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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꽃, 그대 6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꽃, 그대 6

박로제 2017. 6. 3. 12:49







안즈는 제 고백을 듣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레이때문에 괜스레 불안해졌다. 빈말로도 지금 그의 얼굴은 제 고백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 고백이 그렇게까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걸까. 자신있게 속마음을 고백했지만 안즈는 이렇게 거절당하면 레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사쿠마 레이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안즈는 레이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갖고 고민해달라고 했지만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이라면 안즈는 레이가 이 자리에서 바로 거절해주길 바랐다. 그의 답이 거절이라면, 쓸데 없이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레이는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는지 조금은 편한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았다. 안즈야. 안즈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레이의 목소리가 긴장감을 품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답을 듣고 싶겠지만, 지금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그 이야기를 들은 뒤에 답을 들어도 늦지 않을 게다."
"...레이 씨의 이야기요?"
"그래. 네가 내게 전부 이야기해줬으니...나도, 전부를 이야기해줘야할 것 같아서 말이다."

안즈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계속 아이로 있어주길 바랐단다. 이유는 너랑 비슷했지. 어른이 되면 내 곁을 떠날테니까. 지금은 내가 있어줘야 하는 아이지만 어른이 되면 더는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테니까...그래서 네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매일 빌었지. 다시 생각해도 꼴사납구만. 이런 나를 겁쟁이라고 비난해도 달게 들으마. 안즈야, 나는... 나는 말이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단다. 우습지만 네가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나였고, 나 또한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했던 게지. 아, 딱히 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아도 이 아이는 언제나 내 옆에 있어주겠구나. 그런 착각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나를 정신차리게 만든 건 친구의 말 한마디였지. 음, 뭐였냐고? 어른이 되면 주위의 환경이 바뀌게 되고, 만나는 사람이 다양해지고,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듣고 겪을텐데 그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네가 내 옆에 있어주겠냐고, 무얼 믿고 그렇게 여유롭냐며 아주 신랄하게 비꼬았단다 그 친구는. 전부 맞는 말이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화가 나던지... 어른이 되어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걸어가는 너를 붙잡을 권리따위, 변화를 겁내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내게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치만...변명같지만 이 말만은 네가 믿어줬으면 좋겠구나. 나는 겁이 났단다. 내가 변하고자 용기낸 일이 실패로 돌아갈까봐, 지금 이 관계마저 깨질까봐, ...그리고, 가장 무서웠던 건 네가 나를 위해서 네 마음을 속이고 무리하게 내 옆에 있으려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그게, 겁이나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

내가 놀랐던 건 안즈, 네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란다. 너는 내 행복을 바란다고 했지? 나 또한 네가 행복하길 바랐단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널 옆에 붙잡아두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런 생각만 하루에 수천번은 한 것 같구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좀 더 많은 경험을 해야하는데, 내가 너의 미래를 방해하는 건 아닐까. 물론 나도 사람이다보니 이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이기적으로 굴어볼까 했지만...네 얼굴을 보고 있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지. 나의 소중한 안즈.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안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내가 지금 무얼 들은 거지. 레이는 혼란스러워하는 안즈의 얼굴을 보면서 난처해했지만 계속 쌓아왔던 것들을 모두 토해낸 그는 왠지 모르게 후련해보였다.

"너는 나의 행복을 바란다고 했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계로, 네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 것 같구나."
"그리고 그게 안즈, 너의 행복이라면..."

한번쯤은, 욕심을 내도 괜찮겠지. 레이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외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안즈가 아무리 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과 같을 거라고, 사쿠마 레이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안즈와 자신은 같은 자리에 함께 서있었지만 서로가 바라는 것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절대로 같은 곳을 바리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안즈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지금까지 맞다고 여겼던 것들이 모조리 틀린 답이 되었지만 레이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아서 지금 당장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거, 꿈인가요."
"꿈이었으면 좋겠는가?"
"아니요. 현실이었으면 좋겠는데...이런 게 현실일리가 없잖아요. 요즘 연애소설도 이렇게 진부하지 않아요. 서로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고민만 하고 있었다니. 팔리지도 않을 거라구요."
"안즈."
"이게 뭐냐구요...바보같아. 이런 거였으면 조금만 더 일찍 말하면 좋았잖아요. 나도, 레이 씨도."

소녀는 이게 형편 좋은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즈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것이 틀림 없는 현실이라고 말을 해줘야겠지만 사실 레이 스스로도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마주잡은 두 손은 현실이었고,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해보았지만 제 앞에는 평소와 다르게 웃고 있는 레이가 앉아있었다. 아, 현실이구나. 그제야 이게 꿈이 아님을 자각한 안즈가 결국은 울음을 터뜨렸다.


저 거짓말을 했어요. 사실은 오늘 레이 씨가 어디 가는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청소하다가 열려있는 서랍을 통해서 그 분의 사진을 봤거든요. 그걸 보고나니 너무 무서웠어요. 아, 레이 씨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저는 또 고민을 해야만 했어요.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써야 레이 씨가 그곳에 가지 못하고 나와 있어줄지. 저기, 그날 기억나요? 제가 울면서 처음으로 떼썼던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레이 씨는 차를 운전해야만 했죠. 그날과 똑같은 상황이었는데도 저는 레이 씨가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게 싫어서 전화를 했고 울면서 보고싶다고 떼를 썼어요. 레이 씨는 그걸 단지 혼자 있기 무서워했던 아이의 투정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틀렸어요. 저는 일부러 그런 연기를 했어요. 레이 씨를 누군가에게 뺏기고 싶지 않아서. 사실 오늘도 보내고 나서 엄청나게 후회한 거 알아요? 리츠 군 앞에서는 허세를 부렸지만 너무 무서웠어요. 오늘은 그래도 그때 그날처럼,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어린아이처럼 굴어볼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기는 했지만 그만큼 전 오늘 하루가 너무 지옥이었어요.

레이 씨는 제 미래를 위해서 말하는 걸 망설였죠?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 모든 걸 들은 이 순간에도 난 레이 씨가 제 미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는 레이 씨가 아니면 안되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이 집에 처음으로 왔던 날 당신이 제 손을 잡고 했던 말을 기억해요? 가족을 잃은 나에게 너의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했죠.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해줬어요. 그때부터 레이 씨는 제 전부였어요.

"이 말은, 내가 감당하기 너무 무거워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랑해요. 레이 씨는 제 전부고, 제 미래에요."

당신에게도, 제가 그렇나요? 안즈는 떨리는 손으로 레이의 두 손을 어루만졌다. 항상 따뜻했던 소녀의 손이, 긴장했는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있었다. 오히려 항상 차가웠던 레이의 손이 평소와 다르게 따뜻했기에, 그는 차갑게 식은 안즈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나는 안즈, 네가 없는 내일을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나에게도 네가 전부냐고 물었지. 솔직히 말하자면 전부라는 단어도 모자랄 정도로 내게 너는 그 이상의 존재지만 그걸 적절하게 표현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해다오. 너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했지. 나도 마찬가지란다. 나는, 네가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어.

"사랑스러운 나의 안즈.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단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들은 안즈는 참지 못하고 레이의 품에 안겨들었고, 레이는 기쁜 얼굴로 제게 안기는 안즈를 끌어안았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서로를 바라보았고, 이내 두 입술이 조심스럽게 부딪혔다.


드디어, 장마가 끝이났다.




**



아예 입양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권유하던 부모에게 필요없다고 딱 잘라서 말한 것은 레이였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안즈는 제게 있어서 가족이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그것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죽은 안즈의 부모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도 했기 때문에 더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레이는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그 이야기를 하는 제 가족들을 끝까지 무시했다. 결국 아들의 고집에 두손두발을 든 그의 부모는 입양을 포기했다 선언했고, 다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리츠는 안즈가 진짜 자신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레이가 뺏어갔다고 생각했는지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더 쌀쌀맞게 그를 대해서 레이를 슬프게 했지만 그 문제에서만큼은 리츠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이런 미래를 예견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었지만 어쨌든 레이는 과거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만약 그때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지금 두 사람은 절대 이런 사이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안즈는 편안한 얼굴로 레이의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같이 자겠다고, 제 옷소매를 잡고 그렇게 말하는 안즈가 사랑스러워 레이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같이 잠을 잤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어릴 때는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두 사람이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누워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이상하고 두근거렸다.

'이상해요.'
'이상하다고?'
'네. 이런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지금은 그때와 다른 기분이 들어요.'

이상하고 어색하지만 안즈는 그게 싫지 않다고 했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잘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수줍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지만 레이가 품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자 안즈는 곧바로 잠이 들었다. 제 속에 있던 것들을 모두 토해내느라 힘들었을테고, 그만큼 울기도 많이 울었으니 많이 지친 상태였을 거다. 잠이 든 안즈의 뺨에 조심스레 키스하며 레이는 안즈가 꿈도 꾸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길 바랐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 따뜻함은, 분명히 현실이었다. 레이는, 오랜만에 걱정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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