며 친근하게 구는 고양이가 싫지 않아, 안즈는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레이안즈 : sweet sweet





고양이는 얌전했고, 사고도 치지 않았다. 시끄럽게 구는 일도 잘 없었으며 털이 날린다는 걸 제외하면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과 더 비슷한 자신의 새로운 룸메이트는, 아주 빠르게 안즈의 일상으로 스며들어와 이제는 없으면 허전한 그런 존재가 되었다. 다만 걱정되는 건 토마토주스를 물보다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인간이 먹는다고 만들어 둔 그것을 고양이가 먹는다고 생각하니 찝찝하여서 결국 안즈는 모처럼의 휴일에 자신의 애완고양이를 품에 안고 친구가 하는 동물병원을 방문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 거지?"
"응. 아야얏. 안즈. 이 녀석 원래 이렇게 사나워?"
"에... 아니? 굉장히 순하고 사람도 잘 따르는 편인데... 병원에 와서 그런가?"
"그런 것치고는 안즈한테 딱 붙어있지 않아~? 치료내내 내 손을 할퀴고 깨물었으면서 뭐야 지금은!"

혹시라도 아픈 곳이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픈 곳은 없어보였고, 안즈는 제 손에 볼을 부비며 예쁜 짓을 하는 고양이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 품에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치료 내내 제 손을 깨물고 할퀴어서 기어이 피를 보게 만든 장본인이 언제 그랬냐는듯 태도를 바꾸고 주인에게 아양을 떠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스바루는 속에 있던 것이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안즈가 저렇게 좋아하니까 이번 한 번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고양이 이름은 지었어?"
"어...지었는데... 뭔가 사람이름 같아서 잘 안부르게 되더라구."
"에에...뭘로 지었는데?"
"레이. 되게 사람이름같지? 내가 지어준 건 아니고... 원래는 생각해둔 이름이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마치 이걸로 불러달라는 듯이 신문에 있던 글자를 앞발로 계속 툭툭 두드리길래 그렇게 지어줬어."
"엄청 똑똑한 고양이잖아...그런데 왜 병원에 데려온거야? 데려왔을 때 예방접종은 집 근처에서 해줬다며."
"그게...있지, 스바루 군."
"응?"
"... 고양이가 토마토 주스를 마셔도 괜찮은 거야?"

안즈의 말에 진료실 안은 마치 귀신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조용해졌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스바루는 멍청한 얼굴로 다시 되물어보았다. 뭘 마신다구? 토마토 주스. 안즈가 직접 만들어준 거? 아니, 시중에 팔고 있는 거. 거기까지 들은 스바루는 잠시 심각한 얼굴로 고민을 하더니, 아주 애매한 답안을 들려주었다.

"...마셨는데도 별 이상이 없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런가...?"
"그리고 어차피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닐테고... 몸에 좋은 건 아니지만 조금정도는..."
"아니, 아니야. 스바루 군."

물처럼 마신단 말이야. 아니, 물이 아니라 토마토 주스를 마셔 우리 고양이...

안즈의 말에 스바루는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고, 두 친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해보았지만 결국 아무런 해결책도 나오지 않았고, 제 주인과 붙어있는 스바루가 꼴사나웠던지 시끄럽게 울며 안즈에게 매달리는 고양이 때문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더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안즈는 급하게 병원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야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주워왔던 이 새까맣고 잘생긴 고양이는 안즈를 아주, 아주 많이 좋아했다. 고양이를 키우는 다른 친구들 말로는 혹시 겉모습만 고양이랑 비슷한 개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안즈와 붙어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정도는 까탈스러운 면이 있어 새침하게 굴 때가 있다는데 이 고양이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잠시만, 임시로 보호만 하고 있자. 그런 생각을 하고 데려왔던 안즈는 결국 이 고양이를 자신이 책임지고 키우게 되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흔히 말하는 '집사'가 되어있었다.

원래는 사축이라고 불릴 정도로 회사에 묶여살던 안즈가 고양이 때문에 일을 마다하고 정시에 퇴근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동료들은 다들 무슨 일이냐며 달려들어 이마의 열이 있나 확인하고, 어디 아픈 건 아니냐, 힘들면 말해라, 그래 안즈 씨도 좀 쉬어야지. 같은 말을 해주며 안즈의 정시퇴근을 응원해주었다. 내가 그렇게 사축처럼 살았던 건가. 퇴근길에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 비참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레이-"

고양이에게 줄 토마토주스를 사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름을 부르며 찾으니 어둠 속에서 새빨간 눈을 한 고양이가 빠르게 달려왔다. 평소에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성격인데, 안즈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재빠르게 달려와 빨리 자신을 안아달라는 듯 울어댔다. 너무 어리광쟁이로 키우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고양이의 얼굴을 보고있으면 역시 아무래도 좋아져서, 버릇을 고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며 그 어리광을 받아주고 말았다. 내가 얼굴에 약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사람도 아니고 고양이 얼굴에 마음이 약해져서 이러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잘생겼으니, 귀여우니까, 예쁘니까! 안즈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이렇듯 자신의 고양이의 전부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안즈였지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이 야행성인 동물이 제 주인이 자야하는 시간에도 놓아주지 않고 자꾸 놀아달라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일 출근을 해야하고, 내가 일을 못하면 우리 레이 토마토 주스도 못사줘... 제발 그만하자며 품에 끌어안고 그렇게 말해보았지만 이 말썽꾸러기 고양이는 딱 그때만, 안즈의 말을 못알아듣는 척 연기를 했다. 그렇다보니 야근을 하지 않음에도 잠을 자지 못해 안즈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졌고, 야근도 하지 않는데 왜 점점 상태가 나빠지냐며 모두들 안즈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중에는 애인때문에 그런 거 아냐? 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소문이 퍼질 뻔 하기도 했지만 고양이 사진과 함께 밤에 재우지를 않고 자꾸 놀아달라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런 소문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즈미 오빠도 그런 오해를 했었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사실은 알 것 같았지만 안즈는 애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요즘은 정시퇴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즈미가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먹자며 연락을 해왔고, 서로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했던 이즈미를 보고 싶었기에 안즈도 그 제안을 받아들여 오늘 퇴근하자마자 자신을 데리러 온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온 것이었다.

'요즘 야근 안한다며.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수척해?'
'어어...정시퇴근을 하긴 하는데... 잠을 못자게 해서...'
'뭐?'
'붙잡고 놔주지를 않으니까 잘 수가 없어요. 잘려고 누우면 바로 달려들어서 깨우는데다가 자는 척 하는 것도 별 소용이 없었고...'
'하아?'
'그만하자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 말을 들은 척도 안하니까...'
'어떤 새끼야?'
'고양이가...'

마지막 말은 동시에 내뱉은 것이었고, 이즈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어떤 새끼냐고 물어보았고, 안즈는 한숨을 쉬면서 고양이라는 말과 함께 제 사진첩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내가 말을 이상하게 한 건가, 어떻게 생각이 저렇게 흘러갈 수 있는 거지.

'진짜 고양이 맞는 거지?'
'애인을 사귀고 싶어도 쟤 때문에 사귈 수가 없어요. 주말에 아예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걸요.'
'흐응...'
'진짜라니까요...'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이즈미는 그것을 믿어주었고, 애인이 생기면 자신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한다며 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잔소리를 했던 이즈미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응? 왜 그래?"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어디서 으르렁 거리는, 사납게 우는 소리가 나서 보니 방금 전까지는 기분좋게 울고있던 고양이가, 제 몸 여기저기를 킁킁 거리더니 이까지 드러내면서 화를 내고 있었다. 자기한테 신경안써줘서 그러는 건가? 하지만 다른 때에는 이렇게 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는데. 제 손 여기저기를 핥아대면서 짜증을 내는 고양이를 보며 생각에 빠진 안즈는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 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이즈미는 애용하는 향수가 있었고, 오늘도 그것을 뿌리고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 오래는 아니지만 몇 시간을 붙어있었으며 밀폐된 공간이고 향이 가장 진하게, 오래 머물러있는 이즈미의 차를 타고 돌아다녔으니 아무래도 그 향수가 자신의 몸에도 남은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제 주인에게서 낯선 향이 나니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는게 당연했고.

"그런데 이건 좀..."

단순히 낯선 향이 나서 경계한다고 보기엔... 그런 묘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럴리가 없다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마치 질투하는 것 같잖아.

다시 한 번 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그 생각을 부정한 안즈는 아직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





어젯 밤은 달이 굉장히 예쁜 날이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볼정도로 예쁜 보름달이 떠있는 밤이라서, 게다가 내일은 쉬는 날이기도 했으니까 나가지 않으려고 투정부리는 제 고양이를 안고 맥주 한캔에 가벼운 안주를 사서 달구경을 갔다. 이렇게 나오지 말고 집에 있자는 듯 투정부릴 때는 언제고 막상 함께 나와서 달을 구경하는 건 좋았던 모양이다. 계속 안즈에게 애교를 부리며 갸르릉 거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다들 이런 마음으로 고양이를 키우는 건가 싶었다. 집에 도착해서도 안즈의 품 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길래 결국은 제 침대 위에 눕히고 말았다. 털때문도 있고, 혹시라도 제 잠버릇 때문에 다치기라도 할까봐 일부러 따로 잠자리를 마련해줬는데 평소에는 얌전히 거기에 누워서 자더니 오늘따라 왜 이리도 말을 안듣는지. 결국 자신이 씻고 나올 때까지도 침대 위에 누워서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버릇없지만 귀여운 제 고양이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던 게 안즈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누구지.

무언가가 제 몸을 누르고 있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제 고양이가 저를 누르는 건가 싶었는데 이건 고양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분명히 사람의 무게였고, 저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남자의 무게였다. 아니 집에 도둑이라도 들었나?! 그런 생각이 드니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눈을 뜨니 보이는 건 누군가의 벗은 몸이었고, 그걸 보고도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안즈는 제 몸을 누르고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치워내고 다 벗은 몸으로 제 침대 위에 누워있는, 도둑인지 단순한 변태인지 모를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누구지? 누구인데 내 침대 위에 누워있지? 아니 그것보다 왜 벗고 있는 건데? 잠시만, 벗고 있다고? 그제야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흘려넘겼던게 아주 커다란 문제임을 깨달은 안즈가 우렁차게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서 떨어졌고, 그 시끄러운 비명소리에 잠에서 깬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안즈?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른 남자는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며 이리 오라고 손짓했고, 마치 자신을 잘 아는 것마냥 구는 남자때문에 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된 안즈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누구신데 여기에 있냐고 물어보았다.

"응? 아아... 들켰구만."

당신이 내 집에 무단침입해서 나체로 제 침대에 뛰어든 변태라는 사실을 말인가요? 태평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저 남자가 누구인지, 제 안전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조심하고 경계해야 했기 때문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그러고 보니 나랑 같이 잤던 우리 고양이는 어디갔지. 다른 남자가 옆에 있었으면 가만히 있을리가 없는데, 평소 성격대로라면 시끄럽게 울어대며 난리를 쳤을 제 고양이가 보이지 않자 혹시라도 저 남자에게 해코지를 당한 게 아닌가 싶어 안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레이, 레이 어디갔어? 라고 조심스럽게 제 고양이를 불렀다. 그러나 나오라는 고양이는 나오지 않고, 신원불명의 그 남자가 자길 불렀냐며 웃는 것이 아닌가!

"저..저기요, 저는 그쪽을 부른 게 아닌데요..."
"그렇지만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가."
"우리 레이랑 이름이 똑같으신가봐요...하하하..."
"이 몸이 아가씨의 「우리 레이」네만."
"장난치지 마시구요... 저희 고양이 어디갔어요? 그쪽이 해코지한 거 아니죠?"
"자해하는 취미는 없으니 걱정말게나. 뭐... 그래, 믿기 힘들만도 하지. 고양이가 사람이 되서 나타났는데 누가 그걸 믿겠는고."
"....뭐라구요?"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잘 못 들은 거겠지. 안즈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며 웃었고, 그 남자는 이런 걸로 농담하는 취미는 없으니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답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보라빛 연기가 나더니 침대 위에 앉아있던 남자는 사라지고 안즈의 사랑스러운 고양이가 귀엽게 울고 있었다. 저 영롱한 빨간 눈과 잘생긴 얼굴, 윤기나는 검은 털과 제가 목에 달아 준 방울까지. 저 고양이는 누가봐도 안즈의 고양이였고, 놀란 안즈가 이건 꿈이라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며, 나한테 이런 말도 안되는 판타지 소설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고 소리치자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그 남자, 아니 안즈의 고양이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뭣하면 한 번 더 보여줄 수도 있는데, 한 번 더 보겠는가?

안즈는 괜찮다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구만.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하나도 아쉽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가끔 제 집에 자러 오는 이즈미가 입던 옷이 있었고, 다른 남자 냄새가 나는 걸 입어야한다는 게 불쾌하기는 했지만 제발 옷 좀 입고 이야기하자며 비는 안즈때문에 레이는 어쩔 수 없이 그걸 받아 입었다. 묘하게 짧은 소매와 바지 밑단을 보면서 가당치도 않은 우월감을 느낀 레이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머리를 쥐어 뜯고 있는 안즈의 앞에 가서 앉았다. 인간의 몸으로 있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역시 이쪽이 본모습이라 그런지 움직이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줄까? 레이는 그렇게 물었고, 안즈는 처음부터 전부 다 이야기하라며 피곤한 얼굴로 답했다.

아가씨가 보다시피 나는 평범한 인간은 아니구먼. 뭐, 이쪽이 본모습이긴 하지만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으니 일단 보통의 인간은 아니지. 아무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가오면 이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어져서 고양이로 변해버리고 만다네. 아가씨가 나를 데려갔던 그 날도 비때문에 약해져서 길거리에서 고양이로 변해버렸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누군가가 데려가주길 만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에 타이밍 좋게 아가씨가 그곳을 지나갔지. 고양이로 변한 몸은 다음 달 보름이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인간의 모습이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원래는 그때까지만 신세 질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그래, 그럴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지내는 게 너무 즐거워서 말이야...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음에도 오래 여기에 머무르고 말았구먼. 그럼 계속 숨기지 왜 인간으로 돌아왔냐고? 뭐...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해도 괜찮겠지? 중요한 건 나도 이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는 도중에 본모습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는 거니까.오해하지말게나. 어젯 밤에 침대 위에서 내려가지 않은 건 일부러... 아니, 아니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구먼. 믿어주게나.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안즈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니까 원래는 사람이고, 다시 힘을 찾을 때까지만 여기서 머물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나랑 있는 게 좋아서 여기 계속 머물게 된 거고, 오늘의 사태는 자신도 원치 않게 일어난 일이라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저 붉은 눈이 자꾸 고양이를 생각나게 해서, 그 얼굴에 약했던 안즈는 레이의 말을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나한테 해코지 한 것도 없었고, 우리 그동안 잘 지냈으니까. 그리고 이제 저 남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테니까, 우리는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니까 믿어주는 게 좋겠지. 안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고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정말 제 고양이와 비슷한 점이 자꾸 보여서 이 남자가 제게 무언가를 부탁하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난감할 정도였다.

"그런데 부탁이 있구먼, 아가씨."
"네? 무슨 부탁이요?"
"그게..."

내가 생각해도 뻔뻔하긴 하지만 말이야... 이 늙은이의 부탁은 여기서 계속 살 수 있게 아가씨가 허락해줬으면 하는 거라네. 아니, 오해말게나. 제대로 집세나 필요한 돈은 지불할테니까. 그럴거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니, 나는 아가씨랑 같이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구만. 원한다면 계속 고양이의 모습으로 있을테니까... 안되는가? 첫 날,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눈을 반짝이며 저를 쳐다보는 그때와 똑같은 얼굴로 레이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아, 나는 이 얼굴에 너무 약해. 보면 안돼, 보면 안되는데. 하지만 자꾸 그 얼굴에 눈길이 갔고, 제가 안된다며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의 머리 위로 까만 고양이 귀가 뿅, 하고 생겨났다. 언제나 자신이 만지고 쓰다듬어줬던 그 귀가 축 쳐지더니 어쩔 수 없지...이 늙은이는 그럼 또 길거리에 버려져서... 다른 사람이 데려가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만... 아니, 당신 집있다면서요. 그렇게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 정말.

"...집세랑 생활비 주는 거죠?"
"!!"
"...고양이 모습으로...있어야...돼요...아니, 사람 모습으로 있어도 되긴 한데..."

제발 벗고 있지만 말아요. 옷 사다줄테니까... 그 앙증맞은 귀가 기운을 차린듯 쫑긋 거리더니 이제 꼬리까지 나와 신나게 움직이는 걸 보면서 안즈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기 시작했지만 이미 허락을 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역시 그때 주워오면 안되는 거였어. 길거리에서 고양이 줍는 거 함부로 하지말라는 친구의 말을 조금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안즈는 한숨을 내쉬었고, 원하는 걸 쉽게 얻어낸 레이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고양이였을 때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제 뺨에 부비적거렸다.



기쁜 만큼 드는 생각은 이렇게 쉽게 난감한 부탁을 들어주는 안즈에 대한 걱정이었다. 물론 안즈가 들어줄 수밖에 없게끔 행동한 사람은 자신이었고, 이게 안되면 다른 (극단적인)방법을 쓸 생각이었기에 여기서 허락이 떨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외모로 밀어붙이는 것에 쉽게 넘어가는 안즈를 보니 얼굴밖에 없는 나쁜 사람에게 혹시라도 이용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나쁜 건 자신이었지만.

처음에는 그저 자신을 데리고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안즈를 붙잡은 거였지만 함께 지내다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안즈와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일부러 이 모습을 유지했다. 집에 돌아오면 제 이름을 부르며 안아주는 것이 좋았고, 짓궂은 장난을 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예쁘다며 쓰다듬어주는 게 싫지가 않았다. 제 친우들이 안다면 드디어 뇌까지 고양이가 된 거냐며 놀릴 일이었지만 안즈와 이대로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정말 솔직히, 이 모습으로 평생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평화로운 생활을 깨부순 건 다른 남자의 냄새를 묻히고 집으로 돌아 온 안즈때문이었다. 그녀의 활동범위는 굉장히 좁았고, 만나는 사람도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레이는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말도 없이 늦어서 걱정을 시키더니 처음 맡는 남자의 향수냄새를 잔뜩 묻히고 집으로 돌아왔고, 그게 마음에 안들어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그전까지도 안즈의 옆에 붙은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날카롭게 군 적은 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향수 냄새때문인가? 아, 이즈미 오빠 차로 계속 움직여서 나한테도 향이 옮았나 보다.'
'이게 그렇게 기분나빴어? 하기사...오빠 향수 냄새가 동물이 맡기에는 좀 자극적이긴 해.'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도 모자라 그 이름 뒤에 오빠라는 호칭까지 붙이고. 당장이라도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그 남자가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은 걸 겨우겨우 참아내며 레이는 안즈가 씻고 나오는 걸 기다렸다. 내 사람인데, 제 주인인데, 안즈는 내 껀데. 유치하게 자꾸 그런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았고, 그때부터 레이는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계속 있어봤자 자신은 그저 애완동물일 뿐, 그녀의 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서 누구를 만나는지 간섭할 수도 없었고 이상한 놈이 달라붙어도 쫓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달이 차오르기만을 기다렸고, 어제는 레이가 그토록 바라던 그 날이었다. 그러니까, 본모습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달이 굉장히 예뻤던 그 날 밤, 레이는 이 밤이 지나고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안즈의 침대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중간에 본심이 튀어나와 들킬 뻔 했지만 상식 밖의 일에 당황하고 제대로 상황파악조차 되지 않아서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녀는 그걸 듣고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기는 것 같았다. 이렇게 쉽게 들키면 안되지. 아직 그 남자가 어떤 놈인지 보지도 못했는데. 레이는 안즈를 제 사람으로 확실하게 도장찍기 위해서 아주 방대한 계획을 세워놓았고,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람일 때도 제 침대에서 잘 거예요?"
"나이가 있다보니 바닥에서는 잘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그럼 잘 때만이라도 고양이로 변신해주세요..."

새빨개진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안즈를 보면서 제 속마음을 숨기고 예쁘게, 그렇지만 서늘함이 느껴지는 얼굴로 웃은 레이는 그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눈 앞의 남자가 어떤 속내로 웃고 있는지도 모르고, 안즈는 이제 어떡하냐며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안산블루스따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즈른 단문  (0) 2017.11.07
레이안즈 백업  (0) 2017.11.06
#1일_1레이안즈  (0) 2017.11.05
레이안즈 : you don't love me  (0) 2017.11.04
레이안즈 : you don't love me  (0) 2017.11.04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