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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열 : 그 겨울, 꽃이 피다. 본문

이엑쏘

도열 : 그 겨울, 꽃이 피다.

박로제 2015. 12. 1. 00:22

겨울이 오면 차가운 바람과 메마른 땅을 견디지 못하고 꽃은 져버린다.

그 악조건을 이기고 피어나는 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꽃은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겨울에 꽃이 지고 봄에 다시 꽃이 피는 것은 자연의 섭리였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한 작은 마을이 있다.

작지만 이웃 모두가 서로를 가족처럼 대하며 정답게 살아가는 그곳은 다른 마을처럼 가을을 떠나보내고 겨울을 맞이했다. 눈이 내렸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땅은 메말랐고, 나무는 잎을 떠나보냈으며, 동물들은 모두 겨울잠에 들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겨울이었다.

 

이 마을에는 괴이한 전설이 있었다. 마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에서는 그 전설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마을의 청년과 처녀들이 꽃을 토해내는 원인 모를 희귀한 병에 걸리었는데, 약도 듣지 않았고 의사가 와서 치료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그들은 제각각 다른 꽃을 토해내며 괴로워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을 때, 그해 겨울 마을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땅은 여전히 메말랐고, 차가운 바람이 사람들의 살과 뼈를 시리게 했으며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꽃들은 그런 것 따위 상관없다는 듯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피어 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을에 저주가 내린 것이라며 피어난 꽃을 뽑고, 불에 태워도 보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어제의 노력을 비웃듯 꽃은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다시 피어있었다. 원인 모를 이 사태에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그 원인을 찾았다. 겨울에 꽃이 피는 것, 그것은 모두 꽃을 토해내는 병에 걸린 사람들 때문이었다. 붉은 꽃을 토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꽃을 토해내다가 죽었고, 그가 죽음과 동시에 그 붉은 꽃은 마을에서 볼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마을 사람들은 병과 꽃이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꽃을 토해내는 병에 걸린 사람을 한곳에 모아 가둔 뒤 마을 사람들은 거기에 불을 질렀다. 안에 갇힌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꺼내 달라 외쳤지만 아무도 그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새벽 내내 타오르던 불길이 꺼졌을 때, 마을에 생생하게 피어있던 모든 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제히 시들어 버렸고, 마을은 고요하고 차가운 겨울을 다시 맞이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이것은 마을의 역사를 담은 책에 기록되었고, 비밀스럽게 후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겨울날.

마을에는 꽃이 피었다.

그것은 탐스럽게 핀, 붉은 피안화(彼岸花)였다.

 

 

 

 

 

그 겨울, 꽃이 피다.

경수 x 찬열

 

 

 

 

 

마을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평안했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그 속은 난장판이었다. 오래전 그 사건 이후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어 전설로만 생각했던 그 일이 다시 일어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인은 같을 것이라며 사람들은 꽃을 토하는 사람을 찾아서 마을에서 내쫓던지 그때처럼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병에 걸린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집안의 경조사가 언제인지도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것만은 알 수가 없었다. 이 병은 젊은 사람들만이 걸린다는 게 유일한 정보였으나 그마저도 책에 기록되었기에 그렇다고 믿고 있을 뿐,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마을 어르신들이 청년들을 흉흉한 눈빛으로 원망스럽게 노려보았기에 마을의 얼마 없는 젊은이들은 자신도 전설 속의 사람들처럼 불에 타죽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며 몸을 사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경수 또한 그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수의 아버지가 마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할아버지가 마을의 장로였기에 경수는 그런 비난의 시선을 다른 사람들보다는 덜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마을에 일어나는 저주의 원인이 저가 아님을 알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시선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현상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경수는 이 현상이 징그럽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경수에게 매일매일 새롭게 피어나는 저 생기 있는 아름다운 꽃들은 세상에서 제일 흉측한 존재였다.

 

 

징그럽다, 징그러워.”

 

 

아무것도 없는 메마른 땅에서 부자연스럽게 피어난 그 붉은 피안화는, 저주라는 것도 잊을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나 어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꽃에 내려앉아 있는 모습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겨울에 피는 지지 않는 꽃. 평소의 경수라면 그것은 불길한 것이 아니라 신비한 현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기이하고 신비한 현상을 왜 저주라고 몰아가며 들고 날뛰는 마을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수는 이것을 저주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도경수는 이 저주의 원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꽃이 피던 그 날, 그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경수였다. 시들어버린 작물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피워있는 꽃을 본 경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친구인 찬열에게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그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경수는 그 누구보다 그 전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그 시선들이 제 친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또한 알고 있었다. 아무리 마을 사람들이 착하다고 해도 그들 사이에서도 차별은 존재했고, 부모 없이 자란 찬열에게 의심의 눈길과 비난이 향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경수는 적어도 제 친구가 그 이유라도 알 수 있도록, 사실을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구석진 곳에서 외롭게 서 있는 찬열의 집, 작은 파란 대문을 급하게 열고 들어가자마자 경수가 본 것은 미친 사람처럼 손으로 흙을 파면서 마을에 핀 붉은 꽃과 똑같은 것을 토해내고 있는 찬열이었다.

 

 

박찬열?’

 

, 경수야...’

 

 

제 친구는 놀란 얼굴로 저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해서 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경수는 그 날 알았다. 책에 적힌 것이 모두 진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손톱이 부러져서 피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땅을 파서 꽃을 묻기 위해 애쓰는 찬열을 위해서라도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을.

 

 

 

*****

 

 

 

찬열이 그 병을 앓기 시작한 날부터 그의 집에는 항상 향기로운 꽃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 두 사람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보았지만, 오히려 그 냄새가 더 강해질 뿐,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을을 뒤엎은 피안화 덕분에 사람들이 꽃향기에 익숙해져 찬열의 집에서 나는 그 향기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향기가 심해져서 경수는 찬열을 집안에 가둬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련스럽게도 착한 제 친구는 그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오늘도 그렇다. 제가 오기 전에 또 한바탕 토해 낸 건지 방안은 독한 꽃향기로 가득 차있었고, 찬열은 제가 토해 낸 꽃들을 쓸어 담아 구석으로 치우고 있었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저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찬열은 항상 그 꽃을 숨기려고 했다. 나는 알잖아. 그러니깐 숨기지 말고 같이 치우자, ? 이런 말로 몇 번 타일러 보았지만 찬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으며 매번 저는 보지 못하게 그 꽃을 처리했다. 그것도 매번 직접 손으로 땅을 파서 꽃을 묻었고, 덕분에 찬열의 손에서 상처가 아무는 날이 없었다.

 

 

너 진짜.... 그냥 태우라고 했잖아. 왜 자꾸 그걸 땅에다가 묻어?”

 

혹시라도 연기 때문에 누가 알면....그냥 조심하자는 거야. 알잖아, 내 성격.”

 

퍽이나. 땅 파서 묻는 게 더 부자연스럽다는 거는 아냐?”

 

꽃이잖아. 태우지 말고 땅에 묻는 게 맞다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 그거야 그렇다 치고. 너 정말 오늘도 그 사람이 누군지 말 안 해줄 거야?”

 

 

꽃과 함께 토해낸 위액과 피를 닦을 것을 가져오던 찬열은 경수의 말에 오늘도 입을 다물었다. 찬열이 앓고 있는 병은 구토중추화피성질환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짝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걸리는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몸속에서 꽃을 만들어 냈고, 만들어진 꽃을 토해낸다. 그 꽃은 병에 걸린 사람의 생명을 먹고 자라며, 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은 그 짝사랑이 이루어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병에 걸린 사람의 몸에 꽃이 쌓이게 되고, 심장과 폐, , 모든 장기가 꽃으로 변해서 죽는 무시무시한 병이었다. 처음 이 병에 대해 알았을 때는 병의 증상과 치료법만을 알았기에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찬열이 좋아하는 사람만 알아내면 되겠구나. 그래서 약간 장난스럽게 병에 관해서 이야기했고,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며 놀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찬열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경수에게 제발 묻지 말아 달라고 무릎까지 꿇고 제게 빌었다. 20년을 넘게 함께 해 온 친구가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수는 그 날 처음 알았고, 찬열이 누구를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더는 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때는 이 병이 왜 걸리는지와 증상, 치료법만을 알았기에 괜찮겠구나, 박찬열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자.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뒀지만, 그 병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지금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죽는다. 죽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죽는 것이 백 퍼센트 확실한 병이다. 그런데 박찬열은 그걸 알면서도 묻지 않기를 강요했고, 지금도 또 입을 다물고 제가 토해낸 피만 닦아낼 뿐이다.

 

 

이대로 두면 너 진짜 죽어. 죽는다고! 온몸의 장기가 꽃이 돼서 거기에 파묻혀 죽어버린다고! 거기다가 마을에 피어나는 저 꽃들은 네 생명을 갉아먹고 계속 자라고 있는데 대체 왜 말을 안 하는 건데, !”

 

.”

 

박찬열!”

 

경수야, 미안한데 가주면 안 될까. 나 지금 피곤해.”

 

너 진짜....!”

 

. 아니, 제발 가줘. 너랑 더 이상 할...이야기 같은 거 없으니깐, 제발 가!”

 

오늘은 그냥 가지만 내일은 꼭 대답 들을 거야. 네 생각만 하지 말고 지금 너 때문에 피가 말라가는 네 하나뿐인 친구인 내 생각도 좀 해줘. 부탁한다, 제발.”

 

“........”

 

경수는 벗어두었던 자신의 외투를 챙긴 뒤 방을 나갔고, 찬열은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바닥을 닦고 있었다. 제가 토해낸 피와 위액들은 이미 닦아냈지만, 아직도 더러운 것이 남은 것처럼 찬열은 미친 듯이 바닥을 닦아냈다. 경수의 말이 모두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몸의 상태는 주인인 제가 제일 잘 알았다. 몸속의 장기들은 꽃이 되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고, 꽃을 토해내는 일도 점점 잦아졌다. 밥을 못 먹은 지도 오래됐고, 잠을 제대로 잔지도 오래되었다. 정말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찬열은 경수에게 상대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었다.

 

 

멍청한 게, 알면 어쩔 거야. 누군지 알고 자꾸 이어준데.”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자기가 뭐라도 해줄 수 있지 않으냐고 경수는 찬열을 설득했다. 하지만 그건 도경수가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는 경수가 미웠지만, 그 또한 저를 위해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어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박찬열은 죽을 때까지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자신이 누굴 좋아하는지, 누굴 그리도 좋아하다 못해 이런 저주와도 같은 병에 걸릴 정도로 연모하는지에 대해서 제 친구인 도경수에게 죽어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유는 없다.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깐.

 

 

 

 

 

*****

 

 

 

 

 

찬열의 병이 더 심각해졌다. 이제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였고, 토해내는 꽃의 양은 점점 많아져 땅에 묻을 수도 없었다. 경수는 매일 찬열의 집에 들러 토해낸 꽃을 모아 불에 태웠다.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찬열은 그것을 땅에 묻으라고 잔소리했지만 친구를 죽게 하는 그 꽃을 곱게 묻어 줄 마음 따위 처음부터 없었던 경수는 알았다고 대답한 뒤 항상 그 꽃을 석유통에 집어넣고 불을 붙였다. 징그러운 꽃, 흉측하고 더러운 꽃, 박찬열의 생명을 갉아먹고 더 아름다워지는 저주받은 꽃. 마음 같아서는 마을에 피어난 저 꽃들도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저것마저 태워버리면 죽어가고 있는 제 친구가 정말로 죽어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찬열은 여전히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하지 않고 있다. 경수는 계속 말하지 않으면 마을에 이 사실을 알린다고 마음에도 없는 협박을 해보았지만 죽어가는 제 친구는 또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병을 앓기 시작한 날부터 박찬열은 변했다. 말수가 줄었고, 밥 먹듯이 치는 장난도 더는 치지 않았다. 조용해졌고, 제가 무슨 말을 해도 소리 없이 웃기만 했다. 둘이 함께 있으면 항상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찬열이었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은 경수였다. 하지만 이제 말을 하는 사람은 경수였고, 그것을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은 찬열로 바뀌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변한 제 친구를 바라보며 드는 감정은 질투였다. 물론 이름 모를 박찬열의 짝사랑 상대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처음에는 제 친구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모르며 살아가고 있을 그 상대가 원망스러웠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지만, 지금은 다르다. 찬열이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을 지키는 그 상대가 부러웠다. 하지만 경수는 단순히 이것이 친구를 빼앗겼기 때문에 생기는 질투심이라고 결론 내렸다. 저만 알던 제 친구가, 이젠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데서 오는 그 질투심. 이 감정은 그것이었다.

 

타들어 가는 꽃들과 피가 묻은 천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경수는 남은 불씨를 정리했다. 이제 들어가자.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먹지도 못하겠지만 찬열이 먹을 점심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경수의 눈앞에서 나비가 날아간 것은.

 

 

나비?”

 

 

꽃은 피어도 나비는 날아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불길한 생각에 경수는 황급히 파란 대문을 열고 밖을 나갔다. 몇 달 동안, 마을 사람과 저를 괴롭히며 피워있던 그 붉은 꽃이 언제 피어있었느냐는 듯 시들어 있었고, 불처럼 타오르던 꽃은 말라붙은 피가 되어 땅에 천,,, 떨어졌다. 영원히 피어있을 것만 같던 꽃의 죽음이었다. 텅 빈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경수는 몸을 돌려 느리게 걸으며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박찬열!”

 

 

찬열아, 박찬열. 떨리는 목소리로 경수는 찬열을 불렀지만, 친구는 말이 없었다. 자는 거겠지, 자는 걸 거야. 자느라 못들은 거야. 턱밑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참으며 경수는 찬열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지독한 꽃향기와 한겨울에 볼 수 없는 하얀 나비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지독하게도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찬열의 말을 듣지 않고 꽃을 태워버려서일까? 아니면 찬열이 짝사랑하는 상대를 주제도 모르고 질투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후회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 위에 밀랍인형처럼 누워있는 찬열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직전까지 꽃을 토해냈는지 찬열의 주위는 몇 달 동안 지겹도록 보았던 꽃들로 한 가득이었다. 하지만 화려하고 아름답게 빛나던 붉은 피안화는 마을에 있던 피안화처럼 이미 시들어 있었다. 꽃향기를 맡고 몰려든 나비들도 꽃을 찾을 수 없자 다시 다른 꽃을 찾아 떠나버렸다. 지독하던 향기마저 사라진 방 안에는 찬열이 토해 낸 역한 피비린내만이 가득 맴돌았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끝까지 상대를 알려주지 않은 박찬열? 아니면 박찬열을 이렇게 만든 그 사람?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한 도경수, 저 자신?

 

박찬열이 죽었다.

그리고 마을은 다시 온전한 겨울을 되찾았다.

 

 

 

 

 

*****

 

 

 

 

 

찬열은 고아였다. 당연하게도 장례는 죽기 직전까지 함께 했던 경수의 차지가 되었다. 저주가 끝이 났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마을의 청년 하나가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찬열이 좋아했던 그 사람도 다른 마을 사람과 똑같을 것으로 생각하니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누구인지도 모르니 가서 한 대 때려줄 수도 없었다.

 

집을 정리했다. 찬열은 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건 경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찬열의 의지 이전에 도경수 자신이 박찬열의 흔적을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이 집에만 오면 흰나비와 붉은 피안화에 둘러싸여 있던 박찬열이 생각났고,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생각이었다. 찬열의 물건, 찬열의 집, 그리고 박찬열과 저의 추억까지.

 

서랍을 뒤지니 찬열의 일기장이 나왔다. 이걸 봐도 되는 걸까? 항상 저 몰래 쓰며 보여 달라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해도 보여주지 않던 일기장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넘겼겠지만, 경수는 이 일기장을 읽어보고 싶었다. 찬열이 여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나 하는 기대감 반, 그 좋아한다는 상대방에 대해서 써놓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반이었다. 하지만 봐선 안 될 것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으로 펼쳐 본 일기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숨긴 거야 그 녀석은...”

 

 

하여튼, 박찬열. 헛웃음을 지으며 계속 일기장을 훑어보던 경수는 마지막 페이지에 꽂아져 있던 사진을 발견했다. 처음 성인이 되던 날, 둘이서 어른이 되었으니 마음껏 다 해보자며 마을 슈퍼에서 술이며 담배며 다 사 와서 했던 그 날의 사진이었다. 사진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닌데 손때가 묻고 여기저기 흠이 나 있는 걸로 보아 찬열은 이 사진을 매우 소중히 여긴 듯 했다. 저도 잊고 있던 그 사진을 지금까지 소중히 가지고 있는 제 친구가 사랑스럽기도 했고,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저와 찬열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옛 추억도 생각이 나 한참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사진의 뒤에 적혀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xxxxx일 내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과 함께.

 

 

그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경수는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목이 막히는 감각에 참지 못 하고 기침을 해 속에 있는 것을 토해냈다. 익숙한 향기와, 익숙한 형태의 덩어리가 자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붉은 피안화였다.

 

 

 

그때야 경수는 인정했다,

제가 박찬열을 사랑했음을.

그리고 경수는 원망했다,

그것을 끝까지 깨닫지 못한 자신을.

 

 

겨울에 핀 꽃을 위한 봄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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