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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춘광사설(春光乍洩) , 0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춘광사설(春光乍洩) , 0

박로제 2017. 7. 4. 13:50





홍콩의 여름은 덥다. 덥고 습하며 비가 지나치게 많이 내리고, 장마 기간에는 집에 얌전히 쳐박혀있는 게 좋을 정도로 사람이 견디기 힘든 날씨였다. 심지어 스콜과 같은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귀찮지만 우산은 필수였고, 안즈의 가방 속에는 항상 작은 우산이 하나 들어가있었다. 오늘도 일을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심상치않았고, 장을 보고 나오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오늘은 월급을 받아서 먹고 싶었던 토마토를 드디어 샀기 때문에 온몸이 젖어도 이것만큼은 지켜야했고, 결국 안즈는 입고있던 가디건을 벗어 물건을 감싼 뒤 우산을 쓰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사실 택시라도 잡으면 되지만 쓸데없이 거기에 돈을 쓸 이유도 없었고, 안즈의 집 앞까지 친절하게 가 줄 택시는 이 홍콩을 뒤져도 없었다. 이곳은 도시계획도 없고 인구만 자꾸 늘어나는 상태에서 건물을 어떻게든 증축하고 개축해야하니 자꾸자꾸 높이 빌딩을 세우게 되고, 이런 것들을 반복하다보니 건물이 닭장처럼 빽빽해져서 대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전등을 켜야했다. 어둡고, 축축한 습기가 가득하며 골목은 미로와도 같았고, 전기배선이나 수도관이 늘어져있는 모습은 빈말로도 보기 좋다고 할 수 없는 빈민굴인 이곳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없었고, 더군다나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치안이 엉망인 이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운전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즈는 그냥 이 작은 우산을 쓰고 이 폭우를 견디며 걷기로 했다. 물론 안즈는 토마토만 무사하면 아무래도 좋았으므로, 자신이 비를 맞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자 혼자서 이 거리를 살아가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안즈가 무사히 이 거리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 애초에 태어난 장소가 이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악을 쓰며 버텼고, 그 결과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안즈가 목숨을 살려 준 이가 한두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은혜를 갚고자 안즈가 무사히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도 있었다. 그런 배려따위 사실은 별로 필요도 없으며 이제 과거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그런 배려같은 건 해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다지 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에 생각만 그리할뿐,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아, 다왔다.

우산을 쓴 보람도 없이 신발이고 가방이고 다 젖어서 멀쩡한 건 품안의 토마토 밖에 없었다. 집에 가면 씻어야지, 토마토로 뭘 해먹을까. 그냥 씻어서 바로 먹어버릴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집이 가까워졌고, 안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 들어가면 씻지도 않고 바로 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이 전봇대 하나만 지나가면 바로 집인데,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편하게 쉴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안즈는 그러지 못했다. 못본척하고 쓰레기가 오늘따라 많이 쌓였네, 하고 넘겼어야 했는데 죽다 만 시체와 눈이 마주쳤고, 안즈는 평소처럼 그냥 보기만 하고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쓰레기인 줄 알았다. 정리가 되지 않는 곳이니 쓰레기가 쌓여있는 건 일상이었고, 그위에 사람 한두명쯤이 죽어있다고 해서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오늘 안즈가 만난 건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고, 못본 척하고 지나갈 수 없게 눈까지 마주쳐버렸다. 물론 마주친 그 붉은 눈은 쳐다보지 말고 꺼지라는 눈빛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안즈는 그러지를 못했다. 다시는 이렇게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없길 바랐는데, 신의 장난인지 오늘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남자는 놓고 꺼지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안즈는 그걸 무시했다. 품안의 토마토를 가방 안에 억지로 쑤셔놓고 이제는 별로 쓸모도 없어진 우산을 쓰레기 더미에 갖다버렸다. 좀 아깝기는 했지만 제 구실도 못하는 우산따위 갖고 있어봤자 짐만 될 뿐이었다. 제 키보다 한참 큰 남자의 팔을 잡고 일으켜 제 몸에 기대게 만든 안즈는 이를 악물며 물에 젖은 솜이불마냥 무거워진 남자를 이끌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들어갔다. 평소에는 집의 위치가 너무 낮아 조금만 더 높은 층에 살길 바란 적이 있지만 지금은 낮은 층에 위치한 제 집이 너무 고마울 정도였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안즈는 그 남자를 욕실 안에 집어던졌고, 양동이에 찬물을 받아와 건물 복도와 계단에 남아있던, 남자가 지나온 흔적을 싹 다 지워버렸다. 혹시 모르니까 흔적을 지우는 건 필수였다. 대충 그 흔적을 지워낸 안즈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고,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남자에게 샤워기를 틀어 대충 씻겨주었다. 던지면서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했는지 그는 기절한 상태였고, 조용히 씻길 수 있어서 안즈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옛날 습관이라는 거 정말 무섭네. 이러고 있으니 옛생각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와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점점 거세게 내리고 있고, 옛날 생각은 나고, 또 사람을 주워오고. 토마토를 사서 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기분좋은 생각을 하자.

억지로 좋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안즈는 대충 씻겨낸 남자의 몸을 닦아내고 대충 응급처치로 상처를 치료한 뒤 방구석에 쌓아두었던 박스를 꺼내 남자옷을 찾아내서 그에게 입혀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기에 안즈가 갖고 있는 걸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냥 놔두고 왔어도 됐던 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물론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다가 아끼던 연분홍빛의 셔츠가 비에 젖은 것도 모자라서 핏자국까지 묻어있는 걸 확인한 안즈는 저 남자가 눈을 뜨면 목숨을 살려준 값을 톡톡히 받아내겠다고 다짐했다.

토마토 사달라고 해야지.

옷은 빨아서 자국을 없앨 수 있으니까 먹을 걸로 보답해달라고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즈는 눈을 감았다.



**



사쿠마 레이는 낯선 천장을 바라 보며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필사적으로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큰 싸움이 있었고, 함정에 걸려 그는 심각하게 다친 상태로 이곳까지 도망쳤다. 목숨에 그다지 미련은 없었지만 자신이 먼저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다친 몸을 이끌고 추적을 피해 도망치다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고 더는 자신을 쫓아오지 않자 안심하며 그대로 쓰레기 더미 위로 쓰러진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중간에 정신이 몽롱하게 들었을 때 어떤 여자와 눈이 마주친 기억이 나는데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일어났어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황급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일어났냐고 묻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거 꿈이 아니었구만. 그제야 모르던 여자가 자신을 도와주겠다며 끌고갔던게 기억이 났고, 레이는 여기가 저 여자의 집이라는 것도 간단히 유추할 수 있었다.

「당신 이틀이나 깨지도 않고 잤어요. 자는 건 줄 몰랐다면 시체인 줄 알고 버렸을 걸요.」
「내가 이틀이나 잤다고?」
「그래요. 덕분에 일도 못나갔어요. 어차피 이번달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긴 했지만...」
「...그냥 땅바닥에 버리고 오지 그랬나?」
「그럴 수는 없죠. 아, 말 편하게 하세요.」

"저도 일본인인거든요. 정확히는 혼혈이지만."

계속 광동어를 쓰던 여자는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익숙한 언어를 썼고,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레이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유창하게 모국의 말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내가 일본인인 건 어떻게 알았지?"
"얼굴을 본 건 처음이지만 누구인지는 알고 있으니까요."
"아가씨가 알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그렇다만... 이제 저랑 상관 없는 사람이긴 한데, 제 스승이었던 사람이 당신과 친구여서 모를 수가 없었어요."
"스승과 친구라고?"
"히비키 와타루. 그사이에 절교라도 한 건 아니죠?"

그녀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레이는 옛날, 자신의 친구가 흘리듯이 말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제자 두명을 키우고 있는데 말이죠. 둘다 너무 뛰어나서 곤란할 정도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던 스승의 얼굴을 한 와타루의 목소리에는 뿌듯함과 기쁨이 담겨 있어서 신기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명이 더는 버틸 수 없다며 자신을 떠났다고 말했을 때, 굉장히 슬퍼하며 우울해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한명은 이미 레이도 익히 알고 있는 나츠메니까, 이 여자는 남은 한명인 '안즈'가 분명했다. 죽어가던 자신을 살려준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와타루의 제자라니. 기막힌 우연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것때문에 나를 살린 건가?"
"아. 그건 아니예요. 데려올 때는 얼굴을 제대로 못봤거든요."
"그러면?"
"치료 끝나고 보니까 익숙한 얼굴이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와타루 씨의 친구더라구요. 그러니까 그 이유로 살린 건 아니예요."
"특이한 아가씨로구먼."
"그거에 별로 큰 의미는 두지마세요. 전 그냥 다친 고양이 한 마리 주워와서 씻기고 치료한 것 뿐이니까."
"...하아?"
"그러니까 사람인 척 하지말고 고양이인 척 해주세요."

무표정한 얼굴로 이상한 말을 내뱉은 안즈와, 그 말에 기가 막힌 레이는 멍청한 얼굴로 지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있냐고 되물었다. 물론 안즈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와타루의 제자를 그만두고 그와 인연을 끊으면서 다시는 사람을 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을 했었다. 간혹 오늘처럼 길을 가다가 다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을 도와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그랬어야 했는데, 집에 데려와 살려준 것도 모자라 이렇게 일어날 때까지 좁은 집의 공간을 내어주고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긴다고 해서 그다지 손해를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여, 안즈는 이 남자를 그냥 고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까맣고 눈이 빨간, 덩치 큰 고양이.

그러나 사쿠마 레이는 자세한 속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 말을 이상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자신을 해칠 생각도 없어 보이고 와타루의 제자였다는 말을 들으니 경계보다는 친근감이 느껴졌지만 그 말을 들으니 레이는 눈 앞의 여자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다.

"...아가씨는 그런 취향인가?"

결국 진지한 얼굴로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걸 말해버렸고, 안즈는 들고 있던 젖은 수건을 레이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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