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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대화가 필요해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대화가 필요해

박로제 2017. 5. 8. 23:53




안즈는 레이에게 묻고 싶은게 많았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관계에 의문을 느끼고, 지쳐감에도 불구하고 겁이 나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우리 무슨 사이에요? 그 말 한마디가 이렇게나 어려웠던가. 저를 품에 안고 잠든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안즈는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부터 갑자기 안즈는 레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옆을 보면 항상 레이가 서있었다. 처음에는 「귀여운 아이들」중 한 명이라서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지만 둘만 남은 경음부실에서 레이와 키스했을 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일은 다른 사람과도 별 생각없이 하는 일이니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키스는 달랐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지만, 뒤이어 다가오는 입술과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때문에 장난이 아님을 안즈도 깨닫게 되었다 왜이러냐고 화를 내야 했는데 키스 후에 자신을 보며 짓는 그 표정이 좋아서, 안즈는 레이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안즈는 꽤 오래 전부터 레이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하고 있기 때문일까, 소녀는 그 남자의 앞에만 서면 소심해졌고,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는 무른 사람이 되었다. 그와 같은 유닛의 카오루가 그렇게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아도 된다고 안즈에게 충고했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면 얼굴부터 풀어졌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다행히도 그는 아직 안즈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은 매우 쉬운게 사람일이었고,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둘만 있는 상황이 되면 자주 입을 맞춰왔고, 어쩔 때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놓아주지를 않아 입술이 퉁퉁 부은 채로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안즈, 입술이 왜 그래? 호쿠토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물어보았지만 사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어서 안즈는 공기가 건조한가봐, 같은 말도 되지않는 변명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입술에 상처나니까,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안돼요.'

그렇게 말했을 때 레이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그것만은 안된다고 매달렸지만 공기가 건조하다고 변명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안즈는 절대 안된다고 강하게 밀고 나갔다. 사실은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키스를 해요, 같은 말을 했어야 했지만 어째선지 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안즈의 제안을 받아들인 레이는 이제 입술이 아니라 다른 곳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콧등, 눈, 뺨. 거기까지는 이해했지만 귀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을 때는 안즈도 깜짝 놀라 그를 밀어냈지만 레이는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보다못한 안즈가 그런 곳에 하지말고 차라리 입술에 키스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입술에 하지말라고 한 것은 이런 걸 원해서가 아니었나?'

아니라고 화를 내고 싶었지만 어차피 듣지 않을 게 뻔했다. 그와 붙어 다니면서 나름대로 레이의 성격에 대해서 알게 된 안즈는 그냥 자신이 포기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앞선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더는 따지지 못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의 안일함이 이런 사태를 불러일으킨거라면, 안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과거로 돌아가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뜯어말렸을 것이다. 허나 지금 현재 과거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었고,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누군가에게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었지만 안즈에게는 이런 걸 말할 용기도 없었고, 애석하게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도 없었다.

평소처럼 등 뒤에서 안즈를 끌어안고 장난을 치던 레이가 어찌된게 그날만은 달랐다. 키스를 하면서 셔츠 안으로 손을 넣는다던가, 가슴을 만진다던가 하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말라고 해야하는데 그 눈을 보고 있으니 그때처럼, 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대체 이 사람에게 왜 이리도 약한거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나에게 이런 짓까지 하는데 거절하지도 못하고 받아주는거야. 그런 생각이 들자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것이 터져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레이는 그걸 다르게 받아들이고 아프냐며 눈물을 닦아주고 달래주었지만 그런 다정함때문에, 더 울 것만 같았다.

나한테 왜그래요? 우리는 무슨 사이에요?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나한테 잘해줘요. 왜 내가 착각하게 만들어요, 사쿠마 선배. 자신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다독여주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춰주는 레이때문에 안즈는 더 비참해졌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안즈라고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 말들을 속으로 삼키며 안즈는 레이에게 말없이 안겼다.

레이가 자는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 사람은 항상 자고 있으니까, 어느샌가 레이를 깨워서 스케쥴에 맞춰 데려가는 역할을 안즈가 맡게되면서 자는 얼굴을 보는 일은 더 많아졌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 자는 얼굴이 다르게 보이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이제는 한계다. 레이가 일어나기 전에 여길 나가야 했다. 안즈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고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레이와 안즈는 같은 학교였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상대가 상대이다보니 안즈도 그를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레이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자신이 사과해야할 상황도 아니었는데도 미련하게도 그런 말부터 튀어나왔다. 안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음부실을 빠져나갔고, 레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꿈을 꾸고 있을 뿐이었다.


안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음부실에 가지 않는 것이었다. 가면 편하니까,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할 일을 할 수 있으니 습관적으로 가는 것이 버릇이 되어 레이와 가까워진 것도 있었다. 그래서 경음부실에 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완전히 몸에 익숙해진 습관이라서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갈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레이와 마주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안즈가 일부러 시간을 내어 경음부실로 가지 않으면 레이와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3학년이었고, 안즈는 2학년이었다. 언데드 뿐만 아니라 다른 유닛들의 레슨도 봐주어야 했고 한 명의 프로듀서로서 안즈가 해야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여유롭게 그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가 안즈를 만나러 온 적이 없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녀가 교실에 없을 때였고, 두 번째는 안즈가 교실에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만나는 게 무서워서 일부러 자는 척을 했고 스바루에게 부탁해서 거짓말을 해달라고 했다. 다행히도 착한 스바루는 안즈에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고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세 번째는 언데드의 레슨 때였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안즈를 붙잡았지만 마침 학생회의 일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가 없었고, 마오에게 하굣길에 동행해달라 부탁하여 레이를 피할 수 있었다. 이쯤되면 레이도 안즈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고,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트릭스타도 레이와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우리는 너의 편이야, 그러니까 부담갖지말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해주는 호쿠토의 얼굴과 목소리가 너무 상냥하여 안즈는 결국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지만 진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자꾸 숨기는 안즈가 마음에 들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네 사람은 최대한 안즈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안즈쨩이 이야기하고싶을 때 말해줘도 괜찮아. 기다릴테니까. 마코토가 그렇게 말해주었고, 마오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며 다독여주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었지만 안즈는 위로받을 수 있었고, 아주 오랜만에 모든 걸 잊고 웃을 수 있었다.

혼자 있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점심시간 내도록 가든 테라스에서 홀로 숨어있던 안즈는 수업을 시작하는 종이 쳤음에도 움직이기가 싫었다. 만들고 있던 의상을 내려놓고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안즈도 알고는 있다. 이렇게 도망가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그렇지만 그녀는 너무 지쳤고, 이제는 좀 쉬고 싶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거지. 나는, 그저 그 사람이 좋았을 뿐인데. 안즈는 그냥 레이가 좋았다. 좋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 밀어내지 않았다. 사실은, 레이가 손을 잡아주고 입을 맞춰주었을 때 죽을만큼 기뻤었다. 어떤 관계라고 따로 정의내리지 않아도 좋았다. 레이가 자신을 옆에 두기만 해준다면 그 어떤 것도 받아낼 자신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자신은 그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은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고백을 했으면 달라졌을까? 그러나 그럴 용기가 없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착각이라면? 안즈는 레이가 자신에게 주는 것들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 도저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뭐라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부딪혀보지도 않고 포기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누군가가 겁쟁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 또다. 교복치마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안즈는 자신이 울고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번 울 때마다 온몸의 수분을 모두 쥐어짜내는 것처럼 서럽게 울어 이제 울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이렇게 남의 속도 모르고.

"안즈씨?"

수업 중이라서 이곳에는 아무도 없을텐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즈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냈지만 이미 빨갛게 된 눈이라거나 코는 감출 수가 없었다. 하기사, 이 목소리의 주인공 앞에서 무언가를 숨기는 건 기적에 가까웠기 때문에 굳이 감추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인 와타루는 안즈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고, 빨간 장미꽃 한송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울고 있는 공주님에게 주는 저의 선물입니다. 받아주시겠어요?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와타루를 보니 안즈도 웃음이 나와서, 그 장미꽃을 받아주었다. 와타루는 받아주어서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안즈의 옆자리에 앉았고, 원래대로라면 먼저 자리를 피해야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성실한 안즈씨가 수업을 빠지고 여기에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뇨, 딱히...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 있고 싶은 이유는, 울고 있던 이유와 같나요?"
"...다 아는 얼굴로 그렇게 물어보지 마세요."
"이런. 저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랍니다?"
"히비키선배."
"네, 말씀하세요 안즈씨."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해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 히비키 와타루, 얼마든지 당신의 대나무 숲이 되어드리죠."

충동적이었지만 나쁜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사실 히비키 와타루이기 때문에 믿고 그런 말을 한 것도 있었다. 지금 안즈에게 필요한 건 위로도 충고도 아니었고, 동정이나 경멸의 시선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만 들어주기만 해도 좋았고, 와타루는 아마 지금 안즈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반응 없이 넘어가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이야기를 모두 마친 안즈가 이제 자신이 말한 것들을 잊으라고 한다면 바로 잊어버릴 사람이기도 했다.

와타루는 안즈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중간에 말을 잇지 못하고 우는 안즈를 달래주기도 하고 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게 어려워 고민할 때면 참을성있게 기다려주기도 하였다. 좋은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와타루와 자주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전까지는 굉장히 어려워하던 사람 중 하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트릭스타의 네 사람보다 와타루가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두 마친 안즈가 코를 훌쩍거리며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와타루를 바라보았고,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안즈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안즈씨,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당신에게 화를 내는 건 아닙니다. 아니죠, 오히려 제가 화내야 할 사람은 레이같군요. 원래는 그냥 듣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요. 괜찮나요, 안즈씨? 그만큼 조심스러운 와타루는 본 적이 없었기에 안즈는 신기하게 생각하면 괜찮다고, 저를 혼내는 말을 해도 좋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비장한 얼굴로 와타루가 내뱉은 말은 전혀 예상 외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연인관계가 아니었습니까?"
"네?"
"안즈씨. 레이는 말이죠...저희에게 안즈씨와 사귀게 됐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 붙어다니길래 저희도 그게 진짜라고 믿고 축하해줬던 거구요. 그런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뇨?"
"...그치만, 사쿠마, 선배는 아무 말도..."
"아아... 이런 놀라움은 전혀 필요없는데 말이죠! 안즈씨의 일이라면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변한 게 없군요 레이는."
"저기, 히비키선배. 사쿠마선배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요? 저희, 두 사람이, 그런...그런 사이라고?"
"...아주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런 얼굴은 오랜만에 봤죠 저희도. 레이는 안즈씨의 이야기를 했답니다. 행복해보였어요."
"그런데 왜 저한테 말을 안 한 건가요?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아마 안즈씨의 감정을 레이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게 아닐까요. 별 다른 고백의 말은 필요없다고 생각했겠죠. 그의 이런 점을 저는 좋아합니다만...이번은 성급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연인이라고 소개했다고? 전부 안즈는 처음 듣는 이야기다. 레이는, 단 한 번도 그에 대해서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다. 거짓말같았다. 이런 걸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와타루가 불쌍해서,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런 말을 지어낼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기쁘다기 보다는 놀라웠고, 현실이 아니라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저 스스로가 너무 바보같아서 화가 날 정도에요."
"글쎄요. 이런 경우라면 보통 사람들은 다 안즈씨처럼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절 좋아하고 있다는 걸, 저만 몰랐다는 게 제일 억울해요."
"그 부분은 제가 따로 할 말이 없군요."
"...제가 힘들어 했던 시간은, 대체 어떻게 보상 받아야 하나요."
"안즈씨."

지금 여기서 저에게 그걸 물어봤자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그럴 자격도 없구요. 그러니 어서 레이를 만나러 가세요. 원망도, 분노도, 그리고 애정도. 안즈씨가 갖고있는 그 모든 감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레이 뿐이니까요.

와타루의 말이 맞았다. 따지는 것도, 그리고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레이에게 해야만 했다. 제3자인 그에게 떠들어봤자 해결은 되지 않았고, 이건 그와 자신만의 문제였다. 이제 더는 망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안즈는 그에게 대충 인사를 한 뒤 자신의 물건을 들고 가는 것도 잊은 채 가든테라스를 뛰쳐나가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손을 흔들며 그녀를 보낸 와타루는 또 다시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안즈가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보다...다 본 것 같은데,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요."

아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는데. 안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피한는 것 같다고, 요 몇주간 내내 저기압이었는데 그 저기압의 원인이자 자신과는 만나주지도 않는 안즈가 한창 수업시간일 때 가든 테라스에서 와타루와 단 둘이, 그것도 딱 붙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으니 레이가 화를 내지 않는게 더 이상하긴 했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아마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겠죠? 안즈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지만 레이는 복도의 창을 통해서 와타루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히비키 와타루는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서 즐거울 뿐이었다.

안즈씨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사실을 알고나면 레이도 뭐라 하지는 못하겠죠. 두 사람의 오해가 무사히 풀리길 바라며, 와타루도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든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



경음부실로 가봐야할까. 그 사람이 반드시 거기에 있을거란 확신이 없었다. 기세좋게 경음부실이 있는 층까지 달려오기는 했지만 항상 그곳에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곳을 먼저 찾아 보고 마지막으로 가봐야하는 건 아닐까, 단순하게 별 고민 없이 경음부실로 밀고가버릴까 싶지만 쓸데없이 많은 생각들이 안즈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복도에 서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등을 지고 서있던 탈의실의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손 하나가 빠져나와 그대로 안즈를 낚아채 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전혀 예상도 못한 상황에서 당한 거라 안즈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들어갔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잠그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양 팔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손은 누가봐도 남자의 손이었다. 탈의실 안은 어두워서 안즈는 자신을 안고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고,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 자신에게 입을 맞춰오자 덜컥, 겁이 났다. 「그 사람」이라서 받아준거지, 누구라도 좋았던 건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제게 다가올때마다 고개를 뒤로 빼며 그 남자를 피해 도망갔지만 그는 끝까지 따라붙었다. 거기다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거부의사를 표시하는 그녀가 제딴에는 엄청나게 거슬렸는지 결국은 짜증을 내며 남자는 안즈의 귓가에 참고 참았던 한 마디를 속삭였다.

입 벌려. 짧은 말 한마디였지만 안즈가 그 목소리를 못알아들을리 없었다. 사쿠마선배? 놀란 안즈가 그렇게 물어보았고, 레이는 더는 도망가지 못하게 한 손으로 머리를 붙잡은 뒤 다시 입술을 부딪혀왔다. 얼마나 급했던건지, 입술이 부딪히면서 이까지 부딪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즈를 몰아붙였다. 숨, 막혀요. 잠시 맞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졌을 때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했으나 레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안즈를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이럴려고 온 게 아닌데. 두 사람이 지금 해야할 건 대화였고, 서로가 하고 있는 오해를 푸는 일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를 들어 제발 정신차리라고, 시원하게 한대 차 줄 생각이었는데 붙잡히고 말았다.

어둠에 익숙해지니 가장 먼저 보인 건 레이의 눈이었다. 안즈는 저렇게 무서울정도로 형형하게 빛나는 레이의 눈을 본 적이 없었다. 허나 저 눈빛이 뜻하는 게 뭔지는 알았다. 위험하다. 그는 지금 화가 나있었고, 안타깝게도 안즈의 말을 참을성있게 들어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빌어먹을 꼬마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말하는 레이가 너무 낯설었다. 와타루 그 자식이랑 무슨 이야기 했는지 당장 말해. 그렇게 말하는 사쿠마 레이는 너무 낯설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즈에게 중요한 건 그런 감정들이 아니었고, 지금 당장 그에게 대답을 들어야 하는 게 있었다.

...보고, 있었어요?
....
....설마 저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으니 레이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아, 봤구나.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방금전 그의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제야 안즈는 이 남자가 왜 저에게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도망다녔으니 어느정도는 각오했던 일이지만 이렇게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저를 맞이할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드는 감정은 바로 미안함이었다. 와타루는 전적으로 레이의 잘못이라고 했지만 안즈의 잘못도 없지는 않았다. 레이선배. 안즈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제 이름에 사쿠마 레이는 눈을 크게 뜨고 지금 뭐라고 했냐고,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레이선배. 잘못들은 게 아님을 깨닫자 레이는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웃는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에게 하고 싶었던 그 말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서 안즈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선배."

우리는 무슨 사이인가요?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왜 제 손을 잡아주고, 매번 저를 끌어안고 잠이 드나요. 제게 키스는 왜 하셨어요? 왜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저를 안았어요?

레이선배,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오래 전부터 속에 담고 있던 말을 내뱉자 드디어 앓고 있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와타루의 말과 방금 전까지 레이가 보여준 평소와는 다른 그 낯선 행동,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향했던, 오직 저만을 위한 말과 행동들을 생각하니 이제 안즈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었지만 역시 이런 건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레이는 누가 보면 멍청해보인다고 비웃을 정도로 망가진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나, 와타루가 말한 것처럼 그는 안즈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안즈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저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하기사, 똑똑한 사람이니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를리가 없었다.

"...아가씨. 혹시 히비키군이랑 한 이야기도 이거였는가?"
"어라, 선배 다시 어조가 돌아왔네요."
"묻는 말에만 답해주게. 그런 내용이었나?"
"네. 덕분에 우리 사이가 뭔지 히비키선배에게 먼저 들었지만요."
"하아...내 잘못이구만. 다 내 탓이야."

한숨을 쉬며 자신의 위로 쓰러지는 레이가 귀여워서, 이번에는 안즈가 그를 꼭 껴안아주었다. 당장 내일 히비키군 얼굴을 내 어떻게 보누. 한 번 화를 내면 꽤 무서운 자신의 친구를 생각하면서, 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제 잘못이 맞았다. 당연하게 거쳐야 하는 절차를 제멋대로 생략한 건 자신이었고, 말 그대로 안즈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아니, 아예 없지는 않지. 대체 내 이미지가 어땠길래 그런 오해를 하나 싶어서, 레이는 고개를 들고 소리내어 웃고 있는 안즈를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내가 아무나 붙잡고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사람으로 보였는가?"
"...그치만, 이 학원에선 적당한 사람이 저뿐이니까..."
"엄청난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구만.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을 정도라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대체 왜 받아줬는가, 나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 안즈가 무슨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묻는 게 조금은 얄미웠지만 모든 걸 말하기로 했으니까, 안즈는 더는 숨기지않고 제 속마음을 보여주었다.

"좋아하니까 그랬어요. 다른 사람이었으면 처음부터 거절했을 그 파렴치한 행동, 선배가 좋아서 받아줬어요."
"선배니까, 받아줬던 거라구요. 다른 사람은 싫어요. 방금 전에도 레이선배 목소리인 걸 알았기 때문에 받아준거에요. 좋아해요. 정말, 정말로 좋아해요..."

더는 울지 않기로 했는데, 차분하게 제 마음을 전달하려고 했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가만히 안즈의 말을 듣고 있던 레이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다지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뭐, 혼자 착각하고 있던 그 연애를 하는 동안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말이었으니 안즈의 「좋아한다」는 고백이 레이 입장에서는 싫을 리가 없었다. 사쿠마 레이는 안즈를 좋아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한 건 안즈뿐만이 아니었고, 레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라도 좋았던 게 아니었고, 그 사람이 안즈였기에 그랬을 뿐이었다.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백같은 절차를 거쳐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화를 불러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감정을 쌓아두지 않고 모두 뱉어내면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너무 돌아서 온 것 같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군. 안즈야."
"네, 레이선배."
"으음...역시 낯간지럽구만. ...안즈야. 나俺와, 사귀어주지 않겠는고?"

약간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도 이상하게 섞여 매우 우스웠지만 안즈는 그런 레이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역시나 그런 모습마저 좋아서 다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이 말 한마디가 뭐라고 여기까지 돌아왔나 싶지만 안즈는 그래도 레이의 진심을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대답은?"
"싫을리가 없잖아요..."
"그래도 답은 확실하게 받아야지. 또 이번처럼 혼자 오해하고 착각해서 아가씨가 나를 피한다면 이번엔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좋아해요. 레이선배 옆에 계속 있고싶어요."
"좋구나, 좋아. 절대 놔줄 생각 없으니 각오하는 게 좋을 게다."

혼자서 마음고생했던 것만큼, 아껴주고 사랑해주마.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그런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예뻐해줄테니 다시는 날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겠느냐, 안즈야?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는 레이에게 그러겠노라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한 안즈는 이제는 정말로, 아무런 근심과 걱정없이 다시 예전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래, 드디어 그렇게 웃는 구나. 자신이 정말 좋아했던,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그 태양처럼 반짝거리는 안즈의 웃는 얼굴을 말없이 보며, 그제야 사쿠마 레이도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레이선배.
응?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가?
저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
설마 히비키선배한테 질투했어요?

사쿠마 레이는 못들은 척 입을 다물었고, 다음 수업이 끝나는 종이 칠 때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안즈가 그 화제를 잊어버릴 수 있게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다음 날 와타루에 의해서 그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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