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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반딧불이의 숲 下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반딧불이의 숲 下

박로제 2017. 3. 11. 00:16





기다리라고 했으니, 믿고 기다렸다. 어차피 사쿠마 레이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일주일은 기다릴 수 있었다. 레이가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려 왔던 시간이 몇백년이었다. 그 시간을 생각한다면 겨우 일주일 쯤이야, 버틸 수 있었다. 인간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 레이가 보기에도 소녀는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 매우 바쁜 사람이었고, 이곳에 오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집에 가서 푹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정말 신사 안에서 가디건을 덮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 적이 있어서 소녀가 일어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본 적도 있었다. 추운 날씨에 혹시 감기라도 들까봐 들어오는 바람을 막고 신사 안을 따뜻하게 만들어 놓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자는 소녀를 지켜보던 그 시간은 레이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따라 운 좋게도 소녀를 만질 수가 있어서, 레이는 잠들어 있는 소녀의 뺨을 만져보기도 하였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레이가 소녀에게 가진 마음은 틀림 없는 연모의 감정이었다. 상황이 이러니까, 너무 외롭고 쓸쓸했으니까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 날 레이는 자신의 감정이 연모의 감정임을 확신했다. 물론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이 평범하고 일반적인 감정과 똑같을 수는 없었다. 그 사랑은 무겁고, 조금은 탁한 감정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소녀에게 아무 짓도 할 생각이 없었다. 레이에게 인간소녀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으며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복했기에, 욕심이 났지만 욕심내지 않았다. 이 기다림이 기약없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음에도 소녀는 레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일주일 지났고, 보름이 지났으며, 한달이 지나 곧 있으면 소녀가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은 것도 두달이 되어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처음에는 걱정부터 들었다. 소녀는 그가 보기에도 무리하는 경향이 있었고, 한동안 바쁘다고 했으니 무리하다가 쓰러진 게 아닐까, 하는 그런 걱정을 했었다. 분하지만 레이는 그런 소녀를 찾으러 이 신사를 내려갈 수가 없었고, 그저 여기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찾아갈 수 없는 자신, 오지 않는 소녀. 기약없는 기다림. 처음에는 스스로를 다스리며 참아야 한다고, 기다리면 된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겨우 이것도 버티지 못하냐고 힐난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건 소녀를 만나기 전의 이야기다. 빛을 보기 전에는 어둠 속에서 외로움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빛을 만났다.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너무 길게, 너무 오래 고통받으면서 살아왔던 신은 이제 그 인간소녀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소녀가 더는 자신을 만나러오지 않는다면? 극단적이지만 만약에 죽어서 살아있는 상태도 아니라면? 신은 인간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강해보이지만 인간의 믿음과 존경, 사랑을 잃어버리면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인간만도 못한 존재를 구해준 건 그 소녀였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녀는 갇혀있던 레이가 원했던 그 모든 것을 주었다. 이제 그 소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쿠마 레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데려와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와서 다시는 제 옆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레이는 저주받은 몸이었고, 평생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빌어먹을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

「내가 힘을 빌려주지.」

그 소녀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면 되잖아. 필요하면 죽여서라도 옆에 둬야지. 안그래? 어떻게 해야하나, 방법을 찾고 있을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는 분명 자신밖에 없을텐데 대체 누가? 놀라서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건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대로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 소녀를 데려갈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고민할 거냐고 따지기도 하였다. 외롭지 않은거냐? 갖고싶잖아. 다시 또, 그렇게 살아갈거야? 누구도 오지 않는 이 공간에서 홀로, 외롭게? 그래도 인간인 소녀의 삶을, 자신이 그렇게까지 망쳐도 되는 건가 고민하던 레이의 마음을 꿰뚫어본 것처럼 그 목소리는 그렇게 말해왔다.

「착한 척은 그만 하시지. 사실은 너도 그렇게 하고싶잖아?」

'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아니야. 부정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알고 있잖아? 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럼에도 모른 척 했다. 자신이 그럴리가 없다고, 인간을 사랑했고, 그 어떤 신보다 인간에게 자애로웠던게 레이였다. 허나 눈 앞에 서있는 남자는, 레이에게 더는 참지 말고 욕망에 따라 움직이라고 유혹하는 남자의 얼굴은 그 누가봐도 사쿠마 레이 본인이었다. 자아, 데리러 가자. 그 소녀를. 남자는 손을 내밀었고, 그 손을 멍하니 보고 있던 레이는 탁해진 붉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최근에 이렇게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신사 내에 레이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남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신성한 기운이 맴돌던 신사 안은 어느새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을 웃다가 고개를 드니 어느새 눈 앞의 남자는 사라져있었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그가 곧 자신이었고, 자신이 곧 그였다.

사쿠마 레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고, 저주 또한 더는 그를 이곳에 가둬둘 수 없었다.



레이는 소녀의 꿈에 나타나서 함께 가자고 말했지만 소녀는 매번 거절을 했다.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누구도 피해보지 않는 권유를 하는 자신을 거부하는 소녀를 받아주다가도 간혹 속에서 울컥 차오르는 분노에, 제 손으로 죽여서 영혼을 가져갈까싶었지만 그러기에 신은 인간소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래, 어차피 이제는 도망도 가지 못하는 신세인데 이정도는 받아줘야지. 레이는 힘을 되찾았고, 상황은 예전과 달랐다. 언제든지 그 소녀를 데려갈 수 있음에도 신인 자신이 봐주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조금은 참아보자고, 차오르는 분노를 애썩 삭혀보았지만 소녀는 이런 마음도 몰라주고 매번 거절을 하더니 급기야 무녀를 찾아가서 받아 온 부적을 침대 머리맡에 붙여두는 몹쓸 짓까지 저질렀다. 그 부적 때문에 소녀의 꿈을 찾아갈 수 없었던 레이는 그때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상황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그 부적의 주인은 원수와도 다름없는 가문의 사람이 쓴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잊고있었구나, 그때 했던 저주를. 봉인이 풀려 이곳에서 나가면 그놈의 가문을 멸망시켜주겠다고 했었지. 이것에 정신이 팔려 잊었구만. 신은 그 부적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자신을 저 신사에 가둔 인간들을 하나, 하나 찾아가 그때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자가 소녀에게 이 부적을 건네 준, 이 무녀였다.

'건방지구나. 아주 건방져. 감히 인간주제에 신을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대들기까지 하다니.'

그렇게 인간을 죽이고 다녔으니 일반인들은 몰라도 그들 사이에선 이미 소문이 퍼졌을 것이고, 소녀를 직접 만나고 부적까지 전해줬으니 아마 다른 이들 보다 더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의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레이의 눈에는 모든게 보였기 때문에 그다지 쓸모 없는 허세였다. 아무리 가진 힘이 뛰어나고 레이를 가둔 그 인간의 후손이라고 해도 혼자서 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고, 그녀는 도망조차도 가지 못한채 그에게 붙잡혀 신이 내리는 벌을 받아야 했다. 요괴에게 영혼이 오도독, 오도독 씹혀지며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가던 무녀를 내려다보던 레이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밝은 얼굴로 그녀의 턱을 잡아 들어올렸다.

'그 인간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느냐? 말해보거라. 지금이라도 이름을 말해주면 살려주마.'

지금 자네가 그 소녀를 생각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살고싶으면서 괜한 허세 부리지말게나. 이미 영혼이 반쯤 먹혀서 눈이 뒤집히고 턱이 빠져서 살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귀는 멀쩡히 살아있었는지 한쪽 팔을 힘겹게 들어올려 레이의 옷자락을 잡고, 서럽게 울면서 소녀의 이름을 한 글자씩 끊어서 말해주었다. 안, 즈.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몇번이고 다시 되새기면서, 레이는 자애로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약속을 했으니 상을 줘야겠구나. 허나 어차피 영혼이 반이나 먹혔으니 살아봤자 별로 쓸모가 없지않느냐? 내 손으로 죽여주마. 신이 하찮은 인간을 직접 죽여주다니, 영광으로 알거라. 마지막 말은 어차피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한 레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이름까지 알았고, 그를 방해하는 것들은 모조리 죽여놓았다. 아무리 소녀가 자신을 밀어내도 이제는 도망갈 수 없었기에, 레이는 아주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소녀를 만나러 갔다. 의심하고 무서워하면서도 쉽게 사람을 믿고 손을 내미는 소녀에게 잔소리라도 해줄까 하다가, 어차피 그가 데려가면 그런 일도 없어질테니 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소녀의 손에 끼워 준 반지는 아주 오랜 전부터 레이가 하고 있던 반지였고 이걸 끼고 있는 이상은 어디로 도망가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랜 꿈이 드디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얼른 품에 안고 예뻐해주고 싶구나. 자신의 신역에서, 오직 안즈와 저만이 갈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 공간에서 보낼 미래를 생각하며 레이는 눈을 감았다.



**



아주 오랜만에 걸려 온 전화였다. 살려주세요. 우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안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에이치는 바로 차를 보냈고, 소녀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심한듯 그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안즈를 알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은 정말 처음 겪어보는 거였기에, 답지않게 당황한 에이치가 일단 안즈를 제 침실로 데려가 눕힌 뒤 주치의를 부르려고 할 때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루카미 아라시. 얼굴도 알고 있고 몇번 대화도 해본 적이 있지만 전화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무시하려다가 안즈의 상태를 아라시라면 알지 않을까 해서 전화를 받았고, 그 감은 틀리지가 않았다.

「유즈루쨩에게 들었어요, 텐쇼인선배가 어떤 사람인지. ...제발, 안즈쨩을 살려주세요.」

이야기는 길었지만 에이치는 그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왜 진작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거니? 마지막에는 감정이 격해져 아라시를 힐난하며 에이치는 화를 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제발 안즈를 살려달라고 하는 아라시에게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에이치는 오늘 아침 일찍부터 일이 있었다. 분가 쪽의 사람이 아주 잔인하게 살해당한 뒤 시체로 발견되었고, 최근 여러 주술사 가문들의 후계자가 살해당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생각하여 현장을 보러갔었다. 직접 눈으로 본 그 현장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건과 차이가 있다면 잔인함의 정도일 뿐, 수법자체는 다르지 않았고 남아있는 힘의 흔적도 똑같았다. 보통 이런 경우에 괴물이든, 아니면 귀신이든, 자신이 했다는 증거나 흔적은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럼에도 이렇게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도 인간들이 절대로 자신을 잡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에이치는, 그게 누구인지 알면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신을 한낱 인간따위가 잡아서 벌을 줄 수 있나요. 죽은 여자의 가족은 그렇게 말했다. 슬프지만 신이 내린 벌이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유가족이 그렇게 말하니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건 에이치에게 헛된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깟 신이 뭐길래.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패배감과 허탈함, 그리고 분노를 삭히고자 집에 돌아가자마자 모든 걸 잊고 쉬려고 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앞서 겪었던 일보다 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왜 나한테 말을 하지 않았어. 일어난 안즈를 보자마자 에이치는 그렇게 화를 내려고 했지만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니 안즈가 아니라 그 남자, 감히 자신의 사람을 탐내는 그 빌어먹을 신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반지, 가 빠지질 않아요.'
'별 방법을 다 써봤는데, 그래도 빠지지가 않아요.'
'차라리 손목을 잘라내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이 반지를 뺄 수 있다면, 저는 그렇게 할래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안즈는 에이치가 하는 말도 듣지 못했고,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고, 더는 안되겠다 싶어서 주치의를 부른 에이치가 그녀를 강제로 잠재우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에이치는 그 신을 알고 있었다. 그 신을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선조였고, 날 때부터 선조의 환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주위의 어른들은 자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랑스러웠고, 존경할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저지른 짓의 댓가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에 더는 그를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비록 그 일 때문에 가문 전체가 단명을 하게 되는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대를 이어왔지만 그 누구도 선조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저주야말로 그들이 이룬 업적의 증거였기 때문에, 일찍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건 에이치도 마찬가지였다. 병약한 몸,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요절할 가능성이 컸음에도, 지금처럼 그를 원망하고 욕하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안즈는 에이치의 연인이었다. 그가 졸업을 하기 전까지는. 후계자를 남기기 위해 에이치는 일찍 결혼을 해야했고, 그 피를 지키기 위해 상대는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이어야만 했다. 당연히 안즈는 그의 결혼상대가 될 수 없었고, 두 사람은 합의 하에 이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이치는 안즈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안즈도 자신을 에이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사랑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당신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말하며 졸업식날 울면서 이별을 고했던 안즈를 떠올리며, 에이치는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좀 더 자신의 정체를, 집안의 이야기를 빨리 했어야 했다. 그럼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자신이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 누가와도, 설사 에이치의 선조가 와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안즈를 바라보고만 있을 때, 갑자기 방의 창문이 열리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몸을 숨겼는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는 분명했다.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당당히 들어오다니. 신이란 것들은 왜이리도 건방질까, 안즈쨩?"

창문을 통해 바람에 휩쓸려 온 붉은 장미꽃잎이 방 안으로 쏟아져내렸고,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달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처음보는 모습이었지만 에이치는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 신은, 태연한 얼굴로 나타나 에이치와 안즈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방해할 셈이냐?"
"그건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을까나."

내가 방해를 할지, 가만히 놔두고 지켜볼지는. 겁도 없이 주술사의 집에 잘도 쳐들어왔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할만큼 미쳐있다는 거려나?

에이치는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내용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생긴 것만 똑같은 줄 알았더니 속알맹이도 똑같구나 아주.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나왔지만 레이는 그다지 에이치가 한 말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맞는 사실을 무례하게 말했기 때문에 짜증이 났을 뿐이었다.

"네가 방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으냐?"
"그렇네. 그치만 나도 별로 당신을 이기고 싶어서 여기에 있는 건 아냐."
"아니면 어차피 단명할 목숨이니 지금 죽어도 상관 없다는 건가."
"별로. 나는 오래 사는 게 목표라서 말이야."

대화는 도무지 진전이 되질 않았다. 레이는 비키라고 했으나 에이치는 비켜주지 않았다. 안즈는 그런 상황도 모른 채 얌전히 잠들어 있었고, 영양가 없는 말싸움에 지친 레이는 그와 대화하는 걸 관두고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이제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손에 들어오면 모든 걸 잊어버릴테고, 우는 일따위는 없을테니 레이는 그걸 보고도 모른 척 외면했다. 그리고 그런 레이의 생각을 읽어낸 에이치는, 속이 뒤틀려서 모든 걸 토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면 지는 건 자신이었다. 침착하자, 진정해야해. 레이가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까지 제 스스로를 진정시킨 에이치가 다시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이를 바라보았다.

"거래를 하자. 당신한테도 나쁜 내용은 아닐 거야."
"무슨 속셈이지?"
"나 이외의 내 가문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도 좋아. 대신에 안즈쨩을 포기해줘."
"...가문과 저 소녀를 교환하자는건가?"
"당신한테도 나쁘지 않은 조건일 거라고 생각해."

어때? 바라왔잖아. 자신을 그곳에 가둔 인간의 후손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저주했잖아. 그래서 우리 선조에게 그런 저주를 내린 거 아니었어? 곧 죽을 노인부터 이제 막 태어날 아이까지, 꽤 많거든. 그 인간들의 목숨이 다 당신에게 있어.

부처와 같은 자애로운 얼굴로 아주 무시무시한 말을 하는구나. 에이치가 제시한 건 텐쇼인 가문의 모든 사람과 안즈 한 명을 맞바꾸자는 것이었다. 본가와 분가의 사람까지 합치면 어림잡아도 백명은 넘을텐데, 그 생명을 마치 제 것처럼 쥐고 흔들며 거래를 하는 에이치를 보고 있으니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닮았어. 아니, 그 자가 환생한 것 같구만. 에이치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잠시 옛 생각에 잠겼던 레이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꺼내 그대로 에이치에게 날렸으나 그 칼은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치고 지나가 벽에 그대로 박힐 뿐이었다. 이런, 아깝구만. 진심으로 아깝다는 듯 혀를 차며 레이는 소매로 피를 닦아내는 에이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 목숨엔 관심이 없어서 말이네. 자네만 죽어준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데, 어떤가?"
"여기서 날 죽이면 안즈쨩이 볼텐데?"
"죽고 난 다음의 일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는가?"
"협상결렬이네."

에이치는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들었고, 레이 또한 유쾌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들은 안즈의 이야기에서 무기력함을 느꼈던 이유는 텐쇼인 에이치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안즈의 연인이 아니었으니 그에게 내 사람을 뺏어가지말라고 따질 수도 없었고 당연하지만 힘으로도 그 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그 신은 안즈를 데려갈 것이고, 거래를 해봤자 신은 안즈를 택할 게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않을까?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기력함에 빠져서 예전처럼 태어난 걸 저주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안즈쨩.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에이치는 들고 있던 왼손을 내려서 안즈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침대 위에 죽어있는 텐쇼인 가의 유일한 후계자, 텐쇼인의 에이치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



안즈는 눈을 떴다. 눈은 떠졌지만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그 중요한 게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소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ㅡ

「일어났구나. 어디 아픈 곳은 없는고?」
"...레이 씨?"
「그래, 안즈야.」

좋은 아침이구나. 아침 햇살을 받으며 인사를 건네는 레이를 보며, 안즈는 머릿 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름과 나이, 그리고ㅡ이 남자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안즈는 두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레이에게 아침인사를 건넸다. 평소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는, 평범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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