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생긴 건 놀라운 일이기는 했지만 기쁜 일이었다. 둘다 아직은 일이 먼저였기 때문에 아이는 나중에 가지자고 결혼 전에 미리 약속을 했었고, 안즈와 레이는 별 다른 의견없이 그것에 동의했다. 뭐, 사실은 일은 겉으로 드러난 핑계거리이고 사실은 신혼이니까, 아직은 아이보다는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좀 더 둘이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즐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져도 늦지 않다고. 물론 허니문 베이비가 생겨버려서 그런 것들은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레이는 진심으로 기뻐했고, 안즈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병원을 다녀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안즈는 많이 울었었다. 싫었던 걸까, 아니면 무서웠던 걸까. 무슨 이유로 그렇게 서럽게 우는 지 몰라 안절부절할 때 안즈는 자신의 남편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기뻐요, 너무 기뻐서 자꾸 눈물이 나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쿠마 레이는 자신이 보기 드물게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여유롭고, 뭐든지 알고 있는 사람인 척 했지만 그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당연했다. 레이는 너무 울어서 눈가도, 코도, 뺨도 새빨개져서 히끅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안즈의 등을 토닥이며 침실로 데려가 눕힌 뒤 그 옆에 같이 누웠다. 레이씨를 닮은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나를? 네. 딸이어도 예쁠 거고, 아들이어도 예쁠 거에요. 레이씨도 나처럼 기쁘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주 크고, 아주 소중한 선물을 받았는데 기쁘지 않는 사람도 있나? 레이의 말을 들은 안즈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곧 지쳐서 골아떨어진 안즈를 품에 안고 가만히 누워있던 레이가 몰래 울었다는 것은, 안즈에게 비밀이었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주위에 알리자 축하한다는 반응과 함께 나온 말이 바로 능력도 좋다는 말이었다. 어라, 사쿠마씨 아이는 되도록 늦게가질 예정아니었나? 대충 사정을 알고 있던 카오루는 그렇게 말하며 얄밉게 웃었고, 그때는 레이도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안즈는 아직은 일할 수 있다고 했지만 회사와 트릭스타 멤버들이 안된다고 제발 집에가서 쉬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휴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거기에는 레이의 입김이 없지는 않았다.
휴가를 받은 안즈가 집에서 하는 일은 딱 한가지 뿐이었다. 잠자기. 아직은 괜찮다고 온몸으로 설명해봤지만 레이는 무리하지말라며 집안일 하는 것도 금지시켰고, 아예 안즈를 이불로 꽁꽁 싸놓고 나가는 일도 있었다. 과보호라고 말해봤자 듣지도 않았다. 왜 이런데서 성격 나쁜 걸 티내나요. 이불 안에 파묻혀서 그렇게 툴툴 거리는 사랑스러운 아내를 보면서 레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빠서 읽지 못했던 책이라거나 미뤄뒀던 영화보기같은 것을 했지만 임신을 하면서 잠이 많아진 안즈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잠만 잤다.
'...언제 들어왔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레이가 옆에 누워 있었고 깜짝 놀라 언제 들어왔냐고 물으면 몇시간이나 지나있는 경우가 잦았다. 처음에는 들어오는 것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해하면서 레이가 들어오는 시간까지 깨있으려고 노력했지만 쏟아지는 잠을 이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런 노력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레이는 집에 들어오면 안즈가 자는 모습밖에 볼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대신 집안일을 해주시는 분이 말씀하기를 낮에는 그래도 깨서 이것저것 한다고 하는데, 해가 지면 그때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고 했다. 밤 늦게까지 활영하는 일이 잦은데다가 항상 레이보다 먼저 일어나서 그를 깨우던 안즈는 아침에도 비몽사몽 상태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니 두 사람이 하루에 제대로 대화하는 시간은 낮에 하는 전화말고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깨어있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안즈는 굉장히 속상해했다. 모처럼 자기가 여유있게 쉬는 중인데 레이씨를 챙겨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레이는 그런 생각하지 말라고, 원래 잠이 많아지는 거고 당연한 거니까 나쁜게 아니라며 걱정말고 쉬라고 했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자는 얼굴만 보는 생활이 계속 이어지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싶었고,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주는 안즈를 보고 싶었다. 유닛 활동 자체는 이제 곧 막바지라서 조금만 더 참으면 됐지만 레이는 그 뒤의 개인활동 스케쥴도 빡빡하게 차있었기 때문에 아마 지금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아. 정말 못참겠구만.
대기실 의자에 누워있던 레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코가가 움찔거렸다.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담겨있는 짜증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져서 대기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안즈 다음으로 레이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가 요즘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언데드의 멤버들은 레이의 저 갈 곳 잃은 분노와 짜증의 원인을 알고 있었고, 이 숨막히는 대기실 안에 폭발하기 직전의 사쿠마 레이와 함께 있느니 도망가있는 걸 선택했다.
***
안즈.
낮잠이라도 자면 밤에 깨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안즈는 자신의 생활 싸이클을 바꾸기로 했다. 레이는 낮보다는 밤에 깨있는 게 편한 사람이었고, 레이가 일을 끝내고 오면 밤이었으니 안즈 입장에서는 낮보다는 밤에 깨있는 것이 좋았다. 다만 레이가 알게 되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잔소리할 게 뻔해서 그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었다. 오늘도 레이의 베개를 끌어안고 낮잠을 자는 중이었는데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보고 싶어서 꿈에 나오는 건가 싶었는데 뺨에 닿아오는 입술이나 차가운 손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레이씨?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레이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오프도 아닐텐데?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앞을 보니 레이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깨있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만. 잘잤는가?"
"왜 레이씨가 여기에 있어요...?"
"일이 끝났으니까?"
"...오늘 토크쇼 녹화있지 않았어요?"
"그건 나대신 카오루군 나가기로 했다네."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요! 하카제선배가 괜찮다고 한 거 맞아요?"
"당연한 걸 묻는 구먼. 그것보다...안즈."
점심은 먹었는가? 부엌에 가보니 먹은 흔적이 없던데. 그동안 듣기로는 잘 챙겨먹는다고 하던데, 거짓말한 건 아니겠지?
웃는 얼굴로, 이미 모든 걸 알고 묻는 남편의 얼굴이 안즈는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어쩜 이렇게 까탈스러운지 안즈는 다른 사람보다 입덧이 심한 편이었다. 못 먹던 음식은 더 받아주질 않았고, 잘 먹던 음식까지 속이 받아주질 않아 레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먹고 싶은게 있어서 사와도 반도 먹지 못하고 버리는 일이 잦았다. 말라가는 팔을 볼 때마다 속상해서 억지로 뭐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냄새만 맡아도 고통스러워하는 안즈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이 바빠서 항상 옆에서 챙겨줄 수 없으니 더 그랬다.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분께 매번 따로 연락드려서 뭐라도 먹었냐고 물어보는 게 레이의 하루일과였고, 몇주 전부터는 그래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는 말에 안심하고 그쪽에는 신경을 덜 썼는데, 오늘 식사를 한 흔적이 전혀 없는 식탁과 냉장고의 상태를 보고 수상하다 여겨 전화를 해보니 안즈가 그런 문제로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다해서 짜고 거짓말을 한 거 라는 답이 날라왔다.
"....."
"나한테 할 말이 분명히 있을텐데."
"그치만 정말 못 먹겠는 걸요..."
그래도 저 그건 마셨어요. 토마토 주스. 토마토 주스? 네. 누가 레이씨 아이 아니랄까봐, 그건 역겹지가 않고 잘 넘어가더라구요. 저 그래서 그건 마셨어요. 뭐라도 먹었으니까 혼내지 않을 거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품에 안겨드는 안즈를 보니 화내려는 마음도 사라졌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누. 이렇게 깨있는 안즈와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니까, 레이는 안즈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다시 누웠다. 그래. 뭐라도 먹었으면 됐지. 집에 토마토 주스를 쌓아놓을까. 아니, 그건 참아주세요. 별 의미없는 대화를 계속 이어가던 두 사람은 잠깐 대화를 끊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너무 좋아요."
"나도 그렇다네."
"너무 보고 싶어서 낮잠 자기 전에 공연 dvd를 봤었는데, 그거 보고 나니까 더 보고 싶은 거에요."
"그랬구만."
"근데 자고 일어나니까 진짜 레이씨가 눈 앞에 있어서 너무 놀랐어요."
예전에는 어리광도 잘 부리지 않던 안즈가, 어느 순간부터 레이에게만 어리광을 피우게 됐다. 그만큼 믿고 기댈 수 있는 상대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서, 레이는 이런 안즈가 좋았다. 나 졸려요. 그렇게 자고도? 잠꾸러기가 다 됐구먼. 그치만 안잘래요. 오랜만에 같이 있는 건데 잠으로 시간 낭비하기 싫어요. 그건 걱정말게나. 유닛 활동도 끝나서 일주일 정도 휴가니까. 그래요? 그럼 저 조금만 잘게요. 그래. 안즈는 레이의 품에서 눈을 감았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레이도 이 휴가를 위해 잠도 못자고 해치웠던 일 덕분에 쌓여있던 피로가 몰려와 바로 잠들었다.
***
아니,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나랑 사쿠마씨가 심야 라디오 스케쥴 때 있었던 일인데. 잠시 광고가 나가는 시간에 사쿠마씨한테 전화가 온 거야. 보니까 안즈쨩이더라고. 방송용 얼굴 싹 다 지워버리고 안즈쨩 앞에서 보여주는 그 얼굴로 전화를 받더라고. 근데 스피커 너머로 안즈쨩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분위기 심각해지고, 알지? 사쿠마 씨 정색하면 무서운 거.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묻는데 그때 안즈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레이씨이이...딸기...딸기가 먹고 싶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단 말이야? 여름에, 그것도 그 시간에 딸기를 대체 어디서 구하냐고. 근데 울면서 안즈쨩이 계속 딸기를 외치고 있더라고. 그 다음은 사쿠마씨가 나가서 전화를 받는 바람에 듣지를 못했는데, 들어올 때는 웃는 얼굴이었으니 아마 잘 해결됐겠지. 아아. 솔직히 말하자면 울면서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하는 안즈쨩은 귀여웠는데 말이지, 더는 보기 싫으니까 사쿠마씨한테 빨리 육아휴가 주지 않을려나, 이 회사?
그리고 사쿠마씨. 나 미혼이니까. 나 결혼한 적 없으니까! 나한테 입덧할 때 뭐해야하는지 제발 묻지 말아줄래?!
아니, 사실 저희도 안즈를 바로 쉬게 할 생각이긴 했죠. 그 녀석, 걸핏하면 무리하고 야근하고, 자기 몸 생각은 안하고 일하니까. 그런데 저희 마지막 투어 때는 그래도 와주길 바랐거든요. 뭐, 첫 투어도 아니고 사실 안와도 되는 자리지만 그래도 프로듀서니까. (하하, 사리 솔직하지 못하네-) 시끄러워 스바루. 근데...사쿠마 선배가. 음. 네. 뭐...웃는 얼굴로 부탁하시는데 모른 척 할 수도 없었고. (아니 이사라군, 그거 웃는 얼굴이라기엔 너무 무서웠으니까!) ....이거 근데 사쿠마 선배는 못보는 거 확실한 거죠? (이사라. 지금 떨고 있는데 괜찮은 건가?) ...그만할게요. 그만하겠습니다.
좋아했었다, 그 사람을. 아니. 아직도 좋아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감정은 과거의, 이미 끝이 나버린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도 안즈가 안고가야할 감정이었다.
그는 항상 힘이 넘쳤고,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다른 후배를 태양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안즈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더 태양에 가까웠다.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가면 데일 것만 같아. 그래서 그가 자신을 안아오면 뜨거워서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지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일부러 그 사람을 때리면서 그러지 말라고 화를 냈지만 사실은 안아주는 게 너무 좋았다. 이대로 녹아서 그 사람에게 스며들고 싶었다.
그 사람의 등은 매우 넓었고, 따뜻했다. 여기서 내려가고 싶지 않아. 안즈는 그때 결승점이 움직여서 영원히 골인하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다. 그치만 선배의 등에서 내려가기 싫은 걸. 쪽지의 내용은 알지 못했고 무작정 따라 나선 거지만 그래도 좋았다. 당신의 등에 업힐 수 있는 사람이 나여서 좋았다. 안즈는 그날 그와 찍었던 사진을 다이어리 안에 숨겨두었다.
「20xx. 9. xx. 나의 히어로와 함께.」
참고로 말하자면 사진 뒤의 저 문구는 답례제 이후에 안즈가 쓴 것이다. 나는 너의 히어로니까. 항상 말하던 모두의 히어로가 아니라 너의 히어로라는 말에 안즈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마 그는 영원히 모를 것이다.
당신은 언제나 나의 히어로였어요. 그 말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노란 프리지아를 그에게 선물해주며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까진 무리없이 해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당신은 언제나 나의 히어로였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를 태양이라고 불렀지만 내 태양은 당신이었어요. 그 말이 뭐라고 그렇게 어려웠을까. 안즈는 결국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보냈다.
이게 사랑임을 자각했던 건 언제일까. 돌이켜보면 안즈는 언제나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왜 그를 사랑하게 된 걸까. 강한 척만 하고, 남에게 약한 모습은 보여주려 하지 않은 그 바보같은 사람을, 그럼에도 모두의 히어로가 되어서 희망과 꿈을 전해주려고 무슨 일이 있어도 태양처럼 밝게 웃으며 노력하는 그 사람을 안즈는 아주 많이 좋아했었고, 지금도 좋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좋아할 것이다.
"치아키 선배."
나의 히어로.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아니, 사랑하고 있어요.
안즈는 오늘도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치아키를 향해 웃어주었다.
오늘은 츠카사의 성인식이었다. 연인인 안즈에게 장미꽃다발도 선물 받았고, 다른 나이츠의 멤버들의 축하도 받았다. 술을 처음 마셔보는 건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별 다를 것 없는 술맛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다들 정신 없이 마시고 취해서 쓰러질 때 츠카사는 안즈와 둘이서 몰래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오늘 밤을 함께 보내기로 미리 약속한 두 사람은 츠카사가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가서 조금 더 마시기로 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누, 누님? 잠시만요. 잠깐 멈추세요!"
"에에, 츠카사군. 싫어?"
"아니요 좋습니다! 아니, 이게 아니라. 그렇지만 일단 진정을 해주세요!"
"좋으면 괜찮은 거네~"
안즈는 술에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적당히 자제할 줄 알았고 분위기에 휩쓸려서 마시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들떴는지 평소보다 좀 더 오버해서 술을 마셨고, 사실 츠카사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안즈는 이미 취해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만 마시는 게 좋다고 말려보았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라는 말로 넘기며 와인을 홀짝거리는 안즈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던 츠카사가 잠깐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들어오니 안즈는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오늘은 무리구나.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라, 츠카사도 나름 기대를 가지고 안즈와 이곳에 온거지만 이렇게 술에 취한 여성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뭐, 이제 성인이니 다음을 기약하면 되겠죠? 답답하게 매고 있던 타이를 풀고 커프스의 버튼을 푼 뒤 편안한 복장으로 잠깐 숨을 돌렸다가, 잠들어있는 안즈를 잠시 깨워 욕실로 보낼 생각이었다. 메이크업을 제가 지워줄테니 간단하게 세안이라도 하고 다시 재울 생각이었는데, 츠카사의 이런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술에 취한 사람은 이상한 괴력이 생긴다더니, 안즈는 자신을 깨우는 츠카사의 손을 잡아당겨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뜨렸고,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놀라서 아무런 방어도 못하고 있던 츠카사의 위로 자신이 그 위로 올라탔다. 누님?! 이런건 예상 밖의 일이라 당황한 츠카사의 입술에 안즈의 입술이 부딪혔고, 성인식의 날에 한 기념비적인 첫키스는 아쉽게도 안즈가 아까 마신 와인의 맛이 났다.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츠카사가 눈만 굴리며 어쩔 줄 몰라할 때 안즈는 입술을 떼고 숨을 한 번 몰아 쉬더니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놀라서 말려봤지만 막무가내였다. 누님에게 이런 술버릇이 있었나요?! 지금 당장이라도 아라시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안즈는 블라우스의 리본을 풀어 자신을 밀어내는 츠카사의 손을 아주 예쁘게 묶어버렸고, 상황과 맞지않게 아이처럼 웃으면 잘됐다, 잘됐어~라는 말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다.
"좋으면 괜찮은 거네, 가 아니에요! 저, 저는 술에 취한 여성과 이...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으음...츠카사군, 내가 취한 것 같아?"
"누님. 눈이 풀리셨습니다. 취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치만 나 정신은 깨어있는 거얼~ 나, 츠카사군이 성인만 되기를 기다렸다구?"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거지만, 사실 나도 참기 힘들었어. 블라우스를 바닥으로 던지고 캐미솔도 마저 벗어 던져버린 안즈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브래지어 후크도 풀어 다른 것들 옆으로 집어던졌다. 안즈가 입고 있는 건 까만색의 화려한 레이스가 아주 예쁜, 누가봐도 노리고 온듯한 디자인의 속옷이었다. 츠카사가 성인이 될 때까지 키스까지로 만족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안즈였다. 중간에 한번 실수로 삽입 직전까지 간 적은 있지만 중간에 정신을 차린 안즈가 안된다며 밀어냈고, 츠카사도 별 다른 말 없이 물러났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걱정따위 하지 않아도 되고,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남아있어서, 안즈는 술을 마셨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이정도면 필름이 끊길 정도는 아니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츠카사는 당황스러웠다. 좋냐, 싫냐를 따지면 당연히 좋았다. 싫을리가 없었다. 단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서 당황스러울 뿐이다. 거기다가 본인이 리드한다고 생각했지 안즈에게 이렇게 묶이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라 더 그랬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뜬 것 같아 스오우 츠카사 본인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자꾸 시선을 피하는 어린 연인의 얼굴을 잡고 제쪽으로 돌린 안즈는 환하게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다시 입을 맞췄다. 츠카사군, 좋아해. 성인이 된 걸 축하해. 네, 감사합니다 누님. 저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에 기분이 좋아져 헤헤 웃으며 츠카사를 끌어안고 여기저기 뽀뽀하며 장난을 치던 안즈는 갑자기 쏟아져오는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아, 지금 자면 큰일나는데. 나 옷도 다 벗었는데 어쩌지...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녔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수는 없었다.
"누님? 누님, 잠시만요. 주무시는 겁니까?"
안즈는 그 상태로 츠카사의 품 안에서 잠들어버렸고, 츠카사는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