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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접시꽃당신 上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접시꽃당신 上

박로제 2017. 7. 8. 22:09





소녀는 자신의 할머니를 굉장히 좋아했다.

할머니의 집은 매우 가까웠기에 소녀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벗어던진 뒤 가까운 할머니의 집으로 달려갔다. 소녀는, 친구와 노는 것보다 할머니와 함께 마루에 앉아 이야기 하는 걸 더 좋아했다. 꽃처럼 고운 소녀의 할머니는 왠지 모르게 할머니보다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같다는 느낌을 많이 주었다. 할머니가 우리 언니였으면 좋겠어요. 형제가 없어 혼자서 지내고 있는 소녀는 제 할머니와 같은 자매가 갖고 싶었고, 부모님은 그걸 듣고 버릇이 없다며 화를 냈지만 할머니는 자신도 너같은 귀여운 여동생을 갖고 싶었다며 유쾌하게 웃어주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고, 자주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다. 한 번도 소리 높여서 싸운 적도 없었고 할아버지는 항상 다정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할머니를 챙겨주었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아 할머니가 먹기 좋게 잘라놓은 복숭아를 먹으며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정말로 좋은가봐, 라고 했더니 소녀의 할머니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고 손녀가 더울까봐 부채질을 해주던 할아버지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곧 떠나야하니까, 더 잘해줘야지.'

어디로 가냐고, 할머니를 그렇게 좋아하시면서 두고 어디가냐고 뭐라 해보았지만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을 뿐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할머니를 두고 멀리 여행이라도 가는 건가 싶었는데 그 일이 있고 몇달 뒤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소녀는 그제야 자신의 할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니까, 당신은 이제 자유롭게 살아요. 내 걱정은 말아요.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할테니까. 할머니를 향한 유언은 그것이 다였고, 그 말을 들은 소녀의 할머니는 지금까지 당신 덕분에 행복했다며 울면서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 대답을 들은 노인은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고, 그렇게 가족의 곁을 떠났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례를 치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할머니에게 그런 걸 물어본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례한 짓이라, 소녀는 그것들을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 할아버지는 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했을까, 왜 자유라는 단어를 썼을까. 그 유언은 마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억지로 잡아두었다는, 그런 묘한 생각을 소녀가 하게 만들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조금 더 많이 사랑했었다는 말밖에 들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어요?

49재가 끝나고 아주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나러 갔을 때 소녀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물건을 정리하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보여서, 그 질문은 얌전히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그래,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긴 시간동안 함께 살았을 이유가 없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할아버지의 유언을 애써 머리 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소녀가 그걸 다시 생각해낸 것은 할머니의 옆에 낯선 남자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레이안즈 : 접시꽃당신 上





그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은 봄이었다. 신학기의 첫수업을 마치고 소녀는 그날도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할머니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매번 잔소리를 했지만 제 친구들과 노는 것 보다 할머니와 수다를 떠는 것이 더 좋았기에, 그날도 선물을 사들고 할머니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그 길에서 소녀는 낯선 사람을 발견했다. 그다지 이때의 첫만남이 특별하거나 인상이 깊어 일부러 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근방에서 저렇게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녀는 그 남자와 처음 만난 날은 아마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한쪽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마치 연인과 첫데이트를 하러가는 사람마냥 들뜬 얼굴로 걸어가는 남자를 보고 있으니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의 연인이 굉장히 부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중간에 다른 길로 빠질 것 같았던 남자가 그런 거 없이 자신과 똑같은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소녀는 그 남자에게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나오는 건 할머니의 집 뿐이다. 이런 남자가 할머니와 아는 사이인걸까? 소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곧 그럴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소녀의 할머니는 아이돌을 키우던 프로듀서였고, 뛰어난 실력으로 프로듀서 일을 하면서 성공적으로 키운 아이돌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프로듀서를 만나기 위해 자주 집으로 찾아왔었고, 어릴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소녀는 할머니를 만나러 왔던 사람들을 얼추 기억하고 있었다. 막말로 이렇게 기가 막히게 잘생긴 얼굴을 본인이 보고 잊었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할머니가 키웠던 아이돌도 이제는 다들 제법 나이가 있었고, 그중 가장 어린 사람도 제 아빠 뻘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젊은 남자가 할머니가 키운 아이돌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마치 그것이 궁금해 남자를 몰래 뒤따라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소녀는 당당하게 걸어갔다. 나는 할머니를 만나러가는 거지, 저 남자를 따라가는게 아니니까!

그러나 자신을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고, 그게 길게 이어지지 제 갈 길만 가던 남자도 궁금하긴 했는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기습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생각도 못한 타이밍에 남자가 제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놀란 소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딸꾹질을 해댔고, 그는 아주 묘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안즈?」

남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소녀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었다.

「우리 할머니를 아세요?」

죽은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항상 이름으로 불렀다. 안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시절에도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어떤 감정이 담겨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소녀에게 있어서 할머니의 이름은 할아버지만이 부를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고, 처음 보는 남자가 제 할머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다는 것에 화가 나서 표정 관리도 못한 채 딱딱한 목소리로 따지듯이 묻고 말았다. 멍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사과를 했다. 너무 닮아서 실수했구먼. 미안하네, 아가씨.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에 조금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가까스로 진정하고 소녀는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 안즈...으음, 아니지. 아가씨의 조모님에게 옛날에 신세 진 사람이라네. 사정이 있어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운좋게 연락이 닿아서 이렇게 만나러온거고.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경계하지 말게나. 믿어달라는 듯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날을 세워봤자 괜히 힘만 낭비하는 것일테고,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남자의 말도 그럭저럭 신뢰가 갔기에 소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준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기쁜듯 웃었고,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소녀는 사이좋게 남자와 나란히 서서 할머니의 집으로 걸어가야만 했다.

「아가씨는 할머니를 많이 닮았구만.」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어...뭐, 좋아요. 츠바키椿예요. 츠바키.」
「...누가 지어줬지?」
「할머니가요.」
「아가씨는 그 이름을 좋아하는고?」
「할머니가 지어 준 이름을 싫어할리가 없잖아요.」

요즘 여자아이에게 쓰기엔 좀 낡은 느낌의 이름이었지만 할머니가 직접 지어 준 이름이었고, 츠바키는 그런 할머니를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굉장히 좋아했다. 남자는 조금 묘한 얼굴로 좋은 이름이라고 칭찬한 뒤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츠바키는 남자의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는 방금 전 그가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은인의 손녀에게 지어줄 표정이나 분위기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할머니에게 신세를 졌다고는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고, 두 사람이 과거에 무슨 사이였는지도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빠져서 앞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걷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할머니 집 앞이었다.

「안들어가세요?」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보게나. 손님이 왔다는 말만 전해주면 되니까.」
「알겠어요.」

남자를 문 밖에 두고 안으로 들어간 츠바키는 바로 마루에 앉아서 마당의 꽃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벚나무는 살랑살랑 꽃잎을 흩날리고 있었고, 마당의 작은 화원에는 튤립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항상 생각했지만 츠바키의 할머니는 그 나잇대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어릴 때부터 츠바키는 할머니가 소녀같은 느낌의, 동화 속의 주인공같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꽃나무 아래에 있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

평소처럼 달려가서 할머니를 부르며 안기니, 할머니는 어서오라는 말과 함께 츠바키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늦어서 걱정했단다. 아, 여기 오는 길에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랑 있다보니 늦었나봐요. 가방을 한쪽에다가 던져두고 옆에 앉으며 그렇게 말하니 표정의 변화가 적은 할머니가 그걸 듣고는 보기 드물게 설레는 얼굴로 다시 되물었다. 낯선 얼굴. 길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는 할머니는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더더욱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고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어떤 사람이었니?」
「으음...굉장히 잘생겼었는데, 말투가 이상했어요. 할아버지도 그런 말투는 안썼는데 젊은 남자가 그런 말투 쓰는 건 처음 봤어요.」
「그 사람이랑 같이 오지 않았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사람이 온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츠바키. 할머니의 마법사 친구를 기억하니?」
「응. 기억해요. 무엇이든지 알 고 있다는 그 분 말이죠? 그 분이 오늘 그 사람이 온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 그 친구가 할머니에게 말해주었단다. 오늘 아주 반가운 손님이 올거라고. 잠시만 기다려줄래? 할머니는 그 분을 데리고 올테니까.」
「나는 그 사람 싫은데...」

소심하게나마 불만을 표현해보았지만 할머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머리를 가다듬고, 옷의 주름을 펴고,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할머니는 몸을 단장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할머니가 죽은 할아버지만을 생각하고 살 필요도 없었고, 츠바키고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의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매일 바라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가 없는, 할머니의 이름을 아주 마음대로 부르던 남자. 그게 왜 그렇게 못마땅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츠바키는 그 남자가 불편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할머니가 나간지도 오래 된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화를 하는 것인지 목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몰래 들으러 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한참 뒤에 울었는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행복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와, 애써 감추고 있지만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가져왔던 꽃다발은 할머니의 손에 들려있었고, 츠바키는 그때 남자의 이름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사쿠마 레이. 앞으로 자주 보게 될테니 이름 정도는 들어두는 게 좋겠지. 매일 여기 찾아 올 생각이예요? 언뜻 들어도 굉장히 무례한 말이었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럼. 아주 귀찮게 들락날락 거릴테니 기대하는 게 좋을 게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엄청나게 재수없었지만 이걸 말려 줄 할머니는 그저 웃을 뿐이었고, 츠바키는 자신과 할머니의 공간에 타인이 들어온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의 손을 꽉 잡고 있는 할머니가 정말로 행복해보였기 때문에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레이에 대한 츠바키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고, 이것이 바뀌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남자가 그날 가져온 꽃이 프리지아였고 그 프리지아의 꽃말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건, 아주 나중의 일이다.



**



사쿠마 레이는 정말로, 매일매일 할머니를 만나러 왔다. 참다 못한 츠바키가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레이에게 우리 할머니랑 무슨 사이냐고 소리를 빼액 지르자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그렇게 답했다.

「연인사이지. 당연한 걸 묻는 구먼.」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기에, 레이의 말을 듣자마자 츠바키는 적잖이 충격받은 얼굴로 대뜸 나이 차이가 몇인데 우리 할머니랑 사귈 수 있냐고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과분하다는 게 아니라, 겉모습만 봐도 상당한 나이차가 났고 주위에서도 이런 나이차일 극복하고 연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아직 어린 츠바키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어찌보면 당연했다. 거기다가 그는 아주 당당하게 할머니를 안즈라고 불렀고, 오히려 본인이 연상인 것처럼 굴었다. 그와 반대로 할머니는 레이에게 항상 경어를 썼으며 대화하는 것만 들으면 서로의 나이를 반대라고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은 기이한 관계였다.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레이가 할머니에게 하는 걸 못본 척할 정도로 눈을 감고 귀를 막지는 않았기 때문에 츠바키는 그가 자신의 할머니에게 엄청나게 잘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점만 생각한다면 오히려 죽은 할아버지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상 위에 놓아 둔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이런 관계가 되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이차이? 으음....그렇게 따지면 잡혀갈 사람은 이 늙은이네만...」
「뭐라구요?」
「응? 아니라네. 못들은 걸로 해주게나.」

저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짜증이 났지만 말로 해서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이미 파악한 뒤였기 때문에 츠바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츠바키는 오래 전부터 레이가 마음에 들었었다. 봄이 지나고, 어느새 여름이 왔다. 할머니의 작은 화원에는 수국이 피어났고 장마가 찾아왔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레이와 함께 지내면서 츠바키는 그가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저 사람이라면 할머니를 믿고 맡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자신한테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친아빠보다 더 아빠처럼 굴 때가 있어서 기분이 묘할 때도 있었다. 딱히 제게 무언가를 원하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츠바키는 사쿠마 레이에게 있어서 선 안의 사람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피 하나 섞이지 않는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친가족처럼 챙겨주었다. 그런데도 자꾸 마음에 안든다며 퉁명스럽게 굴고 짜증을 내며, 할머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언은 할머니가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츠바키는 그걸 들었을 때부터 궁금증을 갖고 있었고, 아직도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말한 자유가 이런 거 였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가신 츠바키의 할아버지는 이런 미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벌써 돌아가신지도 3년이 지났고, 그때만큼 슬프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수는 있었지만 죽을 때까지도 할머니를 걱정했던 자신의 할아버지를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츠바키는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 진짜 어렵다."

오늘은 오랜만에 지겹도록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해가 뜬 날이어서 두 사람은 바깥으로 외출을 했다. 며칠 전에 마루에 앉아서 장맛비를 맞고 있는 수국을 바라보며 양산 없이는 햇빛 아래에서 제대로 서있지도 못한다던 남자가 할머니에게 비가 그치면 둘이서 바다를 보러가자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할머니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괜찮으니까 꼭 함께 가자고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오늘, 일기예보의 기상캐스터는 아주 오랜만에 화창한 날씨라며 보도했고, 조금 이른 시간에 찾아 온 남자는 어울릴 것 같다며 사온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주고, 한 손에는 검은 양산을, 다른 한 손에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결국 바다로 데이트를 나갔다. 오랜만의 외출이었고, 겸사겸사 친구도 만나고 온다고 했으니 아마 늦게까지 안들어올게 분명했지만 츠바키는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집에 가봤자 재밌는 것도 없었고, 여기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것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모자를 씌워주고 예쁘다고 말해주었을 때 수줍게 웃던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나서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중요한 건 산 사람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게 좋은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핑계일지도 몰랐다. 할머니는, 여태까지 계속 츠바키만의 「할머니」 로 있어주었다. 하지만 그 남자가 나타나면서 그 남자의 「안즈」로 변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건 할머니를 빼앗긴 아이의 투정일지도 몰랐다. 그걸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굳이 할아버지 핑계를 대면서 그렇게 심술맞게 굴었던 것일수도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니 츠바키는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제 감정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아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잊지 않았다. 불단에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사진이 있었고, 할머니가 매일 아침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불단에 앉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죽은 할아버지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죽으면서까지 할머니의 자유와 행복을 빈 사람이니까. 반성하자. 그리고 오늘 두 사람이 돌아오면 웃으면서 인사하자. 아직 이름을 부르는 건 어렵겠지만, 이제 그 사람을 '당신'이나 '그쪽'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두자. 츠바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 사람이 얼른 돌아오길 기다렸다.


「다녀오셨어요, 사쿠마 씨.」 츠바키는 손을 잡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그렇게 말했고, 사쿠마 레이는 그날 처음으로 츠바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안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이와 츠바키를 번갈아 보면서 조용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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