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110212200506

레이안즈 : 본 아뻬띠! (Bon Appetit!)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본 아뻬띠! (Bon Appetit!)

박로제 2017. 3. 24. 21:33




아가씨, 입을 벌리게나.

레이는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안즈는 정말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레이의 손에 턱이 잡혀 있어서 그건 무리였다. 억지로 하는 건 싫다네. 그러니까 말 좀 들어줄 수 없겠는고? 그냥 레이씨가 포기하면 되지 않을까요, 싶지만 아마 이 남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 정말 싫은데. 살짝 입을 벌리니 그 틈 사이로 레이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입 안으로 들어 온 하얀 손가락은 혀를 누르며 입 안으로 무언가를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벌려놨다. 정말로 배안고픈데. 하지만 안즈의 의사와 상관없이 입안으로는 구운 토마토가 들어왔다. 자, 이제 씹어야지? 친절하게 입을 닫아주며 씹으라고 말까지 해주는 레이때문에 안즈는 먹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씹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잘 먹으니 보기 좋구만.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 보기 싫어 짜증을 가득 담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즈는 먹는 걸 싫어했다. 아니, 먹는 행위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니 저 문장은 틀린 문장이다. 좋아하는 음식은 잘 먹었고, 싫어하는 음식은 가려서 먹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점은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안즈의 식사는 학교에서 먹는 점심이 끝이었다. 그 사이에 에이치와 만나서 홍차부와 함께 하는 티타임을 즐기면서 티푸드를 먹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점심이 끝이었고, 아침도 먹지 않았으며 저녁 또한 먹지 않았다. 점심. 오로지 점심만 제대로 된 식사로 챙겨먹을 뿐이었다. 딱히 먹는 게 싫은 건 아니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먹고 있었을 뿐이었다. 학생일 때도 그랬고, 이건 성인이 되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거기다가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니 학생 때처럼 점심을 잘 챙겨먹을 수도 없었다. 일이 많으면 주스 한잔으로 식사가 끝날 때도 있었고, 쿠키나 편의점의 샌드위치로 끝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레이가 안즈의 이런 식생활을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며칠 전이었다. 연애를 시작한 것은 졸업 후였고, 학생일 때도 점심시간에 잘 먹는 안즈를 보면서 일이 바빠도 먹는 것만은 잘 챙겨먹는 구나 싶어서 안심을 했었다. 가끔 저녁에 만나서 밥을 먹을 때도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었기에, 레이는 그런 부분에서는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거기다가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안이라고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안즈의 집을 가는 것보다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게 더 편해서, 직접 와서 이렇게 확인해볼 기회도 없었다.

그리하여 연애 5년차, 처음으로 애인의 집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어본 사쿠마 레이가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가씨. 이게 뭔가?」
「글쎄요...보통 사람은 이걸 물이라고 하죠?」
「이 늙은이는 지금 그걸 물어보는게 아니다만.」
「...그럼요?」
「어째서 냉장고에 물밖에 없는거냐고 묻고 있는 거라네.」
「그야...저, 집에선 아무것도 안 먹으니까요.」

요리도구같은 건 여러가지 사놓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니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대학을 다닐 때야 시험기간 때 간혹 야식을 만들기도 하고, 주말에는 집에 있으니 밥을 먹기는 해야해서 장을 볼 때도 있었지만 일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장을 볼 일이 전혀 없었다. 평일 점심 때는 당연히 밖에서 먹었고, 휴일이 불규칙하게 있으니 쉬는 날엔 평일에 못잤던 걸 몰아서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레이를 만나러 나갔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 굳이 집에서 밥을 먹을 필요가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했다.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건 물, 탄산수, 그리고 술 몇개였다. 그렇게 야무지던 아가씨가 어쩌다 이렇게 됐누. 잠시 두통이 와서 머리를 짚고 서있던 레이는 자신이 알게 된 이상 더는 이걸 못본 척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안즈야. 네? 나랑 같이 살 생각은 없느냐? 네? 아 좋아요. ....아니, 잠깐만. 뭐라구요? 당장 필요한 것부터 챙기는게 좋겠구만. 저기요, 레이씨! 안즈의 의견은 거의 무시되었고, 그 날 안즈는 레이의 집으로 가서 아주 오랜만에 저녁을 먹어야만 했고, 그 날 저녁 메뉴는 가지와 토마토가 들어간 아주 맛있는 파스타로, 만든 사람은 레이였다.

위라는 건 꽤나 귀찮아서, 항상 비어있던 시간에 무언가가 들어오자 놀랐는지 그걸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건강하지 못한 식사생활을 이어오던 안즈의 위는 특히나 더 귀찮아서, 첫날 레이가 해줬던 파스타를 반도 소화시키지 못했다. 넘어가질 않는 걸 또 억지로 먹일 수는 없어서, 레이는 그 날 더 권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다면 같은 시간에 계속 음식을 섭취하는 게 좋지 않냐는 안즈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결론을 내렸고, 최근 싱글 활동이 끝나 휴식기를 가지고 있는 레이는 안즈가 자신의 집에 들어 온 날 아주 신나게 차까지 끌고 가서 장을 봐왔다.


사쿠마 레이는 생각 외로 요리를 엄청나게 잘했다. 요리를 잘하는 건 안즈도 마찬가지였지만 레이는 약간...차원이 달랐다. 이런 모습을 5년 째 보고 있었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레이는 입이 짧았다. 그다지 많이 먹는 것도 아니었고, 먹는 걸 극도로 가렸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까탈스러운 입맛이었다. 그렇다보니 본인이 직접 요리하는 걸 편하게 여겼고, 누가 사쿠마 레이 아니랄까봐 웬만한 식당의 셰프보다 더 굉장한 것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런 레이의 즐거움 중 하나가 안즈가 먹는 걸 구경하는 일이었고, 자주 먹지 않을 뿐이지 먹는 일 자체는 좋아하는 안즈 또한 사양하지 않고 즐겁게 식사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안즈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레이가 주는 식사가 부담스러웠고, 솔직히 말하자면 먹기 싫을 때도 있었다. 물론 막상 먹으면 맛있다고 잘 먹기는 했지만 먹기 전까지의 과정이 문제였다.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람이 대체 어떻게 일어났는지 자고 있는 안즈를 깨워 침실까지 아침을 가져왔지만 대체 눈뜨자마자 이걸 어떻게 먹냐고 안즈는 그걸 먹지 않겠다고 밀어냈고, 그걸 억지로 먹이려고 하는 레이와 항상 다투었다. 오늘도 그랬다. 자고 있는 걸 깨워서 포크를 쥐어주길래 오렌지 주스를 입에 쏟아붓던 안즈는 오늘은 정말로 못먹겠다고 밀어냈다.

어젯밤에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놓고...지금 내가 밥이 넘어갈 것 같아요? 그러니까 먹어야지. 레이는 단호했고, 안즈 또한 단호했다. 한참을 서로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다가 안즈는 절대 안먹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못마땅한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던 레이는 결국 (성격을)참지 못하고 한 손으로 턱을 잡고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냥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안즈의 눈에는 많이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레이씨 이럴 때마다 성격 나쁜 거, 엄청 티나요."
"아가씨에게는 최대한 상냥하게 굴고 있네만."
"그래요. 상냥하게 턱을 잡고 벌려서 제 입에 토마토를 넣어주셨죠..."
"제대로 먹기만 한다면 그런 일은 없을텐데. 나를 부추긴 건 아가씨라네?"
"진짜 성격 나빠..."
"그래서, 애인이 이렇게 성격이 나쁜 남자라서 싫은가?"
"그ㅡ러ㅡ니ㅡ까...이런 점이 나쁘다고 말하는 거에요."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면서 그렇게 말하는게, 정말 엄청 얄미웠다. 졸업 전의, 안즈가 알고 있는 레이는 상냥하고 다정하며, 어른스럽고 자상한 선배였고 연애 초기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함께 해온 시간이 길어지니 자연스럽게 그의 본래 성격같은게 눈에 보여서, 이제는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그러니까 사쿠마 레이에 의해) 의도적으로 착각하는 일도 없어졌다. 물론 알게 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런 본래 성격을 자신에게 보여준다는 게, 안즈 입장에서는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물론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좀 얄밉기는 했지만.


먹여주는 것에 재미라도 들렸는지 레이는 구운 아스파라거스 하나를 들어 안즈의 입으로 가져갔고, 그 손에 턱을 두번이나 잡히는 건 사양이라 안즈도 이번에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적당히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는 질기지도 않고 맛있었고, 안즈는 레이가 주는 포크를 받아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될텐데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려서. 안즈는 이제 고집부리는 걸 그만두고 내일 아침부터는 얌전히 먹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이 먹는 걸 구경하고 있는 이 남자를 위해서라도.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