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혼의 구슬 조각 마냥 퍼져있는 리츠안즈 글을 모은...글.... (근데 암만 생각해도 몇개 없다 이럴수가)
-몇 개 없지만 탐라의 리츠안즈 러버들에게 바칩니다-
손잡고 걷고 싶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리츠를 보면서 안즈는 엄한 얼굴로 안된다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보면 어쩔려구. 그녀가 무슨 이유로,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모두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늦은 밤이라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변장까지 한 상황이었는데도 혹시 모르니까, 라는 말로 손잡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안즈, 나 손시려워.
그치만 리츠 군 장갑 있잖아.
...안즈는 바보야...
집에 가면 많이 잡아줄게, 응?
오늘따라 리츠 군이 굉장히 어리광쟁이네. 어리광도 아니고, 그저 안즈와 손을 잡고 이 거리를 걷고 싶을 뿐인데 어찌도 이렇게 제 마음을 몰라주는지. 단 둘 뿐인 집에서 손을 잡고 있는 것과 이 거리에서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건 분명히 다른 일이었다. 그냥 이 장갑을 끼고 나오지를 말 걸. 혹시라도 안즈가 추울까봐 일부러 끼고 나온 것인데 준비성이 철저한 안즈는 장갑은 물론 머플러와 모자까지 챙겨와서 별 쓸모가 없었다.
장갑이 없으면 손 잡아줄거야?
응? 무슨 말을 하냐는 얼굴로 바라보니 손에 끼고 있던 걸 벗은 리츠는 그걸 그대로 쓰레기통에 집어던졌고,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안즈는 당황한 얼굴로 태연하게 웃으며 자, 됐지? 이제 손잡아줘. 라고 말하는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자기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라고 혼내봤자 별 소용은 없었다. 쟤는 안즈랑 내가 손을 잡기 위해서 저렇게 사용될 운명이었던거지. 정말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그게 또 밉지가 않아서, 결국 안즈도 웃으며 그것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안즈의 장갑을 한 쪽씩 나누어 끼고, 리츠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안즈의 손을 잡았다.
이대로 집까지 걷자.
춥지 않아, 리츠 군?
안즈가 손잡아줬으니까, 괜찮아.
정말 오늘따라 평소랑 다르네. 크리스마스라서야? 안즈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걸어가는 리츠에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어보니 아니, 나는 항상 이랬는 걸? 깍지 껴서 잡은 손 위로 입을 맞추며 리츠는 그렇게 답해주었다.
팬서비스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쉬웠다. 말하는 게 쉽다고 해서 거기에 자신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쿠마 리츠는 그런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건 나이츠의 다른 멤버들이나 마오에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리츠는 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고, 그것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나쁜 것도 아니고 이런 걸 굳이 빙빙 돌려가면서 말할 필요는 없잖아? 그게 리츠의 생각이었고, 제 작은 공간 안에 누군가가 또 들어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누가와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리츠는 안즈를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혔다. 예전에는 분명히 이러지 않았는데, 그 뜨거운 여름을 함께 보내면서 안즈를 바라보는 리츠의 감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을, 그 숨막힘을 굳이 설명하자면 한 여름에 양산도 없이 바깥에 홀로 서있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으며, 눈을 뜨고 있기가 괴로웠다. 분명히 여름을 보내고, 함께 가을을 맞이하면서 바뀐, 리츠가 안즈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언컨대 사랑이었고, 이것은 평소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던 애정과도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안즈가 싫지 않은데, 오히려 옆에 있고 싶은데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안즈, 좋아해. 그 말 한 마디를 하는데 몇십분이 걸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도 말하면서, 안즈에게 하는 건 겁이나서 다른 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른 뜻으로 들리면 어떡하지. 제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까봐 무서웠다. 나는 이렇게나 너를 좋아하는데, 바보처럼 말을 더듬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답답하고, 함께 있으면 숨이 막혀서 힘들어지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많이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으나 안즈의 손을 잡고 몇 십분을 끌면서 리츠가 겨우 내뱉은 말은 좋아해, 라는 단 한 마디 뿐이었다.
안즈는 리츠와 함께 가든 테라스에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친구인 동급생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 것 같아서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던걸까.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안즈는 리츠의 손을 잡고 싶어졌고, 작은 세상에 갇혀있는 리츠를 제가 있는 바깥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안즈는 리츠를 좋아하니까, 가끔 스스로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리츠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제가 보고 들은, 그리고 지금도 겪고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리츠는 안즈의 그런 행동을 거부하지 않았고, 별 말 없이 끌려가주었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리츠의 앞에만 서면 이상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제 연애상담을 들어주는 하나뿐인 언니이자 친구는 그 자신감과 용기가 좋아하는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애정에 자신감이 있으니까, 그 마음을 믿고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안즈는 그 말이 너무 좋아서, 답지 않게 매달려서 한 번만 더 말해달라고 응석아닌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즈는 몇 십분 동안이나 제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계속 말을 돌리는 리츠를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서 들은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지만, 안즈는 그래도 괜찮았다. 떨리는 손 끝, 평소와 다르게 젖어있는 목소리, 새빨개진 귀와 저와 똑같은 감정을 담고있는 예쁜 보석같은 빨간 눈. 그 모든 게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그 모든 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즈는 괜찮았다.
리츠는 활짝 웃으며 자신을 안아주는 안즈 때문에 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자신을 평소보다 더 힘을 줘서 꼬옥 안아 주는 안즈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제 속에 있는 걸 털어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여전히 숨이 막히고, 온 몸이 뜨거웠만 리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안즈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래서 그는, 그동안 속에 담아두고 깊숙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서웠어. 너만 보면 숨이 막히고 괴로웠으니까. 나는 안즈의 옆에 있고 싶은데, 그러면 안된다고 모든 게 나를 막아서고 괴롭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옆에 있을 수 없다면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으나 네 얼굴을 보면 숨이 막히고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었어. 좋아한다는 말도 너무 어려워서 긴 시간을 끌어서 겨우겨우 말할 수 있었는데 나는 힘들게 표현한 그 마음이 너에게는 다르게 들릴 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너무, 무서웠어 나는. 아아, 다른 사람에겐 사랑한다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너한테는 무리야. 그런 말로는 이 숨막힘도, 답답함도, 괴로움도 표현 못하니까... 안즈, 알고 있어? 이대로는 불에 타서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래도 좋으니까 나는 지금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안돼. 가만히 등을 쓸어주며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안즈는 리츠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안된다고 속삭였다. 지금 이렇게 둘다 불에 타버리면 아무것도 못하는 걸. 나는 리츠 군이 좋은 일, 나쁜 일, 그리고 슬프거나 괴로웠던 일을 나랑 함께 겪어주면 좋겠어. 그 안에서 나와서, 나와 함께 더 넓은 세상을 봐주면 좋겠어. 있지, 리츠 군.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물론 나도 리츠 군이라면 그렇게 되어도 좋지만, 언제든지 그렇게 같이 죽어줄테니까, 지금은 나랑 함께 내일을 살아가자.
리츠는 그제야 제 안을 가로 막고 있는 무언가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리츠의 태양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또 다시 그를 구원해주었다.
안즈가 자고 있는 모습을, 리츠는 오늘 처음으로 보았다. 리츠가 안즈의 무릎을 베고 잠드는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고, 자는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니었는데 안즈는 항상 자기 전과 변함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푹 자고 일어난 리츠를 반겨주었다. 리츠군, 잘잤어? 잡고있는 리츠의 손에 안즈가 입을 맞추며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이제는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그래서 리츠는 오늘도 눈을 뜨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다.
안즈. 자는 거야?
만들고 있던 의상을 옆에 내려두고, 안즈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리츠가 이름을 부르고, 자는 거냐고 물어보아도 안즈는 답이 없었다. 정말 자는 구나. 안즈가 잠들어있는 걸 확인한 리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레슨도, 부활동도 없는 날이었고 일정이 없다는 걸 확인한 리츠는 나이츠의 스튜디오로 안즈를 데려왔다. 안즈는 여기서 일을 하고, 나는 안즈의 무릎을 베고 자는 거야. 괜찮지? 평소와 다름없는 일정이었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내가 자고 일어나면,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 그리고 안즈랑 손을 잡고 걸어다니고 싶어. 안즈는 리츠의 말을 듣고 수줍게 웃으며 자신의 무릎에 벌써 누워버린 사랑스러운 연인을 손을 잡았다. 응, 그러자. 나 리츠군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같이 산책도 하고 싶어. 안즈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웃은 리츠는, 잡고있는 손의 온기를 느끼며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니 이번에는 안즈가 자고 있었다. 최근 나이츠의 저지먼트에도 어울려주고, 그것외에도 이 학교의 유일한 프로듀서로써 신경 써야할 일이 많았으니 무리를 했을 거고, 지독한 워커홀릭인 리츠의 연인은 잠을 줄여서까지 일을 했을 것이다. 평소라면 무리하는 안즈에게 화를 냈어야 했지만 자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리츠는 그다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안즈는 이렇게 자는 구나.
불편하게 자고 있는 안즈를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잠자리로 끌고 가서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눕힌 뒤, 리츠는 그 옆에 누워 자고 있는 안즈의 얼굴을 관찰했다. 얌전한 얼굴로 자고 있는 안즈를 보고 있으니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안즈는 신기한 사람이네. 자고 있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이렇게 만드는 구나.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이었지만 리츠는 이 감정들이 싫지 않았다. 안즈가 주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낯설고, 이해할 수 없고, 어쩔 때는 무서울 정도지만 리츠는 자신이 느끼는 그 모든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어떤 감정이든 리츠가 그것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안즈였고, 리츠는 안즈가 주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다. 안즈는 태양이니까, 흡혈귀인 내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걸. 나쁜 건 태양을 사랑해버린 나잖아. 처음 이 마음을 고백했을 때 걱정하던 안즈에게 리츠가 한 말이었다. 태양을 사랑해버렸으니까, 이것은 자신이 모조리 감당해야할 일이었다.
안즈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행복한 얼굴이었고, 뒤척거리면서 내뱉은 말은 리츠의 이름이었다. 꿈에서도 나와 함께 있는 거야? 그 사실이 너무 행복했지만 리츠는 꿈 속의 자신에게도 안즈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안즈.
잠자리로 옮길 때도 일어나지 않고 깊게 잠들어 있던 안즈는, 리츠가 귓가에 자신의 이름을 속삭이자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이렇게 바로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조금 놀란 얼굴로 안즈를 쳐다보던 리츠에게 안즈는 아직 잠에 젖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더 자고 싶었는데...
응.
리츠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어.
그랬어?
응. 그래서 깼어. 리츠군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걸.
웃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고 말하는 안즈가 리츠는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아도 울 수 있다는 걸, 리츠는 안즈를 좋아하게 되면서 배웠다.
안즈와 만나면서 리츠는 많은 걸 배웠고, 배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짝사랑이었다. 안즈가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다른 사람과 있을 때 리츠는 너무 서러웠다.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렇게 너만 보고 있는데 왜 이쪽을 보지 않아? 처음에는 화가 났고, 나중에는 슬퍼졌다. 그럼에도 안즈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언제 그랬냐는듯 리츠는 웃었다. 그 푸른 호수를 담고있는 그 눈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잠시뿐이지만 그 작고 푸른 호수를 리츠가 독점할 수 있었고, 그 순간 동안은 리츠가 느꼈던 서러움과 슬픔, 두려움을 묻어버릴 수 있었다.
리츠는 안즈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을 때 차오르는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을 흘렸었다. 멋지게 보여야 하는데, 이러면 안되는데. 그러나 몸은 리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안즈가 좋아한다고 말을 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으며, 눈에서는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즈는 난처한 얼굴로 울정도로 내 고백이 싫었어? 라고 물었고 리츠는 고개를 저었다. 안즈가 싫은 게 아니야. 좋아서, 좋아서 그런거니까... 눈물에 발음이 뭉개지고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안즈는 리츠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안즈의 따스한 손이 차가운 리츠의 손을 잡았다. 잡은 두 손이 정말 따뜻해서, 웃고있는 그 얼굴이 너무 반짝거려서 이대로는 재가 되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리츠는 차라리 재가 되어도 좋으니 이 모든 게 꿈이 아니길 바랐다. 물론 안즈의 고백은 꿈이 아니었고, 다음 날 자신의 집 앞으로 찾아온 안즈 덕분에 리츠는 집 앞에서 그녀의 품에 안겨 울어버리고 말았다.
리츠는 감정의 변화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잘 울지도 않았다. 선을 그어서 자신이 허락한 사람에게만 친절했고, 그들에게만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우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안즈는 달랐다. 리츠는 부끄럽지만 안즈와 함께 할 때면 자꾸 눈물이 나왔다.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하는 일은 슬픈 일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꾸 눈물이 났다. 행복해서 눈물이 나왔고,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게 기뻐서 눈물이 나왔다.
리츠군, 그렇게 내가 좋아?
울보가 되어버린 리츠 때문에 티슈와 손수건이 필수가 되어버린 안즈가 눈물을 닦아주며 그렇게 묻자 리츠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좋아해. 좋아하는데...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설명을 못하겠어. 이 세상의 그 어떤 걸로도 지금 리츠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리츠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눈앞에 있는 안즈를 끌어안기만 했다. 하지만 리츠의 태양은 대답을 원했는지 말이 없는 그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네. 작게 한숨을 쉰 리츠는 자신과 반대되는 그 푸른 눈을 바라보며 그나마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대답을 생각해냈다.
있잖아, 안즈. 나는 우는 게 싫어. 빌어먹을 형님때문에 많이 울었거든. 그래서 더는 울기 싫었고, 날 울게 하는 모든 것들이 싫었어. 그치만 안즈때문에 우는 건, 싫지가 않아. 안즈가 주는 감정의 모두가 사랑스러워. 이렇게 우는 것도 안즈가 내게 준 것들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리츠가 나른한 목소리로 내뱉은 고백의 말을 들은 안즈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울어서 안즈한테도 전염되어버린 걸까?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리츠는 어느새 울고 있는 안즈를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즈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뒤 리츠가 가장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안즈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대답이었다.
리츠의 태양은 오늘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대로 재가 되어도 좋을 것 같지만, 그래도 리츠는 계속 살아서 안즈와 함께 하고 싶었다.
"안즈."
안즈는 저를 부르는 어린 목소리에 하던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 저택에서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아이는 딱 한 명뿐이고, 역시나 안즈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리츠 도련님. 무릎을 굽히고 리츠와 눈높이를 맞춘 안즈는 웃으며 팔을 벌렸고, 어린 도련님은 기다렸다는 듯 그 품 안으로 달려갔다.
"내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저도 일은 해야죠. 하루종일 도련님 옆에만 있을 수는 없는 걸요."
"안즈는 내 사람인데 왜 내 말은 들어주지 않는 거야?"
짜증나. 리츠는 안즈의 품으로 좀 더 파고들면서 투덜거렸다. 낮잠을 자기 전 리츠는 안즈의 손을 꼬옥 잡으며 자신이 잠들어도 어디 가지말고 옆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명령'을 했고, 안즈는 그러겠다며 리츠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리츠가 잠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안즈는 그 손을 놓아야 했다. 어린 도련님의 명령이 있기는 했지만 하루종일 옆에 있을 수는 없었고, 안즈는 해야할 일이 있었다. 도련님, 미안해요. 천사같은 얼굴로 잠든 리츠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안즈는 그 방을 빠져나왔고, 달콤한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제 명령을 어기고 사라진 건방진 메이드에 뿔이 난 어린 도련님은 다른 메이드와 시종들을 귀찮게 하며 안즈를 찾아 다녔을 것이다.
"그치만 저는 사쿠마 저택의 메이드지, 도련님만의 메이드는 아닌 걸요."
"그런게 어딨어...안즈는 내 사람인 걸."
안즈가 이 저택에 들어와서 처음 했던 일이 이 어린 도련님을 깨우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좋은 냄새가 난다는 리츠의 손에 잡혀 침대 속으로 끌려들어갔고, 깨우지도 못하고 같이 잠들어버렸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어린 도련님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 이후로 리츠는 안즈를 조금 무서울정도로 따라다녔다. 낮잠 시간이 되면 안즈가 무엇을 하고 있든 신경쓰지 않고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방으로 끌고 갔으며, 할 일이 있어서 안된다며 어르고 달래면 '명령'이라는 단어까지 쓰며 억지로 끌고 가 자신의 침대에 안즈를 눕혔다. 안즈는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 그러니깐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작은 손으로 안즈의 얼굴을 붙잡고 그렇게 말한 리츠는 빨간 리본으로 안즈와 자신의 손을 묶은 뒤 안심했다는 얼굴로 잠이 들었다. 물론 안즈는 리츠가 잠이 들지마자 그 리본을 풀고 일을 하러 가버렸지만.
"정말 마음에 안들어. 도련님이라고도 부르지 말랬는데 계속 나를 그렇게 부르고."
"그래서 제가 싫으세요?"
심술궂은 얼굴로 안즈의 목덜미를 왕왕 깨물던 리츠는 그 말에 깨물던 것을 멈추고 안즈를 바라보았다. 예쁜 붉은 눈동자는 짜증을 담고 있었고, 리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뭐라 말을 하려다가 그것을 관두고 고개만 살짝 저을 뿐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안즈를 싫어할리가 없다고 화를 냈지만 이제는 짜증내는 자신을 달래기 위한 수법임을 알아챘기 때문에 리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거기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신경이 쓰였는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모습이 제나이처럼 보여서, 건방지고 강압적인 꼬마 도련님이 그때만큼은 귀여워 보여서 안즈는 리츠가 심술을 부릴 때마다 그렇게 물어보았다.
"...졸려. 재워줘, 안즈."
"벌써요?"
"응. 이번에는 놔두고 가버리면 안돼."
"네, 네. 이번에는 도련님 옆에서 같이 잘게요."
리츠는 그대로 눈을 감았고, 안즈는 벌써 잠들어버린 꼬마도련님의 등을 토닥이며 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잘자요, 내 사랑스러운 꼬마 도련님.
잠든 리츠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지금의 리츠를 버티게 해주는 건 안즈였다. 리츠의 소중한 태양은 죽어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혼자 남은 그가 버틸 수 있도록 힘이 되주었다. 흡혈귀에게 이처럼 강한 햇빛은 분명히 독이었지만 리츠가 안즈를 잃어버리고 혼자가 됐던 그 날 이후로, 태양은 이 흡혈귀에게 더는 독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태양 아래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리츠를 보며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기이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처음 1년은 원망을 했다. 원망의 대상은 자신일 때도 있었고, 안즈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을 원망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리츠는 자신을 원망했다. 인간을 사랑한 건 자신이었고, 사랑했던 만큼의 댓가를 치루고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안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 거라고? 저와 비슷한 무리의 녀석이 그런 말을 했었고, 예전같았으면 손을 올렸겠지만 상대할 가치도 없다 여겨 리츠는 그것이 무어라고 지껄이든지 신경쓰지 않고 무시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거겠지. 리츠는 안즈를 만나고,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것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안즈가 있기에 지금의 사쿠마 리츠가 있을 수 있었다. 현재의 리츠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모두 안즈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웃을 수 있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다. 5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리츠는 안즈의 흔적을 버팀목 삼아서 조금씩 변해갔다. 처음에는 그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해서, 괴롭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피하고 도망가는 건 이제 질색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망가진 채로 지내는 걸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이 안즈이니까, 리츠는 안즈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은 흔적을 보고 우는 건 이제 그만두자. 안즈가 내게 남긴 그것들을, 내 소중한 보물들을 보면서 슬퍼하기 보다는 웃을 수 있게,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노력해보자. 방문을 열고 나왔던 리츠가 제 형을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목소리로 했던 말이었다. 그의 형은 자신의 동생이 다시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죽어서까지 제 동생의 빛이 되어 준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해주고 싶었다.
안즈는 나한테 초콜릿 줄거지.
오늘은 웬일로 치마 안으로 들어오는 짓궂은 장난을 하지 않고 얌전히 무릎 위에 앉아있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했는데, 대뜸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초콜릿이요? 이틀 뒤면 발렌타인 데이잖아?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는 날이라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정말로 이틀 뒤면 발렌타인 데이였다. 이 저택의 주인은 그런 기념일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었고, 어린 도련님도 거기에는 관심이 없어서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발렌타인 데이는 챙길 사람만 챙기는 그런 날이었는데, 어린 도련님, 리츠가 그런 걸 신경쓰고 있는 줄을 몰랐다.
"초콜릿 받고 싶으세요?"
"안즈한테 받고 싶어."
"저한테요?"
"그럼 안즈는 나한테 초콜릿을 주지 않으려고 했어?"
부루퉁한 얼굴로, 고사리같은 손으로 안즈의 볼을 아프게 잡아당기며 투덜거리는 리츠에게 안즈는 미안하다 사과했다. 도련님에게 왜 자신이 초콜릿을 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어린 도련님은 자신의 고용주였고 자기는 이 저택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는 사람이었으니 얌전히 그 부탁을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고, 안즈는 이 저택에서 일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책임지고 보살피고 있는 이 어린 도련님을 제법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감사의 의미로 초콜릿을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주방장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밤에 부엌을 쓸 수 있겠지. 어린 도련님에게는 무슨 초콜릿이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제게 집중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는게 화가 났는지 리츠가 잡고있던 안즈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었다. 날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련님한테 줄 초콜릿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고, 다른 생각같은 걸 한 게 아니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게 어떤 것이든 리츠 자신과 대화할 때 집중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걸 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자신이 잘못한 게 맞았기에 도련님에게 줄 초콜릿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고, 그러니 너무 화내지 말라며 토라진 얼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도련님의 입술에 살짝 키스해주었다.
"안즈가 주는 거라면 다 좋아."
"저 초콜릿은 처음 만들어 봐서 엉망일 수도 있어요."
"괜찮아."
안즈가 주는 거니까, 그 어떤 거라도 상관없어.
무심코 어린 아이 주제에 제법 멋있는 말을 한다고 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제 입을 막은 안즈는 그럼 발렌타인 데이를 기대하겠다며 제 할 말만 하고 잠들어 버린 건방진 어린 도련님을 보며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사실 리츠에게 초콜릿은 핑계였고, 안즈가 그 특별한 날에 제게 무언가를 준다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형님은 발렌타인 데이를 연인의 날이라고 설명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과 장미를 주는 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리츠는 안즈를 떠올렸다. 있지, 형님. 그 날에는 무조건 여자가 남자에게만 줘야 하는 거야? 어린 동생이 자신이 하는 말을 무시하지 않고 다시 질문까지 해왔다는게 기뻤는지 레이는 들뜬 얼굴과 목소리로 그런 건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우리 리츠가 형아에게 줘도 괜찮다는 말이지. 나름 기대를 하며 그렇게 말한 것 같았으나 레이에게는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리츠는 그걸 무시하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뒤에서 우는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그건 별로 리츠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원래는 안즈에게 자신이 발렌타인 데이 선물을 줄 생각이었으나 리츠는 자신이 만드는 스위츠가 어떤 모양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양만 그럴 뿐 맛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특별한 날 안즈에게 그런 걸 선물해줄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이지만 안즈에게 주는 선물이었으므로 그러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자신은 흡혈귀라 계절을 잊고 정원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장미꽃을 만질 수도 없었기에 꽃조차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선물해줄 수가 없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장미꽃과 초콜릿이 아닌 다른 선물도 생각해보았지만 발렌타인 데이 선물에 그 둘을 뺀다면 선물을 하는 의미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리츠는 생각을 바꿔 안즈가 제게 선물을 하게끔 만들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 특별한 날에 안즈와 내가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는 거니까.
'저한테요?'
그리 물어보는 얼굴에는 제게 그런 걸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게 보였으나 그래도 리츠는 괜찮았다. 그게 뭐가 중요해? 앞으로 내게 초콜릿 주는 걸 당연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어린 흡혈귀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았고, 이 소녀가 자신을 다른 시선으로 볼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