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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꽃, 그대 5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꽃, 그대 5

박로제 2017. 6. 1. 22:38






나오실 줄 몰랐는데, 꿈만 같네요.

레이와 단 둘이 남았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빨간 동백을 머리에 장식하고 깔끔하고 단정한 단색의 기모노를 입은 그녀는 마치 첫사랑 상대와 이야기하는 연애소설 속의 주인공 마냥 수줍게 웃으며 레이를 맞이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그녀는 뛰어난 미인이었고,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렀다. 건방져 보이겠지만 감히 말하건대 레이가 보기에도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기에 충분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레이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져왔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빗소리와 여름임을 알려주는 풍경소리, 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 등이 공간 안에 울려퍼졌지만 레이와 그녀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레이였다.

"...보자고 하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당사자에겐 실례지만, 사실 그녀와 만나면 자신에게 애절하게 고백하며 매달릴 줄 알았다. 적어도, 그렇게 매달리며 만나고 싶어하던 이와 만났으니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으나 그녀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고요한 침묵을 즐길 뿐이었다. 그리고 레이는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쿠마 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별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런 이유로 이런 자리를 만드셨다니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군요."
"그래도 이렇게 나와주지 않으셨습니까? 전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나는 이 혼사를 거절하기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처음부터 받아주실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쿠마 님을 직접 만나서 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겠다 싶어서, 정말 제 욕심으로 만든 자리니까요."

그녀는 단정한 얼굴로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랑 결혼할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제가 갖고 있는 이 감정은 분명히 연모의 감정이었지만 감히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을 욕심내나요. 그저...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제 첫사랑과 결혼 전에 한번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만든 자리랍니다. 사쿠마 님, 아.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을까요?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치고산이 막 지난 어린 아이가 보기에도 그 시절의 레이 님은 무척이나 멋있는 분이셨죠.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고백이요? 당연히 할 생각도 못했죠. 이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하려니 좀 부끄럽습니다만, 레이 님은 무리들 사이에서도 불가침의 영역이었으니까요. 그치만 한 번쯤은 말해보고 싶었어요. 말했듯이 혼사를 위해서 만나자는 건 핑계였고, 저는 다음 달에 다른 분과 결혼을 한답니다. 그 분도 오늘의 일을 알고 있냐구요? 오히려 가라고 등을 떠밀어주더군요. 가서 다 털어놓고 오라고. 그래서 저도 마지막으로 용기를 낼 수 있었지요.

"..."
"아주 많이, 좋아했어요. 답은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걸로도 충분하니까요."

편지를 보내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얼굴을 보고는 말할 수 없으니 글로 쓰면 조금은 나아질까 싶어서요. 그런데 레이 님의 이름을 쓰고나니 한 글자도 쓸 수가 없더군요. 온갖 시집과 책을 쌓아두고 어울리는 말을 골라보았지만 무리였답니다. 그래서 결국 포기했던 적도 있었죠. 그만큼 제가 당신을...좋아했어요. 당신은 제 얼굴을 기억하지도 못할텐데, 내 이름도 제대로 모를텐데. 그래도 좋았어요. 당신을 좋아할 수 있어서, 당신이 제 첫사랑이라서...정말 행복했답니다. 자칫 잘못하면 불쾌할 수 있을텐데도 묵묵히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수줍게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녀는 정말로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어째서 이런 만남으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해할 수 있는 걸까. 레이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용기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거절을 각오하고 내내 숨겨왔던 속마음을 내뱉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아마 자신은 평생 알 수 없겠지. 그녀는 이걸로 충분하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악수를 청했다. 사실은 마지막으로 한번 욕심을 내볼까 했는데, 저한테는 이게 한계인 것 같네요. 그 손을 마주 잡으니 그녀는 조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레이의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아마 그녀는 죽도록 노력했을 것이고, 사실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쿠마 레이도 그런 그녀의 노력을 끝까지 모른 척해주었다.

입안이 썼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안즈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레이는 알 수가 없었다.





​​레이안즈 : 꽃, 그대 5





안즈를 언제부터 좋아하고 있었는지 레이는 알지 못한다. 그냥, 어느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아이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좋아하게 된 과정마저도 첫만남같아서, 그 마음을 깨달았을 땐 어울리지 않게 소리내어 웃기도 했었다. 연민과 동정으로 아이를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안즈에게는 가족이 되고 싶었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정확히는 안즈와 자신이 살 집을 정하고 이사를 준비하면서 생긴 마음이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땐 그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냥, 비오는 날 수국을 끌어안고 제 부모님을 부르는 그 아이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고, 옆에 두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사쿠마 레이는 그 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으로 남과 같이 사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안즈는 레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첫 날에 그러지 않아도된다고 몇번이나 얘기해주었지만 안즈는 그걸 쉽게 고치지 못했고, 착한 아이가 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이제 막 시치고산이 지난 어린 아이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자꾸 어른처럼 굴었고, 결국 그걸 참지 못한 레이가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쌓여왔던 것이 터진 원인은 함께 살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나간 생일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레이가 늦었지만 생일을 축하한다며, 원하는 게 없냐고 물은 레이에게 생일선물은 필요없다고 말한 안즈때문이었다.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이는 축하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 말만은 도저히 참고 넘어가줄 수가 없어 레이는 화를 냈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안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고 전 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저녁에 엄마가 전화를 했었어요. 일찍 돌아가고 싶었는데 일이 생겨서 늦어질 것 같다고. 올해 생일은 함께 축하해줄 수가 없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요 엄마가.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알았다고 넘어가면 되는데 그날은...너무 싫었어요 그게.'
'그래서 빨리 오라고, 혼자서 생일을 맞이하는 건 싫다고 투정을 부렸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알았다고, 빨리 올라가겠다고...미안하다고 했는데 듣기 싫어서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어요.'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나뿐인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부부는 비가 세차게 내림에도 불구하고 그 늦은 밤에 운전을 했을 것이고...레이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안즈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생일을 축하 받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린 아이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고, 왜 사소한 것조차도 자신에게 부탁하는 걸 극도로 꺼려했는지 레이는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쿠마 레이는 아이를 이렇게 계속 놔둘 생각이 없었다. 안즈가 그날 전화로 했던 건 어린 아이가 당연히 부모에게 할 수 있는 투정이었고, 거기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늦은 밤에, 빗길을 운전하겠다고 선택한 것은 안즈의 부모였다.

'아이가 생일에 부모와 함께 하길 원하는 건 나쁜 게 아니란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한 안즈, 너의 부모님도 나쁜 게 아니지.'

틀에 박힌 답이었지만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이 사고는 누가 더 나빴는 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벌어진 불행한 사고였고, 레이는 그런 일로 안즈가 본인이 태어난 날을 싫어하지 않길 바랐다. 그건 본인이 바라지 않는 일이었고, 죽은 아이의 부모가 바라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너를 원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나도 네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하는 말이 이해도 되지 않을 거고, 그럴 마음도 없겠지. 그렇지만 나는 네가 너무 거기에 매여있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돌아가신 부모님도 그건 바라지 않을게다 안즈야. 어떻게 아냐고? 글쎄...위험한 걸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던 분들이 너를 미워할 것 같지 않아서 말이다. 그래도 마음에 걸린다면 강요하지는 않으마. 대신에 부모님을 보러 가자꾸나. 그정도는 괜찮겠지? 그리고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다오. 나는 너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사고 또한 절대 네 탓이 아니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니까...이것만큼은 믿어줬으면 좋겠구나. 우린, 이제 가족이니까 말이다.

별 거 아닌 말이었다. 특별한 말로 위로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안즈는 그날 레이의 손을 잡고 울다가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난 아이는 그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물론 내년에 그와 함께 맞이하는 「첫 번째」생일이 되었을 때 또 축하와 선물은 필요없다고 해서 레이는 화를 내고 안즈는 우는 일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레이가 주는 것들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는 축하도, 선물도 받지 않으려 했고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안즈는 그래도 레이가 주는 것은 아무 말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힘들어 하기는 했지만 생일날 레이를 따라서 부모님을 보러도 갔고, 그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직 어리니까, 조금 더 크면서 많은 것을 보고 생각이 바뀌게 되면 지금과 다르게 자신의 생일을 기쁘게 축하할 수 있기를, 레이는 간절히 바랐다. 안즈의 생일은, 그런 속사정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는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아이의 생일을 독점할 수 있었다.


이 마음을 깨달은 것도 안즈의 생일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눈이 빨리 떠져 오늘은 반대로 자신이 안즈를 깨워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에는 안즈가 없었고, 이 시간에 어딜 갔나 싶어서 걱정하며 거실로 나가보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수국 앞에 서있는 안즈를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한여름이라고 해도 이런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레이는 수국을 끌어안고 우는 안즈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때 그날처럼 서럽게 울며 제 부모를 부르는 안즈를 보고 있으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레이는 재빨리 제 방으로 도망쳤고, 그 뒤에 안즈가 자신을 깨우러 올 때까지 자는 척을 했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레이의 친우는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악취미라고 웃는 얼굴로 비난했다. 사람의 우는 얼굴에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닫다니, 레이도 악취미군요.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딱히 부정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이의 우는 얼굴을 한두번 본 것도 아니었다. 같이 살기 시작했던 초반부터 지금까지 자주 있는 일이었고 그때마다 자신이 크게 감정의 변화를 겪은 것도 아니었다. 유독, 비를 맞으면서 그 꽃을 끌어안고 우는 안즈만 보면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레이는 그 아가씨와 무슨 사이가 되고 싶나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나?'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내 옆에 있을 건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이런. 레이, 그 아이는 곧 어른이 될텐데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옆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자신의 옆에 있었고, 안즈의 우선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럴 줄 알았던 레이에게 그의 친우가 한 말은 슬프게도 현실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은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지만 언젠가는 어른이 될 것이고, 당장 눈에 보이는 관계에 만족하고 변하지 않으려는 레이에게 어른이 되어서 성장해가는 아이를 붙잡을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소중하다면 바꿔야지요. 변화가 두려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그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레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는데 정작 안즈는 그렇지 않다면? 물론 자신이 길렀으니 제 고백에 안즈가 어떻게 나올지 레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곤란한 얼굴로 웃겠지만 그걸 받아줄 것이고, 그를 좋아하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자신을 지금까지 보살펴 준 보답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레이는, 우습게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렇게까지 가지 않을텐데, 상대가 안즈이다보니 그 사쿠마 레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아직까지도 얼마나 아이를 괴롭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래서 레이는, 안즈가 행복하길 바랐다. 모든 걸 다 털어버리고 아무런 걱정없이 밝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리츠는 안즈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도 없냐고 그를 꾸짖었지만 레이는, 정말로 자신이 없었다. 나와 함께 지내는 것이 안즈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일까? 이 아이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냐 하지 않을까. 나보다 더 그 아이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 만남을 막는 게 아닐까. 겁쟁이라고 욕해도 좋았다. 레이는, 그렇기 때문에 안즈에게 고백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어 그 아이가 더는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괴롭기는 처음이었다. 장마기간에는 최대한 집을 비우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답지않게 빠르게 걷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안즈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몰라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도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늘따라 이 길이 왜이리도 짧은지, 평소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쉰 레이는 몇번을 망설이다가 열쇠를 꺼내서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마루에 있던 안즈가 현관으로 와서 인사를 했고, 레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저녁은요? 먹었으니 걱정말거라. 사실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식탁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할 수는 없어서 거짓말을 했다. 오늘은 정말 계속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게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갈려던 레이를 붙잡은 것은 안즈였다.

"이야기 좀 해요, 레이 씨."
"으음...중요한 게 아니면 내일 했으면 좋겠구만..."
"지금 해야해요. 내일은 안돼요."

답지않게 단호한 얼굴로 말하는 안즈때문에 레이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고, 결국 방으로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레이는 안즈에게 붙잡혀서 마루로 끌려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 비를 맞으면서도 마당의 수국은 화려하게 피어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봐달라며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드는 안즈 덕분에 정신을 차린 레이는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앉은 아이를 바라보았고, 안즈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리츠 군이 왔었어요."
"리츠가?"
"네. 오늘 레이 씨가 어딜 갔다왔는지 말해줄려구요."
"...잠깐, 지금 뭐라고?"
"저, 레이 씨가 어디 갔다왔는지 들었어요."

사랑하는 동생에게 화를 내고 싶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잘 숨겨주던 리츠가 무슨 일로 저와의 약속을 어기고 안즈에게 말을 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레이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됐어요? 좋은 사람같아 보이던데."
"안즈야."
"괜찮아요. 숨겼다고 해서 저 화내는 거 아니에요. 저랑 했던 약속때문에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거, 알고 있어요."
"...거절하고 왔단다. 하도 나와달라 매달려서 나간 것 뿐이지, 사실은 나갈 마음도 없었어."
"왜 거절하셨어요?"
"안즈 네가 있는데 내가..."
"레이 씨, 저 곧 어른이 돼요."

자신이 하던 말을 끊으면서 안즈가 한 말은 레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아이가 그런 말을 해버리면 싫어도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게 했고, 사쿠마 레이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더 말하지 못하게 말려야 하는데, 자신에게 그럴 권리는 없었다.

"그 악속은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였죠. 그러니까 이제 저때문에 그런 혼담을 거절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안즈야. 나는-"
"저는 이제 아이가 아닌 걸요."

그렇게 말하지마.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안즈는 웃고 있었지만 레이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아, 이 아이가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구나. 막연히 생각만 하고 두려워하던 그 일이 이렇게나 빨리,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그런 이유때문에 지금까지 내게 들어오는 혼담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역시나 레이에게, 그것을 말할 자격이 없었다.

"레이 씨가 저를 선택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들을, 늦었지만 돌려주고 싶었어요."

아니다. 나는 한번도 너를 선택해서 무언가를 포기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는 레이 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저와 함께했던 그 시간이 레이 씨에게 행복했을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그래도 이제, 다른 행복도 겪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하지마, 제발.

"레이 씨의 안즈는,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결과는 이렇게 다른 걸까. 사쿠마 레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울고 싶어졌다.

"그치만 마지막으로, 아이처럼 욕심을 부려도 될까요? 이걸 들어줄지, 아니면 거절할지는 레이 씨의 자유에요."

결심했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는 안즈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순간, 레이는 자신이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어서 누가 보면 비웃을 정도의 얼빠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를 안즈는 눈치채지 못했고,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레이 씨에게 어리광 부려보는 것 같네요. 아, 그렇다고 무조건 들어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런식으로 들어주면 오히려 화낼 거니까요 저. 수백번, 수천번을 고민했어요. 내가 감히 이 마음을 고백해도 될까? 내 욕심때문에 지금 이 관계마저 망가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너무 겁이 났어요. 나한테는 레이 씨가 전부니까, 내 욕심때문에 모든 걸 버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아이로 있고 싶었어요. 적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아이로 있다면 레이 씨의 옆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치만 이번에 깨달았어요. 그 상태로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요. 시간은 흘러갈 거고, 저는 어른이 되겠죠. 이건 제가 아이처럼 떼를 써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번화를 받아들이고, 조금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다른 사람과의 행복도 겪어봤으면 좋겠다고 허세부리면서 말해놓고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 말만은 하고 싶었어요. 이 마음도 고백 못하고 레이 씨를 떠나보내는 건 억울하니까. 좋아해요. 이건 제가 하나 뿐인 가족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가족이 아닌 사쿠마 레이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니까, 지금 답을 들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주세요.


아,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 푸른 눈을 보고있으니, 사쿠마 레이는 울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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