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12200506
안즈른 단문 본문
이즈안즈 마다안즈 와타안즈 호쿠안즈(+레이)
호쿠안즈는 야센님 그림 참고해서 썼습니다
다양하게 쓰는 사람이....되자......
안즈 씨. 그런 무서운 건 잠시 내려놓고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악마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여서 들고있던 라이플을 장전해서 쏴주니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빗겨지나간 탄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에 박혔고, 안즈는 아깝다 생각하며 수녀복을 들어서 허벅지의 가터에서 권총를 빼내서 연속으로 악마를 향해 총을 쏘았다. 이런 거 소용없다니까. 온몸에 탄환이 박혔지만 그것은 악마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고, 몸에 박혔던 것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히 낭비만 했잖아. 한숨을 내쉬며 악마를 노려보니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즈를 바라보고있었다.
"어차피 쓸데없는 말이겠지만 들어는 줄게요. 다섯을 셀테니까 그 안에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요약해서 말하세요."
"잠깐, 안즈 씨! 다섯은 너무 짧지 않아~?!"
"하나, 다섯!"
"어떻게 하나 다음이 다섯일 수 있어어!!"
안즈는 그 말을 듣지도 않고 다시 총을 쏘기 시작했고, 악마는 이대로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생각했는지 날라오는 탄환을 피해 안즈의 뒷쪽으로 도망갔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돌려서 다시 공격하려고 했으나 악마에게 손목이 붙잡혔고, 결국 들고있던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황급히 다른 손으로 목에 걸고 있는, 성수가 달려있는 목걸이를 잡아 뜯어 집어 던졌지만 약간의 탄내만 날 뿐 악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지치지 않고 반격하는 안즈 씨가 취향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마마의 이야기 좀 들어주지 않을래~?"
"보나마나 맨날 하던 이야기만 할 게 뻔하잖아요!"
"그런 내 부탁을 안즈 씨가 들어주지 않는 게 나쁜 거라고 생각안해?"
"되먹지도 않은 부탁을 들어달라고 내게 요구하는 당신이 이상해요."
악마의 이름은 미케지마 마다라. 다른 꿈이 있었던 안즈가 그걸 포기하고 이 길을 걷게 만든 원흉이었고, 어릴 때부터 옆에서 달라붙어 되도않는 유혹을 하고 있는, 안즈가 이 세상에서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유일한 생물이자 원수 중의 원수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을 미워한다며 마다라는 안즈를 볼 때마다 신세한탄을 했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영혼이 먹힐 뻔 했다던가, 성직자가 되겠다고했더니 안된다며 우는 그에게 순결을 잃을 뻔 했다던가, 그외에도 온갖 짓을 당할 뻔 하고 목숨까지 위협받은 적이 있던 안즈의 입장에서 마다라의 그런 신세한탄은 길거리에서 개가 짖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번의 싸움도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해서 결국 쓰러진 안즈가 병원에 입원을 했고, 퇴원하기 전까지 화를 꾹꾹 눌러담았다가 집에 오자마자 터뜨려버린, 정말 한달에 한 번 정도는 있는 흔한 일이었다. 나는 네 남편 아니야? 우리 결혼한 사이아니냐고. 그런데 왜 모든 걸 네가 도맡아서 할려고 하는 건데? 세나 이즈미는 그게 불만이었고, 안즈는 내가 이즈미 씨보다 좀 더 한가하니까 이건 당연한 것이며, 이런 일에 당신한테 기댈만큼 자신은 약한 사람도 아니라며 소리쳤다.
"그런 변명은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나 해당되는 말 아닌가? 그때야 너와 나 사이가 남이어서 가능했던 거지만 지금 우리가 남이야?!"
"이혼하면 어차피 남인데 그때랑 지금이랑 뭐가 달라요?"
"안즈!"
솔직히 말하자면 안즈는 이 문제로 이즈미와 그만 다투고 싶었다. 그가 이럴 때마다 화내는 이유를 안즈도 알고는 있다. 그러나 자신은 더이상 그가 지켜줘야 할 여동생도 아니었다. 안즈는 그의 말처럼 결혼을 하고 부부사이가 되었으니 이즈미 또한 자신을 여동생처럼 보지않길 바랐고, 여동생처럼 대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세나 이즈미는 여전히 「오빠」처럼 행동했고, 안즈는 제 남편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도 싫었다. 이즈미가 제게 기대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혼자서 버티려고 하던 사람이 제게만은 물러져서 어리광도 부리는 게 싫지 않았다. 좋았으면 좋았지, 그게 싫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아내의 입장에서 감싸주었으나 이즈미는 언제까지고 오빠의 입장에서 안즈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부부라는 게 의미가 있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나 이즈미는 안즈에게 있어서 연인이고, 배우자이며, 믿고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평생의 파트너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즈미는 그녀를 연인, 그리고 「여동생」. 이 두 가지의 시선으로 볼 뿐이었다.
세나 이즈미는 모든 게 불만이었다. 서로 사회인이 되서 다시 만났을 때 학창시절에 죽어라 노력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서 절망적이었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노력하면 안즈도 그때처럼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보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하면서 안즈의 옆자리를 자신이 차지했기에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오히려 옛날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변해있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에게 말하면 되고, 집안일같은 것도 서로 나눠서 하면 된다. 그러나 안즈는 항상 지나치게 이즈미를 배려했고, 그렇게 무리를 하다가 이즈미에게 들켜서 혼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이 모든 게 지치고 힘들었다. 부부라는 건 서로 기대면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게 아니었나? 이즈미 스스로는 나름대로 그 역할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하고 나서 그는 안즈에게 좀 더 기대게 되었고, 어리광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안즈는, 안즈는. 그는 속이 답답해서 찬물이라도 들이키고 싶었다.
"...세나 선배. 할 말이 있어요."
"하아? 너 지금 호칭 그따위로 할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매번 같은 이유로 이렇게 싸우는 것도 질렸어요. 나도 나대로 피곤하고 선배도 선배대로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건데."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거예요."
"생각해서 안되면?"
"그때야..."
정말 헤어지는 거죠. 안즈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이즈미는 그 대답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우리가 아무리 자주 싸우면서 헤어지자는 소리를 숨쉬듯이 했다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그러나 안즈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보였고, 방에 들어가 미리 싸두었던 그 가출가방을 꺼내왔다.
이대로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주제로 싸우기만 한다면 같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안즈는 이즈미와 이런 문제로 싸우기 위해서 결혼을 한 게 아니었고, 의견 차이를 굽히지 못한다면 이혼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붙잡는 이즈미의 손을 뿌리치고 안즈는 기어이 집을 나갔다.
"내가 왜 이러는지, 세나 선배도 한 번 생각해봐요."
나도 머리 식히면서 세나 선배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할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안즈를 이즈미는 붙잡지 못했고, 그녀를 붙잡으려고 뻗었던 손만이 처량맞게 있을 뿐이었다.
'나랑 결혼해줄거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소녀를 누군가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겁을 내던 소년은 매일 소녀의 집으로 찾아와 꽃을 선물해주며 그렇게 말했다. 어른이 되면 결혼하자. 나말고 다른 사람이랑 약속하면 안돼. 약속해줘. 어린 아이의 생떼였지만 소녀는 항상 웃으면서 새끼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응. 아무하고도 이런 약속 하지 않을게. 난 너랑 결혼할거야. 조금 더 자랐을 때는 토끼풀로 만들어 낸 꽃반지를 손에 끼워주며 다시 한번 소년은 소녀에게 고백을 했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를 보면서 소리 내 웃은 소녀는 어릴 때부터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너를 누가 데려가겠냐며 그 풋내나는 청혼을 받아주었다.
소년은 자라서 왕국의 기사가 되었고, 그덕분에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무리하면 안돼. 정식으로 혼인을 하기도 전에 날 과부로 만들 생각은 아니지? 불안했기 때문에 일부러 강한 척 그렇게 말하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기에, 떨리는 손을 잡아주며 너를 두고 절대 어디 가지 않겠다고 그 자리에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해주었다. 소녀는, 그제야 소년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번 전쟁을 승리해서 돌아오면 이 왕국도 안정을 찾을테고, 그러면 더는 소녀를 기다리게 하지 않아도 되니 이번에야말로 어릴 때의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소녀를 구속하고 싶지 않았기에 소년은 적당한 때를 기다리며 계속 혼인을 미루었고, 소녀는 그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걸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때를 기다리며 소년은 행복한 꿈을 꾸었다. 면사포에는 티아라보다는 화관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크림색의 드레스도 좋지만 역시 너에겐 장밋빛이 더 어울리겠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반지를 건네주자. 둘이서, 행복하게 앞으로 걸어나가자.
그리고 이것이 소년이 살아생전 가장 행복하게 꿨던 꿈이었다.
'호쿠토, 안즈가...안, 즈가...!'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그가 느낀 것은 묘하게 침체되어있는 분위기였다. 왕국의 승전 소식이 분명히 전해졌을텐데. 그런 분위기가 기이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들었다. 그리고 소년은,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도 편지의 답이 늦어 자신을 걱정하게 만든 약혼녀가 생각이 났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다급하게 소녀의 집으로 가던 길에 그는 제 친구를 만났다. 자신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미안하다고,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며 무릎까지 꿇고 빌던 친구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소녀의 이름이었다. 그제야 소년은 한쪽팔이 없는 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사라, 너. 그 팔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으니 소년의 친구는 그가 없던 사이에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마왕이 쳐들어왔어. 왜 이런 곳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마을을 부수고 사람을 죽이고, 여기저기에 불을 질렀어.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야. 아, 안즈는...우리가 마을 밖으로 피신시키려고 했는데, 들켜버렸어. 데려가지 못하게 우리 셋이서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 아. 미안해. 호쿠토, 안즈만은 지켰어야 했는데.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미안하다.
다른 두 사람은? 지금 만나러 가는 길이야. 피폐해진 얼굴로 그리 말하는 친구를 따라가니 보이는 것은 작은 무덤이었다. 아. 나는. 소년은 그 앞에 주저 앉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악을 쓰며 울기만 했다. 뭐가 기사라는 거냐.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친구의 죽음도, 이곳의 평화도, 그리고 연인까지, 히다카 호쿠토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마왕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웃는 얼굴이었다. 인간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구만. 피를 토하면서도 그리 말하는 게 우스워 아예 말도 하지 못하게 목을 날려버릴까 하다가 오른팔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기에 주저 앉아서 그 헛소리들을 듣고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나에게 이겼다고 생각하겠지.'
'지금 그 기쁨을 잘 기억하게나. 아깝군, 아까워. 그 얼굴이 절망에 물드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은데, 그걸 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한다니 너무 안타까워.'
붉은 눈을 매섭게 뜨며 호쿠토를 비웃던 마왕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의 허세 한번 거창하군. 이를 악물고 그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시체의 산을 넘고 넘어서 자신의 약혼녀, 안즈가 갇혀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홀로 이곳까지 쳐들어와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마왕성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죽였고, 마침내 마왕마저 제 손으로 목숨을 끊어주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던 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건 마왕에게 붙잡힌 자신의 연인을 구해야한다는 집념때문이었다. 그때부터 호쿠토를 살아갈 수 있게 한 건 오로지 그 집념뿐이었다.
"안즈!"
화려하게 장식 된 새장 안에 가둬 진 안즈를 발견한 호쿠토는 그쪽으로 빠르게 달려갔고, 자신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소녀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눈앞에 서있는 걸 보자마자 울 것 같은 얼굴로 가까이 오지말라며 소리쳤다. 오지마오지마오지마오지마오지마오지마오지마오지마오지마!! 미친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며 오지말라고 소리치는 안즈가 이상해 새장 가까이로 다가간 그는, 이제는 악을 쓰며 우는 제 연인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에게 그 존재의 흔적이 남는다고 했다. 그 흔적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남아있으며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근데, 그게 왜 너에게. 호쿠토는 그제야 마왕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고, 그때와 똑같이, 이 사실을 처음 알았던 그날처럼 절망적인 얼굴로 미안하다고 우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넌, 내게 미안해할 게 하나도 없는데. 새장안으로 팔을 넣어 안즈의 손을 잡아 준 호쿠토는 내게 사과하지말라고 소리쳤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그저 끌려갔을 뿐이고, 안즈, 널 지키지 못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니까, 제발, 제발. 차갑게 식어버린 손을 잡으며 그렇게 빌고 또 비는 호쿠토를 보면서, 안즈는 아주 오랜만에 웃었다.
아냐, 나쁜 건 나야.
안즈.
그 괴물을 동정했어. 그래서 더 밀어내지 못하고 그를 용서했어. 호쿠토 군, 나쁜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안즈, 제발. 그러지마.
그 괴물이, 네 얼굴을 하고 나에게 잘못을 빌었어. 그래서 용서했어. 네가 아닌 걸 알면서도, 알았는데도, 나는.
아니야, 돌아가자. 안즈, 제발 함께 돌아가자. 이제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는 건 없어. 돌아가자. 응?
호쿠토 군.
이미 늦었어. 그리 말하며 처연한 얼굴로 웃는 안즈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 같았다. 태양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던 호수를 닮았던 그 눈동자는 어느새 그 남자와 똑같은 색을 띄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괴물은, 죽어서도 그녀를 놓지 않았다. 잡고 있던 호쿠토의 손을 놓아 준 안즈는 숨겨두었던 작은 칼 하나를 꺼냈다. 안돼. 그녀가 무슨 짓을 할 지 눈치 챈 호쿠토가 그것을 말리려고 했으나 들고 있던 검은 마왕의 시체 옆에 버려두고 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 새장을 부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른팔은 이미 부러져서 쓸 수 없었기에 그는 무력하게, 제 연인이 무슨 짓을 하는 지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게도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우리가 하지 못했던 거, 전부 다 해보자.
좋아했어, 아니지. 지금도 사랑하고 있어, 호쿠토 군.
히다카 호쿠토는, 그녀가 어떤 얼굴로 눈을 감았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영웅왕, 당신이 원하는 건 대체 무엇인가요?」
「내가 너에게 원하는 건 마스터가 아니다.」
「저는 평범한 마술사라서 영웅왕에게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닐텐데요.」
「본인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낮군.」
아름다운 얼굴로 고혹적으로 웃는 그를 보면서 안즈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서번트는 아처와 함께 동맹을 맺은 어쌔신과 캐스터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고, 이쪽도 라이더가 급하게 도와주러 오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을 만나러 온 아처때문에 안즈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분명히 첫만남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인간계집따위 관심도 없다면서 무시했으면서 라이더의 주도 하에 모였던 자리에서 안즈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더니, 그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마스터는 내버려두고 이렇게 행동해도 되나요? 급할 때는 령주를 사용해 부르라고 했으니 문제 없겠지. 이런 서번트를 존경하며 모시고 있는 코가가 생각나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마스터를 바꾸고 싶은게 아니라면, 아처가 그녀에게 원하는 건 마술 뿐이었다. 그러나 마술사 가문으로 길게 이어져오기는 했지만 중간에 끊긴 마술회로가 살아난 것은 안즈 뿐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았고, 다른 영령도 아닌 영웅왕인 아처가 이런 풋내기 마술사에게 원하는 게 있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인지, 아처는 소리내 웃으며 그 생각에 대한 답을 내주었다.
「허나 이 몸은 마술사로서의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 안즈, 내가 원하는 건 마술사도, 이 성배전쟁의 마스터도 아닌 너라는 인간 그 자체다.」
그건 무슨 뜻인가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건가. 그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안즈의 손을 잡았다. 아뿔싸, 아무리 그래도 서번트 앞에서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며 급하게 손을 빼려고 했지만 아처는 소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령주가 있는 손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그 위로 입을 맞췄다. 하필이면 그 광경을 본 세이버가 안즈에게 무슨 짓이냐며 달려오려고 했지만 캐스터가 그 앞을 막아서 달려올 수가 없었다.
「세이버를 버리고 내 신부가 되라.」
「....네?」
붙잡힌 안즈를 빼올 타이밍을 재고있던 미도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아처를 바라보았고, 그는 고고한 얼굴로 참을성 있게, 마치 큰 영광을 베푸는 왕의 얼굴로 다시 말해주었다. 자신의 신부가 되라고. 「되어달라」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오만한 성격이 보여서 안즈는 헛웃음이 나왔다. 설마설마 했는데 이런 뜻이었다니. 아름다운 외모와 그에 받쳐주는 영령으로서의 능력, 이 성배전쟁을 포기하고 그와 결혼한다면 안즈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볼 것이 없어 보였지만 소녀는 영웅왕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처음 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라면? 그 호기심이 사라지고 지겨워지면 그 후가 어떻게 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소녀는, 지금 이렇게 남들과 다르게 성배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소녀는 이 영령에 대해서 전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의 무엇을 믿고 그 청혼을 받아들이나요, 영웅왕.」
「건방지군. 감히 내 뜻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청혼을 명령처럼 하지 마세요...」
그는 불쾌한듯 얼굴을 찡그렸고, 안즈는 잡힌 손을 재빨리 빼내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이버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제 마스터를 탐낸다며 화를 냈으며, 캐스터의 마스터인 나츠메는 재밌는 광경이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처와 잘 알고 있던 사이인 캐스터는 역시 그다운 청혼이라며 즐거워했고, 그와 마찬가지인 어쌔신은 두통이 오는지 인상을 구겼다.
「다시 한번 더 정중하게 거절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세요.」
이미 거절당한 마당에 다시 한번 예의바르게 고개까지 숙이며 또 거절의 말을 전하는 안즈에게 뭐라 더 몰아붙일 수도 없었는지 아처는 불쾌하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저는 제 서번트와 이 성배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그의 소원을 들어줄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신부는 될 수 없어요.」
안즈는 자신의 서번트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당신이 나의 마스터냐고 묻는 그 얼굴을 보면서, 소녀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겠다고 다짐했다. 도망칠 생각도, 중간에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죽어야한다면 영광스럽게 그를 위해 죽어줄 생각이었다. 세이버, 호쿠토의 소원을 들었던 그 첫날부터 한번도 포기한 적 없는 소녀의 목표였다. 단호하고 확신에 찬, 자신이 반했던 그 얼굴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안즈를 보고있으니 속이 쓰려왔지만 그럼에도 아처는 이 작은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 가질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것들도 있는 법이지. 그리 생각하며 아처는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며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어차피 이 말을 전해주기 위해 왔을 뿐, 그다지 싸우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이 작은 소녀를 포기할 생각따위 전혀 없었다. 어차피 빌 소원도 없는 그에게 성배따위는 관심이 없는 물건이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이 소녀를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성배를 위해서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다.
사라진 아처를 보면서 긴장이 풀린 안즈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고, 캐스터의 방해가 사라진 틈을 타 그를 밀쳐내고 안즈에게 달려 온 세이버는 괜찮냐며 소녀를 부축했다. 흥이 깨졌다. 어쌔신은 한숨을 쉬며 그의 마스터와 사라졌고, 캐스터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세이버를 도와주기 위해 왔던 라이더 뿐이었고, 정신을 차린 안즈는 미도리의 손을 잡아주며 와주어서 정말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도, 동맹이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선배가 무사해서 다행임다...」
「그래도 고마워. 아무리 세이버라도 셋을 상대하기는 무리였으니까.」
「잠깐, 마스터. 나는 셋도 충분히....!」
「캐스터가 있는데 가능할리가 없잖아. 강한 척 하지마 호쿠토 군.」
진명을 부르며 그렇게 말하는 안즈에게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는지 세이버는 혀를 차며 탐탁치 않은 얼굴로 영체화해 사라졌다. 어색하게 웃은 미도리는 늦었으니 자신도 이만 가보겠다며 인사했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라이더에게 붙잡혀서 한껏 우울해하며 사라졌다.
성배전쟁이 시작된지 이제 겨우 일주일. 아직 아무도 탈락하지 않았고 과거를 생각하면 너무 평화적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지만 안즈는 지금 너무 피곤했다.
가져오는 꽃은 항상 장미꽃. 색과 갯수는 날마다 달라졌지만 장미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미꽃을 내게 가져다주려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안즈는 와타루에게 다양한 장미꽃을 받아왔다. 이런 와타루의 기행은 이미 소문이 퍼져서 그 히비키 와타루가 오늘은 프로듀서에게 어떤 꽃을 줄 지 내기하는 사람도 생길 정도였다. 저를 두고 내기하는 것에 화가 난 호쿠토가 그 무리들을 전부 찾아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것 같지만 안즈는 저를 두고 무슨 내기가 오가든 사실 관심이 없었다. 당사자인 저도 내일 무엇을 받을지, 과연 이게 언제까지 갈지 궁금한데 제 3자의 시선으로 보면 더 그렇지 않겠는가. 물론 저를 신경써 준 호쿠토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안즈씨. 지금 바쁘신가요?
아니요. 급한 일은 없어요.
다행이군요. 그럼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그래요.
오늘은 조금 특별했다. 잠시 시간을 내달라고 말하길래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한가해서 괜찮다고 한 것도 있지만 사실 할 일이 있었어도 아마 와타루가 제게 그런 부탁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받아줬을지도 모른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연극부실이었다. 설마 의상이라도 입히려고 하는 건가, 싶었지만 연극부원도 아닌 저에게 와타루가 그럴리가 없었다. 도통 자신을 여기 데려온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와타루를 바라보니 그는 웃는 얼굴로 이 의자 위에 앉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속을 모르겠는 저 얼굴. 호쿠토에게 들은 것도 있고 안즈 본인이 겪은 것도 있기 때문에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제 발로 왔으니 이제와서 싫다할 수는 없었다. 안즈는 그 의자 위에 앉았고, 와타루는 대충 묶고있던 안즈의 머리를 풀어버렸다.
뭐하는 건가요, 히비키 선배...
오늘 제가 안즈씨께 드릴 꽃은 조금 특별해서 말이죠,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머리장식인가요?
역시 안즈씨는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치만 그건 그냥 주고가도 되는 거잖아요.
제 손으로 해주고 싶었답니다. 그리고...안즈씨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머리장식같은 거 하지 않잖아요?
정답이었다. 제대로 하는 법도 모르고, 아침에는 바쁘다고 말그대로 씻기만 하고 학교에 와서 너 그렇게 관리 안하면 나중에 큰일난다며 이즈미에게 잔소리까지 듣는 안즈가 화려한 머리장식을 제 스스로 하고다닐리가 없었다. 와타루의 선택이 옳았고, 안즈는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주기로 했다.
자아, 어떠신가요. 마음에 드시나요, 안즈씨?
부스스하고 정돈되지 않았던 머리가 아주 예쁘게 바뀌어 있었다. 내 머리로 이런 것도 가능했구나. 와타루가 오늘 주려고 했던 분홍색의 장미가 머리에 장식되어있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나 싶었지만 머리에 맞춰서 얼굴에 화장까지 해놓으니 괜찮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교복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와타루는 만족한 얼굴이었고, 안즈도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분홍장미의 꽃말을 아시나요?
으음...뭔가요? 그런 쪽으로는 지식이 없어서.
그렇군요. 분홍장미의 꽃말은 「맹세」와 「행복한 사랑」이랍니다.
뭔가, 결혼식에 어울리는 꽃말이네요.
네. 그래서 저도 오늘 이 꽃을 준비한 거랍니다.
방금 와타루가 한 말이 무엇인지 해석하기도 전에 분홍빛의 안개꽃과 장미가 어우러져 있는 꽃다발이 손에 쥐어졌고, 하얀 면사포가 머리 위에 씌워졌다. 아, 정말. 사람을 놀라게 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남자다. 이걸 위해서 지금까지 제게 꽃을 줬던 거예요? 글쎄요. 안즈씨, 왼손을 내밀어주시겠습니까? 안즈는 이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얌전히 왼손을 내밀어주었다. 그 어떤 보석도 박혀있지 않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반지였지만 오히려 그게 지금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것 같아서 안즈는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결혼식이네요.
그렇다면 성공이군요. 혹시라도 안즈씨가 받아주지 않을까봐 걱정했답니다?
걱정한 사람의 얼굴이 아닌데...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으니까 너무 그러지마세요.
드러난 와타루의 귀가 새빨갰다. 아, 정말로 숨기고 있었구나. 그걸 알게 되니 안즈는 기분이 좀 더 좋아졌다. 그의 왼손 네번째 손가락에는 안즈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들고있던 꽃다발을 무릎 위에 내려놓은 안즈는 와타루의 왼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뒤 그 반지를 빼버렸다. 안즈씨? 놀란 와타루가 왜 그러냐며 물어보자 그녀는 방금 전의 와타루처럼 그에게 왼손을 내밀어달라고 했다.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와타루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왼손을 내밀었고, 반지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래야 공평하죠.
...이런 거에 굳이 공평을 따지는 것도 안즈씨답군요.
애초에 실제 결혼식에서도 서로 반지교환하는 걸요? 이런 곳에서 둘이서만 하는 결혼식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을 들은 와타루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고, 안즈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두 사람만의 결혼식, 사랑하는 신부에게 웨딩 드레스조차 입혀주지 못한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이었기에 히비키 와타루는 미안하다 말했고, 그의 신부는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안즈는 와타루가 왜 이런 일을 벌렸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곧 봄이 온다. 봄이 오면 그는 떠날 거고, 안즈는 혼자 남게 된다. 단순한 「졸업」이 아니라 아주 멀리, 보고 싶어도 바로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는 떠날 것이다. 와타루는 안즈에게 기다려 달라 말했고 그녀는 그러겠다고 말했지만 떨어져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 몰래 이런 일을 준비했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허울 좋은 말로는 그녀를 위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제 욕심이었다. 어떻게든 안즈를 제 옆에 붙잡아두고 싶은 과한 욕심이었고, 그가 말하는 「미안하다」는 말에 담겨있는 감정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었다.
제 욕심때문에 안즈씨가 힘드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괜찮아요. 이건 제 선택인걸요? 다 알면서도 히비키 와타루를 선택한 건 나니까, 그런 것들도 모두 제가 책임져야해요.
안즈씨.
그러니까 걱정말고 잘 다녀와요.
다시 돌아오는 날에도 오늘처럼 당신을 닮은 꽃을 들고 만나러 오겠습니다. 그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할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겨우 이런 것에 만족하면 곤란합니다, 안즈씨. 제가 누구인가요? 당신의 히비키 와타루입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당신에게 선물해드리죠.
신부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면사포를 걷어낸 와타루는 그렇게 약속하며 조심스레 입을 맞췄고, 안즈도 웃으면서 그를 받아주었다.
목이 탄다. 덥고 짜증이 난다. 기분이 나쁘고, 땀 때문에 씻어도 온 몸이 찝찝하고, 매우 불쾌하다. 세나 이즈미는 여름이 싫었고, 이런 날에 야외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더울바에야 차라리 추운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즈미는 여름을 싫어했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더워. 짜증나. 차가운 수건을 뒤집어 쓰고 멍하니, 그런 말만을 중얼거리며 앞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깜짝이야. 막 꺼내왔는지 아직도 꽝꽝 얼어있는 물병이었고, 감히 제게 이런 짓을 하는 건방진 사람이 누구인지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더우세요? 평소와 다를 게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즈미는 이제 그 얼굴에서 생각을 조금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그걸 질문이라고 해? 애초에 상냥하게 답을 해줄 생각도 없었지만 너무 더워서 그럴 힘도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익숙하다는 듯 살포시 웃더니 이즈미의 머리에서 이미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수건을 가져가고 새 것을 건넸다.
리허설 곧 끝날 거예요.
짜증나.
네, 네.
더워.
주최측에서 리허설만 끝나면 공연 전까지는 안에서 쉬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지금 당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너무 더워지니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는지 평소와 다르게 자꾸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하게 된다. 선배 오늘은 되게 아이같아요.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그게 보기 싫어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밀었더니 과장되게 밀려나며 바보처럼 웃으니까 더 짜증이 났다. 짜증나니까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누가 들으면 너무하다고, 말을 왜 그렇게 하냐고 뭐라할테지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의 옆자리를 지켰다.
부채질 해드릴게요.
제정신이야? 지금 해봤자 뜨거운 바람밖에 안오는데?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너 바보야?
어이가 없어서 물병을 쥐고 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바보같다고 하지말라고 해야하는데, 말린다고 들을 사람인가. 소녀는 들고있던 부채로 부채질을 시작했고, 기분 나쁜 뜨거운 바람이 날아와 제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하나도 시원하지 않은데, 더우니까 그만두라고 해야하는데 그럴 힘도 없어서 이즈미는 얌전히 그 부채질을 받아주었다. 하나도 안 시원해. 짜증나. 더워. 고장난 로봇처럼 그런 말만 반복하지만 소녀는 아무런 짜증도 내지 않고 그것들을 전부 받아주었다.
무릎에 누울래요?
하아?
왜요. 제가 햇빛 가려드릴게요.
그런 문제가... 아, 됐어. 어차피 내 말 듣지도 않을 거 아냐?
쓸데없이 고집만 쎈 짜증나는 여자. 이즈미는 뭐라 더 말할까 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소녀의 무릎 위로 누웠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생각없이 하는지. 하기사 이 멍청하고 바보같은 여자의 머릿 속에는 그런 걱정따위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신경쓰는 것도, 예민하게 구는 것도 모두 이즈미 뿐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험한 말을 하고 짜증을 내보지만 그런 제 구박에도 아무렇지 않은듯 항상 똑같은 얼굴로 저를 대하며 제 신경을 건드리는 건방지고 짜증나는 후배. 그런 것들이 거슬려서 일까? 분명히 소녀가, 안즈가 태양을 가려주었을텐데도 그는 자꾸 신경질이 났다. 아니, 가려주고 있는 건 맞아? 눈이 부시지만 않을 뿐이지 오히려 태양이 제게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즈미는 시선을 돌려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안즈를 쳐다보았다. 무릎에는 차가운 수건을, 얼굴에는 얼린 물병이, 그리고 부채질까지 해주는데도 왜 이렇게 더운걸까.
불편하세요?
...조금만 눈 붙이고 있을테니까 10분 뒤에 깨워.
네, 네. 10분 뒤면 리허설도 끝나있을 거예요.
눈 앞에 있는, 너무 가까워서 불편한 안즈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온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어서 이즈미는 수건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이유를 알았다. 자신이 너무나도 싫어하는 한 여름의 태양을 닮은 그 소녀가 눈 앞에 있는데 어떻게 덥지 않겠는가.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가려봤자 뭐하냐고. 눈 앞에 또 다른 태양이 있는데.
더운 건 싫다. 한 여름의 태양같은 거 질색이다. 불쾌하고 짜증나서 가까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얼굴을 가린건데, 여전히 태양 아래에서 맨 몸으로 있는 것처럼 온 몸이 뜨거웠다. 이 뜨거움은 무더위에서 오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다른 감정에서 오는 것일까. 세나 이즈미는 알 수 없었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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