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12200506
레이안즈 단문 본문
프라이베터에 올린 글을 모은 것 어디서 봤다 싶으면 그거입니다 그거(?)
첫번째 레이안즈(+호쿠)는 야센님 그림보고 쓴 것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매달렸다. 사랑해달라 매달리면서 하는 말은 그를 증오하는 안즈가 들어도 한순간 흔들릴만큼 매혹적인 말이었기에 소녀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괴물은, 자신이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바로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아직 때가 아니어서 그럴 수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먼 과거에서부터 너를 기다려왔다고 말하며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그 괴물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끔찍했다. 이대로는 정말로 이 괴물에게 넘어가버릴 것 같아서 안즈는 잡혀온지 한달이 되었을 때, 그가 성을 비운 사이에 자살시도를 했다.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믿고 풀어둔 것이 괴물의 실수였고, 안타깝게도 안즈의 자살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다. 분명히 칼로 배를 사정없이 찔렀을텐데 눈을 뜨니 상처 하나 남아있지 않았고, 괴물은 그 후로 안즈를 절대로 풀어두지 않았다.
새장 안은 안전했다. 안즈의 몸을 다치게 할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괴물은 그 밖에서 하루종일 안즈를 관찰했다.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었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허나 그가 하는 사과는 안즈를 이런 곳에서 가둬서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고, 친구를 죽이고, 마을을 파괴하고, 제 가족을 죽이고 저를 납치해 온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로 미안하든 말을 하지 않았다. 안즈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흘려들을 뿐 그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당신을 받아주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가 죽어도, 죽어서 영혼이 되어도,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해도.'
참다못한 안즈는 괴물에게 그리 말했고, 그 뒤로는 그의 앞에서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괴물은 안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안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것들을 무시했다. 답지 않게 로맨티스트를 자청한 괴물은 그런 안즈에게 화가 나도 다른 곳에다가 화풀이를 할 뿐 소녀의 앞에서는 언성을 높인 적도 없었다. 이것은 그런 괴물을 향해서 소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복수 방법이었고, 자신을 사랑하는, (안즈는 이게 사랑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저 괴물은 이런 자신을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계속 무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했던 말처럼 죽어서도 그를 저주하고 미워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불행하게도 안즈는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게되었다.
'안즈.'
그날은 이상하게도 성 안에 아무도 없었다. 그 괴물도 보이지 않았고, 안즈는 오랜만에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대로 숨이 멈춰져서 죽어버리면 좋을텐데. 새장 안에 누워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있을 때 어디선가 호쿠토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눈을 뜨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정말로 그가 서있었다. 나의 소중한 친구, 나의 영원한 기사님, 내가 죽어서도 사랑할 연인. 미안하다고, 새장을 붙잡고 울며 사과하는 호쿠토를 보면서 안즈는 그러지말라고, 너는 나쁘지 않다고 그의 손을 잡고 계속 사과를 하는 호쿠토의 손을 잡아주었다. 소년은, 들고 있던 칼을 이용해서 안즈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안즈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나를 용서해줄거지? 계속해서 잘못을 비는 호쿠토에게 괜찮다 말해주며 안즈는 그를 용서했다.
그래, 용서했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용서하는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은 저와 호쿠토 뿐이었기에 굳이 '누구'라고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안즈는 몰랐으니까. 굳이 그렇게 말을 해야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안즈 그 말을 내뱉자마자, 눈 앞의 소년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저가 사랑했던, 저와 비슷했던 푸른 눈동자가 선명한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안즈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는, 괴상하게도 울면서 웃고 있었고, 사랑한다는 말만 계속 중얼거리며 안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더 힘주어서 끌어안았다.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교활한 그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쓴 것 뿐이고, 거기에 속아넘어간 사람은 자신이었다. 안즈는 더는 그를 밀어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안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그에 반해 레이는 뻔뻔한 얼굴로 웃으며 자기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구는 제 연인을 안즈는 이번만큼은 도저히 용서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틈을 봐서 문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걸 눈치챈 레이가 유일한 탈출구를 막아서는 바람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안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구석에서 가까이 오지말라며 레이에게 짜증을 냈고, 사쿠마 레이는 닫힌 문에 기대고 서서 어디 한번 해보라는듯 여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졸업 후 레이는 집을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만남은 레이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정식으로 연예계에 데뷔한 그와 밖에서 만나는 건 힘든 일이었고, 둘다 아웃도어파는 아니었기 때문에 집에서만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그다지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뭐 가끔가다 밤에는 레이의 차를 타고 가까운 바닷가나 자동차극장을 가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 어쨌거나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오늘도 친구네 집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안즈는 레이를 만나러 왔고, 내일이 주말이라 학교에 갈 필요도 없어 자고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져 제법 들떠있는 상태였다.
레이는 기본적으로 스킨십을 좋아했다. 안즈가 옆에 있으면 꼭 제 무릎 위에 앉혀야만 했고, 손이나 얼굴, 혹은 배나 가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대서 학창시절에만 해도 주위의 원성을 제대로 사 안즈가 접근금지 명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물론 그걸 들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그것뿐이면 괜찮은데 무슨 귀신이라도 붙은건지 키스하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같이 있다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곤 했다. 물론 키스로 끝나는 일은 잘 없었지만. 어쨌든 눈에 보이는 곳마다 입술부터 들이대는 레이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기분이 들어 좋기도 했고 안즈 본인도 좋아했기 때문에 여태까지 이것들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지금은 아니었다.
사실은 이렇게 놀면 안되지만 레이를 만나지 못한지 벌써 두달은 된 것 같아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안즈는 이번 주말만 아무 생각없이 쉴거라고, 그러니 이번만 일에 대해서 잊자고 스스로를 세뇌시킨 뒤 레이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내일 저녁에 돌아가면 그때부터 다시 테스트 준비를 해야한다. 뭐, 이미 프로듀서로 많은 것들을 보여준 안즈가 이제와서 과목 낙제점을 받는다고 해서 그다지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도 낙제점이 나온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쿠누키선생님과, 어떻게 안건지 중간테스트의 결과를 알아낸 이즈미가 프로듀서가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으면 어떡하냐고 잔소리할게 두려워서 안즈는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 사람은 졸업까지 했으면서 내 성적은 대체 어떻게 안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더 파고들면 큰일날 것 같아서 안즈는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어쨌든, 안즈는 내일 시험공부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 체력을 보존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레이를 만나러 오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연인이 너무 보고 싶었던 안즈에게 그런 선택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정을 아니까 믿고 온건데! 커다란 베개를 무기삼아 벽에 달라붙은 안즈는 더 다가오면 이걸 집어던지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그런것쯤 맞아봤자 아프지도 않고 별 피해도 없었기에 레이는 그냥 집어던지라고 말했다. 오늘만이라도 좀 평범하게 있어도 되잖아요! 아가씨는 재밌는 소릴 하는구먼. 이 몸에게는 이게 평범이네만? 듣고있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릴 하는 레이 때문에 잠시 어이를 상실한 안즈는 자신을 붙잡으러 오는 레이를 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잽싸게 방문으로 달려갔다. 요즘 아도니스군한테 교육받고 있으니까 무사히 이 방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안즈의 상대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사쿠마 레이였다.
이거놔요!
싫구먼.
레이씨 바보, 거짓말쟁이, 멍청이! 진짜 싫어!
그래, 그래.
어깨에 매달려서 주먹 쥔 손으로 등을 때리며 내려달라고 했지만 말을 들어줄리가 없었다. 안즈는 바로 침대 위에 눕혀졌고, 도망가지 못하게 레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올려다보는 레이의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안즈는 약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이 사람한테 이렇게 약해서 어떡하면 좋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더니 레이가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안즈를 위해서 딱 키스만 하겠다고, 그 외의 다른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손가락까지 걸며 약속을 하는 레이를 보며 의심이 들지 않을리가 없었지만, 안즈는 그래도 사쿠마 레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남자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럼 키스만이에요. 하고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안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주 환하게 웃는 레이의 얼굴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함을 느꼈다.
잠깐, 레이씨! 키스만 하겠다고 했잖아요!
이런게 어딨어요! 키스만 하겠다고 해서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더니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엄한 곳에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치마 안쪽으로 들어온 얼굴이 허벅지 안쪽의 여린살을 살짝 깨물더니 혀로 핥는 것을 본 안즈가 깜짝 놀라서 레이를 밀어내려 하니 손이 붙잡혔고, 붙잡은 손바닥과 손등, 손목에 차례대로 입을 맞춘 레이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키스만 하겠다고는 약속했지만...입술에만 하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으니, 내俺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은근슬쩍 달라진 어조에, 그런 치사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안즈는 레이를 밀어낼 수가 없다. 거기다가 레이가 한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기 때문에, 안즈는 얌전히 그 입술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과제도 무엇도 없는 날이고, 중간고사도 끝나서 가방에 무겁게 들고다닐 것도 없어서 가볍게 온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짜 운동해야겠다. 지나치게 많고, 높은 계단을 올라오느라 가진 체력을 모두 써버린 안즈는 인문사회학관 앞 정자에 앉아서 숨을 고르다가 깜짝방문을 포기하고 이대로 불러낼까, 하는 고민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그건 안된다며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있는 건물과 레이가 있는 이 건물은 각각 정문과 후문에 위치하고 있어서 거의 끝과 끝의 거리였다. 물론 항상 걸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차를 타고 올 때도 있지만 매번 자신을 데리러오는 레이를 생각하며 이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그래도 5층까지 있는 건물이 엘리베이터도 없이 계단 밖에 없는 건 너무 하지 않나요...
중간에 주저앉아서 쉬다가도 시계를 보면 슬슬 마칠 시간이 다되가서 편안하게 쉴 수도 없었다. 나 정말 운동할거야. 어차피 아침수업과 통학시간, 그리고 야작때문에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 다짐한 안즈는 무사히 5층에 도착했고, 숨을 몰아쉬며 엉망이 된 몰골을 다듬었다. 예쁘게 하고 나온다고 평소에 잘 신지도 않은 신발을 신어서 발이 아프기는 했지만 어차피 햇빛 때문에 낮 동안은 걷지 않고 레이의 차로 다닐 테니 그다지 상관은 없을 것이다.
시간표도 같이 짰고, 수강신청도 함께 했다. 모두 공강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지만 어쩐지 애매하게 시간이 맞춰져버렸고, 안즈는 그날 진심으로 컴퓨터를 제대로 만지지 못하는 자신을 욕하는 사쿠마 레이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다 비슷하잖아요.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으니까 다행이죠? 안즈가 그렇게 말하며 달래자 어느정도는 화를 삭혔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귀여워서 다음 학기에 성공하면 된다고 레이를 안아주었다. 어쨌든 안즈는 레이의 이번 학기 시간표를 알고있었고, 어디 강의실인지도 알았기 때문에 그 앞에 서서 강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이렇게 굴면 졸업논문은 보지도 않고 집어던질거야!'
안에서 교수님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고, 학생들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앞문의 창문을 통해 강의실 안으로 들여다보려고 할 때, 문이 열리며 점잖게 생긴 교수님이 분하다는 얼굴로 걸어나왔고, 뒤이어서 학생들이 물처럼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레이 씨!"
목소리가 컸는지 제 갈 길을 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안즈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순간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신나서 레이를 불러버린 안즈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치만 얼굴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웃음이 나왔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얼마 전에 제가 처음으로 디자인을 해서 만들어준 거라는 걸 깨달으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 오늘 내가 올 거라는 걸 알고 입은걸까. 말도 안되는 상상이았지만 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를 이야기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건가."
"...다른 사람들이 다 가면요..."
안즈의 앞에 서서 같은 과의 학생들이 자주 왔다갔다 거리는 건물 복도임을 잊은 채 안즈를 끌어안고 장난을 치던 레이는 아직도 멈춰서서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 동기와 후배들에게 얼른 가보라고 눈짓했고, 학교 안에서 유명한 커플의 애정행각을 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반쯤은 협박이 담긴 눈빛에 얌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으니까 고개를 들어도 된단다.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여준 레이를 믿고 고개를 든 안즈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 받을 각오로 오긴 했지만 너무 놀랐어요..."
"나도 그렇게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줄은 몰랐다네..."
"그치만 너무 좋아서..."
만들 때부터 레이를 생각하고 만들었다. 그 옷을 만들 때 안즈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건 레이 뿐이었고, 덕분에 평소보다 더 실수를 했었다. 만날 때마다 손에 상처가 생겨있으니 고생하지말라며 걱정하는 레이에게 속사정을 이야기했다가 그날 처음으로 새빨개진 얼굴로 당황하는 레이를 봤었다. 그렇게 만든 옷을 입어줬으니까 당연히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부끄럽지만 아마 시간을 되돌린다해도 아마 자신은 방금 전과 똑같이 행동할 것 같았다.
그다지 길게 살아온 건 아니지만 안즈의 인생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쿠마 레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안즈는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그는 안즈의 좋은 스승이었고, 가족이었으며, 어쩔 때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굳이 둘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안즈와 레이는 '연인'사이였으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즈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레이의 가족 뿐이었고, 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레이와 안즈가 어떤 사이인지 알지 못했다. 안즈 또한 '그' 사쿠마 레이를 만난다고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위에 가족은 없었고, 함께 그 얼굴을 보고 자라온 같은 보육원 출신인 친구들도 그저 그를 안즈의 후원자로만 알고 있었다. 알려져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게 레이의 의견이었고, 안즈도 거기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관계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보았으니 레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았고, 최대한 거기에서 자신을 지키고 싶어하는 그 노력을 괜한 질투와 욕심으로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자신도 사람이라서, 그런 생활에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안즈가 느끼는 거의 대부분의 감정은 레이를 향한 것이었고, 안타깝게도 안즈는 그 누구에게도 그것들을 털어놓고 위로받을수가 없었다. 애초에 정상적이지 않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관계였으니 그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이 감정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즈는 자신이 쌓아놓은 이 감정을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그런 말 안하셨잖아요.」
「나도 얼마 전에 알아서 이야기해줄 시간이 없었다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레이 씨가 맞선본다는 걸 당사자도 아닌 제3자에게 들어야 해요?」
「안즈.」
「알아요. 레이 씨는 잘못없죠. 근데 나는 속좁고, 아직 철이 덜 든 애라서 레이 씨 탓이라도 해야겠어요. 그러니까 당분간 연락하지말아요.」
「...」
「그리고 나도 딴 남자 만나러 갈거니까, 레이 씨도 잘 다녀와요.」
그 말을 끝으로 안즈는 레이의 번호를 바로 차단해버렸고, 집으로도 찾아오지 못하게 간단하게 짐만 챙겨서 친구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어차피 금방 어딨는지 찾아내겠지만 안즈는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가 자신때문에 힘들어하길 바랐다. 알고는 있다. 이런 행동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른스럽지 못한지. 그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안즈였고,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만남을 가지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작은 레이였지만 이걸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한 사람은 안즈였다. 그렇지만 안즈도 사람이었기에, 모든 걸 각오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치고 힘이 들었고,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이 일로 터지고 말았다.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고 다시 이어붙이는 것도 힘들 때, 그런 안즈를 더 나락으로 내몬 것은 레이였다. 다음 날 아침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와있었고, 그것을 확인한 안즈는 결국 들고 있던 휴대폰을 벽에 집어던져 부숴버리고 말았다.
「마음대로 해.」
투정이 맞았지만 레이는 그래도 그걸 진지하게 받아주길 원했다. 유치한 방법이지만 이렇게라도 그의 관심을 받길 원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안즈가 전혀 원하지 않던 답이었다. 뭘 마음대로 하라는 건데요. 당장이라도 전화해서 그렇게 따지고 싶었으나 이번에는 무슨 말이 날라올지 몰라서 안즈는 결국 눈물과 그 말을 함께 속으로 삼키며 레이와의 이별을 선택했다. 안즈는 레이를 사랑했지만 이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지는 않았고, 결국 극단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번호를 바꾸었고, 그가 마련해준 집을 나왔다. 혹시라도 이 집에 들어올 레이를 생각해서 아주 잘보이는 곳에 그가 선물해줬던 반지도 두고 나왔으며,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언제든지 환영이라며 집키를 내어 준 친구의 집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갑작스럽다고,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냐고 그녀를 혼낼지도 모르지만 안즈는 그만큼 많이 참았고, 그만큼 모든 걸 억누르고 있었다. 그것들이 터져서 수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안즈였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본인이 친히 말씀해주었으니 그때부터 안즈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남자는 손에 쥐고 있는 게 많지 않고, 자신의 애정을 온전히 안즈에게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레이는 그 이후로 안즈를 찾아오지도 않았고, 따로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눈에 띄게 그녀를 따라다니면서 감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 이렇게 끝나는구나. 애초에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관계느 끝도 이렇게 허무한건가 싶었다. 이상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고, 그와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면서 조금씩 그를 잊어가고 있을 때 레이는 다시 안즈의 앞에 나타났다.
「누구세요?」
「너무하는구먼. 몇달간 연락하지 않았다고 내 얼굴마저 까먹은 건가, 아가씨?」
「경찰에 이상한 사람이라고 신고하기 전에 당장 내 눈 앞에서 사라져요.」
「재밌는 소릴하는구만. 내게 그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왜 왔어요. 그대로 끝난 거 아니었어요?」
「끝내다니? 나와 아가씨가?」
레이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굴었고, 계속 그를 무시하며 말을 돌리던 안즈가 그 모습에 오히려 열이 올라 결국 참지 못하고 그날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핸들을 잡고 의미없이 그것을 손으로 박자에 맞춰 두드리던 레이는 안즈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밌다는듯이 웃기 시작했고, 자신은 죽어라 고민했던 것들이 레이에게는 장난으러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 안즈는 그 웃음소리가 커질 때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하고 차올라왔다.
「전화를 거니까 없는 번호라고 하지, 이상하다 싶어서 집을 가보니 내가 사준 건 죄다 쓰레기통에 가있고, 반지까지 버려져있길래 무슨 일이 있었나 했더니. 그래, 다른 남자는 만났는가 아가씨?」
「...그거, 다 알면서 묻는 거죠?」
「만나고 있다는 건 들었지만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
「레이 씨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예요.」
「못본 사이에 우리 아가씨가 농담이 늘었구먼.」
차마 거기에 맞다고 우길 수가 없어서 안즈는 입을 다물었고, 레이는 줄거운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도 괜찮다고 했던 건 진심이니까, 난 신경쓰지 말게나.」
「...!」
「그래, 많이 만나보는 것도 중요하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만나둬.」
「...어떻게 레이 씨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못할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나? 안즈는 좀처럼 그의 의도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고, 웃고있지만 그 웃음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소름끼치다는 것을 눈치챈 안즈는 자신이 놓고갔던 반지를 다시 끼워주는 레이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안즈.」
「...」
나 한 사람이 너를 독점하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아가씨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많은 걸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으니까 말이야. 허나 거기에 정착을 해서는 안되네. 안즈. 어딜가도 좋지만 마지막에는 내게 돌아와야 해. 그것만 지켜준다면 나는 아가씨가 뭘 해도 괜찮으니까, 그것만은 꼭 지켜주면 좋겠구만.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짓궃은 질문을 하는 구먼. 아가씨도 알지 않는가? 내가 얼마나 속이 좁은지.
안즈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조금 이르지만 붙잡아와서 내 옆에 묶어두는 수밖에 없겠지. 나는 아가씨가 하지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하면서 내 옆에 있는 걸 보고 싶지 않으니까, 주어진 시간 안에서 자유롭게 살길 바란다네. 그게 어떻게 자유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안즈는 그렇게 따질 기력도 없었다.
역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쿠마 레이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고, 안즈는 그저 그런 레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발버둥쳐봤자 변하는 건 없을 게 분명했고, 자신은 최대한 이 자유같지도 않은 자유를 누리며 시간이 느리게 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전화 좀 해도 되죠?」
「마음대로 하게나.」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할 말이 있으니 만나지고 연락한 뒤, 안즈는 제 짐을 모두 차 안에 두고 내렸다. 레이는 기다리고 있을테니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그걸 아무렇지 않게 보고 넘길 기력이 없었기에 안즈는 차문을 닫고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약속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충동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안즈가 바라왔던 일이기도 했다. 그를 사랑한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옆에 있는 것이 힘들었다. 안즈는, 이미 많은 것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 저라는 짐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남자를 사랑하지만 함께 있으면 그 사랑이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의 앞에서는 항상 웃었고, 별 다른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안즈의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서 찌꺼기만 남은 상태였다. 레이가, 자신때문에 모든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를 지켜준다 약속해놓고서 그 남자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안즈 자신이었다. 그렇게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당신의 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안즈는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고 그런 자신에 대한 환멸은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으로 이어졌다. 나만 없으면 그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다시 생각해보면 자신을 위해 희생한 레이에게 들려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말이었고, 어떻게 보면 전부 핑계로 밖에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의 안즈는, 무너지기 직전의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모든게 해결된다는 건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이다. 지독한 피해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안즈는 지나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저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사고로 인한 부모님의 죽음, 그걸 견뎌내기도 전에 겪은 스캔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성인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녀가 겪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들 뿐이었다 더군다나 비난은 레이에게만 쏟아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숨기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불행히도 안즈는 그 비난과 폭언을 그대로 받아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때는, 자신은, 나는.
그래서 도망가는 거다. 남겨진 사람이 무슨 마음일지, 내일 그 작은 성당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홀로 남아있을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안즈는 너무 지쳤고, 도망가고 싶었으며,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기차역의 벤치에 앉아서 안즈는 하염없이 울었다. 레이 씨. 레이 씨, 미안해요. 미안해요,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레이 씨. 제발 날 잊고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나같은 건 잊고, 당신의 행복을 찾아주세요. 신님, 그 사람을 제발 행복하게 만들어주세요. 저는 불행해도 되니까, 그 사람만은, 제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초음파 사진만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즈는 그것을 가방 안에 쑤셔넣고 학생 때부터 소중히 써왔던 다이어리를 꺼내서 맨 끝장을 펼쳐보았다.
레이를 짝사랑하던 시절에 마코토에게 부탁해서 몰래 찍었던 레이의 사진 한 장. 무대 위에서 너무너무 밝게 빛나고 멋있었던 나의 아이돌. 이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의미없는 짓이다. 한 장 뿐인, 보고싶을 때마다 보아서 이제는 닳아버린 그 낡은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서 공중에 날려보낸 안즈는 제 마음이, 저 찢어진 사진조각과 똑같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의 아이돌들은 어떻게 노래하고 춤추는지 너무 궁금하다는 이유였다. 일중독인 안즈다운 이유였지만 그런 것에 관심도 없던 프로듀서가 자신들을 위해서 그렇게 알아보는게 기뻤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일을 잠시 쉬고 다른 것들을 찾아보며 휴식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에 말렸지!!
누군가는 제일 가까운 사이이면서 말리지 못한 트릭스타를 원망했고, 누군가는 신나서 이것저것 소개시켜준 다른 사람들을 원망했다. 허나 원망해봤자 이미 일어난 일이며 저렇게 푹 빠진 안즈에게, 오히려 신나서 쉬면서 그런 영상들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며 추천한 자신들이 이제는 그만 보라면서 뜯어말릴 권한같은 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누군가는 피눈물을 쏟고, 누군가는 질투에 눈이 멀어 성격이 바뀌고, 누군가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며 죽어버리겠다고 외쳤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돈을 써서 해체를 시키는 게 어떠냐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안즈는 한국의 아이돌을 좋아했다. 움직이 화려하고, 딱딱 맞춰서 춤을 추는 게 너무 신기해. 전문적으로 회사에서 교육을 시킨다는데 유메노사키 학원이랑 비슷한걸까? 신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안즈는 귀여웠지만,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은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같은 학원의 다른 녀석을 봐도 신경이 쓰이고 자신을 봐달라 외치고 싶은데 이제는 외국의 얼굴이랑 이름밖에 모르는 아이돌에게 질투를 느껴야 하다니.
"안즈으으으, 그만 보고 나랑 좀 놀아주면 안돼?"
스바루가 안약으로 만들어낸 눈물을 반짝거리며 그렇게 매달려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으응, 나 이것만 보고 놀면 안될까? 난처하게 웃으며 들고 있는 태블릿 pc로 안즈는 다시 눈을 돌렸고, 스바루는 지금 그 아이돌이 연기하는 것만 스무번은 돌려봤잖아! 하고 외치고 싶었지만 차마 안즈에게 그렇게 소리를 칠 수는 없었다.
있지, 이 아이돌 너무 재밌지 않아? 진지한 얼굴로 카베동을 하면서 하는 말이 밥 먹었어요? 인 거야. 그래서 관심갖고 찾아봤는데, 한국의 드라마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왔더라구. 귀엽게 생겼는데 목소리는 멋지고 작지만 무게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 있지. 곧 일본에서 콘서트 한다는데 갈 수 있을까?
볼을 붉히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얼굴은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어떻게 그런 얼굴로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할 수 있냐며 마코토는 그날 자신을 찍으러 온 이즈미의 카메라를 부숴먹었고, 어떻게 안즈의 첫 콘서트가 자신들이 아닐 수 있냐며 트릭스타의 리더 호쿠토는 뒷목을 잡았다. 누님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건 반드시 나여야 하는데! 그렇게 외친 츠카사는 그 아이돌이 속한 회사를 인수할 생각을 했고, 카오루는 그런게 취향이었다면 내가 해줄테니까 제발 그만 좀 돌려보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이렇게 아이돌들이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든말든, 안즈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도 다른 아이돌의 신곡 뮤비를 돌려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리 뿐이다.
그랬던 안즈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건 가을 쯤이었다. 그날은 안즈의 옆 자리에 이즈미가 있었고, 맞은 편에는 아라시와 츠카사가 앉아있었다. 네 사람은 함께 스위츠를 먹으러 왔고, 곧 먹기 아까울정도로 예쁜 모양의 케이크와 팬케이크, 파르페와 음료가 순서대로 나와서 테이블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저지먼트에서 수고했으니까, 오늘만 다이어트 신경 쓰지말고 먹어. 인심쓰듯이 말하는 이즈미를 향해 세나선배는 사실 좋은 사람이었군요, 같은 혼날 말을 하며 눈을 반짝 거리던 츠카사는 포크를 들어 하나둘씩 먹기 시작했고, 단 걸 먹지는 않는 이즈미는 커피를, 그리고 아라시는 전부터 먹고 싶었다던 파르페를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사람과 다르게 안즈는 제 앞에 놓여진, 먹고 싶었던 팬케이크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안즈?'
먹지않고 가만히 있는게 이상해서 이즈미가 먹지 않냐고 물으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안즈가 새빨개진 얼굴로 포크를 들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단지 상황을 착각했을 뿐이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답이 날라왔다. 대체 무슨 착각을 했나 싶었지만, 캐물어봤자 더 말해주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이즈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번 째는 트릭스타와 함께 밥을 먹는 점심시간에 일어났다. 마코토가 갖다준 걸 받아서 제 앞에 내려놓은 안즈는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걸 가만히 보기만 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를 사람같았고, 역시나 이번에도 안 먹고 가만히 있냐는 마오의 말에 정신을 차린 안즈가 새빨개진 얼굴을 두 손 안에 숨기며 한숨을 쉬었다. 진짜 큰일났다... 그리 말하는 안즈의 얼굴은 굉장히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날, 안즈는 식사시간 내내 이상한 방법으로 젓가락을 잡아서 주위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잡는 게 아니었나?'
미묘하게 어긋난 방법으로 잡고, 서투르게 젓가락질을 하는 안즈는 너무나도 낯설어서 네 사람 중 그 누구도 점심식사에 집중하지 못했다.
안즈는 최근 자신에게 일어난 낯선 일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자신과 하루동안 가장 많이 붙어있는 사람은 그 사람 뿐이었고, 그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빼도박도 못하게 범인은 그 사람, 사쿠마 레이였다.
"제가 먹을래요..."
"갑자기 무슨 소릴하는겐가 아가씨."
"젓가락 주세요 제가 먹을게요..."
"이 늙은이의 소소한 즐거움마저 뺏지말아주게나..."
"그럼 저 안 먹어요."
고개를 저으며 더는 안 먹겠다는 듯 손가락으로 x자를 만들어서 입 앞에 갖다댄 안즈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냐며 자신을 설득하려고 하는 레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최근 안즈에게 무언갈 먹이는 게 하루의 계획 중 일부가 된 레이는 오늘도 데이트 장소로 디저트로 유명한 카페를 골랐고, 평소와 다름없이 그걸 하나하나 직접 먹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느때처럼 얌전히 그걸 받아먹을 줄 알았던 안즈가 싫다며 고개를 저었고, 따로 직원을 불러 포크와 스푼을 하나씩 더 갖다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당연히 사쿠마 레이는 안즈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직원이 갖다 준 포크와 스푼을 가져가 왜 그러냐며 물었고, 차마 그 이유를 말할 수 없었던 안즈는 이제는 자기가 직접 먹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연애를 시작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안즈는 레이와 함께 밥을 먹는 일도 많아졌다. 처음에는 먹여주거나 그런 거 없이 평범하게 식사를 했지만 어디서 뭘 보고 왔는지 어느순간부터 레이가 그걸 하나하나 먹여주기 시작했다. 당연히 초반에는 부담스러웠고 부끄러워서 그걸 거부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포기할 사람도 아니었고,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한 안즈가 걸국은 먹여주는 걸 받아먹기 시작했다. 시작은 낯설었지만 익숙해지면 또 괜찮아진다고, 받아먹는게 불편해서 식사자리를 불편해하던 안즈는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져서 굳이 레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얌전히 입을 벌렸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당연한 것이 되어서 레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츠와 트릭스타의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안즈. 정말 안 먹을 건가?"
"내가 직접 먹을 거예요."
"으음...그건 싫구먼."
"대체 왜 그렇게 거기에 집착하는 거예요..."
한숨을 쉬면서 그리 말하는 안즈에게 레이는 당연히 그편이 귀여우니까, 같은 전혀 도움이 안되는 말만 할 뿐이었다. 스위츠만 눈 앞에 두면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면서, 그걸 입에 넣고 먹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웃으면서 맛있어 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러는 것뿐인데, 문제라도 있는가? 안즈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숨기며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말라며 화를 냈고, 레이는 당연한 말을 하는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런 단 말이예요. 레이 씨가 없는데, 레이 씨가 해주는 거에 너무 익숙해져서 자꾸 안 먹고 기다린다구요. 나 이제 젓가락도 이상하게 잡아요. 호쿠토 군이 갑자기 왜 그러냐며 진지한 얼굴로 걱정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알아요? 이게 다 레이 씨 때문이야... 근데 왜 탓하지도 못하게 그런 말을 해요...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안즈가 한 말을 모두 들은 레이는 유쾌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이유라면 더 포기할 수 없지. 연인의 검은 속내를 끝낸 눈치채지 못한 안즈는, 결국 오늘도 레이를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벌릴 뿐이었다.
3년을 그렇게 찾아다녔고, 미친 사람처럼 안즈를 찾아 다니던 레이를 멈추게 한 것은 우습게도 가장 그를 원망하고 있을 사람 중 한 명인 안즈의 동생이었다. 그는 레이를 원망하지 않다고 했다. 원망해봤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그는 레이에게 작은 상자와 함께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처리하는 건 당신 마음이니까 뿌리든, 땅에 묻어버리든, 그도 아니면 버리든 마음대로 해도 좋다며 더는 이곳에 있기 싫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떨리는 손으로 펼쳐 본 유서에는 말없이 떠나서 미안하다는 내용과,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하라는 내용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끝까지 잔인하구나. 말없이 사라졌다가 3년만에 나타나서 전하는 게 부고라고? 그럴리가 없다고 수 천번, 수 만번을 곱씹어보았지만 유서에 적힌 건 안즈의 글씨가 맞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찾을 수 없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의 가족이 직접 전해 준 유서와 유골함. 레이는 결국 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유서를 찢어버렸으나 유골함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결국 제 방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꿈에는 매일 안즈가 나왔다. 잔인하게도 항상 꿈의 결말은 그녀의 죽음이었다. 내가 없는 편이 당신에게도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녀를 보면서 레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꿈에서 깨면 무능한 자신을 혐오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안즈를 그리워하며 괴로워했다. 안즈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을 때마다 병적으로 남아있는 앨범을 뒤져서 그녀를 다시 눈에 담았다.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을 때는 하루종일 방에 쳐박혀서 우울해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부모가 정해 준 정혼자인 여자도 만나보았지만 이 모든게 안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고, 못할 짓이라 생각하여 제 선에서 끊어내어 처리를 했다. 그렇게, 그렇게 망가진 상태로 또 3년을 보냈다.
죽은 사람이 눈에 보일리가 없는데, 혹시나 싶어서 옆사람을 붙잡고 저기 저 여자가 보이냐고 물었더니 이상하게 쳐다보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혹시 유령을 보는 건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인기 아이돌이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이상한 걸 물어보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는 건 사양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사람을 불러 그 「유령」을 따라가게 만들었다. 무슨 방법을 써도 좋다. 내가 허락할테니 전부 다 알아내.
진짜 안즈이길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자신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죽었다는 연극까지 할 정도였다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레이가 그렇게 느끼는 건 당연한 거였다. 정말로 그렇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레이는 그런 모순된 마음을 안고 제게 올 정보를 기다렸다.
「...아이가 있다고?」
그러나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고 하듯, 레이가 그날 만났던 사람은 안즈가 맞았다.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그는 제 방 서람 속에 넣었던 유골함을 꺼냈고, 우습게도 그 유골함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레이는 빈 유골함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제대로 속았구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가니 분노보다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허나 그런 분노와 어이없을 가라앉혀준 건, 안즈와 함께 살고있다는 아이에 대한 정보였다. 사진이 있나? 얼굴을 확인해야하니 레이는 그렇게 물었고, 남자는 아이를 찍은 사진을 건네주었다. 아이는, 안즈의 옆에 붙어서 아무것도 모른 채 환하게 웃고있는 아이는 지금 이 사진을 보고 있는 누군가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 그제야 레이는 안즈가 왜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았다. 아마 그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선의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고, 안즈는 그 과정에서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어떻게 만나야 우연처럼 보이지 않고 드디어 찾았다는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안즈의 옆에 아이가 있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죽지 않았다면, 죽은 척 위장하고 살아있는 거라면 데려와서 가둬버려야지. 다시는 그런 극단적인 선택같은 건 하지 못하게 말이야. 책상 위로 사진을 내려놓으며 레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선장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건 어떤 소녀를 데려오면서부터였다. 매번 밤마다 바다에서 수영이라도 하는지 홀딱 젖어서 배로 돌아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하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누가봐도 어린 소녀를 데리고와서 가까운 측근들을 기겁하게 만들었었다. 해적답지 않게 사람은 사고팔지 않는다는 게 이 배의 규칙이었고, 그것을 만든 사람은 선장이었다. 굳이 데려올거면 남자를 데려와야지 왜 하필 귀여운 여자아이야?! 핀트가 어긋난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다수의 의견은 저 파렴치한 선장을 지금 당장 화형을 해야한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몸, 이 배의 선장이네만... 소녀를 안고있는 선장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도 듣지 않았고, 배를 조용하게 만든 건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소녀의 한 마디 덕분이었다.
'제가 원해서 따라왔어요. 이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마세요.'
말을 하는 게 어딘가 모르게 서툴렀지만 소녀는 그렇게 말했고, 이 사람을 괴롭히지말라며 선장을 끌어안았다. 그때 나사가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풀린 얼굴로 헤실헤실 웃던 선장의 얼굴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처음 소녀가 이 배에 왔을 때, 늦은 밤에 들리는 건 소녀의 노랫소리였다. 인간이 아니라 사실은 인어였던 소녀는, 설화 속의 그들과 비슷하게 굉장히 노래를 잘 불렀다. 듣고 있으면 잠이 온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을 주는 노랫소리라서,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떤 노래를 부를지 기대하는 사람들이 한 두명씩 생겨났고, 그것을 듣기 위해 자진해서 보초를 서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느순간부터 밤에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소녀가 아니라 그들의 선장의 목소리로 바뀌어있었다. 물론 노래를 끔찍하게 못부르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소녀보다 더 잘 부르는 것 같았지만 기다리는 건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큰 실망을 했었다.
선장이 부르는 노래는 항상 달랐지만 모두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들이었다. 밤마다 그것들을 들으면서, 여태까지 무섭다고 생각했던 선장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저런 사람이었구나. 저 사람도 사랑에 빠지니 다른 사람과 똑같았구나. 그들은 듣는 이가 부끄러울정도로 낯뜨거운 사랑노래를 멋드러지게 부르는 선장이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경직되어있는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바뀌어 가던 그 분위기와 태도를 그가 알고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마 그들의 선장이라면 바뀐 분위기와 태도를 내치지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받아줄 것 같았다.
한 번 그 둘이 싸운 적이 있었다. 웬만하면 며칠동안 대화를 안하는 걸로 넘어갔던 그 싸움이 이번에는 꽤나 심각했는지 소녀는 울고 있었고, 선장도 봐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제 분함을 이기지 못한 소녀는 당신 앞에서 꺼져줄테니 잘 살라며 소리치더니 그대로 선장실을 뛰쳐나왔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인어인 걸 알고는 있지만 현재 배가 위치한 곳은 바다 한가운데였고, 모두 놀라서 소리만 지르고 있을 때 뒤이어서 선장이 뛰쳐나왔다. 바다로 뛰어들었나? 가까이에 있던 부하에게 그리 물은 선장은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모자와 겉옷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집어던졌고, 신고있던 신발도 마저 벗은 뒤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고, 그 두 사람이 다툰 원인을 알고 있는 측근들은 사랑싸움 한 번 살벌하게 한다며 혀를 찼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소녀를 품에 안고 그들의 선장이 물 위로 올라왔다. 당장 밧줄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선장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기달려달라 했고,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제게 잡혀있는 그 소녀를 안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헤엄쳐갔다. 배 위의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했고, 어떻게 화해를 했는진 알 수 없었지만 몇 십분 뒤에 돌아온 소녀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웃는 얼굴로 선장의 품에 안겨있었고, 그것을 보면서 잘 화해했구나, 하고 예측만 할 뿐이었다.
무엇을 이야기하다가 나온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안즈였다. 그러고보니 저한테도 약혼자가 있었어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였기에 레이는 놀란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안즈는 천천히 그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다지 서로에게 특별하고 애틋한 연애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기에 말만 약혼자일 뿐 형식적인 관계에 가까웠지만 아주 어렸을 때는 커서 오빠랑 결혼할래, 그래. 나랑 결혼하는 거다? 같은 말을 주고 받기도 했었다. 레이를 따라간다고 했을 때도 계획도 없이 그 인간이 어떤 놈인 줄 알고 따라가냐며 쫓아와서 말렸던, 안즈에게 있어서 레이와는 다른 의미로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참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도 가끔 밤에 찾아와요, 라는 말을 듣자마자 레이는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라고? 어쩐지 늦은 밤에 자지도 않고 몰래 밖을 나갈 때가 있어서 따라가볼까 하다가 관둔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속된 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 남자는 레이도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함께 오기로 결정했던 날, 절대 안된다며 쫓아와서 반대를 했던 안즈와 비슷한 눈을 가진 은빛의 인어는 자신을 바깥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애를 꼬셔서 잡아먹으려고 하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갔었다. 모함하지 말라고 해야했지만 사실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었기에 레이는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 알고 따라가는 거야, 라는 안즈의 한 마디에 그는 더 뭐라 하지 못하고 두고보겠다는 말만 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늦은 밤에 혼자 보러갔었다고? 다시 들어왔을 때 흠뻑 젖어서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면서 돌아왔던 안즈를 기억했기에, 레이는 곱게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녀석이 그렇게 좋으면 다시 바다로 돌아가지 왜 나랑 살고 있냐고. 욱하는 성격 좀 고쳐야한다고 카오루가 수십번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결국 고치지 못한 레이는 그렇게 내뱉었고, 안즈는 왜 그런 말을 하냐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한테 말도 않고 늦은 밤에 나갈 정도인데 그냥 따라가지 그랬는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건 질투였다. 물론 레이는 안즈가 왜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안다고 해서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해가 된다고 해서 납득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놈이 안즈에 대해서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도 짜증났고, 안즈가 그녀석 때문에 자신에게 비밀을 만들었다는 것도 싫었다. 말하는 것을 잊었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레이는 그걸 하나마나한 변명이라고 비꼬았다.
'...저를 믿지 못하시는 거예요?'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거에 저도 모르게 풀어질 뻔 했지만 레이는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말해두고 싶었고, 쉽게 화를 풀고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누군가가 보면 쓸데없는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때의 레이는, 정말로 많이 화가 나있었다.
'이즈미 오빠가 레이 씨를 싫어하니까...혹시라도 둘이 싸울까봐 그랬던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말은 하고 갈 수 있지 않은가?'
'말하면 따라왔을 거잖아요!'
씩씩 거리며 그렇게 소리지른 안즈는 울고 있었다. 혹시라도 싸울까봐, 레이도 이즈미를 싫어했으니 안즈 나름대로 배려를 한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이 좋은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즈는 레이가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바보, 멍청이, 쪼잔한 사람, 세상에서 제일 미워! 원하는 대로 꺼져줄테니까 어디 혼자서 잘 살아봐요!
자리에서 일어난 안즈는 레이를 향해 그렇게 외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장실을 뛰쳐나갔다. 내가 쫓아갈 줄 알고. 어차피 가봤자 코가나 아도니스를 만나러 갔을게 분명하니 쫓아가지 않고 그냥 놔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설마 하는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뛰어나가니 모든 사람들이 바다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다로 뛰어들었나?'
혹시나 싶어 아무나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니 그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는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쓰고있던 모자와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벗기 귀찮은 신발도 어찌어찌 벗어서 마찬가지로 집어던진 레이는 더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쫓아가지 않는다고 했지만, 안즈가 바다로 돌아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다로 돌아가서 그자식을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차가운 바다 속에 있는데도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는지 얼마가지 않아 안즈가 보였고, 레이는 조금 더 빠르게 헤엄쳤다. 자신에게 오는 레이를 눈치채고 안즈는 도망가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더 빨랐다. 바다생물도 아닌데 왜 나보다 더 빠른 건데요! 붙잡힌 안즈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레이는 가볍게 그걸 무시했다. 물 위로 올라오는 내내 주먹으로 때리고 꼬집고 할퀴는게 느껴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어린애들 장난같은 느낌이라,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
"...나보고 따라가라면서요. 왜 따라왔어요?"
"진짜로 바다로 뛰어들 줄은 몰랐지."
"이거 놔요. 지금 레이 씨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대로 올라가면 무슨 이유로 싸우는지 자랑하는 꼴이라서 (물론 몇몇은 이유를 알겠지만) 레이는 일부러 배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바다 한 가운데서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주위에 마땅한 섬도 보이지 않는 곳이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화풀어."
"싫어요. 지금 그게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예요?"
"하아...진짜, 젠장, 빌어먹을. 너, 무시하지 말고 똑똑히 들어. 세상 천지의 존재하는 모든 남자를 붙잡고 물어봐도 나랑 똑같이 대답할 거다! 대체 어느 누가 연인이 그 늦은 시간에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데 질투를 안하겠냐고! 믿고 안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게 나는 싫어. 싫다고! 게다가 다른 남자도 아니고 그 짜증나는 자식이랑 만났다는데 나보고 참으라고? 웃기는 소리하지마!"
제 마음도 몰라주지 않고 자꾸 그러는 안즈가 야속하여 결국 참지 못한 레이가 제 속마음을 내뱉었고, 뚱한 얼굴로 벗어나려 애쓰던 안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누구를 질투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험악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던 레이가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는 걸 말없이 쳐다보던 안즈는 그 사쿠마 레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이즈미를 질투를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도 티낸 적 없었잖아요."
"꼴사납게 이걸 왜 티내."
"그럼 지금은요?"
"..."
더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는 레이의 귀는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이 사람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화가 나서 헤어질 생각까지 하고 있었는데, 부끄러워 하는 레이를 보고 있으니 안즈는 무엇이든지 다 용서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도 흔쾌히 사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태까지 말 안하고 몰래 나가서 미안해요. 다음에는 말하고 나갈게요."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게야. 나가지 말라니ㅡ"
"그치만 안나가면 또 레이 씨한테 뭐라고 할 게 뻔하단 말이에요. 그렇지 않아도 자꾸 볼 때마다 레이 씨를 납치범처럼 이야기해서 기분 나쁜데...거짓말 아니구, 다른 이유없이 그냥 이즈미오빠한테 자꾸 그런 소리 듣는 게 싫어서 일부러 말 안한 거니까, 저 조금만 봐줘요."
"..."
"진짜...진지하게 잡아먹혀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따라온 건 나인데, 왜 레이 씨가 혼자 잘못한 사람처럼 욕을 먹어야 하는 건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이 그런 말 듣는 거 죽어도 못보니까, 내가 언제 만나는지 알려준다고 해도 찾아오면 안돼요. 알겠죠?"
누가 그런 말에 상처받는다고. 어차피 전부 맞는 말이니 그다지 자신에게 해가 될 것도 없었지만 레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야기를 끝마친 안즈는 다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그를 안아주었고, 레이도 안즈를 마주 안으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다시는 화난다고 그런 말 하지 않으마. ...저도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숨기지 않을게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다지 싸울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는지 두 사람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 어쨌든 화해했으니 그걸로 된 거라며, 서로를 좀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돌아갈까?"
"응. 돌아갈래요."
이렇게 별 거 아닌 싸움은 그 이름값을 하듯이 정말 쉽게 결판이 나버렸고, 레이와 안즈는 바다에 뛰어들 때와 달리 둘이서 함께 배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는 걸 보면 꽃집과는 영 인연이 없어 보이는데 남자는 어울리지 않는 하늘색의 앞치마를 메고 두껍고 커다란 손으로 꽃을 만졌다. 가게의 사장이 천천히,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쉽게 가르쳐주었지만 참을성이 없는 직원은 못하겠다며 앓는 소리를 냈고, 사장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기운내라며 등을 두드려주는 일이 하루에 몇번씩이나 있는 그 꽃집은 동네에서도 이미 유명하였고, 그걸 보기 위해 일부러 필요도 없는 꽃을 사러 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야쿠자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이 생긴 남자가 도저히 못해먹겠다며 꽃을 테이블 위에 내팽겨치고 머리를 잡아 뜯는 모습은 그 직원에게는 미안하지만 굉장히 우스웠고, 직원이 그런 행동을 해도 사장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게 신기하기도 하였다.
이 동네에서 가게를 연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난 꽃집의 사장은 활짝 피지 않은, 연한 분홍빛의 장미 꽃봉오리같은 사람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차분한 분위기의 귀엽게 생긴 소녀같은 사람이었고, 잘 웃지는 않았지만 다정하고 친절했기에 그 사장을 보기 위해서 꽃집에 들리는 청년들도 여럿 있었다. 그렇게 인기가 있으면 고백하는 사람이 한둘쯤은 있을텐데 어쩐지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와 조금이라도 오래 대화할라치면 누군가가 엄청난 살기를 품고 노려보는 기분이 들어서 인기에 비해서 그녀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굉장히 적었다. 아무튼 알게 모르게 팬이 있는 꽃집의 사장의 앞에서 도저히 못하겠다며 무례하게 꽃을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지르는 직원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무리도 있었는데, 아마 그 남자도 그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호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 도와주라고 보내놨더니 이러고 있었단 말이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맣던, 다른 색은 일반인보다하얀 피부와 붉은 눈 뿐이던 그 남자가 꽃집을 들어오자 못하겠다며 늘어져있던 직원은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리에서 잽싸게 일어나더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굉장히 피곤해보이던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때부터 엄청나게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고, 그 직원은 아무말도 하지 못한채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사이이길래 저 직원을 저렇게 혼내는 거지. 가게의 손님들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사장을 힘들게 하던(사실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팬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으니 그런거다.) 직원이 저 지구 속 맨틀로 꺼질정도로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포장이 끝난 꽃다발을 들고 나오던 사장이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무서운 얼굴로 꽃다발을 내려놓더니 달려와서 그 남자의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내 가게에서 우리 직원 혼내지 말라고 했죠!!」
땅속에 파묻혀서 체감상 얼굴만 내밀고 숨만 겨우 내쉬고 있는 기분이 들던 직원은 구세주를 만난듯이 눈을 반짝거렸고, 남자는 제 등을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방금 전과는 180도 다른 얼굴로 변해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제 앞에 서서 화를 내고 있는 사장을 끌어안았다.
「이거 놔요, 나 화났어요!」
「도착하자마자 바로 여기로 온건데 인사는 못해줄망정 다른 남자 편을 드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로 오라고 한 적도 없거든요.」
「우리 아내님은 왜 이리도 매정한지 모르겠구먼...」
우는 시늉을 하며 더 세게 안아오는 남자를 밀어내려다가 결국 포기한 그녀는 한숨을 쉬며 직원에게 잠깐만 저 대신 가게 좀 봐달라고 부탁했고, 매달려있는 남자를 끌고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여기 사장님 결혼하셨어요?」
최근에는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 오늘은 내 마음을 전해야지, 하고 용기를 내서 꽃집으로 찾아 온 남자는 허탈한 얼굴로 그 직원에게 물어보았고, 직원은 혀를 차며 그 불쌍한 남자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우리 사장님 결혼 2년차신데요.」
안돼에에애에에에에....
꽃집 안은 소리 없는 비명이 울려퍼졌고, 직원은 가게 안으로 들어간 제 보스이자 이 꽃집의 사장의 남편인 그가 지금 이 상황을 보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딱히 안즈가 결혼한 걸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레이가 직접 끼워준 결혼반지는 항상 손에 끼워져있었고, 남자친구는 있냐는 물음에도 남편이 있으니 남자친구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거기다가 기준치를 넘어서는 잘생김에 화려하게 생기기까지 한 제 남편이 가게에 와서 영업을 방해하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기에 레이는 가게에 잘 오지 않았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다들 안즈가 미혼의, 연인도 없는 사람이라고 멋대로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꽃집의 직원은 레이의 부하 중 한 명이었고, 아무도 가고 싶지 않아 하던 꽃집을 가위바위보에 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출근했던, 굉장히 불쌍한 남자였다. 손에는 총이나 칼같은 무기나 들어봤지 꽃같은 걸 쥐어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실수를 할 수밖에 없었고, 안즈는 자기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게 된 직원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제 보스는 무서웠지만 그 보스의 부인인 안즈는 굉장히 착하고 다정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남자는 힘들어서 못하겠다며 자주 푸념을 늘어놓았고, 안즈는 제 남편이 폐를 끼친다며 그에게 항상 사과를 했다. 물론 그것도 들키는 바람에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 뻔 했지만 안즈가 레이를 잘 어르고 달래준 덕분에 목숨만은 유지할 수 있었다.
안즈가 레이를 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얼굴 때문이었지만 직업특성상 혼자 다닐 수 없던 그는 꼭 항상 옆에 누군가를 데리고 다녔고, 그 꼴이 누가봐도 나는 비합법적인 조직에 몸을 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꽃집에 오는 손님이나 주위 가게의 상인들이 겁을 먹을까봐, 같은 이유도 있었다. 그나마 레이만 보면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 쉽게 유추할 수 없어(다들 연예인인 줄 알고 있다.) 별 걱정없이 넘길 수 있었지만 꼭, 항상, 데리고 다니는 부하들이 문제였기에 안즈가 내린 어쩔 수 없는 해결책이었다. 나 영업 말아먹게 하고 싶은 거면 계속 찾아와요. 이상한 소문 퍼지면 이혼이야. 알겠어요? 안즈는 레이를 붙잡고 무시무시한 얼굴과 목소리로 그렇게 협박했고, 그는 별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가게 안에만 안들어갔을 뿐이지 밖에서 레이는 안즈가 어떻게 일하는지 전부 지켜보았고, 이상한 마음을 품고 안즈에게 다가오는 손님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제 남편의 직업을 알고 있었다. 레이는 안즈가 어릴 때부터 봐왔던 옆집오빠였다. 부모님끼리도 교류가 있었기에 무슨 일을 하는지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모든 걸 알고도 그와 결혼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 사람의 아내로 사는 것이 불안할 때도 있지만, 사실 그녀는 제 앞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이 정말로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지금은 정말 아무래도 좋지만.
동네의 남자들이 단체로 실연을 당한 그날 이후로 레이는 자주 안즈의 꽃집을 찾아왔다. 출장이라는 이름 하에 며칠씩 외국을 다녀오는 경우를 제외하면 레이는 항상 안즈를 만나러 직접 가게까지 와주었고, 안즈도 말은 싫다고 했지만 레이를 내쫓지 않고 그대로 가게에 두어서 다른 이들의 원성을 산 적도 있었다. 뭐, 그래도 어쩔텐가. 아무리 보기 싫어도 그들에게 이 가게사장의 남편을 쫓아낼 힘은 없으니 그냥 보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쿠마 레이는 할 수만 있다면 아내의 옆에 자신이 붙어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꽃집에 위장잠입한 부하가 너무나도 이런 쪽으로 소질이 없어 아예 배우라며 학원까지 보내놨더니 왜 사람을 괴롭히냐며 안즈와 카오루에게 동시에 혼나서 서러워한 적도 있었다. 뭐든 완벽한게 좋지않나? 그렇게 반박해보았지만 하나만 하기도 벅찬 사람에게 그런 거 시키는 거 아니라며 안즈에게 더 혼나기만 했다.
그가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안즈를 더 오래 보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앞바다에서 시멘트와 함께 가라앉아 있는 빌어먹을 납치범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뭣도 모르고 안즈를 납치해 협박하는 인간들은 다 사라졌지만 몇년 전만 해도 그게 아니었던지라 안즈도 납치된 적이 있었다. 물론 일이 커지기 전에 레이가 찾아내서 모두 처벌을 했고, 그 납치를 지시한 남자는 시멘트와 함께 바다로 집어던져주었다. 물론, 안즈는 그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그...예전에 저 납치했던 사람이요. 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그건 왜?'
'아뇨... 문득 생각나서요. 살아있기는 한 거죠?'
'그럼. 살아있는 상태로 보냈으니 걱정말게나.'
바다에는 살아있는 상태로 집어던졌으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레이는 웃는 얼굴로 화제를 돌렸고, 안즈도 별 관심은 없었는지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레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안즈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전부 알아야 할 필요도 없었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해준다고 했으며, 그는 그걸 믿었지만 이건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지금처럼 적당히 알고 있고, 적당히 제 부하들과 친하게 지내는 지금이 좋았고, 그걸로도 충분했다.
처음에 레이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말도 안된다며 짜증을 냈던 건 리츠였다. 짜증이 아닌 분노의 감정을 담아서 화를 내며 리츠는 그 사람이 그럴리가 없다고 부정했지만 안즈는 리츠가 레이를 싫어하니까, 일부러 좋지 않게 평가를 내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번째는 상담을 들어 준 카오루였다. 이야기를 들은 카오루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사쿠마씨 정말 나쁘네, 라는 말을 하며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다. 세번째는 와타루였다. 레이가요? 안즈씨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군요. 평소처럼 말하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들을 때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랐고, 안즈도 그걸 눈치챘다. 마지막은 나츠메였다. 레이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안즈의 이야기를 들어 준 나츠메는 해답을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사과만 할 뿐이었다.
이쯤되니 안즈도 자신이 알고 있는 레이와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레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레이와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해준 말이고, 지금 현재 레이와 제일 가까운 사람은 안즈이지만 그들은 그녀가 모르는 시간의 레이를 알고 있으니 아마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안즈는 그들의 말을 믿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생각하니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레이는 안즈에게만 다르게 행동하는 걸까? 두 사람은 연인관계였고, 안즈는 레이가 자신에게 모든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바라왔다. 욕심인 건 알고 있지만 안즈도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모든 것을 보고 싶었고, 갖고 싶었다.
"레이 선배."
관속에 누워 편안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조금 화가 밀려왔지만 안즈는 이 모든 걸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레이도 "연기"를 그만두고 본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 그래도 조금은 미우니까, 안즈는 자고있는 레이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이정도로 깰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거면 충분했고, 안즈는 레이의 품 안으로 더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
안즈가 잠이 드는 걸 확인한 뒤 레이는 눈을 떴다. 사실 경음부실에 들어오자마자 자는 레이를 붙잡고 투덜거린 안즈때문에 잠에서 깬지는 오래됐지만 혼자서 투덜거리는 그녀가 제법 귀여워서,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레이는 안즈가 다른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을 알고 있었다. 리츠는 집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꿍꿍이냐며 최악이라는 소리를 했고, 카오루는 진지한 얼굴로 사쿠마씨, 그러다가 진짜 벌받는다. 라며 충고를 했었다. 와타루는 직접 경음부실까지 찾아와서 한 마디를 하고 갔었다. 레이, 당신의 마음을 저도 이해하지만 적당히 해야 하는 거, 알고 있겠죠? 붉은 장미꽃을 손에 쥐어주고 그 말만을 남긴 채 오랜 친구가 가버리니 이번에는 나츠메가 찾아왔다. 레이형. 그러나 나츠메는 끝내 입을 열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안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레이도 알고 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일도 아닌데 다들 왜 이렇게 걱정이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아가씨."
레이는 자기 품 안에서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그냥 이런 얼굴을 원했다. 안즈가 자신의 옆에서 불편해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으면 해서 했던 행동이었다. 거기에 불순한 의도가 없었냐고 물으면 없었다고 떳떳하게 말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레이의 의도는 그러했다.
"...나는 아가씨에게만 서툴어. 물론 다른 건 감히 아가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활하고 능숙하지. 그렇지만...나는 그걸 아가씨가 몰랐으면 하는 구먼."
사쿠마 레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했던 수많은 행동들 중에는 옳은 일도 있고, 옳지 않은 일고 있다. 레이는 웃는 얼굴로 안즈의 인간관계를 알게 모르게 조종했으며, 때로는 교활하고 비겁한 일을 능숙하게 해치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안즈의 앞에서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다. 레이가 사랑하는 그녀는 레이의 가면이 어떤 건 줄 모른다. 주위 사람들의 말만 듣고 레이의 가면 속 얼굴을 멋대로 상상해서는 괜찮다고, 벗어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안즈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가짜였고, 그마저도 사쿠마 레이가 의도한 것이었다. 레이는 그 모습을 안즈에게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영원히 몰랐으면 했다.
잠들어 있는 안즈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레이는 속으로 다시 생각했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안즈를 위한 것이라고. 언제까지고 아무겋도 모른 채로, 자신의 옆에서 행복하게 웃어주길 바라며 자신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안즈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레이의 붉은 눈이, 반짝거렸다.
다시 만나는 건 어려웠지만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쿠마 레이는 제 손에 쥐어진 두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건 안즈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안즈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를 쫓아가서 손을 잡았고, 안즈는 도망가지 않고 그에게 잡혀주었다. 연락처를 다시 교환하고, 레이는 안즈에게 꼭 연락하겠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받으라며 신신당부했다. 약속해주지 않으면 이 손을 놔주지 않겠다는 레이를 진정시켜서 안즈는 꼭 받겠다며 약속했으나 재밌게도 먼저 연락을 한 건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전부 쓸모없었어요. 레이 씨 얼굴 보니까 그런 다짐따위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먼저 전화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레이 씨. 우리 언제 만날까요?'
그 옛날,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레이가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안즈였다. 안즈가 용기내어 먼저 연락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빠르게 변해갔고, 두 사람은 어느새 예전과 똑같은 관계가 되어 있었다.
서른이 넘어서 다시 시작한 연애는 이십대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건 지금의 감정이 그때와 다르다는 건 아니었다. 레이는 그걸 둘다 그때보다 조금 더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안즈도 거기에 동의했다. 물론 그게 성장인지, 그도 아니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른 변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둘 중 무엇이 되어도 안즈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현재의 상태가 안즈는 싫지 않았고, 그건 레이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의 집은 안즈가 다니고 있는 회사와 가까웠으며, 레이는 그걸 핑계로 자주 안즈를 제 집으로 데려가서 자고 가도 된다며 유혹을 했고,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거기에 넘어가 레이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안즈는 레이의 집에 하나둘씩 쌓이는 물건들을 보면서 잠시 예전으로 돌아가 그 옛날, 그를 만나기 위해서 이 집으로 오는 걸 너무 무서워 했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보다 이게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물론 그는 아이돌이었고, 파파라치들과 극성팬들에 의해서 사생활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스타였기 때문에 안즈가 그런 공포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이는 긴장을 풀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렇게 방심했다가 저도 모르게 사고를 칠까봐 안즈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와 다르게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절의 안즈는 레이조차도 믿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을 무서워했지만 지금은 레이를 믿고 조금 더 타인의 시선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한 결과, 안즈는 결국 레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미 제 물건의 대부분이 그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막상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을 내놓고 이사를 할 때는 가져갈 물건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울정도였다.
동거 생활은 순탄했다. 목소리를 높여서 싸우는 일도 없었고 크게 맞지 않는 생활습관도 없었기에 별 문제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레이를 깨우는 건 조금 힘든 일이었지만 옛날부터 해왔던 일이었기에 금방 능숙하게 깨워서 스케쥴에 맞춰서 그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레이를 데리러왔던 카오루와 아도니스, 코가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는 현관 앞에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럼 두 사람, 결혼할 생각인 거지?'
'결혼이요? 글쎄요...'
'어이. 네 일인데 남처럼 말하지 말라고.'
'설마 생각해보지 않은 건가?'
'어...그렇네. 결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달까...'
'이제라도 생각해보는 건 어때, 안즈 쨩? 우리도 나이가 있으니까 예전만큼 반발이 심하지도 않을 거고.'
'...생각은 해볼게요. 고마워요.'
그 어색한 만남이 있은 후에 안즈는 세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고, 그들은 절대 자신이 없을 때 오지말라는 레이의 경고아닌 경고를 무시하고 스케쥴로 레이가 집을 비웠을 때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나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레이와는 어떻게 다시 만났고 같이 살게 됐는지 이야기하다보니 대화는 어느새 결혼에 대한 주제로 흘러가게 되었다. 학창시절이었다면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을 주제였고,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말해주는 주제이기도 했다. 결혼이라, 다시 만났다는게 기뻐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주제였다. 일단 레이와 거리가 먼 단어이기도 했고. 아무리 나이가 들면서 팬의 시선도 바뀌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레이는 여전히 인기가 많은 현역 아이돌이었고, 안즈는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결혼에 더한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그랬어야만 했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전화를 했고, 그들은 안즈에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나이가 있으니까 슬슬 좋은 사람을 만나야하지 않겠니. 지금 당장은 생각이 없더라도 한 번 만나보라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몇 주 뒤에 맞선을 보기로 결정했으니 그리 알고있으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자신은 맞선을 볼 생각도 없고,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다해도 막무가내였다.
레이를 만난다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 일인데, 그의 위치를 생각하니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당장 데려오라고 할텐데 안즈는 아직 부모님에게 그를 소개시키는 건 이르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결혼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대를 다짜고짜 제 부모님에게 소개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안즈는 그때 하다가 말았던, 잊고 있었던 결혼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결혼에 대해서 생각은 없었지만 이왕 한다면, 이 남자가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점점 욕심이 생겨났다.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이런 관계보다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안정적인 관계를 안즈는 원했다. 그녀는 다시 만난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고, 그건 그 남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 같구만."
"어째서요?"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된다고 해서 항상 안정적이고 편안한 일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아요?"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구먼. 그리고... 혹시라도 그 결혼이 아가씨를 옭아매는 족쇄가 될까봐 무섭기도 하니까 말이야.
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늘은 일찍 들어올테니 간만에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안즈는 웃는 얼굴로 그를 배웅했고, 조금 멍한 얼굴로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제 귀로 직접 들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안즈도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으니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뒤에 레이가 한 말은 동의를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놓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요. 그건 다 거짓말이었어요? 왜, 왜 내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그런 상황이 와도 문제없이 바로 보내줄 수 있다는 식으로 구는 건데요. 그와 다시 만나면서는 처음인,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비참함에 안즈는 그날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울기만 했고, 결국 그가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안즈는 그와 자신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안즈는 맞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레이가 이제는 충분하다며 자신을 보내줄까봐. 그러면서도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서, 한편으로는 레이가 자신을 놓아줄까봐 무서워서 결국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맞선장소에 나갔다. 도망가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안즈는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만나는 장소는 항상 똑같았다. 유명한 디저트 가게였는데,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자신도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많은 곳이었고, 오픈된 곳이 아니었기에 연예인들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의 추천메뉴는 슈크림이었고, 지금 열심히, 혹은 무리해서 일하고 있는 안즈를 위해서 돌아갈 때는 그걸 사서 갈 생각이었다. 여전히 단 걸 좋아하고 잘 먹는 안즈를 떠올리면서, 레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즈?"
그러나 놀랍게도 사쿠마 레이가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 본 것은 지금 회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안즈였다. 아니, 안즈가 맞는가? 나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지금의 안즈는 레이조차도 낯설어서 어색할 정도였다. 단정한 기모노를 입고 평소와 다르게 화장을 하고, 항상 묶고 다녔던 머리를 풀어서 곱게 단장한 모습은 레이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그는 홀린듯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즈도 레이를 발견한 것 같았고, 웃는 얼굴로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사고가 나는 바람에 차가 밀려서... 많이 기다리셨죠?"
"괜찮아요. 저도 방금 전에 도착했는 걸요."
"하하. 들은 대로 상냥하시군요, 안즈 씨는. 여기는 처음이시죠? 자,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나 안즈는 레이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예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지나치더니 있는지도 몰랐던, 제 뒤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상냥하고 다정한, 레이만이 알고 있던 그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다시 레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얼 본 거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안즈가 자신을 못본 척하고 지나친 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가버리다니.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니 아무리 그 사쿠마 레이라도 멍청하게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 그래 생각을 해보자. 이곳은 연예인도 자주 오지만 맞선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실제로 함께 일하는 디렉터 중에서 이곳에서 맞선을 보고 결혼까지 골인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제 앞에서 사라진 두 남녀의 관계는 그쪽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주었는데, 그게 다 연기였단 말인가? 저를 찾으러 온 프로듀서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방은 하필이면 안즈의 옆 방이었다. 목소리는 들리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고, 왜 안즈가 제게 말도 없이 그 남자와 맞선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어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들리지 않았다. 집에서 억지로 나가게 했던 거라면 내게 말이라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왜 말도 하지 않았던 거지?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점령하고 있었고, 기어코 소리를 지르며 제게 집중하라고 짜증을 낸 프로듀서 덕분에 레이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제 눈 앞의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들어올 때부터 넋이 나가있더니 무슨 일이라도 있어?"
"...물어볼 게 있는데 말이야..."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본론이냐? 뭔데."
"...연인이 있는 사람이 보통 맞선 자리에 나가나?"
"하아...? 사귀는 사람이 있는데 거길 왜 나가. 뭐 부모님이 그 남자는 안된다, 하면서 반대했다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에게는 맞선을 보게 됐다고 알리는 게 당연한 거겠지."
"그렇지?"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즈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었고, 만약 그녀가 제게 그걸 말했다면 오늘 회사에 일이 있어서 출근한다는 거짓말을 했을리도 없다. 부모님의 강요로 인해서 보러 간 것이라고 해도 제게 이야기했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왜 자신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안즈는 그런 일이 없는 척 웃는 얼굴로 제 앞에서 연기를 했고 방금 전에 마주쳤을 때도 놀라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하고 다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사쿠마 레이. 너 내 말 안 들을 거면 여기 왜 나온 거야? 말을 하다 말고 또 생각에 빠져서 제 말을 무시하는 레이 때문이 화가 난 프로듀서가 짜증을 냈고, 레이는 한숨을 쉬면서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설명했다. 프로듀서는 안즈를 알고 있었고, 멤버들을 제외하면 가장 그녀와 많이 만난 사람이기도 했다.
"너 뭐 잘못한 게 있는 거 아니야?"
"그럴리가 없지않은가?"
"자신감 넘쳐서 좋긴한데...그런게 아니면 안즈 씨가 왜 널 놔두고 몰래 맞선을 봐. 너라면 모를까, 그럴 사람도 아니잖아."
"..."
"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쩔 건데? 방에 쳐들어가기라도 할 셈이야?"
"저게 정말로 맞선이라면."
"...너다워서 좋긴 하다. 그래, 그럼 나는 이만 자리 비켜줄게. 어차피 있어봤자 넌 내 이야기 듣지도 않을 것 같고."
안즈 씨 너한테 아까운 사람인 거 알지? 잘 해결해서 일에 지장없도록 해라. 그리고 네가 잘못한 게 없는지 한 번 생각해본 뒤에 쳐들어가라고. 프로듀서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고, 혼자 남은 레이는 벽을 타고 흘러오는 안즈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최근에 결혼 이야기를 한 적은 있었다. 자신은 결혼이 생각이 없었고, 때마침 안즈가 물어보았기에 제 생각을 이야기 했었다. 자신의 대답을 안즈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결혼에 대한 제 고집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굳이 결혼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사는 걸로도 만족스러웠고, 결혼이라고 해봤자 법적으로 관계를 인정받는 것뿐이고,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단순 동거인, 이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결혼은 레이에게 있어서 조금 먼 이야기였다. 그렇게 말했던 이유도 그다지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했던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사쿠마 레이는 그 말이 듣는 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진 알지 못했고, 그때의 대화와 현재의 상황을 매치시키지도 못했다.
레이는 방을 나왔고, 복도에 서서 이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는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무작정 화를 내면서 끌고 나올 수도 없었고, 그건 상대방 남자에게도 실례였다.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안즈의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거라면 어느정도 예의를 차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쳐들어가는 건 뒤로 미루고 다른 방법을...
"부모님께서 제가 빨리 결혼하길 원하시는 것 같으셔서 나온 것도 있어요. 물론 저도...결혼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구요."
"저도 주위에서 빨리 결혼하라고 어찌나 성화인지, 그런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홧김에 나온건데 지금 생각해보니 과거의 제가 고마울 정도네요. 안즈 씨를 만났으니까요."
"과찬이세요.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 걸요."
"아닙니다. 사실 안즈 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이야기해보니 더 좋은 사람이 생각이 듭니다. 저한테 아까울 정도로요."
"... 첫만남에 너무 이른 게 아닌가 싶지만, 이대로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말이죠. 안즈 씨만 괜찮다면,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습니다."
...다른 방법이고 뭐고, 저런 말까지 나왔는데 그걸 듣고만 있으라고? 누구 맘대로, 남의 여자랑 결혼을 전제로 만나겠다는 거야. 서른이 넘었지만 안즈가 관련된 일만큼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레이는 밖에서 그 말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깐만, 누구신데 이렇게..."
안즈의 손을 잡고 있던 남자는(들어가자마자 그것부터 보였고 사쿠마 레이는 안그래도 험악했던 얼굴을 더 찡그리며 보고 있던 안즈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레이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란 얼굴로 당황하며 누구신데 이렇게 마음대로 들어오냐고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갑자기 안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서 제 어깨에 둘러메자 무슨 짓을 하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한 안즈는 내려달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레이의 목에 제 팔을 두르고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귓가에 레이 씨, 제발, 사고치지 말아요. 같은 말을 속삭였던 것 같지만 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다시 보니 꽤나 괜찮은 남자였다. 예의바르고, 착하게 생겼고, 성실할 것 같은, 참한 인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의인화한 것처럼 생긴, 어디의 사는 누군가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남자. 그 전까지는 그래도 눈 앞의 남자에 대해서 그다지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았으나 얼굴을 확인하니 짜증이 확 밀려왔다. 차라리 맞선 상대가 기준 이하였으면 이렇게까지 짜증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지, 그때는 감히 나를 놔두고 이런 남자를 만난 거냐고 화를 냈겠지. 레이는 자신을 잘 알았다. 레이 씨. 안즈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지만 급하게,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고 일을 더 크게 만들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안즈 씨를 내려주세요. 안그러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너말이야,"
"네?"
"지금 누구 허락도 없이-"
함부로 친근하게 이름을 막 부르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안즈가 급하게 레이의 입을 막았다. 아까부터 친한 척 이름을 부르는 게 거슬려서 한소리해 줄 생각이었는데, 제 입을 막고 그러지말라며 고개를 세차게 젓는 안즈를 보고 있으니 자꾸 철없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야하는데, 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고 싶을까. 참아보려고 했지만 마치 자신를 좋은 분위기의 두 남녀를 방해한 방해꾼처럼 취급하길래 거기에 짜증이 치밀어오른 레이가 제 입을 막고있는 손을 잡아서 떼내며 그 남자에게 보란듯이 안즈에게 키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됐으니까 차라리 나가자며 입술이 닿기 바로 직전에 다른 쪽 손으로 제 얼굴을 막은 안즈 덕분에 그건 실패로 돌아갔고, 상대방 남자는 이제 삿대질까지 하며 파렴치하게 무슨 짓이냐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방금 한 행동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저 남자가 아니라 안즈였고, 애초에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지 저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지."
"잠깐만요 레이 씨, 잠시만요!"
"이 여자랑 결혼할 사람이니까,"
방해하지말고 당장 내 눈 앞에서 꺼져. 결국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한 레이가 그 남자를 향해 그렇게 내뱉었고, 안즈는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레이의 입에서 나오자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결혼,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그것때문에 안즈가 이 남자와 만났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가치관따위야 얼마든지 바꿔줄 있었다. 어떻게 다시 만난 사람인데, 겨우 그런 고집하나로 빼앗길 수는 없었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말을 들은 남자 또한 놀란 얼굴로 레이와 안즈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고, 그걸 지켜보던 사쿠마 레이는 유쾌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한 번, 이번에는 한껏 비꼼과 다시는 제 사람을 넘보지 말라는 그런 경고를 담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주었다.
방금 전의 무례를 용서하게나. 나도 아직 젊어서 그런지 욱할 때가 있다네. 그래, 우리 아가씨가 말이야... 아, 우리 아가씨라는 건 안즈를 말하는 걸세. 예전부터 부르던 애칭이라 입에서 잘 떨어지질 않으니 이해해주게나. 아무튼 나랑 싸우고나서 홧김에 그쪽을 만나러 나온 것 같구먼. 내 잘못일세. 내가 그런 고집만 안부렸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고 자네에게 헛된 희망같은 것도 심어주지 않았을 게 아닌가? 내 정말 미안하네. 그래도 자네 덕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알았으니 되려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구만. 우리 안즈보다 좋은 여자는 없겠지만 자네도 꼭 좋은 상대를 만났으면 좋겠구먼. 그럼 난 이만 가볼테니 조심해서 들어가게나. 아, 당연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우리 셋만 알고 있어야 한다네. 그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믿어도 되겠지?
레이는 남자와 악수까지 하며 상쾌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고, 안즈의 짐을 챙겨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얌전히 그 품에 안겨있던 안즈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못들고 내가 정말 못살겠다며 한숨을 쉬었고, 언제 웃었냐는듯 무표정한 얼굴로 레이는 집에 돌아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테니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이야기하라며 으르렁 거렸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레이가 물어보면 전부 이야기해줄 생각이었고, 사실 안즈는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레이 씨."
"할 말이라도 있는가?"
"나랑 정말 결혼할 거예요?"
당신이 나랑 결혼할 생각없다고 해서 나 맞선보러 나온건데, 확실하게 말해줘요. 안그러면 나 다음주에 또 맞선보러 나올거예요.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 남자는 또 도망갈 것 같아 안즈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역시나 맞선이라는 말에 레이는 얼굴을 찡그렸고, 이내 한숨을 쉬면서 안즈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언제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한 적이 있었는고."
"돌려서 말하지마요."
"...지금 나보고 일생일대의 프러포즈를 여기서 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나 기대해도 되나요?"
레이 씨의 프러포즈. 안즈는 웃으며 그렇게 물었고, 귀까지 새빨개진 레이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모브 시점입니다
이제 더는 만날 수 없었기에 멀리서라도 좋으니 얼굴을 보고 싶었다. 마지막이니까 조금 욕심을 내서 조금 더 그 모습을 제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신이 그런 내 소원을 알고 조금 더 용기를 가지라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졸업식이었고, 나는 이상하게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더 잘까 싶었지만 눈을 감을수록 정신이 맑아져서 학교 교문 앞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하니 평소 도착 시간보다 한 시간은 더 빨랐고, 역시나 당연히도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학교를 둘러보면서 어울리지 않게 추억에 잠겨있던 내가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이 학원의 유일한 「프로듀서」였다. 아무도 없는 3학년 교실로 들어오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오늘 일찍 눈을 뜬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신이 마지막이라고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지금은 주위에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도 없으니 조금만 용기를 내면 그녀와 대화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용기내어 그녀의 이름을 부를려고 했지만, 빌어먹게도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그녀는, 노란 프리지아를 누군가의 책상에 내려두더니 수줍게 웃었다. 저건 누군가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었다. 꽃다발을 내려놓고 비어있는 책상 서랍 안에 카드를 숨겨놓은 그녀는 의자를 빼내서 앉아도 보고, 꽃다발이 더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각도를 맞추기도 했다. 저기가 누구의 자리였더라. 히비키 군? 아니다, 그렇다면 키류 군인가? 그도 아니다. 누구지. 누구일까.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을 때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의 그녀가 교실에서 나왔다. 내가 있는 곳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로 들어갔고, 그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사쿠마 레이.
저 자리는 그 사람의 자리였다. 틀림 없었다. 그녀가 누구랑 사귄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모두에게 공평하게 제 애정을 나누어주던 그녀에게 연인이 있었다고? 단순히 자신이 착각한 거라고, 잘못 본 것이라고 하기엔 책상 위에 예쁘게 놓여져있는 꽃다발과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 펼쳐 본 카드까지, 그 모든 게 두 사람의 사이가 특별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카드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고, 책상 위에 올려진 꽃다발을 들어올렸다. 이런 진실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졸업하면 끝이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졸업식날에,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지? 나는 카드를 꾸겨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쳐박았고, 꽃다발 또한 버리려고 했다. 이걸 버릴려면 아무도 없는 지금 뿐이니까.
"읏..."
왜, 버릴 수가 없는 거야.
꽃을 놓고 수줍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 생각났다. 꽃을 보면서 웃던 얼굴이 아주 많이, 행복해보였으니까 축하해주며 보내주는 게 맞았지만 우습게도 고백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 주제에 모든 걸 가진 그 남자에게 질투심이 들었다. 가당치도 않은 질투였다. 물론 더 비참한 것은, 그 질투심에 사로잡혀 꽃다발을 망설임없이 버릴만큼 자신이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아른 거려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거기서 뭐하는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니 이 시간에 교실에 온 적이 없는, 사쿠마 레이가 문 앞에 서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있던 꽃다발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집어던져 버렸고, 그 남자는 천천히 내쪽으로 걸어왔다.
"아... 일찍 왔네요, 사쿠마 씨."
"오늘따라 아침일찍 눈이 떠져서 말이야... 그런데 방금 버린 건 뭔가? 꽃다발같은데."
"신경쓰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주지도 못할 거, 그럴 바에 버리는 게 나으니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지만 이 남자에게 먹힐지는 모르겠다. 그 남자는 내게 더 묻지 않았고, 나는 부실에 볼 일이 있다며 급하게 반을 빠져나갔다. 쓰레기통에 꽃다발을 버린 나는 저 남자와 같은 공간에 있을만큼 담력이 쎄지도 않았고,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여유로움과 느긋함을 담은 그 붉은 눈이 저를 쳐다보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꺼림칙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무시하고 나가야 하는데,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버리지 말고 전해주지 그랬나?"
하지 못하고 후회할바에야 차라리 그게 나은 것 같은데.
그 남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얼굴로 웃고 있었고, 나는 밀려오는 수치심과 패배감을 이기지 못하고 급하게 교실을 빠져나왔다. 알고 있었구나. 알고서 내게 그렇게 물어본 게 틀림 없었다. 아, 빌어먹을. 저 남자가 제 멱살을 붙잡고 왜 그랬냐며 화를 내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 꽃을 버리지 못하고 억지로 손에 쥐고 있던 그때보다, 지금이 더 비참했다.
**
재학생 대표로 단상 위에 선 사람은 두 명이었다. 차기 학생회장과 이 학원의 유일한 프로듀서로 학원을 바꿔 준 그녀. 웃는 얼굴로 말을 마친 뒤 내려갔지만 그 뒤에 학생회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달려온 걸 보니 아무래도 울었던 모양이다. 정말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구나. 그녀를 향한 내 감정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는 걸 나는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사쿠마 레이는 졸업식 내내 망가진 프리지아 꽃다발을 들고 다녔다. 다른 후배들이 그에게 졸업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선물해줬지만 마음만 받을 뿐, 그의 손에 들린 건 그 프리지아 뿐이었다. 그걸 본 그녀는 오늘 아침에 봤던 그 수줍은 얼굴로 사쿠마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백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니까 한 번쯤은 내 마음을 털어놓고 가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후회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나는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고, 더 많이 웃길 바랐다. 꽃다발을 버리고, 그것을 당사자에게 들키고, 온갖 수치심과 비참함을 맛보고 나서야 겨우 내 마음을 그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백 대신에 학교 앞 꽃집에서 급하게 산 백합을 그녀에게 선물하며 그동안 고마웠노라고, 네가 있어서 마지막 3학년이 그래도 그나마 즐거웠노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말해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나야말로... 정말, 그동안 고마웠어. 안즈 씨.'
백합을 들고 있는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서, 코끝이 시큰했다.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다시 그 남자에게로 달려갔고, 나는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려서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안녕 내 첫사랑. 내뱉지 못한 그 고백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런 분위기가 있지만 직접적인 묘사는 없습니다
첫만남은 그냥, 평범했다. 그 남자는 학생회장이었고, 어쩌다보니 학생회 일을 돕게 된 자신과는 만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자주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고, 엮일 일도 없었으나 늦은 밤에 함께 돌아간 적은 있었다. 괜찮다며 한사코 거부했으나 그는 안즈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너같은 여자애를 이 시간에 혼자 보냈다는 걸 알면 그 중놈이 귀찮게 할테니까. 말투는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호의는 쉽게 읽어낼 수 있었기에 안즈는 결국 그걸 받아들였다. 조용하고 어두운, 오직 달빛만이 길거리를 비추는 그 시간을 함께 걸어가며 안즈는 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시간이 관계를 조금씩 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종종 함께 집에 돌아가곤 했다.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그는 항상 안즈를 꼬마라고 불렀다. 탓하려면 너무 작은 너를 탓하라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안즈가 그 호칭에 대해 불만을 토했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작아서 좀 겁난단 말이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의 뜻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실언을 했다며 잊어달라 부탁했다. 그래서 그냥, 못들은 척 넘어가주었다.
안즈는 그를 학생회장님, 이라고 불렀다.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너무 친한 척을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부르는 게 편했다. 그 남자는 그게 불만인 것 같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본인도 안즈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까, 그게 공평한 거라고 생각했다.
"안즈."
그런데 왜 하필 이럴 때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안즈는 귓가에 들리는, 다정하지만 야한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주는 그 남자를 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안즈, 대답. 그는 집요하게 굴었고, 소녀는 결국 거기에 굴복해서 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레, 이 씨. 안즈가 내뱉은 제 이름에 만족한 그 남자는 좀 더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며 안즈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오갈데 없는 팔을 잡아 제 목에 두를 수 있게 해주었고, 안즈는 마치 그게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마냥 매달렸다. 거슬린다고 중얼거리며 레이가 거친 손길로 밀어낸 것들이 책상 밑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와중에도 그게 신경쓰인 안즈가 저거, 물건... 이라는 말을 내뱉자 그는 짓궂은 얼굴로 웃으며 그리 답해주었다. 지금 저런 걸 생각할 여유가 있냐고. 그러면 이제 봐주면서 할 필요 없지않냐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 무서웠다. 무슨 짓을 할려구요.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갑자기 들리는 몸에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는 레이 때문에 안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된걸까. 설명하자면 시간을 되돌려야 했고, 두 사람의 감정 변화도 말해야만 했다. 집에 가는 그 밤의 시간만을 공유하던 두 사람은 점점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레이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도와주러 온 일꾼이면서 모든 걸 다 맡아서 일하려고 하는 그녀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고, 안즈는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려고 하는 주제에 한 번쯤은 자유롭게 살고 싶다, 고 하는 그를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닮았나? 닮았다고 하기엔 조금 미묘했지만 안즈는 레이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레이는 안즈가 자신과 같은 선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선에 들여놔도 괜찮을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워졌고,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 건 학생회장실에서 자고 있던 레이의 입술에 안즈가 몰래 키스하고 도망가려 할 때, 자고있는 줄 알았던 그가 겨우 그걸로 만족하냐며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고 키스했던, 그 때부터였다.
연애를 하자고, 말한 건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안즈는 생각했고 그건 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제 안즈가 제 옆에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소녀는 레이가 자신을 옆에 두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어? 자연스럽게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손을 올리고, 주위에 사람이 있든 없든 머리를 쓰다듬고 뺨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본 안즈의 친구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물어보았지만 정확하게 언제부터 그에게 이런 감정을 갖게 됐는지 안즈조차도 알 수 없어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오늘의 시작은 그때와 다르게 레이였다. 짧은 단발머리, 그 밑으로 보이는 목선, 작은 귀, 남자와 비교하면 좁은 어깨와 또래의 다른 여자아이들 보다 작은 손, 안즈는 모든 게 작았고 레이는 가끔 무서울 때가 있었다. 너무 작아서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케이토는 마시던 커피를 뿜었고, 그런 반응이 민망하기는 했지만 이건 진심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조금 더 크면, 그때는 괜찮겠지. 여기서 더 자랄지는 의문이었지만 사쿠마 레이는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도 오늘 일을 그렇게 저지른 건... 뭐라고 생각해야할까, 낮이었으니 달을 핑계로 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안즈에게 친한 척 굴며 손을 뻗는 그 남자에게 열이 받아서, 흔적을 남겨놓을 목적으로 손을 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안그래도 충분히 나쁜 놈인데 그렇게까지 말하면 내가 더 나쁜 놈 같잖아. 아무튼 속뜻은 그러했고, 레이는 죽어도 그걸 말할 생각이 없었다.
어쩌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됐더라, 레이도 알지 못한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그 소녀에게 제 옆을 내주고 있었고, 함께 있다보면 조금 다르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조그만 여자애가, 천천히 자신을 바꾸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그게 싫지가 않다는 게, 오히려 더 오래 자신의 옆에 머물러주었으면 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런 존재가 떠났을 때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나 오지 않은 미래를 벌써부터 두려워하고 싶지 않았고, 놓아줄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내일은 어떻게 생각이 변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러했다.
어쩌다 나같은 놈한테 걸려서.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안한 얼굴로 제 무릎 위에서 잠들어 있는 안즈를 보며 레이는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마시라며 건네 준 딸기우유를 두 손으로 받으며 안즈는 그렇게 물어보았고, 사쿠마 레이는 무슨 말을 하냐는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휴일이었고, 오랜만에 두 사람의 시간이 맞아서 데이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날이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를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안즈는 잡지와 인터넷까지 뒤져가며 데이트 때는 무엇을 입고가야 좋은지 찾아보았다. 괜찮은 걸까? 그 사람 마음에는 들까? 이상하지는 않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안즈는 약속장소로 나갔고, 다행히도 레이는 보자마자 예쁘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 칭찬의 방법이 조금 파렴치해서 문제였지만 어쨌든 주위에 보는 눈은 없었으니까, 안즈도 별 말 않고 넘어갔다.
데이트는 즐거웠다. 햇볕 아래에서 힘들어 하는 레이때문에 바깥을 오래 걸어다닐 수는 없었지만 날씨도 더웠고, 사실은 새로 산 신발도 아팠기 때문에 안즈는 실내에 오래 있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걸 눈치챈 레이가 중간에 신발이 문제면 본인이 안고 다니겠다느니, 그런 말을 해서 조금 다투기는 했지만 오늘 하루는 별 문제 없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해가 지기 전까지 카페에 앉아있다가, 더위가 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카페를 나온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향한 곳은 공원이었고, 벤치에 앉아서 레이가 주는 딸기우유를 두 손으로 받으며 안즈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제가 그렇게 작냐고. 사쿠마 레이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고, 안즈는 빨대를 꽂으며 다시 물어보았다.
"맨날 저보고 작다고 하시잖아요."
"...그랬나?"
"하스미 씨도 그러시던데."
"그 빌어먹을 땡중이..."
"너무 작아서 자꾸 먹이려고 한다던데."
"또 누가?"
"오오가미 군이요."
"하아..."
이 자식들이. 레이는 한숨을 쉬면서 그렇게 중얼거렸고, 안즈는 오늘 레이와 함께 있으면서 먹은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만나서 제일 먼저 한 건 점심을 먹은 거였고, 밥을 먹고 나오자마자 레이가 안즈의 손에 쥐어준 건 초코맛 아이스크림이었다. 사실은 점심도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먹고 있는 걸 뚫어져라 쳐다보는 레이 때문에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걸어다니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하다가 들어간 곳이 디저트 카페였고, 적당히 에이드같은 것을 시킬 생각이었던 안즈의 생각과 다르게 레이는 다 먹지도 못할 것들을 잔뜩 시켰다. 팬케이크부터 시작해서 파르페에, 조각 케이크까지. 그거 다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자기가 먹을 게 아니라 안즈가 먹을 거라고 말하는 게 어찌나 웃기던지, 그런 거 다 못 먹는다고, 그래서 주문을 취소하라고 했더니 잠시 고민하는 '척'만 하더니 다 먹을 수 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 주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결국 같이 먹어주기는 했지만, 카페를 나와서도 이것저것 사준다는 걸 계속 거절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딸기우유도 사실은 받을 생각이 없었는데 좋아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준 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안즈는 오늘 하루종일 먹기만 했다. 정말 먹기만.
하스미 케이토는 안즈를 볼 때마다 작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작은 키는 아니라고, 그런 말은 실례라고 조금 힐난하듯이 말했더니 사쿠마 씨가 항상 그래서 자기도 옮은 것 같다며 사과를 했다. 그 사람이 그래요? 그 말에 놀라서 물어보았더니 한숨을 쉬며 본인에게서 직접 들으라며 고개를 저었다. 오오가미 코가는 사쿠마 선배가 자꾸 그러니까 너만 보면 뭐라도 사줘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투덜거렸다. 그런 말을 듣고 오늘 이런 일이 있다보니, 안즈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이의 눈에는 자신이 작아보일 수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키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었고 사쿠마 레이는 손도 크고, 평균남자보다 어깨도 넓고, 아무튼 안즈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사람이었으니까. 백번 양보해서, 그런 이유때문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이렇게 먹으면 옆으로 늘어나지 키가 크지는 않는다구요.
사쿠마 레이는 지금 좀 많이, 아주 많이 민망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같은 거, 부끄러운 생각같은 거 안즈에게 그다지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전의 그 말실수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주위의 다른 사람이 그걸 말해버릴 줄이야. 이래서 말조심을 하라는 건가. 이미 후회해봤자 늦었지만 레이는 다시는 그 두 녀석 앞에서 티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안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즈는 작았다.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니까, 당연히 작을 수밖에 없었지만 레이에게 있어서 안즈는 조금 더 작은, 그래서 만지는 게 무서운 사람이었다. 물론 말만 그렇다할 뿐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대버리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딱히 다른 사람에게 뭘 사서 먹인다거나 그런 취미는 없었다. 본인 스스로가 먹는 걸 그렇게 즐기지도 않았으니까 당연한 거였지만, 이상하게도 안즈를 보고 있으면 자꾸 무언가를 먹여주고 싶었다. 그게 안즈가 눈에 보이는 대로 작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마른 팔로 커다란 박스를 척척 옮기는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쁜 것도 아니었고, 어쨌든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레이는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이런 행동을 코가가 모를 수가 없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레이도 딱히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냥?"
"..."
"레이 씨."
나 작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건데. 간단한 답인데도 레이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왜 말을 못하지. 그 말을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리가 없는 안즈와, 솔직히 말하자니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줬더니 그 악력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토마토 주스가 폭발해버렸고, 레이는 손을 씻고 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이의 귀가 그 토마토 주스처럼 빨갰던 것 같은데, 안즈는 못본 척 넘어가주었다.
1.
당장 나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서 끊어지기 직전의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레이는 열쇠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안즈에게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며 소리쳤다. 항상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줬던 그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고, 안즈는 그 향에 눌려서 질식할 것 같았지만 레이의 말을 듣고 순순히 나가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이미 각오를 하고 온 것이고, 들어오기 전에 레이의 방 문 앞에 서서 그의 부탁을 받고 안즈가 들어올 수 없게 막고있던 리츠는 후회하지 않겠냐며 그녀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간단한 일이 아니야. 안즈. 네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인간의 감정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잖아? 내 형님따위...뭐, 그래. 순간의 감정으로 결정하는 건 형님이나 너. 둘다에게 좋지 않아. 굳이 운명을 따르지 않아도 좋으니까, 다시 한 번 물어볼게.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확실하지도 않는 미래때문에 겁먹고 도망가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안즈의 결심은 확고했고, 리츠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나도 몰라. 굳이 따지자면 난 형님보다 안즈. 너한테 원망받는 게 더 싫으니까, 얼른 들어가봐. 그렇게 안즈는 리츠의 허락아래 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그녀는 나가라는 말만 반복하는 레이를 무시하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레이 씨."
보통의 알파들은 이정도까지 오면 대부분 이성을 잃고 눈 앞에 보이는 오메가에게 달려든다고 하던데, 이 사람이 이만큼 참을 수 있는 건 우성이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참는 게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안즈는 침대 위로 올라갔고, 오지말라며 저를 밀어내는 레이의 손을 잡았다. 알고 있다, 억제제도 먹지 않고 브리드 싸이클을 맞이한 알파에게 있어서 저같은 오메가가 얼마나 자극적인지. 그렇기 때문에 레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이럴 때마다 안즈를 만나지 않았고, 그녀는 그와 만나면서 그것이 제일 불만이었다. 알고 있다. 각인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신중해야할 문제인지. 알파에게 각인된 오메가는 죽을 때까지 그의 옆에 있어야 했고, 이 작은 소녀가, 제가 사랑한 소녀가 이른 나이에 제게 종속되는 걸 바라지 않았던 레이는 그녀를 제 옆에 두면서도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계속 선을 그었다. 항상 약을 먹었고, 조금이라도 몸이 안좋아지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그안에서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알면서도 안즈 또한 확신이 서지 않아 레이의 그런 선긋기를 모른 척 했다.
그렇지만 안즈는 이제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었고, 자신을 향한 레이의 애정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평생을 이 남자의 옆에 있고 싶다. 도망갈 생각도, 다른 곳으로 달아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이 방으로 들어왔고, 자신의 의지로 그의 손을 잡았다.
"레이 씨, 내 목소리 들려요?"
아무래도 슬슬 한계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더는 참지말아요."
이제는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안즈의 머리 뒤로 커다란 손이 다가왔고, 결국 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짙어진 붉은 눈동자와 잔잔한 호수같은, 푸른 눈동자가 마주쳤다.
2.
안즈가 레이에게 선물해준 건 향수였다. 평소에 그가 쓰던 것보다 더 독하고 진한 향수였고, 본인의 취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는 그것을 받아서 뿌리고 다녔다. 주위 사람들은 향수 때문에 그의 향이 가려지니 그만두라고 했지만 레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베타는 알파의 향을 맡지 못한다. 그렇지만 오메가는 알파의 향을 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알파의 상태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며, 베타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안즈는 베타였다. 알파의 향을 맡을 수 없고, 그의 상태도 알아차리지 못하며, 실질적으로 아무 도움도 되지않는, 그런 쓸모없는 존재였다. 레이는 제 사랑스러운 연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길 바랐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하고 매달려도 안즈가 느끼는 불안함과 거리감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당신을 놔주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미안해요. 약통을 털어서 억제제를 모조리 입에다가 쑤셔놓고,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약의 힘으로 어떻게든 제 몸을 다스려보려던 레이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던 안즈가 울면서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런 줄 몰랐어요. 그렇게 아플 줄 알았다면 시작조차 하지말걸. 왜 시작같은 걸 해서, 왜 당신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매달리고 있을까요. 레이 씨. 제발 나 버리지 마요. 안즈는 모든 걸 쏟아내고 죽을 사람처럼 서럽게 울며 버리지말아달라 매달렸고, 레이는 한 번에 너무 많은 약을 먹어서 인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았다. 다만 이게 약기운 때문인지, 안즈가 제게 한 말 때문인지 레이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향수를 선물한 이유도 그것때문이었다. 나도 맡지 못하는 당신의 향을, 나아닌 다른 사람이 맡는 거 보고 싶지 않아요. 직접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런 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구속하는 거 같지 않아요? 징그럽지 않아요? 돌려말하지도 말고, 거짓말도 하지말아요.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안즈는 레이에게 그렇게 물어보았고, 사쿠마 레이는 묘한 얼굴로 웃으며 그렇게 답해주었다. 나한테 해가 되는 일도 아닌데, 내가 싫어할리가 없지 않은가. 안즈는 그 대답을 듣고는 울면서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내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닌데 싫어할리가 없지. 그녀가 떠날까봐, 자신을 버리고 평범한 사람을 만날까봐 얼마나 두려워했던가. 레이는 이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고, 행복했으며,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연기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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