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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엑쏘

세백 : 해피투게더

박로제 2016. 7. 20. 00:29

 싱싱한 채소가 먹고 싶었다.

 

 그것은 백현이 최근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절대 이루지 못할 꿈이기도 했다. 싱싱하고 맛이 좋을 것 같은 채소들은 비쌌고, 변백현은 그것을 살 돈이 없었다. 당장 하루에 세 끼라도 규칙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그런 것들은 사치였다. 참다못해 밖에 나가서 사 먹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이 빌어먹을 홍콩의 음식들은 모두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것들뿐이었고, 생으로 야채를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유학생활만 벌써 4년 차였고, 이제는 이국의 음식이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입맛에 맞았지만 가끔은 그런 기름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채소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차찬텡을 가도 가열하지 않은 채소를 먹는 것은 어려웠고, 이런 날이 지속되자 백현은 채소에 굶주린 지금이라면 냄새 때문에 혐오수준으로 싫어했던 오이도 통째로 씹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짜 어지간히도 굶주렸구나, 생각하며 백현은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실 담배만 끊으면 양상추정도는 살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졸업을 앞두고 있는 유학생에게 담배란 식사보다 중요한 기호식품이었다. 당장 눈 앞에 쌓여있는 과제들과 졸업논문을 생각하면 담배와 커피를 줄이는 것은 미친 짓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방금 떨어졌으며, 오늘 과제를 끝내야 하는 백현은 지금 당장 그것들을 사러가야 했다.

 

  또 시작인가.”

 

 지폐 몇 장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가디건을 걸치고 집을 나오자 기다렸다는듯 옆집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이 몇 시인지 생각하면 이 비명소리는 분명히 이웃에게 민폐이며, 심지어 여기는 방음도 되지 않아 사람이 생활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낡고 허름한 아파트다. 그리고 옆집은 꽤나 자주 밤마다 비명을 지르며 다른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집으로 찾아가 닥치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시간에 관계없이 이런 비명소리가 이 아파트, 이 동네에서는 익숙한 것을 넘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살인과 매춘, 도박으로 인해 사채를 쓰고 사지가 절단되거나 마약쟁이들이 가득 차 있는 홍콩 최대의 마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비일상이 아니라 일상이었으며, 치외법권이 적용되어 홍콩 정부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법지대였다. 처음에는 옆집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행방불명되거나 사채를 갚지 못해, 혹은 마약에 중독되어 고문당하거나 납치되어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본 백현은 몇 번이고 이 동네를 벗어나야겠다 다짐하며 변기를 붙잡고 토악질을 했다. 하지만 한 달, 석 달, 반년, 그리고 지금에 이르자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도 여기만큼 집세가 싼 곳은 없었고, 백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었다. 자신이 살던 곳을 지옥보다 끔찍하다 평하던 스무살의 변백현은 이제 행방불명된 이웃의 집에 쳐들어가 식기나 이불, 담배 같은 것들을 가져 오는 게 익숙해졌으며 옆집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도 하루의 일과쯤으로 넘길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작년까지의 일이다. 졸업을 앞두고 논문을 써야 하는 학생인 백현에게 옆집의 비명소리는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그 비명소리도 어찌나 우렁찬지, 귀마개나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옆집에서 어떤 사람이 마약을 했고 사채를 쓰고 갚지 않았는지 관심은 없었다. 어떤 식으로 고문을 당하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들어도 무시하는 것이 이곳을 사는 주민들이 정한 암묵적인 룰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졸업을 해야 하는 대학원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논문이었다. 지금 당장 옆집으로 쳐들어가서 조용히 좀 하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러다가 조폭 같은(물론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못생겼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옆집 남자에게 고문당하거나 맞을지도 모르니 낮에 조용히 따져 볼 생각이었다.

 

 장학금 받았을 때 진작에 나갔어야 했는데 이딴 동네.”

 

 물론 그때는 이 동네를 벗어나는 것보다 고기 먹는 게 더 중요했지만. 가까운 슈퍼에서 담배 한 보루를 계산하고 나온 백현은 담배와 같이 계산한 롤리팝 사탕의 껍질을 까서 입안에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저 오늘은 저 고문쇼가 일찍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비닐 봉투를 요란하게 흔들며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던 백현은 자신의 옆집 베란다에 사람이 한 명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백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동네에서는 보기 드물게 층이 낮은 아파트였는데, 살고 있는 집도 2층 정도의 높이라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까만 셔츠에 까만 바지, 위에 걸친 자켓 또한 까만색이었다. 남자는 베란다에 팔을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상황을 보니 대충 끝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 남자가 문제의 옆집남자로군. 저 남자가 옆집으로 이사 온지는 두 달이 지났고, 두 달 동안 꾸준하게 비명소리로 사람을 괴롭혀온 것이 생각나자 백현은 자신도 모르게 태평하게 담배나 피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당신 때문에 세 시간이면 끝날 과제를 반나절이나 붙잡고 있고, 잠도 못 자고! 괜히 억울하여 남자를 계속 노려보고 있었더니 그 뜨거운 시선을 느낀 건지 남자가 고개를 돌려 백현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거리가 제법 가까워서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볼 수가 있었는데, 남자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치고 굉장히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얼굴에 치켜뜬 삼백안은 한겨울 추위만큼이나 서늘한 모습이라 겁이 없다고 자부하는 백현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그 서늘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치며 백현은 지금을 기회삼아 두 달 동안 참고 있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저기요.”

  …….”

  다 좋은데, 사람 입 좀 막고 하면 안 돼요? 좀 시끄럽거든요.”

 

 당신도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하게 처리하는데 낫지 않아요? 남자의 입장에서는 처음보는, 그것도 진짜 이웃집에 사는 사람인지 확인할 수도 없는 사람의 불평과 불만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남자는 백현이 그 뒤로 몇 마디 덧붙이는 것도 얌전히 들어주었다. 그런 반응이 알겠다는 건지, 아니면 들은 척도 안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백현은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고, 한숨을 쉬며 그냥 들어가야겠다며 고개를 돌렸다.

 

 주의하죠.”

 

 물론 남자의 대답이 들리자 바로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거절이나 욕이 아닌 '주의하죠'라는 말을 한 남자는 피우던 담배를 들고 있던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백현을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은 백현은 벙 찐 얼굴로 남자가 있었던 옆집 베란다를 쳐다보았다.

 

 , ?”

 

 여름밤에 있었던 그 짧은 대화 이후에도 옆집 남자의 집에서 끊임없이 고문이 이어졌지만 예전처럼 우렁찬 비명소리가 들리는 일은 없었고, 입을 막고 말할 때 특유의 뭉개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그런 작은 소음에는 익숙해져 백현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생긴 거는 무섭게 생겼지만 성격은 생각보다 착하네. 이런 사람이라면 지나가다가 인사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백현은 생각했다.

 

 

 

 

 옆집 남자와는 그 뒤로 생각보다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얼굴은 자주 마주쳤는데 서로가 이웃인지 몰랐기 때문에 무시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중요한 건 변백현은 그 뒤로 옆집 남자를 자주 볼 수 있었고, 그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눈 다음 날 남자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가벼운 목례정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백현이 학교일정을 모두 마치고 지친 상태로 집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이제 일을 가는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검은색으로 몸을 휘감은 뒤 집에서 나왔고, 복도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를 한 뒤 다시 자기 갈 갈을 갔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을 하기가 어색했다. 남자의 외모로 보아서 분명히 한국인일텐도 그랬다. 처음에는 남자의 직업 때문인가 싶었지만 백현이 이 아파트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며 가끔 같이 밥도 먹는 류 웨이라는 남자는 삼합회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그다음은 차갑게 생긴 남자의 외모 때문인가 싶었는데 류 웨이는 키가 2m가 넘었고 덩치도 큰 남자였다. 어딜 봐도 옆집 남자가 더 안전해보였지만 백현은 옆집 남자가 어려웠다.

 

 언제쯤 친해질 수 있을까, 아니 친해지는 건 무리일 테니 그냥 짧은 대화라도 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출근하시나봐요, 수고하세요 같은. 처음에는 인사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대화도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남자가 어려운 것과 그런 욕망은 별개의 것이었지만 옆집 남자는 친화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백현에게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고 이런 심각한 고민을 신이라 듣기라도 한 것인지, 백현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늦은 밤 쓰던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 담배나 피우자 싶어서 베란다로 나가 마지막 학기의 대학원생에게 산더미 같은 과제를 내주는 교수, 평소에는 말도 걸지 않으면서 시험 기간에만 달라붙는 동기, 그리고 풀리지 않는 졸업논문을 씹고 뜯고 욕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꽤나 늦은 시간인 데다가 이 시간에 베란다로 나오는 사람은 이 건물에서 백현이 유일했기 때문에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옆집 남자가 있었다.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여태껏 이 남자가 이사 온 뒤로는 이런 상황을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백현은 당황했고, 옆집 남자도 조금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금방 원래의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가 백현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지며 라이터를 찾았는데, 아무래도 어디에다가 떨어뜨리고 온 건지 없는 모양이었다.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져도 나오지 않자 한숨을 쉬며 담배 필터만 씹고 있었는데, 백현은 지금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라이터 없어요?”

 …….”

 이거 쓰세요.”

 

 백현이 건네준 라이터를 받은 남자는 잠시 그것을 쳐다보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전혀 고마운 마음이 들어있지 않은 감사인사였지만 이렇게라도 대화를 했으니 성공이었다. 남자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빨아들일 때 백현은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남자는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자 잘썼다는 말과 함께 들고 있던 라이터를 건넸으나 백현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계속 쓰세요. 저 가진 것 중에 제일 많은 게 라이터라서.”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니깐 라이터 없으면 저 부르세요.

 

 진짜로 백현이 가진 물건 중에 가장 많은 건 라이터였다. 너무 많아서 처리하기도 곤란할 정도로. 남자는 고맙다는 말을 했고, 백현은 괜찮다 말하며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옆집 남자와의 관계는 그때부터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그전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면 이제는 짧은 대화가 오고갔다. 남자가 먼저 말을 걸 때도 있었고, 백현이 먼저 말을 걸 때도 있었다. 대화의 주제는 '어디 가세요?' '오늘 날씨 좋네요.' 등의 시답잖은 것들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또 밤에 베란다로 나가면 옆집 남자를 볼 수 있었는데 남자는 항상 하나를 잊어먹거나 잃어버렸는데, 그게 재떨이일 때도 있었고 심하면 담배일 때도 있었다. 한 대 정도는 괜찮아요. 백현이 건네주면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남자도 결국은 그걸 받았다. 그때도 두 사람은 대화를 했지만 역시나 생산성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새벽인데도 덥네요, 이제 곧 여름이니까요, 저녁은 드셨어요? 같은 대화였다. 그렇게 30분 동안 대화를 한 뒤 백현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남자는 10분 정도 더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게 이제는 하루의 일과처럼 되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옆집에 산다는 것, 그리고 지독한 꼴초라는 것뿐이었고 지나가다가 마주치며 인사하고 대화하는 그런 사이였지만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분명히 어제까지는 그랬을 텐데. 백현은 새벽까지 논문에 시달리다가 아침 해가 밝아올 때 쯤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니 잠든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저를 깨우는 노크소리가 들려왔고, 처음엔 무시하고 그냥 자려다가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리길래 신경질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집세는 이미 냈고, 동기들이 찾아올 리도 없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류는 휴일에 절대 백현의 집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어떤 자식인지 모르겠지만 시답잖은 이유로 자신의 잠을 깨운 거라면 백현은 그 상대에게 폭력을 쓸 의향도 있었다. 그러나 뻗친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백현의 눈에 보인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사람이었다.

 

 옆집 남자가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손에 무언가를 들고, 문 앞에 서있었다.

 

 자고 있었는데 제가 깨운 건가요.”

 아니. 아니에요, 이제 일어날 참이었어요. 무슨 일이세요?”

 ,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건 선물입니다. 받아주세요.”

 감사합니, 잠깐, 뭐라구요? 선물이요?”

 그동안 신세를 졌으니까요. 괜찮다고 하셨지만 작은 것이라도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받으세요.”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백현에게 주었고,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백현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이주가 넘는 시간 동안 백현이 남자에게 준 것들은 많았다. 담배, 라이터, 그리고 재떨이. 혹은 물일 때도 있었고 사탕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보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고 보답을 바랄만한 물건들도 아니었다. 제가 받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거절하기 위해 봉투를 다시 건네주려다가 일단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부터 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갈색의 제법 커다란 봉투 안에 들어있는 것은 놀랍게도 몇 달 전부터 백현이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봉투 안에 한가득 담겨있었다.

 

 무엇을 살까 하다가, 몇 달 전부터 계속 먹고 싶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 이걸로 사 왔는데.”

 , 그게. 맞긴 한데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야 들리니까요. 저희 집에서.”

 

 아침이나 저녁 때 식사 준비하시면서 항상 그러시길래 기억하고 있었어요. 엿들으려고 한건 아니지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사과를 했고, 백현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이건 백현의 실수였다. 이 아파트가 얼마나 방음이 안 되는지 제일 잘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고, 그것 때문에 고생하다가 옆집 남자랑 이렇게 대화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을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니. 생활에서 일어나는 소음이 들릴 정도면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들도 분명히 들릴 게 뻔한데! 옆집 남자는 그저 들은 것을 그대로 사 왔을 뿐이었다. 부끄러워 빨개진 얼굴을 봉투로 가리며 어떡하나, 고민할 때 남자는 전해줬으니 이제 그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저기요, 잠시만!”

 

 백현은 자기가 왜 이 남자를 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대로 가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만 가겠다는 남자의 자켓 끝자락을 잡았다.

 

 그게, 혹시 샐러드. 좋아하세요?”

 

 본인 스스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백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 이러는 것은 그저 남자가 사온 채소는 혼자 먹기에 많았을 뿐이었고, 채소와 함께 샐러드드레싱이 봉투 안에 들어있었으며 단지, 그러니까, 혼자 먹기가 싫어서 남자를 붙잡았을 뿐이고, 그래서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말을 한 당사자인 백현 조차도 의미를 모르겠는 말을 들은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백현은 잡고 있던 남자의 자켓을 놓아주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점심 먹고 가요.”

 ?”

 점심 아직이죠? 같이 먹어요.”

 아니, 괜찮습니다.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어차피 이거 많아서 저 혼자 다 못 먹어요. 들어와요.”

 

 계속 거절하던 남자도 이제 그것이 예의가 아님을 알았는지 한숨을 쉬면서 알았다며 긍정의 답을 내놓았고, 백현은 웃으면서 얼른 들어오라며 현관문을 열고 비켜주었다. 나 요리 잘해요. 의외네요. 그렇게 안 생겼는데. 그래요? 먹어보면 생각이 바뀔걸요. 이제는 제법 편해진 옆집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백현은 현관문을 닫았다. 아직도 그 날 가겠다는 남자에게 왜 같이 밥을 먹자며 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백현은 옆집 남자와의 식사가 꽤나 만족스러웠고, 두 사람은 그 식사를 통해 조금 더 친해졌으며, 변백현은 그것이 꽤나 기뻤다는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오세훈이었다.

 

 '당신', '그쪽' 같은 말로 상대를 부르며 대화를 하다가 식사가 끝난 다음에야 서로가 여태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야 새벽의 만남 때는 이름이 필요가 없었고, 지금까지의 대화에서도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전보다 가까워졌고,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옆집 남자와 백현은 정확히 얼굴을 본지 이 주 만에 통성명을 했다. 나이는 대충 봐도 동갑 같아 보여서 묻지 않았고, 말을 놓게 되었을 때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친해진 뒤로도 존댓말을 썼으며, 그것은 세훈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사람은 친구가 된 다음에도 서로에게 예의를 차렸다.

 

 세훈은 그 날 먹었던 백현의 요리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가끔 식재료를 사와 백현에게 내밀었고, 덕분에 식비를 아끼게 된 백현은 즐겁게 요리를 해서 그와 함께 식사를 했다. 처음에는 너무 비싼 식재료를 사와 먹으라며 내밀 길래 이거는 너무 부담스럽다고 다시 가져가라고 거절했지만 이걸 받고 나한테 밥해주면 덜 미안하죠? 라는 세훈의 말에 넘어가 그걸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주일에 세 번은 그렇게 세훈은 백현의 집을 찾아와 같이 아침이나 저녁 식사를 함께 했으며, 같이 밥을 먹지 못할 때는 백현이 세훈이 좋아하는 것들을 요리해서 먹으라며 건네준 적도 있었다. 원래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맛있다고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 신이 났고, 이것을 계기로 세훈과 백현은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흐르던 어색함과 불편함은 사라진지 오래였고, 여름이 시작될 때 친해졌던 두 사람은 이제 가을을 눈앞에 두고 있을 정도로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 저 당분간 바빠서 좀 늦어요. 아침은 모르겠고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은데 괜찮아요?”

 밖에 나가서 사먹으면 되니깐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학교는 불편해서 시험기간에도 일찍 온다더니.”

 지도교수님한테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요. 웬만하면 거절하겠는데 신입생 때부터 챙겨주신 분이라 거절하기 어려워서.”

 흐음, 많이 늦나요?”

 차 끊기기 전에는 돌아올 거 에요.”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나 없으면 밥도 못 먹는 사람이었나, 세훈씨?”

 

 세훈의 취향에 맞춰 프림과 설탕을 가득 넣은 커피를 주며 백현이 장난스럽게 말을 했지만, 세훈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백현이 그와 알게 되고 친해지면서 가장 놀란 점은 세훈이 생긴 것과 다르게 상냥하다는 점이었는데, 당사자가 들으면 기분이 나빠할지도 모르지만 생긴 건 전설 속에 나오는 설녀처럼 차갑게 생겼고 외모만큼 말수도 적은 편인 데다가 ''을 할 때는 가차 없는 성격인지라 백현은 오해 아닌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을 기점으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고, 세훈은 백현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를 잘 챙겨주었다. 하루는 그의 이런 모습이 너무 적응이 안 되서 원래 이런 사람이었냐고 물었더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냐며 한소리 들었고, 백현은 이걸 그와 친해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이 근처가 위험해서요.”

 이 동네가 안전했던 적도 있어요?”

 그것도 맞지만 최근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건이 많이 일어나서 밤늦게 다니는 게 전보다 더 위험해졌어요. 너무 늦으면 그냥 학교에 있어요. 집으로 오지 말고.”

 맞서 싸울 수는 없어도 도망치는 거 하나는 자신 있어요 나.”

 아랫집에 살고 있는 육상하던 남학생은 발이 느려서 장기매매로 팔려갈 뻔했나?”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조심하라는 거잖아요. 백현씨는 가끔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까먹는 경향이 있으니까.”

 아아, 알았어요. 너무 늦으면 그냥 학교에서 잘게요. 됐죠?”

 진작에 그러면 좀 좋아요?”

 

 그제야 웃으며 세훈은 백현이 타준 커피를 받아 마셨다. 사실 걱정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원래도 이 구룡성채라는 곳은 마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범죄가 일어나는 흉흉한 곳이었지만 최근에는 그래도 살고 있는 시민들을 통해 어느 정도 자정이 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심각한 흉악범죄가 일어났고, 그래도 그쪽 일과 상관없는 시민들은 건드리지 않던 놈들이 죄 없는 학생들이나 아이, 그리고 여성들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대낮에도 그런 일에 대비해 학생들은 무리를 지어 다녔고 조금이라도 어두워지면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데려가 나오지 못하게 했다. 백현도 다르지 않았다. 위층에 살고 있는 류도 백현을 찾아와 조심해야한다고 거듭 주의를 줬고, 세훈도 늦게 다니지 말라며 신경 써줬다. 그들의 충고와 마음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런 것들에 끌려갈 만큼 약해보이나 싶어서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류나 세훈은 분명히 화를 낼 것이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백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에 세훈은 또 다른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아까보다 더 심각한 얼굴로 백현을 바라보았다.

 

 세훈씨. 다른 문제도 있어요?”

 아뇨. 이것보다는 아까 말했던 것들이 더 걱정이니깐, 그것만 조심해요 일단은. 다른 문제는 내가 처리하면 되니깐.”

 , .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류 씨보다 빨리 와서 나 구해야 되는 거 알죠?”

 비교대상이 이상한데. 왜 상대가 경찰이 아니라 류 씨보다 빨리 와야 하는 거예요?”

 그야 나는 이제 류 씨보다 세훈씨랑 더 친하니까요. 세훈씨한테도 제일 친한 사람이 나니깐 당연히 류 씨보다 빨리 와야 하는 거 아닌가?”

 류 씨가 들으면 섭섭해할테니깐 그런 말 그 사람 앞에서는 하지 말아요.”

 

 세훈은 웃으면서 그것을 넘겨들었고, 백현 또한 그것을 진담과 농담을 섞어 했던 말이었으며 그 상황 자체를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훈과 더 친하다는 말은 진담이었고, 세훈도 그것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초여름에 그들의 사이가 엄청나게 어색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발전한 관계였다. 그리고 변백현은 그때 자신이 했던 말처럼 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던 류 웨이가 아니라 오세훈이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아니, 사실은 누구라도 좋았다. 누구라도 나타나서 자신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늦은 밤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간고사 기간과 교수와 함께 하는 연구조사 기간이 겹쳐버렸다. 대학원 수업은 학부시절보다 많지 않았고 중간고사를 치지 않는 수업도 있었지만 그 연구조사라는 것이 사람 머리털이 뽑혀나갈 정도로 어렵고 귀찮고 짜증나는 것들이라 백현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시달렸다. 매일 교수님의 연구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생활하던 백현은 이대로는 못살겠다며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지도교수에게 파업선언을 했고, 제자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는 지도교수는 평소보다 그를 일찍 보내주었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운이 좋았지만 학교를 나서는 순간 백현은 오늘 자신이 엄청나게 재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호마다 걸리고,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자고 싶은데 차는 달팽이처럼 기어가서 결국은 평소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었다. 애초에 학교를 나섰을 때부터 이른 시간은 아니었기에 해는 벌써 졌고, 오늘은 떠있는 달이 하필이면 초승달이었기에 더 음산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런 것들을 평소라면 기괴하다 여기고 무서워했겠지만 백현은 지금 지친 상태였다. 빨리 집에 가서 자는 것 외에는 그에게 선택지가 없었고 결국 세훈이 충고한 '늦은 시간에 다니지 마라'는 잊혀졌다.

 

 하지만 그렇게 무시해서 화가 나서 이러는 거라면,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사과할 수 있을 정도로 백현은 지금 위험한 상황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칼을 들고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백현이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가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일어났다. 전봇대에 숨에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그는 백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고 백현을 향해 달려왔다. 보통 장기매매업자나 인신매매업자는 '상품'이 흠집이 나면 안 되기 때문에 칼을 드는 일도 없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단지 빠르게 제압해 기절시킬 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칼을 들고 백현을 쫓아오는 미치광이는 그 둘 중 어느 한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면 세훈이 그때 말을 하다가 말았던 '더 걱정인' 그 문제가 확실했다.

 

 허억, 그만, 쫓아, , 허억, 오라, !!”

 

 구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밖에 나와서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었다. 점점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겁을 먹고 있는 백현이 이 정도로 뛴 것 자체가 대단했고, 이곳으로 유학와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낸 그에게 더 도망갈 수 있는 체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풀어지는 다리를 이기지 못하고 백현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쫓아가던 타켓이 쓰러진 걸 알았는지 그 미치광이는 더 빠른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진 것 같았는데 그것을 신경 쓰지도 못할 정도로 백현은 공포에 떨었다.

 

 세훈이 보고 싶었다. 사귄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들보다 더 좋아진, 그 친구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세훈이 심각한 얼굴로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조심하라고 했는데 안 그래서 미안해요, 그러니깐 제발, 나 좀 살려줘요. 제발! 그 미치광이는 점점 더 백현에게 가까워졌고, 넘어지면서 삐끗한 것인지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 이대로 죽는 건가, 부모님은 어떡하지, 형은, 유학 무사히 다녀오라고 빌어준 친구들은, 내 졸업은, 적응 못 하고 헤맬 때 나를 잡아 준 류 씨는, 그리고 누구보다도 걱정이 많던 세훈씨는.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지나갔고, 눈앞에서 칼을 들이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무서워, 무서워, 살려줘, 살려주세요,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파, 아파요, , 아악! 칼이 팔을 스치고 머리채가 잡혔다. 시끄럽다며 뺨도 맞았고, 입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이대로 죽는 건가, 죽기 싫어, 죽기 싫어, 누가 좀, 살려주세요. 백현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려달라고 빌고 있을 때, 이번에는 배를 쑤셔 줄 거라고 기괴하게 웃던 남자가 갑자기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고 누군가의 손에 끌려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방어할 수 없었는지 그대로 끌려가 바닥에 얼굴을 처박아야 했고, 그 손에서 풀려난 백현은 바닥에 쓰러져 멍청하게 건장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당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때 백현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백현!!!”

 

 오세훈이었다.

 

 평소의 단정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머리카락은 엉망으로 뻗쳐있었고, 목까지 잠구고 있던 셔츠는 다 풀어져 있었다. 뛰어왔는지 얼굴은 땀투성이였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의 앞에 서서 숨을 고르던 세훈은 백현의 얼굴에 난 상처와 팔에서 흐르는 피, 그리고 찢어진 옷들을 보더니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정색하며 백현을 쫓아온 그 미치광이를 붙잡아 묶어놓은 사람들에게 명령했다. 시멘트 달아서 앞바다에다가 던져버려.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던져. 그것을 명령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고, 어찌나 차갑고 매서웠는지 그것을 듣고 있는 백현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 심지어 그런 목소리로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세훈의 말에 아무도 토 달지 않고 알겠다 대답한 뒤 그 남자를 끌고 사라졌다. 끌고 가는 것을 확인한 세훈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그것을 칼에 찔린 팔에 둘렀다.

 

 괜찮아요? 지혈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 !!”

 아파도 잠깐만 참아요. 입안은 어때요?”

 

 안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골이 흔들린다고 착각할 정도로 강하게 맞았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가 멀쩡하게 붙어있는 게 기적일 정도였다. 백현이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자 세훈은 한숨을 쉬며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냐고 물었다. 백현은 뛰다가 다리를 삔 것 같다고 말했고, 세훈은 제대로 걷지 못하는 백현을 등에다가 업고 한쪽에는 그의 짐을 들었다. 걸을 수 있으니 부축만 해달라 애원했지만 오세훈은 그걸 듣지 않았고, 결국 백현이 포기하고 그 등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병원으로 바로 갈 거니깐 그렇게 알아요.”

 병원이요? 나는, 괜찮은데, 저기, 세훈씨?”

 칼에 찔린 상처는 그렇게 깊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백현씨는 이런 일 처음 겪는 거잖아요. 병원 가야 해요.”

 나 정말 괜찮아요. 세훈씨 말마따나 깊은 상처도 아니고, 큰일 벌어지기 전에 세훈씨가 구해줬고,”

 떨고 있으면서 그런 말 해봤자 아무도 안 믿어요. 그러니깐 그냥 내 말 들어.”

 

 백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떨고 있었고, 세훈이 그것을 지적하자 갑자기 밀려오는 공포심에 눈물이 나왔다. 이제서야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이 어딘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살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자기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서서 구해주지 않는 마굴. 누가 죽어도 신경 쓰지 않는 지옥.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맞은 뺨이 아파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고, 이내 백현은 큰 소리로 울어대며 세훈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 백현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람들은 없었고, 세훈도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갔다.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입원을 하기로 했다. 백현은 학교문제도 있고 하니 다시 집으로 간다고 했지만 세훈은 단호히 그것을 거절했다. 그래도 안 된다며 백현이 고집을 부리자 칼에 찔린 팔뿐만 아니라 발목인대도 늘어나 걷기도 힘들면서 뭘 하겠다는 거냐고 세훈이 결국 소리까지 지르며 화를 냈고, 백현은 입원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목의 상태를 봐야 하니 다음 주까지 입원해있어야 한다고 의사가 말했고, 지도교수에게 전화로 상황을 설명한 뒤 백현은 세훈에게 입원을 무를 수 없다면 제일 싼 6인실로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세훈은 그것도 들어주지 않았다.

 

 나 병원비 없어요.”

 내가 내줄게요.”

 그걸 왜 세훈씨가 내줘요.”

 나 때문이니까요.”

 내가 다친 게 왜 세훈씨 때문이에요.”

 백현씨 공격한 사람 우리 회사 고객이었어요. 돈 못 갚아서 내가 직접 고문까지 했었고. 손이라도 자를까 하다가 갚겠다고 사정 하길래 살려서 보내줬더니 복수하겠다면서 협박을 하더라구요.”

 잠깐만요, 그러면 왜 나를 공격한 건데요?”

 나한테 덤벼봤자 안되니깐 나랑 친해 보이는 백현씨를 공격한 것 같아요. 일반인처럼 보이고, 약해보이니깐. 그래도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공격할까 싶었는데.미안해요. 다 내 잘못이에요.”

 “..세훈씨는 그럼 어떻게 그때 나타난 거예요?”

 이것도 사과할게요. 혹시나 싶어서 사람 붙여서 지켜보라고 했어요. 류 씨랑 친하다는 이유로 협박당한 적도 있다 길래나는.”

 

 걱정이, 돼서. 세훈은 차마 백현을 바라볼 수도 없었는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니깐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줘요. 입원도 하고, 병실도 1인실로 해요. 그것도 못해주면 내가 너무 미안해서 참을 수가 없으니깐. 그런 사람에게 싫다고 고집을 부릴 만큼 백현은 고집이 쎈 사람도 아니었고, 결국 세훈이 원하는 대로 입원절차를 밟았다.

 

 변백현은 오세훈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 지금은 좀 진정이 되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저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칼로 난도질당해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살려준 것 또한 그 친구였고, 결과적으로 자신은 지금 살아서 병실 침대에 누워있다. 팔이 찔렸고 다리인대는 늘어났지만 치료만 잘 받으면 금방 완치될 상처였다. 거기다가 세훈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사람까지 붙여주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세훈의 말을 무시하고 늦은 시간에 돌아다닌 백현의 책임도 없지는 않았다. 백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고, 이런 곳에 살면서 조심하지 않은 잘못이 친구를 잘못 사귄 것보다 더 크다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그는 세훈에게 더는 미안해하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의자에 앉아 또 생각에 잠긴 세훈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이건 다 내 잘못이에요."

 세훈씨?"

 백현씨가 나랑 친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물론 죄 없는 당신을 공격한 그 새끼가 나쁜 거겠지만 원인은 나한테 있어요.”

 아니에요, 그건-”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주의하겠지만 나도 사람이고, 앞날을 예측할 수 없고, 내 직업이 그렇다보니 이런 일은 또 일어날 거예요. 그리고 나는 죄 없는 사람이 나 때문에 다치는 거 못 봐요.”

 

 그러니깐그동안 즐거웠어요. 퇴원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요. 그냥 옆집 사람으로,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세훈씨.”

 밥 맛있었어요, 지금까지.”

 

 그 말을 끝으로 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미 결정을 내린 것인지 단호한 얼굴이었다. 이대로 오세훈이 문을 열고 나간다면 다시는 그와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것이다. 함께 식사도 할 수 없고, 의외로 말이 많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그와 대화를 나눌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전을 생각한다면 그와는 더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좋았다.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 천하의 변백현이라도 멀쩡히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세훈이 나가는 것을 붙잡지 않는 것이 좋았다.

 

 세훈씨.”

 

 백현은 주말 아침, 봉투 한가득 백현이 먹고 싶다 했던 것들을 한가득 사들고 온 세훈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집으로 초대했었던 그 날이 생각났다. 그 날도 가겠다는 세훈을 붙잡았었다. 그때 그를 붙잡았던 이유를 아직도 백현은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세훈은 나가려다가 백현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그럼 나 퇴원하는 날, 밥 먹으러 와요. 퇴원 기념으로 세훈씨가 좋아하는 거 해줄게요.”

 

 그 날의 변백현은 오세훈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런 관계에 만족한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날 세훈을 붙잡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변백현은 오세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후회할 것 같았다. 그제야 백현은 자신이 생각보다 세훈을 많이 좋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마음이 우정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현의 말을 들은 세훈은 나가지도, 그렇다고 다시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백현은 그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나갈까 두려웠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와 친해지고 난 다음 처음 느껴보는 어색함이었다. 도저히 이 무거운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다시 한 마디 하려 할 때, 세훈이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다.

 

 퇴원하는 사람은 당신인데 왜 나 좋아하는 걸해요.”

 

 세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침대 앞 의자에 앉았다.

 

 백현씨가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요. 퇴원 기념으로 내가 살 테니깐.”

 

 백현은 그제야 편안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세훈은 그의 직업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했고, 백현은 자신이 배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리고 한국인인 두 사람이 홍콩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도 이야기했고, 서로의 나이도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세훈이 백현 보다 두 살이나 어렸고, 그의 나이를 들은 백현은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불편하면 말을 놓으라고 세훈이 말했지만 백현은 그냥 이대로가 좋다고 했다. 간혹 세훈이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백현은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퇴원하는 날,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그 날 백현은 세훈이 버블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세훈은 백현이 오이를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사소한 것부터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터놓기 시작하면서 세훈과 백현은 본인들도 놀랄 정도로 가까워졌고, 이제는 서로와 있는 것이 가장 편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은 지금 같이 살고 있었다. 시작은 그때처럼 '고객'이 백현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런 일이 또 벌어질까 봐 걱정한 세훈이 집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면서 그것을 알게 된 백현이 냄비와 국자, 도마와 식칼 같은 것들을 들고 세훈의 집으로 쳐들어 오면서였다. 그러다가 집안에 백현의 전공서적과 옷가지, 살림살이 등이 쌓이기 시작했고, 어차피 일주일에 6일은 같이 밥 먹고 서로의 집에서 자고 가는데 그냥 같이 살아도 되지 않겠냐는 결론을 내렸다. 같이 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처하기 쉬울 거고, 집세도 나눌 수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백현은 얼마 없는 짐을 들고 세훈의 집으로 들어갔고, 세훈은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나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놀 거야. 방탕하게 먹고 마시면서 놀 거니깐 나 말리지 마요 세훈씨.”

 , .”

 그리고 세훈씨도 나랑 방탕하게 먹고 마시면서 같이 놀아줘야 되는 거 알죠? 자지 마요! "

 그 전에 백현씨가 먼저 쓰러질 것 같은데.”

 그때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영화 시작하니깐 진정하고 앉아요. 이거 보고 싶다고 빌려온 거 아니었어?”

 

 오렌지 주스가 들어있는 컵을 백현의 손에 쥐여 주며 세훈은 얼른 앉으라고 잔소리했고, 영화가 시작한다는 말에 백현은 따지려는 것을 멈추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오늘, 드디어 백현은 졸업논문을 제출했다. 제출하고 나오면서 그동안 고생했던 것들이 생각나 눈물이 났는데, 백현을 맞이하던 세훈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었다. 이렇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본 세훈이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달래자 백현은 드디어 졸업논문을 제출했다며 웃었고, 세훈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아직 완벽하게 통과된 것도 아니었고 지도교수가 다시 써오라며 집어던질 가능성도 있었지만 오늘 하루는 모든 것을 잊고 놀고 싶었다. 그래서 세훈과 백현은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밥을 먹었고, 백현이 보고 싶어 했던 영화 비디오를 빌려왔다. 오늘 하루는 방탕하게 놀 거야. 놀지 못해 한이 맺힌 사람처럼 그 말만을 중얼거리는 백현이 안쓰러워 세훈은 오늘 하루는 백현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영화가 재미있어요? 나는 모르겠는데.”

 재밌어요. 그리고 배우도 잘생겼잖아요.”

 배우가 잘생겨서 봐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남자배우가 잘생기면 좋은 거 아닌가. 나 장국영 좋아해요. 내가 홍콩으로 유학 온 이유 중의 하나인데.”

 

 백현이 빌려 온 영화는 <해피 투게더>였다. 동성 간의 연애 이야기인데 괜찮겠냐는 말에 세훈은 그런 거에 편견이 없다고 말했고, 백현은 그럼 됐다며 그것을 빌려왔다. 장국영 때문에 홍콩유학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장난으로 듣고 넘겼는데 진심이었던지 백현은 장국영이 화면에 잡힐 때마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며 세훈이 핀잔을 주자 입을 막고 보기는 했지만 백현은 TV 속 배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 아는 형 중에 장국영 닮은 사람이 있는데,”

 나 소개시켜주면 안돼요?”

 지금 말 다 듣지도 않고 대답한 거 알아요?”

 아니, 장국영 닮은 남자라니까, 궁금해서.”

 백현씨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저 정말로 팬이라서요그래서 그 남자 정말로 장국영 닮았어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백현의 얼굴이 웃기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세훈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고, 백현 스스로도 자신이 한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멋쩍은 얼굴로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아휘와 보영이 싸우는 모습을 감흥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세훈은 자신의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졸음을 참지 못한 백현이 결국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었다. 밤을 샜고, 집에 와서도 이것저것 한다고 자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세훈은 백현이 깨지 않게 조심히 그를 안아서 침대 위에 눕혀주었고, 이불까지 잘 덮어주었다. 잘 자요. 세훈은 영화를 보면서 먹었던 과자봉지들과 사용했던 컵들을 치우고, 방의 불을 껐다. 영화는 어느새 클라이막스가 다가왔다. 아휘가 떠난 아파트에서 그의 흔적을 붙잡고 우는 보영이 나왔다. 세훈은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보영을 연기하는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잡히자 세훈은 비디오를 종료시켰고, 들고있던 리모컨을 쇼파 위로 집어 던졌다.

 

 잘생겼단 말이지. 저런 얼굴이.”

 

 그 뒤로 백현은 몇 번이나 그 장국영을 닮았다는 남자를 소개시켜달라며 세훈에게 매달렸지만 세훈이 그 남자를 소개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이야기를 꺼냈냐고 짜증내는 백현에게 세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났다. 남은 것은 이제 졸업뿐이었고, 백현은 종강을 했다. 놀고먹는 백수가 되었으니 책임지라며 세훈에게 말했더니 책임져 줄 테니 시집올래요? 라는 말을 들었다. 왜 자신이 시집을 가야하냐고 물었더니 내가 돈벌어오고 백현씨가 집안일을 하니깐 백현씨가 시집오는 게 맞지 않냐는 세훈의 말에 장난을 치고 싶어 서방님이라고 불렀더니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지는 것도 모자라 바닥을 구르며 웃는 세훈을 보며 백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백현은 이제 가족보다 세훈이 더 편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당연했고, 자기 전에 그에게 저녁인사를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고, 혼자 먹는 밥이 어색할 정도였다. 그래서 졸업식까지는 어디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세훈은 일 때문에 매일 아침 나가야 하지만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그를 마중 나가고 그와 함께 식사하고, 같이 영화를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 생활이 행복했다. 그리고 이 행복하다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살고 있기에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변백현은 오세훈을 좋아한다. 이것은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미묘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 있었다. 백현은 오세훈을 사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함께 하는 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세훈의 마음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훈도 자신의 이런 마음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백현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앞으로도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갈 것이니 이 관계가 '연인'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생각했다.

 

 백현아.’

 졸업만 남았다며? 축하한다.’

 그동안 타지에서 생활한다고 고생했어.’

 그러니깐 이제 돌아와라. 어머니가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아버지 건강도 예전 같지 않으시고. 형 내년에 결혼해. 형수님 얼굴도 안 볼 생각이야?’

 어차피 거기서는 대학원 공부까지만 하기로 했잖아. 졸업식 끝나면 바로 돌아와. 보고 싶다, 우리 막내.’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12월의 마지막 날, 그 전화만 오지 않았더라도.

 

 

 전화가 온 날, 백현은 처음으로 세훈과 싸웠다. 백현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 했고, 세훈은 돌아가라 했다. 이렇게 돌아가면 홍콩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말하는 백현에게 세훈은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랑 그렇게 끝나도 괜찮다는 거 에요, 지금?”

 내가 지금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면 뭔데! 당신이랑 연락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데 내가 지금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다시 만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나보고 돌아가라는 게 그만하자는 거랑 뭐가 달라요?”

 변백현!”

 나만, 언제나 나만 당신을 잡는 거 알아? 처음에도 그랬고, 그때도 그랬어. 그리고 지금도!”

 내 말 좀, 제발 내 말 좀 들어!”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러면서 가라고 하는 이유가 뭔데?”

 

 항상 내가 당신을 잡으니깐 우스워 보였어요? 백현은 결국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주저앉아 우는 백현을 바라보며 세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TV에서는 새해가 밝았다는 말과 함께 올 한 해도 행복하게 보내라는 말이 흘러나왔고, 두 사람은 그렇게 새해를 맞이했다. 최악의 11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같은 집에 살고,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함께 했지만 처음 얼굴을 익히고 인사하던 때만도 못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백현은 형에게 전화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의사를 전했고, 세훈은 그것을 지켜보았다. 울어서 새빨개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백현을 보고도 오세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고, 백현은 졸업을 했다. 세훈은 꽃다발을 들고 백현의 학교로 찾아갔고,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백현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세훈을 바라보았지만 결국 그 꽃다발을 받아들였다. 졸업 축하해요.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그럼 내가 여기 안 왔어야 했어요? 아뇨, 그랬으면 오늘 집에 들어가서 당신한테 식칼이라도 휘둘렀을 걸요. 두 사람은 그 날 오랜만에 내용은 험악하지만, 길게 대화를 했고,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예전만큼은 못했지만 백현과 세훈은 다시 대화하고, 같이 밥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를 빌려와 함께 보면서 잠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 정해졌다. 정확하게 이틀 뒤였다. 아침 식사 시간에 그것을 전한 백현은 결국 체해서 세훈이 나간 뒤에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냈고, 오세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한 뒤 집을 나섰다. 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백현은 하루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했다면, 우정이 아니라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자신을 좋아했다면 자신에게 저럴 수는 없었다. 망가져가는 것은 변백현 혼자였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니깐, 먼저 다른 감정을 가지고 좋아한 자신이 지고 시작한 관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가려는 세훈을 붙잡아 집안으로 들였던 그 옛날, 이미 백현이 진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는 건 싫었다. 이렇게 헤어질 거라면, 좋아한다는 말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백현은 떠나기 전날 밤, 고백했다.

 

 좋아해요.”

 

 얼마 없는 짐을 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캐리어를 방 한구석에 세워두고 쇼파에 기대어 앉아 영화를 보다가 백현은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오늘 보는 영화는 <해피 투게더>였다. 백현은 항상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졸았고, 세훈은 마지막을 알았지만 백현을 위해 불만 없이 이 영화를 함께 봤다.

 

 좋아해요. 내가, 너를.”

 

 백현은 다시 한 번 더 고백했다. 그제서야 세훈은 영화에서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요.”

 근데 왜 나보고 가라고 해요.”

 당신의 가족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당신은요?”

 나보다는 가족이 먼저니까요. 내가 욕심 부릴 수는 없잖아요?”

 나를 좋아해요?”

 

 세훈은 백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거기에 또 울컥한 백현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세훈이 건네는 사과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일단 먼저 사과할게요.”

 뭐가요?”

 백현씨가 끝까지 이 영화의 마지막을 다 못 보고 가는 걸요.”

 

 말을 마친 세훈은 백현의 입술에 키스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당황한 백현이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그를 안아 올려 침대로 걸어갔고, TV를 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현은 그 날, 깨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을 볼 수 없었다.

 

 

 

 

 백현이 한사코 거부했지만 세훈은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언제나 그의 고집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도 세훈의 승리였다.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은 조용했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함께 기다리면서도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오전 1140분 한국행 비행기에 대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백현은 한국집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여기로 편지하거나 전화해요. 나 아닌 사람이 받으면 친구라고 하면 될 거에요. 귀찮아도 편지 자주해요. 돈도 많은 사람이 국제우편 비싸다는 말은 하지 말고. 백현이 건네주는 종이를 받은 세훈은 알았으니 그만 가보라고 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을까. 어젯밤이 꿈만 같았다. 백현은 잘 있으라고 인사할까 하다가, 괘씸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때, 세훈이 저를 불렀다.

 

 백현씨.”

 …….”

 좋아해요.”

 그 말 조금만 더 일찍 해주지 그랬어요.”

 사실 새벽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때는 그냥 혼자 좋아하다가 말겠구나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당신. 정말 잔인한 거 알아요?”

 좋아해요. 아니 사랑하고 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도, 나도.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을.”

 고마워요. 그럼 얼른 들어가요. 시간 다 됐어.”

 

 세훈은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고, 백현은 그의 웃는 얼굴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끝까지 잔인하고 제멋대로인데 상냥한 사람이라, 백현은 눈물이 났지만 마지막인데 그의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오세훈이 미련 없이 자신을 보내는데 자신이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세훈은 백현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 날 밤, 세훈은 백현을 보고 반했다. 왜 그때 그를 보고 반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대화하고, 그와 함께 살아가면서 알게 된 것은 그는 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잡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세훈은 그를 보내주었다. 그의 집 주소도, 연락처도 받았지만 편지를 보내는 일도, 전화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세훈은 백현이 건네준 종이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그대로 바람에 날려 보냈다. 이게 맞는 일이었다.

 

 이게, 맞는 거지. 그렇지.”

 

 미련이 남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세훈은 이제 잊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백현이 그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야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들렸고, 세훈은 백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항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길 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세훈의 팔을 잡았다.

 

 하아, 하아진짜. 걸음 왜 이렇게 빠른 거예요. 놓칠 뻔, 했잖아.”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오세훈이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환청을 듣고 있나 싶었지만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 힘은 환상이 아니었다. 어째서, 돌아온 거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너에게 돌아가라고 말했는데!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세훈은 고개를 숙여 흐르는 눈물을 닦은 뒤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안 잡으면 내가 잡아야지.”

 

 백현이 새빨개진 눈으로, 웃고 있었다.

 

 잡아줘서 고마워요.”

 

 세훈도 새빨개진 눈으로 그를 향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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