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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접시꽃당신 下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접시꽃당신 下

박로제 2017. 7. 11. 00:58



*316 - 망향을 들으시면서 봐주세요.




할머니의 작은 화원에는 갖가지의 꽃이 심어져있었고, 계절에 맞는 꽃들이 피어났지만 수국은 원래 없던 꽃이었다. 할머니는 수국을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그 꽃을 기르려고 한 적은 없었다. 좋아하는데 왜 기르지않아요? 그렇게 물었을 때, 할머니는 누군가가 생각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제게만 말해주길래 츠바키는 여태까지 그 수국이 첫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남자와 함께 보내는 첫 여름이 시작되고 장맛비가 내리면서 할머니의 작은 화원에는 탐스러운 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아, 혹시. 문득 그때의 대화가 생각이 나서 츠바키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왜 수국을 기르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츠바키는, 그 사람이 사쿠마 레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직접 꽃을 키웠다면, 사쿠마 레이는 올 때마다 항상 다른 꽃을 사왔다. 그 꽃에 모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조금 나중의 일이지만 츠바키는 그 행동이 굉장히 로맨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꽃은 시들면 끝이고, 그 뒷처리도 귀찮으며 그다지 쓸모도 없는 선물이었지만 할머니는 그걸 좋아했으니까, 선물을 받는 사람이 좋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니까 별 말 않고 계속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 남자가 사온 꽃은 항상 꽃병에 꽂혀있었고, 그가 오늘 사온 꽃은 하얀 백합이었다. 그리고 사온 꽃을 주면서 하는 말은 항상 똑같았다.

「아가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레이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한 번도 츠바키를 아가씨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를 종종 아가씨라고 불렀는데, 어쩐지 「안즈」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보다 그렇게 부르는게 더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물론 츠바키는 차라리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낫지 아가씨같은 호칭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다만, 레이가 「안즈 아가씨.」라고 자신을 불렀을 때 할머니의 얼굴이 좋으면서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할 때가 있었다. 그 호칭도 오랜만에 들으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그리 말하며 웃는 할머니를 보면서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 들어서 츠바키는 사쿠마 레이라는 남자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할머니에게 어려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허세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많은 연인의 앞에서 어려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이것때문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학교의 친구에게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위의 남학생들은 전부다 츠바키의 생각에 동의해주었고, 마찬가지로 엄마보다 나이가 5살은 적은 아빠에게도 이 일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거 할머니 이야기니? 혹시 모르니 다른 애들에게 말했을 때처럼 할머니와 그 남자의 일이라는 걸 숨기고 일부러 돌려서 말한건데도 할머니의 이야기임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그렇게 물어봐서 츠바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할머니의 연애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저뿐인 줄 알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아빠도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되물으니 소녀의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것도 모르고 그걸 숨기기 위해 거의 1년 동안이나 혼자서 난리를 치고 그랬던 걸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웠지만 제 부모님이 할머니의 연애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더 고마웠기 때문에 그 부끄러움은 쉽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신기해요. 나는 아빠가 할머니 연애에 제일 심하게 반대할 줄 알았거든요.」
「반대할 이유가 없잖니. 할머니도 할머니의 인생을 살아야하니까, 아빠가 그걸 막을 권리는 없어.」
「그 사람 만나본 적 있어요?」
「딱 한 번. 좋은 분이시니까 버릇없게 굴면 안된다.」
「아빠는 그 사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세상에는 가끔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자주 일어나니까 그럴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란다.」

조금 핀트가 어긋난 대답이었지만 그 답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고, 대화의 화제는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결국 츠바키는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고, 오히려 궁금증만 더 커진 상태로 할머니를 만나러가야만 했다. 가서 할머니한테 물어볼까.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이래저래 고민만 하다가 도착한 할머니의 집은 아무도 없는지 불이 꺼져있고 조용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가까운 바다로 데이트를 간다고 했었던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츠바키는 타고 왔던 자전거를 세워두고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마루에 누워있을까 싶었지만 이런 날씨에 선풍기 없이, 그리고 굳이 선풍기를 들고 나오면서까지 밖에 있고 싶지는 않아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들고 가장 시원한 할머니의 방으로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츠바키가 본 것은 탁자 위에 놓여져있는 앨범이었다.

"이게 뭐지?"

유메노사키? 익숙하고 몇 번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그 앨범을 대충 훑어보니 학교 이름인 것 같았다. 아, 혹시 할머니가 나왔다는 그 학교 이름인가. 아이돌 육성 학교에서 만든 프로듀서과의 첫 졸업생이자 전학 당시 유일한 프로듀서였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다는 걸 츠바키는 기억해냈다. 그럼 이건 그때의 앨범이구나. 옛날 이야기는 자주 해줬지만 사진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할머니때문에 츠바키는 자신과 그렇게 닮았다는 할머니의 젊었을 적 사진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멋대로 봐서는 안되지만 두 사람은 늦어도 저녁에 올테고 아직은 해가 쨍쨍하게 떠있는 한낮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들키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츠바키는 그 앨범을 펼쳤다.

역시 아이돌 학교의 학생이라서 하나같이 잘생긴 사람들 뿐이었고, 익숙한 얼굴도 발견할 수 있었다. 츠바키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린, 풋풋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라거나 느낌이 남아있어서 금방 지금의 모습과 매치시킬 수 있었다. 아 아케호시 씨네. 지금이랑 다른 게 얼굴 뿐이잖아. 나루카미 씨는 이때는 굉장히 예쁜 얼굴이었네. 신기한 마음으로 한장, 한장 넘기다보니 어느새 졸업앨범은 끝이 나있었다. 할머니의 졸업사진은 마지막 쯤에 볼 수 있었고, 츠바키는 눈 색을 제외하고 자신과 똑닮은 할머니의 학생 시절 모습을 보고있자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쿠마 레이가, 처음 자신을 만났던 날 할머니로 자신을 착각한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었다. 물론 세세한 것까지 따지고보면 사진으로 보이는 분위기라거나, 눈 색 같은 것들이 다르기는 했지만 할머니와 츠바키는 굉장히 많이 닮아있었다. 마음같아서는 사진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으므로 할머니의 졸업사진을 하나 하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어서 잠금을 걸어 둔 앨범 안에 고이고이 숨겨두었다.

"어라, 앨범이 더 있었네?"

졸업앨범을 원래 있던 모양 그대로 두고나니 크기에 가려져서 보지 못했던 작은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의, 꽃이 그려져있는 작은 앨범은 자주 보았다는 걸 알려주듯이 손때가 묻어있었다. 이미 졸업앨범까지 보았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기에 츠바키는 그 앨범을 펼쳐보았고, 거기서 학교 졸업앨범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할머니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배로 보이는 남학생이 꽃다발을 건네주면서 우는 사진도 있었고, 꽃다발에 파묻혀서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사진도 있었다. 서로 옆에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투닥거리는 사진도 있었고, 졸업한 선배들로 보이는 사람도 보였다. 이 작은, 소중한 앨범에는 할머니의 학창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말로만 전해들은 할머니의 학창시절은 굉장히 반짝 반짝 빛이 났고 멋있어 보였기 때문에 츠바키는 거기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와 가장 친했다던 트릭스타의 무대도 비디오로 본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보냈던 시간이 달랐기 때문일까, 대단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굉장히 멀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런 사진들을 보고 있으니 할머니도 평범하게 학창시절을 보냈구나 싶어서, 할머니와 저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지막 장에는 단 두 장의 사진만이 있었다. 두 장의 사진 속 배경은 똑같이 졸업식이었는데, 하나는 같이 찍힌 남자의 졸업식인 것 같았고 다른 하나는 할머니의 졸업식인 것 같았다. 다른 사진과는 달리 많이 만지고 보았는지 낡았다는 느낌을 주는 그 두 장의 사진에 있는 사람은 츠바키의 할머니인 안즈와 그 남자, 「사쿠마 레이」였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아니, 그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선배라면, 그때와 지금의 얼굴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생긴 얼굴이 세상에 두 명이나 존재할 리가 없었고, 닮은 사람이라고 넘기기엔 그간 듣고 봐왔던 그의 말투와 이상한 행동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보니 그 남자는 대체 왜 학생시절의 할머니를 잘 안다는 것처럼 말했던 걸까. 그는 항상 츠바키를 보면서 그렇게 말했었다. 「얼굴말고 그 성격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그때 조금은 편했을텐데.」 먼 과거를 추억하는 듯한 얼굴로,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듯이 자신을 바라보며 그런 말을 하던 남자를 츠바키는 기억해냈다.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묘했던 그 행동과 말들이,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색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대체 무엇인가. 할머니와는 정확히 어떤 사이이며, 그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만지고 만져서 낡아져버린 사진과, 누가봐도 행복한 연인으로 보이는 사진 속의 두 사람. 사진의 뒷쪽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었다. 「겨울, 레이 씨와 함께.」 이런 얼굴과, 그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세상에 둘 씩이나 존재할 리가 없었다. 츠바키는 앨범을 원래 있던 곳에 두며 도망치듯이 그 집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이안즈 : 접시꽃당신 下





오늘은 비가 아주 많이 왔고, 남자는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할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는 데도 수국은 탐스럽게 피어있었고, 습기 때문에 온 몸이 끈적했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날이었다. 할머니가 만들어 온 수박화채를 마루에 앉아 기계처럼 퍼먹으면서 멍하니 밖만 보던 츠바키는 일주일 동안 고민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방학숙제라거나, 친구와의 약속같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할머니 집에 오는 걸 피한 츠바키가 오늘 여기에 온 것도 그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조금 에둘러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할머니."
"응? 뭐 필요한 거라도 있니?"
"으응, 그건 아니고...궁금한게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아요?"
"우리 츠바키가 궁금한 거라면 뭐든 다 말해줘야지."
"할머니,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사람 있었어요? 왜, 있잖아요. 첫사랑같은 거."
"첫사랑?"
"네. 할머니가 어떤 사람을 좋아했는지 궁금해요."

다행히도 곤란한 질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으면서 주위를 조금 둘러보더니, 이건 할아버지도 모르는 이야기니까,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지말고 우리 츠바키만 알고 있어야 한다? 할머니의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만난 사람이란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츠바키는 자신이 제대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남자에 대한 걸 들을 수 있는 건가?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츠바키는 그 뒤의 이야기를 기다렸으나, 막상 나온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가끔 놀러오는 눈이 예쁜 할머니 친구를 기억하니?"
"어...으음....할머니를 안지, 라고 부르는 그 분이요?"
"그래. 그러고보니 오늘도 전화가 왔었지. 다음 주에 그쪽으로 찾아가도 되겠냐고."
"그런데 그 분은 갑자기 왜요? 할머니 첫사랑 이야기 중이었잖아요."
"비밀인데...그 친구가, 할머니의 첫사랑이란다?"
"네에?"

전혀 예상도 못했던 상대의 이름이 나오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름의 주인이 첫사랑이라는 말에 답지 않게 당황한 츠바키는 이상한 목소리를 내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달라고 할머니에게 따질 생각이었으나 그러질 못했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꽃다발을 진흙 바닥에 떨어뜨린 사쿠마 레이가 엄청나게 충격받은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만, 지금 뭐라고. 안즈. 내俺가 첫사랑이 아니었다고?"
"이런. 다 들었어요?"
"말도 안돼. 예전에 물어봤을 때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내게?!"
"그걸 믿었어요?"
"안즈!"

처음보는 얼굴로, 엄청나게 충격적인 사실을 들은 사람처럼 횡설수설하며 평소와 다른 말투로 말을 하는 남자를 보면서 츠바키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재밌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알고싶은 진실은 뒷전이었다. 지금은 평소의 여유로운 이미지를 다 갖다버리고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구는 사쿠마 레이를 구경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얌전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로 했다. 게다가, 레이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을 생각하면 츠바키의 질문이 아무런 소득도 없는, 쓸데 없는 짓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첫사랑이 자기라고 믿고 있는 남자. 만약 만난 것이 최근이었다면 저런 말은 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그때는 할머니의 옆에 할아버지가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그는 할머니의 친구인 「스즈 씨」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츠바키는 그제야 자신의 머릿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가 조금 걷히는 것 같았다.

"농담이예요. 이렇게 속을 줄은 몰랐네요."
"...그 말 진짜인가?"
"제가 언제 레이 씨에게 거짓말한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정말...왔으면 바로 들어오지, 숨어서 훔쳐 들을려고 하길래 일부러 그런 거예요. 나도 한 번쯤은 레이 씨 놀려보고 싶어서."

거짓말. 할머니의 말에 그런 건가, 하며 진정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남자를 방 안으로 들이며 츠바키와 눈을 마주친 할머니는 아까 전과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맞구나. 그 말을 믿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 온 사쿠마 레이를 보면서 츠바키는 처음으로 그 남자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한 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타입인데, 그날은 이상하게 눈이 떠졌다. 다시 눈을 감고 잠들려고 노력해봤지만 짜증나게도 그럴 수록 정신이 맑아졌고, 있던 수면욕구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다시 잠드는 걸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옆에 함께 누워있어야 할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이제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둘이서 마당에라도 가있는 건가 싶어서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니 마루에 앉아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마주보고 앉아있는 게 왠지 낯간지러워서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츠바키의 귀에 할머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정말로 옆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나는, 이미 이렇게 늙었는데. 더는 그 옛날, 당신의 '안즈'가 아닌데 옆에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레이 씨, 나는 너무 늙었어요. 당신이 사랑했던 내 모습같은 거, 두 눈 밖에 남지 않았다구요. 그런데도 괜찮나요? 내가 당신을 욕심내고, 독차지하고, 사랑해도 되나요?」

악을 쓰면서, 괴로운 것을 토해내는 사람처럼, 아주 서럽게 울면서 말하는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충격이었다. 할머니의 속마음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항상 괜찮다는 듯 웃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주위에서 몇 번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며 흘려 듣길래 정말로, 츠바키는 할머니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는데. 단지 다른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자신을 숨겼을 뿐이라는 걸, 츠바키는 그때 그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사랑스러운 나의 안즈.」
「어떤 모습이 되어도, 설사 네가 죽고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어도 너는, 너는...」
「넌 언제나 나의, 사랑스러운 안즈일테니까.」
「너는 내가 사랑했던 모습이 이제 두 눈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지. 나는 그거면 돼. 그리고 그 눈 마저 사라진다고 해도 괜찮아. 옛날의 흔적따위 없어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안즈니까.」
「오히려 네가 없으면 안되는 건 나니까, 제발...제발, 조금만 더 오래 내 곁에 머물러줘.」

그는, 사쿠마 레이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울고 있는 사람보다 더 괴로운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어느정도 실마리가 잡혔는데, 그 대화를 듣고나니 다시 미궁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러나 츠바키는 그 궁금중을 가라앉히고, 그 호기심을 억누르며 이제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었는지 파내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츠바키는 자신의 할머니를 사랑했고, 할머니의 연인 사쿠마 레이를 제법 좋아했다. 소녀는 두 사람이 행복하길 바랐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런 호기심같은 게 오히려 해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편하게 서로를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츠바키는 그날 밤, 잠들기 전까지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신은 항상 사람의 소원같은 건 들어주지 않는다.


가을이 막 시작됐을 무렵이었다. 단풍을 보러가자고 약속했으면서, 예전에 함께 갔던 그곳으로 다시 가을 소풍을 가자면서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으나 갑자기 할머니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신은 괜찮다고 억지를 부리더니 결국은 쓰러져버렸다.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그 남자였고, 병원에서 가족들이 들은 말은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라는 의사의 말 뿐이었다. 할머니가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한 말은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이었고, 츠바키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고 말았다. 아무도 소녀가 우는 것을 혼내지 않았고, 할머니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츠바키의 아버지는 거칠어지고, 아주 작아진 어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병실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 서있던 남자는, 울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신을 원망했다. 이제 겨우 계절이 세 번 지나갔을 뿐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너무 빨랐고, 각오한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었다.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온 츠바키는, 그런 남자를 보고있으니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할머니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건 그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병실을 다녀갔고, 모두 할머니와 그 사람을 보면서 울고 갔다. 모두가 이제는 틀렸다고, 놔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그 남자는 할머니를 포기하지 않았다. 할머니 집의 현관을 장식하던 꽃은 이제 병실을 장식하게 되었다. 코스모스 몇 송이를 가져와서 선물해주기도 하였고, 결국 보러가지 못했던 새빨간 단풍잎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봄이 오면 유채꽃을 보러 가기로 했었지.」
「그때 내가 했던 말, 잊은 건 아니겠지? 안즈.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도 조금만 힘내줘. 나는, 나는...」
「...아직, 너를 떠나보낼 준비조차 하지 않은 나를 위해서라도, 조금만 더 살아다오.」
「안즈. 나의 안즈. 부탁이다. 우린 아직 못해본 게 너무 많으니까, 제발. 다음 봄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내 옆에 있어줘.」

그는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오래 잠들면 혹시라도 일어나지 않을까봐 무서워했다. 항상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고, 매일 밤마다 그 손을 붙잡고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츠바키는, 그 남자를 위해서라도 할머니가 이 겨울을 버티고, 봄까지 살아주실 바랐다. 점점 몸이 말라가고, 몸이 무거워서 일어날수도 없게 되었으며, 눈을 뜨고 있을 때보다 죽은듯이 자고 있는 날이 많아지고, 잘 보이던 눈까지 안보이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번 겨울만을 이겨주기를, 날씨가 풀리고 꽃이 피는 걸 볼 수 있길 바라며 츠바키는 할머니가 하루 빨리 건강해져서 퇴원할 수 있기를 빌었다.


그렇게 빌었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결국 그 겨울을 이겨내지 못했다. 츠바키는 그때 처음으로 그 남자가 소리내어 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애달프게 그 이름을 부르면서 서럽게 우는 그 모습을 보고있으니 난생 처음으로 그 든든해보이던 등이 작고 초라해보였다.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그 집과 남은 물건은 전부 사쿠마 레이의 것이 되었다.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소녀의 아버지는 끝까지 장례식을 지켰던 그 남자에게 정말로 고맙다고, 어머니도 그것을 바랄테니까 유언대로 남은 물건과 그 집은 사쿠마 씨의 마음대로 해도 좋다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는 츠바키에게 정리를 도와달라고 했고, 지금 상태로는 할머니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 집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곳을 남자 혼자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츠바키는 그러겠다고 레이와 약속을 했다.

"할머니의 앨범 속에 있던 그 남자, 사쿠마 씨죠?"

의외로 할머니의 물건은 얼마 없었다. 이런 미래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정리는 금방 끝났고, 나온 박스 하나 정도의 양이었다. 그마저도 할아버지와 관련있는 물건들은 그때 다 정리했기 때문에 남은 할머니의 유품은 전부 레이와 관련이 있는 것들 뿐이었다. 잠시 쓸쓸한 얼굴로 그것들을 쳐다보던 사쿠마 레이는 작은 앨범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괴로운 얼굴로 웃으며 더는 보기 싫다는 듯 그것을 덮었다. 정리할 유품도 적었고, 주인이 없으니 먼지가 쌓였을 거라고 생각했던 집도 그다지 지저분하지 않아 청소도 빨리 끝이 났다.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고, 이대로 헤어지기는 조금 아쉬우니 잠시 이야기를 하고 가자는 레이 덕분에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츠바키와 레이는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으나 지금이 궁금한 걸 물어 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츠바키 때문에 곧 깨지게 되었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이미 확신을 한 상태에서 물어봤을테니 아니라고 잡아 뗄 수도 없겠구먼. 그래. 그 앨범 속의 남자는 내가 맞다네."
"....대체 정체가 뭐예요?"
"한 번 맞춰보게나."
"어어....으으윽. 나 이런 쪽은 완전 모른다구요. 대체 정체가 뭐예요?"
"흡혈귀라고 하면 믿을 텐가, 아가씨?"

흡혈귀. 늙지않고, 아름다운 외모로 영생을 산다는 판타지 속에서나 나오는 환상의 존재. 누가 들으면 터무니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당당하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고, 놀랍게도 츠바키는 그 말을 듣자 마자 오랫동안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뿌연 안개가 모두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히 이 남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추리를 했으니 말과 행동에 이질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고,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고민과 문제들은 생각을 바꾸니 쉽게 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은 츠바키의 반응이 생각한 것과 다른지 레이는 재미있다는 얼굴이었고,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으면서 즐거운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신기하구먼. 보통 그 나이 때의 학생이라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이상하다고 말하거나 화를 내는 게 정상아닌가?"
"할머니가 자기 친구 중에는 마법사도 있고, 흡혈귀도 있다고 말해줬거든요. 할머니는 나한테 거짓말 안하니까, 그냥 그걸 믿었을 뿐이예요."
"착한 아이구만."

착한 아이니까 이 할애비가 선물로 옛날 이야기를 조금만 해주도록 할까. 사쿠마 레이는 유쾌한 목소리로 츠바키가 궁금해하던 과거의 일을 천천히, 그러나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자세하게 이야기했다가 몇 날 며칠을 새도 모자랄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거라. 그래. 나는 흡혈귀고,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 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 구나. 어느순간부터 세는 걸 잊어버렸거든. 안즈와 나는 연인사이였고, 한 7년 정도 연애를 했을 게다. 슬슬 언론 쪽에서는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주위에서도 결혼을 부추겼지. 허나 나는 안즈와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단다. 늙지 않고 영원을 사는 흡혈귀였던 나는 안즈를,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가 없었으니까. 내 욕심때문에 안즈에게 꿈을 포기하고 나를 선택하라고 할 수가 없었고, 그건 내가 바라는 행복도 아니었지. 그래서 헤어지기로 했단다. 나와 함께 있으면 안즈도 결국은 불행해질테니까. 겁쟁이라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먼. 그치만 아가씨. 나는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살아 온 만큼 사랑을 해왔으며 내 옆에는 수많은 연인이 있었다네. 그중에서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도 있었어. 그들의 최후가 어땠는지 아는가? 끔찍했지. 나는 그래서 안즈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네. 근데 어쩌다 다시 만나게 되었냐고? 거 성격도 급한 아가씨로구먼. 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헤어질 때 약속을 했다네. 나중에,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을 누리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지금처럼 나를 사랑하고, 내가 보고 싶다면 다시 내가 너를 만나러 오겠다고. 내가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었는데, 그걸 들은 안즈의 반응이 아주 제대로였지.

「....하면, 어떡하나요?」
「응? 뭐라고 했나, 아가씨?」
「레이 씨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어떡하나요?」

「...하아, 내俺가?」

... 그때 정말 어이없었던 건 기억이 나는구먼. 내가 어떻게 마음이 변해. 내가 안즈를 잊고 감히 누굴 이렇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할 필요도 없는 쓸데없는 걱정이었지. 그래도 그게 남아있던 불안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긴 했는지 우리는 웃는 얼굴로 헤어질 수 있었단다. ... 안즈를 사랑했냐고? 아가씨. 그녀는, 내 전부였다네.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아이는 내게 태양이었어. 흡혈귀에게 태양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있는가? 그래, 독이지. 그렇지만 흡혈귀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도, 제 목숨을 바쳐가며 사랑하는 것도 태양 뿐이란다. 재가 되어가면서도... 이 감정이 결국은 나를 죽게 만들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아이를, 안즈를 사랑했어. 지금 후회한다고 해도, 모든 걸 바꾸기 위해서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되돌아간다 해도 아마 나는 결국은 똑같은 선택을 할게다.


츠바키는 레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이제 괜찮다고, 더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를 말렸다. 사쿠마 레이는 씁쓸한 얼굴로 웃으면서, 이제 그만 가야겠다며 유품을 넣은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집은 그대로 두는 것을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힘들겠지만 가끔 와서 꽃을 돌봐주고 집청소만 해달라고 레이는 츠바키에게 부탁했고, 소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부탁을 들어주었다.

"이제 어떡할 건가요?"

이제 마지막이라며, 작별을 고하고 떠나는 레이를 보면서 츠바키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는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얼굴로 웃으며,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떠났다.

"기다려야지."

무엇을 기다리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츠바키는 그 남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겠다고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쿠마 레이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그 결정을 응원해주는 것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레이는 사라졌고, 츠바키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없어진 사쿠마 레이를 그 이후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할머니의 기일마다 몰래 와서 두고간, 오지 못한 봄에 같이 보러가지 못했던 유채꽃을 보면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구나 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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