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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 또라이 매트리 본문

이엑쏘

오백 : 또라이 매트리

박로제 2015. 12. 1. 00:50

저기요.



조상님이 덕을 되게 많이 쌓으셨네요.



저같은 남자가 작업도 걸어주고.






오후 수업이 휴강되서 갑자기 여유가 생긴 백현은 마침 자주가던 고서점의 주인아저씨에게 새로운 책이 들어왔다고 연락을 받았다. 몰아치는 과제와 시험 덕분에 그동안 못했던 취미 생활을 즐길 때라고 생각하며 백현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를 벗어나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교통카드를 꺼내 찍으려 할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제 팔을 잡았다. 어어? 백현이 상황파악도 하기 전에 잡혀서 끌려갔고, 개찰구와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는 거지? 마침내 상황을 깨닫고 끌려가지 않게 발에 힘을 주자 백현을 끌고가던 사람도 멈춰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린 그 사람 덕분에 백현은 이 사람이 남자고, 저와 키가 똑같고, 눈이 굉장히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흰자도 많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백현이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 저기.....누구세요? "


" 저기요. "


" 네, 네에? "


" 조상님이 덕을 많이 쌓으셨네요. "


" 아 그래요? 감사합..아니 뭐라구요? "


" 조상님 굉장히 덕을 많이 쌓으셨어요. 그러니깐 나같은 남자가 작업도 걸어주죠. "



후다닥 몰아치는 남자때문에 백현은 정신이 없었다. 조상 덕을 많이 쌓았다는 부분에서 아 이 사람이 그 말로만 듣던 싸이비구나...했는데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전혀 종교와는 관련이 없는 말이었다. 백현은 대체 이 남자가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저를 골라서 이렇게 몰아세우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만만해보이나? 아닌데 세훈이가 나 입다물고 다니면 무섭다고 했는데? 오늘의 패션과 얼굴 상태를 체크하며 자신이 그렇게 만만한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백현에게 같은 남자가 남자인 자신에게 작업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는지 전혀 다른 부분을 신경쓰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백현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듯 했다.



" 나 잘생겼죠? "


" 아? 아, 네에...잘생기셨네요. "


" 이런 남자가 작업 걸어주니깐 사귀고 싶지 않아요? "


" 에에? "


" 빨리 나랑 연애하고 진도 나가고 싶죠? "


" 저기...저기요? "


" 그럼 제사를 지내요. "



제사요? 그래요 제사. 제사만 지내면 나랑 연애하면서 스킨쉽을 손잡기가 아닌 키스부터 시작해서 섹스까지 초고속으로 나갈 수 있다니까요? 제사 지낼거죠? 지금 당장 갑시다.  어어...저기요?


남자는 당사자의 의사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는지 얼이 빠져있는 백현의 손을 잡고 재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키도 쪼끄맣고 덩치도 작은데 힘은 대체 왜 이렇게 쎈지 잡힌 손목을 빼낼려고 해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백현은 정체불명의 차에 태워졌고, 도망가기도 전에 차는 출발해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따질까 하다가 이미 차에 태워진 이상 돌이킬 수도 없으니 백현은 그냥 포기해버렸다.


제사만 지내면 보내주겠지...



장기매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따위 백현에게는 없었다.






*****





도착한 이상한 장소에는 수술 침대도, 의료기구도 없었고 수상해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웃는 얼굴로 백현을 맞이했고,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수가 뭔지도 물어봤다. 백현은 자연스럽게 코코팜과 바나나킥을 이야기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갖다줌과 동시에 종이에 신상정보를 쓸 것을 권유했다. 제사지내는데 왜 이게 필요하지? 궁금했지만 얼마 전 농협대란 때 신상이 이미 팔린데다가 주민번호 쓰는 칸은 없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신상을 적어주었다. 종이를 받은 사람들은 이제 제사를 지낼 차례라며 백현의 손을 잡고 또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오늘따라 여러 사람에게 잡혀 고생하는 백현의 손목이다.



" 제사 시작 전에 경수 씨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니깐 잘 들으세요. "


" 경수 씨요? "


" 여기까지 같이 오신 분 이름이에요. 그럼 잘 들으세요. "



여기까지 끌고 온 여자가 방을 나가고 곧 방문도 닫겼다. 들어온 방은 향 냄새가 가득 차있어서 환기를 시키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백현은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서 눈 앞의 제사상만 쳐다보고 있을 때, 드디어 그 경수 씨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마이크까지 챙겨들고 목윽 푸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무슨 연설이라도 하는건지, 슬슬 지겨워져 졸린 참이었는데 연설 듣다가 자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만 하면서 하품을 참고 있을 때, 잠을 확 깨워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러분은 정말 운이 좋으신 겁니다. 이게 다 조상님 덕분이에요. 조상님이 과거에 쌓으신 덕이 많아 지금 이 곳에 앉아 있으신 겁니다. "



그래 이건 아까 들었던 헛소리고.



" 그 분들 덕분에 지금 여러분은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던 수많은 진실을 알게 되실겁니다. 그 진실 중 첫번째는 바로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에 대해서 입니다. "



여기서부터 백현은 불안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우리 한민족은 사실 지구상 모든 문화의 뿌리입니다! "



불안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 백현은 이제 경수 씨가 딱 세 번 말을 했지만 듣지 않아도 그 뒤의 말을 알 것 같았다. 맨 앞에 서서 연설을 하고 있는 저 눈 큰 경수 씨는 노답 중의 노답인 환단고기빠였고 이 사이비 종교는 환빠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백현은 환빠를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백현은 사학과 학생이었다. 역사를 배우는 백현에게 있어서 지금 저 앞에서 말도 안되는 역사를 연설하고 있는 환빠는 당장 처리해야할 쓰레기와 똑같았다. 왠만히면 나서지 않고 조용히 묻어가자는 것이 백현의 신조였지만 이건 참고 들어줄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백현은 신나서 입을 털고 있는 경수 씨에게 딴지를 걸고 말았다.



" 그거 아닌데요오... "



백현의 조금 큰 목소리가 건 딴지는 순식간에 방안을 조용하게 만들었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경수 씨는 부담스럽게 큰 눈을 부릅뜨고 백현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니가 지금 내 연설 중에 딴지를 걸어? 안그래도 흰자가 많아 무서운 눈이 째려보기까지 하니 더욱 공포스러웠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환빠는 사회악이기 때문이다.



" 지금 얘기하신 것들 다 틀렸다구요. 수메르인과 한반도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고 지구 상 모든 문화의 뿌리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다 거짓말이에요. 저 사람이 이야기하는거 전부 다 말도 안되는 거니깐 믿지마요! "


" 우리가 뭘 믿고 학생 말을 믿어! 무작정 거짓말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냐 말이야. "



어...제가 역사를 배우는데 좀 믿어주시면 안될까요...



백현은 사물함에 가는 것이 귀찮아 전공책을 챙겨 온 과거의 자신에게 칭찬을 하고 싶어졌다. 운좋게도 가져 온 책은 환빠를 까는 책이었다. 책을 펼쳐서 경수 씨가 말한 부분에 대한 반박 글을 읽어주자 아까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사람은 어디갔는지 경수 씨는 백현의 말에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을 지켜 본 사람들은 언제 그 사탕발림에 넘어갔냐는 듯 백현의 편을 들어주었고, 이런 싸이비를 자기가 왜 따라왔을까 하며 우르르 방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경수 씨는 방을 나가는 예비 신자들을 붙잡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대학 때 사학과를 복수전공하지 않았음을 한탄했다. 경수 씨의 대학 전공은 철학이었다.


백현은 저 경수 씨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도망가야한다고 제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나갔고, 저 얼굴에 빠져 잡혀 온 여자들이 자리를 지켜주니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도 되겠다 생각한 백현이 전공책을 챙겨나가려고 할 때, 경수 씨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 어디가세요. 아직 제 이야기 안끝났습니다. "



시발.



나가려는 백현을 발견한 경수 씨는 대놓고 어디가냐며 저격을 했고, 백현은 들고있던 가방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밑천 다 보여준 것 같은데 나 보내주면 안되나요...물론 이 말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경수 씨의 눈빛이 무서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 어차피 앞에서 말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은거니 그냥 넘기도록 하죠. "



당신이 중요하다면서요...



"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우리의 신에 대한 이야기에요. "



산 넘어 산이라고 생각했다. 백현은 차라리 돈을 내고 싶었다. 제사비용으로 얼마든 줄테니 제발 저 경수 씨의 입 좀 막아주세요...



" 여러분, 신은 존재합니다. 도킨스나 많은 무신론자가 신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유신론자를 멍청하다 욕하지만 정말로 멍청한건 그들입니다. "



멍청한건 경수 씨라고 백현은 생각했다.



" 신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저기 병풍에도, 제사상 위의 사과에도, 저 학생의 전공책에도. "



경수 씨는 백현의 전공책을 가리켰다. 아까 되도않는 환빠 논리를 까는데 도움을 주었던 제 소중한 전공책을 경수 씨가 태울듯이 째려보자 백현은 황급히 책을 품에 안았다.



" 모든 것에 신이 존재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더 큰 존재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을 이루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거대하고 초월한 존재인 신의 일부입니다. "


" 그리고 그 신이 바로 우리가 모시게 될 신입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자신이 신의 일부라는 것을 모르고 멍청하게 살아가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조상님이,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까지 쌓아온 덕이 있어서 이곳에 오게 되었고, 우리가 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조상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특별한 사제가 되어서 신을 모셔야 하는 겁니다. "


" 오늘의 제사는 그 신을 모시기 위한 시발점입니다. 여러분들은 선택받으신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자, 모두 일어나세요. 이제 신을 모실 시간입니다. "



잘생긴 외모와 듣기 좋은 목소리에 홀린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에 대한 자각도 없었고, '신을 이루는 일부',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에 넘어가버렸다. 실제로 그다지 나쁜 말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돈을 내라는 말도 없었고, 거기다가 경수 씨의 말은 만유 내재신론이라는 이론과도 비슷했기 때문에 아까 전에 내뱉었던 역사이야기 때와 달리 백현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사이비같지만 나름 말이 되는 종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끌고오는 방식이나 다른 사소한 이유를 빼면 나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백현은 방금 전에 있었던 역사이야기 때보다 더 속이 비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건 백현이 무신론자였기 때문이었다. 백현은 철학을 복수전공했고, 순자를 좋아했으며, 노엄 촘스키를 좋아했고, 좀 중2병 같지만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니체를 사랑했다. 경수 씨가 멍청하다고 욕한 도킨스도 너무 과격하고 제 생각과 안맞는 부분이 있었지만 일단은 좋아했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백현은 정말 지독한 무신론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차례대로 서서 안내에 따라 절을 했고, 왜 하는지 전혀 이해가 안가는 향을 피웠으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불태웠다. 자신도 저걸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더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던 백현은 다들 저 미친짓에 집중하고 있을 때 몰래 빠져나가야겠다 싶어서 눈치만 보고있었다.



" 백현 씨? 거기서 뭐하세요. "



저 눈만 큰 경수 씨가 자신을 부르지만 않았어도, 백현은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 저기....저...그러니깐 경수 씨? "


" 네. 말씀하세요. "


" 어, 그게 말이죠...전 제사를 지낼 수가 없어서 그런데...그러니깐...음, 가면 안...될까요...? "


" 백현 씨 아까 쓰신 거 보니깐 종교도 따로 없으신 것 같던데, 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겁니까? "


" 그...따로 믿는 종교가 없어서...그런데... "


" 네? "


" 그게 제가... "



신을 안믿어요...



백현이 어렵사리 꺼낸 말을 들은 경수 씨는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건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신을 안믿어? 왜? 종교와 관련된 여러가지 이론들과 사상들을 공부하고 그것을 이용해 새로운 종교가 태어나는데 도움을 준 경수 씨는 무신론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끌고 온 사람 중에 운좋게도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있어도 신을 믿지않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고, 과학주의자이자 종교는 믿지 않는다는 제 친구마저 이 종교를 믿게 만들었던 전적이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백현 또한 모태신앙인 친구를 제 말빨로 도킨스 뺨치는 과격무신론자로 만든 전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둘다 제대로 임자만났다는 이야기였다.



" 어째서 신을 안믿는 건가요? "


" 제가 묻고싶은데요...어째서 신이 있다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건가요? "


" 그건 제가 묻고 싶은데요, 백현 씨는 신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죠? "


"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는 자연주의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니까요. 두뇌활동과 의식까지, 우리가 우주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어요. "


" ...너무 과학적인 검증방법을 맹신하는거 아닌가요? "


" 아뇨. 이건 엄연한 철학이에요. 단지 신이 했다고 믿는 그런 현상들은 자연 속에서 일어난 것이니 자연적인 설명을 추구하는 것뿐이죠. 단순한 자연현상을 설명하는데 왜 굳이 신을 끼워넣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



백현의 말이 끝나자 경수 씨는 입을 다물었다. 경수 씨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백현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게 또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면 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신에 대해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자신이 반박하기도 힘들다는 것 또한 알고있었다.



" ...좋아요. 백현 씨가 무신론자인건 잘 알겠어요. 그런데 무신론도 종교가 아닌가요? 신이 없다는 믿음. 부정에 대한 믿음이 아닌가요? "


" 그건 아니죠!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믿는게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 뿐이에요! "



물론 백현은 의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지고보면 무신론자보다는 반신론자에 가까웠지만 지금 저 싸이비를 상대하기에는 뭐든 상관이 없었다. 백현의 반박을 들은 경수 씨는 그 상태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사색에 빠졌다. 반박의 말을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제 말을 정리해보는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저 시끄러운 싸이비의 입을 다물게 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 미영 씨. "


" 네, 부르셨어요? "


" 다른 신자분들 데리고 나가세요. 아무래도 백현 씨랑 둘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아서. "


" 아, 네. 알겠습니다. "



경수 씨의 지시를 받은 여자는 남은 신자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방에 둘만 남게되자 백현은 그제서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경수 씨의 덩치만 생각하면 자기가 이긴 싸움이겠지만 제 손목을 끌고가던 그 무시무시한 힘을 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방안에는 정체불명의 작두와 연장들이 보여서 백현을 더 공포스럽게 했다.



" 백현 씨. "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경수 씨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 키워를 뜰때보다 조금 다정해진 목소리였지만 백현에게는 그 다정한 목소리마저 무섭게 들려올 지경이었다. 이제 날 죽인다고 할거야....나에게 건방지다며...



" 저와 결혼해주세요. "



결혼해달라고 할......뭐요?



" 결혼해주세요. 백현 씨. "



잘못 들은 게 틀림 없었다. 결혼이라니? 백현은 경악한 얼굴로 경수 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백현의 섬섬옥수를 힘주어 꽉 쥐며 다시 말도 안되는 프로포즈를 했다.



" 당신같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종교의 미래는 밝을거에요. 저와 결혼해서 우리 종교를 대한민국의 국교로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백현 씨만 있다면 통일교도 무섭지않을 것 같은데... "


" 아니, 그런데 굳이 결혼할 필요가 있어요? 그냥 이 종교에 가입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


" 가입해줄거에요, 백현 씨? "


" 아니요! 싫어요! "


" 그러니깐 우린 결혼을 해야해요. 사실 전 지적이고 똑똑한데 귀여운 남자가 이상형이었어요. 백현 씨를 만난건 정말 운명이에요. "


" 아니 전 싫다구요! 싫어요, 이 종교도 싫고 그쪽도 싫고 여기도 싫다니까요?! "


" 그래요, 종교도 싫고 이 신성한 방이 싫을 수도 있어요. 그치만 백현 씨 내가 싫다니요.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해야해요? "


난 잘생겼는데??!



진지하게 나르시스적인 발언을 내뱉은 경수 씨를 백현은 희귀생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쳐다봤다. 이 사람 지금 진심인가? 물론 경수 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존나 잘생겼었다. 이건 백현이 증명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백현은 심각한 얼빠이기 때문이었다. 진한 이목구비와 큰 눈, 짙은 눈썹과 눈썹뼈, 그리고 웃을 때 하트가 되는 입술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얼굴이었지만 백현은 그 말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물론 이유는 잘생긴 얼굴마저 까먹게 하는 종교에 대한 경수 씨의 집념이었다. 얼굴이 아무리 잘생기면 뭐하나, 결국 관계를 이어가는건 성격과 가치관과 얼마나 궁합이 잘맞는지였다. 그래서 백현은 경수 씨와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를 할 마음도 없었다.



" 백현 씨 생각을 해보세요. 이 잘생긴 얼굴을 경쟁도 없이 백현 씨가 가지는 거라구요. 평화적으로 이 잘생긴 나를 옆에 끼고 연애부터 시작해서 결혼까지 갈 수 있고 스킨십 시작도 섹스부터 가능하다구요. 그런 나를 거부할리가 없잖아요? "


" 그리고 종교 문제는 저와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고 우리 교리를 배우고 나면 자연스럽게 바뀔 거에요. 백현 씨는 똑똑하니깐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에요. "



그러니깐 나랑 결혼해요, 백현 씨.



진지하게 제 손을 잡고 말하는 경수 씨는 참 잘생겼다. 저런 말을 해도 이해갈 정도로. 사실 처음에는 좀 홀릴 뻔 했었다. 목소리도 좋고 그 잘생긴 얼굴이 웃으면서 그러는데 안넘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건 방금 전까지 이 방에 남아있던 사람의 대부분이 여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백현은 마지막에 덧붙인 말이 거슬렸다.



" 경수 씨. "


" 저는 신 안믿어요. 믿을 일도 없어요. "


" 그리고 이런 정체불명의 제사도 싫어요. "


" 그러니깐 나는 당신이 싫어요. "


그리고 신은 죽었다구요. 오케이?



3연타로 몰아치는 싫어요 폭탄에 멍해진 경수 씨를 냅두고 백현은 잡힌 제 손을 빼낸 뒤 전공 책을 소중히 끌어안고 방을 나섰다. 어지간히도 충격받은건지 경수 씨는 백현이 나가는데 쫓아오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해방이라고 생각한 백현은 급하게 제 신발을 챙겨 그곳을 빠져나갔다. 이젠 길가다가 누가 잡으면 절대 따라가지 말고 도망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여기서 백현이 착각한게 있다. 경수 씨는 생각보다 집착이 심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얼굴이 제 스타일이라 끌고 온 백현이었고, 똑똑해서 더 마음에 든다는 말도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이 마음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는게 첫 번째고, 이 사이비같은 종교를 자기자신처럼 사랑하며, 종교만큼 좋아하는 백현이 신을 믿게 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거라는게 두 번째며, 마지막으로 가장 큰 착각은 바로 경수 씨에게서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것이다.



백현은 설교를 듣기 전에 자신의 주민번호를 제외한 모든 신상을 적어주었다. 즉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포함한 백현의 신상은 경수 씨가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


백현은 이제 나르시스 싸이비 스토커에게 쫓기는 상황이 됐다!






*****






" 들어봐. 앤터니 플루 알지? 그 사람도 엄청는 무신론자였다고. 신이 모호한 개념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던 사람도 자연의 법칙은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완벽하다고 유신론자로 바뀐 사람이라니까? "


" 그래서? 그건 그 사람이지 나는 신을 믿을 생각이 없다니까? "


" 백현아...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히친스를 말로 이긴 사람이 누군지 알아? "


" 유신론자인 윌리엄 크레이그인건 나도 알거든?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


" 어? 아니, 저기....그러니깐... "


" 경수야, 내가 저번에 줬던 책은 안읽었나봐. 내가 그 책 읽고와서 나한테 말걸라고 했지? "


" ... "


" 그리고 앤터니 플루가 무신론자가 된 다음 쓴 책은 봤어? 전성기 시절에 쓴 것보다 형편없었고 거기다가 틈새의 신이라는 논리를 기초로 한 말도 안되는 이론이었다고. 그건 아무런 설득력이 없어 경수야. "


" 백현아아.... "


" 이제 가. 나 수업 들으러 가야되니까. "



오늘도 졌다. 어디가서 말빨로 져본 적이 없는데 경수는 백현의 앞에만 서면 생각해놓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말까지 더듬고 만다. 친구를 전도할 때는 그 어떤 말도 다 받아치며 결국에는 그 싸움에서 이겼는데 백현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50년 넘게 무신론을 주장했던 사람을 바꾸게 만든 톰 라이트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발끝에는 미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경수는 이제 자신감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얼굴을 무기로 나르시스적인 발언을 하며 쫓아다녔지만 이렇게 까이는 일이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그리고 석 달이 넘어가자 더이상 그런 말들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감 넘치고 자기자신을 사랑하던 경수 씨는 죽고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백현이 동갑인 걸 알자마자 말을 놓으라고 허락한 것 뿐이다.


다른 신자들은 전부 경수를 말렸다. 저런 사람은 답도 없다고. 뭘 어떻게 이야기해도 자기 신념이 확고한 사람은 절대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다고. 그러니 이제 더이상 계란으로 바위치지말고 포기하고 전도에 힘을 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 경수는 백현을 너무 사랑했다. 자기 생각이 확고하고 자기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는 백현이 좋았고, 좋아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백현이 멋있었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석 달 동안 쫓아다니면서 조금 친해져서 제 이름을 불러주며 가끔씩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하는 백현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경수는 이젠 사실 백현이 제 종교를 믿지 않아도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꾸 쫓아다니면서 유신론을 믿으라고 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면 백현과 무슨 대화를 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인생을 종교와 학문에 투자한 경수에게는 그게 너무 어려웠다.



" 백현아아아... "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는 백현이 매정하면서도 수업이니 잡을 수가 없어 슬픈 경수는 백현의 이름만 애처롭게 부를 뿐이었다. 그런데, 사실 경수도 백현만큼 착각대마왕이다.



" ...도경수우! "


" 어, 어? "


" 근처 카페에 있어! 수업 끝나고 같이 밥먹자! "



그건 백현도 사실은 경수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같이 밥먹자는 말을 하고 저도 부끄러운지 백현은 잽싸게 강의실로 들어갔고, 경수는 또 멍하니 서있다가 하트 웃음을 지으며 백현이랑 같이 뭘 먹을지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밥먹으러 가도 하는 대화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지만 어쨌든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경수였다.


그리고 백현은 정말로 경수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거머리 스토커라며 질색을 하고 떼어놓지 못해 안달을 냈지만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그리고 석 달이 지나니 백현은 경수에게 호감이 생겼다. 맨날 반박도 못하고 시무룩해져서 돌아가는 것도, 그러면서도 제가 이름을 부르거나 밥이라도 먹자고 하면 바로 웃으면서 달려오는 경수가 정말로 싫지않았다. 그리고 사실 종교 이야기도 싫지는 않았다. 그만큼 열심히 믿어왔던거고, 그동안 배운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이 그 종교이니깐. 물론 같이 믿는건 사양이지만, 남자친구가 종교인인건 괜찮은 것 같았다. 밥먹을 때도 계속 이야기해서 귀찮긴 했지만 제가 못먹는건 피해서 주문하거나 사소한건 챙겨주는 배려심, 결정적으로 자기가 먹는 것만 봐도 좋은지 하트웃음을 짓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근데 그러면서도 츤츤거리는 이유는 뭐냐고? 그건 시무룩한 경수가 귀엽기때문이었다.


사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자기도 부끄러워서 그런거다. 백현이나 경수나 둘다 그냥 부끄럼쟁일 뿐이다.






***






오늘도 차였다. 이젠 결혼 얘기도 하지 않는 경수는 연애부터 하자고 고백했다. 백현은 오늘도 종교인이랑은 연애도 안할 거라고 거절했다. 며칠 전에 밥도 같이 먹고 집에도 데려다줘서 오늘은 될 줄 알았던 경수는 상심이 컸다. 물론 내일도 다시 고백할거지만 슬픈 건 슬픈거고, 눈물나는 건 눈물나는거였다. 그리고 백현은 또 좋으면서 튕겼다. 사실 경수도 이제 종교이야기 안한다면서 또 고백할 때 그 이야기를 했으니 쌤쌤이기는 했다.


풀이 죽은 경수는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만 휘적거렸다. 얼음이 모두 녹은 아메리카노는 빨대가 휘젓는 대로 흔들렸다. 백현은 경수가 시무룩한 강아지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백현은 종강을 했고, 이번 학기 기말고사는 시험도 잘쳤다. 날씨는 좋았고 경수와 함께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그리고 눈 앞의 도경수는 정말로 귀여웠다.


그래서 백현은 생각했다. 아, 이제는 그만해야겠다고.



" 경수야. "


" 으응...? "


" 있잖아... "



백현은 헤실헤실 웃고있었지만 경수는 긴장했다.



" 제사만 안지내면 데이트 해줄게. "


" 어어? "


" 제사만 안지내면 데이트 해줄게. "



나랑 데이트할거지, 경수야.



경수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다시 생각했다. 멀쩡한 귀도 후벼파보고 백현에게 다시 물어보기도 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제사 안지내면 데이트 할 수 있다구 우리. 그제서야 이해한 경수는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며 알았다고 했다. 사실 백현을 쫓아다니느라 제사에 참여안한지도 오래 됐고 이제는 그런 것도 귀찮았던 경수였다. 겨우 그런 걸로 데이트를 할 수 있다니, 경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 우리 종교고 신이고 그런 이야기하지말구, "


" 데이트 하자. "



경수는 다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사를 지내던 말던 신경은 안쓰지만 왠지 그런 이유없이 그냥 데이트하자고 하는 건 너무 부끄러웠다. 그리고 장난치듯이 얘기했지만 백현은 지금 너무 쑥쓰러웠다. 땅굴파고 안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 근데 백현아. "


" 응? "


" 우리 데이트 할 때...그, 있잖아. "


" 응, 데, 이트 할 때? "


" 손도...잡으면...안될까...? "



아 도경수 진짜 귀여워.



백현은 결국 제 본심을 입밖에 내고 말았다.






*****






근데 백현아, 우리 데이트 어디가서 해?


으음...덕수궁!


거기는 왜?


거기 돌담길을 연인이 손잡고 걸으면 빨리 깨진다고 했어.


백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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