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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君の銀の庭(너의 은의 정원)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君の銀の庭(너의 은의 정원)

박로제 2017. 8. 17. 00:03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런 운명을 타고 났으니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위치를 알았고, 해야할 일도 알았다. 그러니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울지마요.」

당연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제 운명을 원망했고, 이렇게 태어났음을 저주했다.





​​레이안즈 : 君の銀の庭(너의 은의 정원)





끝까지 이 혼인은 안된다고 거부했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이제 더는 말리지 않으마. 그 대답을 듣자마자 안즈는 그때와 똑같이 금목서 꽃가지와 함께 그 소식을 전달했고, 아버지를 설득했다는 그 서신을 받자마자 레이는 옆에 신하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만세까지 하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으며 그중에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상소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결혼만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속을 썩이던 황제가 드디어 결혼을 한다며 신나있었기에 그 의견은 금방 묻혀버렸다. 결혼식 전에 잠도 자지 않고 몰아서 급하고 중요한 일을 모조리 처리한 황제는 결혼식 후 5일 동안은 자신을 찾지 말라며 신하들에게 약속을 받아냈고, 정말로 5일 동안 자신의 궁밖으로 한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폐하께서는 더 오래 계시려고 했던 모양인데...그걸 들은 황후마마께서 역사에 폭군의 처로 남기는 죽어도 싫다며 폐하를 혼내셨어요. 뭐, 애초에 약속을 지키실 생각도 없으셨던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고민하던 신하들도 그 5일동안 옆을 지켰다는 궁녀의 말을 듣고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황후의 일만 되면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는 황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있던 그들은 황후가 그 행동의 고삐를 잡아줄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황후의 궁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은 틈만나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제 주인을 칭송했다.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고 말수도 적은 편이었기에 첫인상은 사실 그리 좋지 못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런 분이라면, 황제의 사랑을 받을만도 하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성심성의껏 제 주인을 모셨다. 이제 그들은 제 주인의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보이는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의 조각들을 볼 수 있었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을 이곳에 보낸 사람은 황제였고, 따지자면 그들은 황제의 사람이었지만 황후의 궁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를 황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황제는 그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그저 흐뭇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받는 족족 부담스럽고 필요없다며 레이가 주는 것을 거부하던 안즈가 결혼선물로 받은 유일한 선물이 바로 황태자궁에 있던 화원이었다.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서 그 궁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안즈와의 추억이 담긴 곳에 타인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레이 때문에 그 화원은 여전히 황족을 제외한 사람은 출입금지였었다. 이건 화원이 안즈의 것이 되면서도 변치 않았고, 많은 사람이 그것을 안타까워했으나 새로운 화원의 주인이 된 안즈는 그곳에 레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들이지 않았다.

'온 세상의 역사를 뒤져도 황제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찾게 만드는 비는 너밖에 없을게다.'
'축하드려요. 또 새로운 역사를 쓰셨네요, 폐하.'
'...한 번 정도는 날 기다려주면 안되겠느냐?'
'...이곳에서 매일 폐하를 기다리지 않습니까?'

한 마디도 져주지 않는 안즈가 얄미우면서도 제 비에게만은 한없이 약해지는 레이였기에, 말다툼은 얼마 못가고 결국 레이가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져주는 게지. 그렇다면 제가 폐하께 항상 져주는 것이겠네요.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안즈의 한 마디에 레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고, 그녀는 맞는 말을 했는데 왜 그렇게 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얼마나 져주고 있는지 아시면, 깜짝 놀라실거예요.'

안즈는 그렇게 말했고 레이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하고 그 말을 흘려 넘겼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한듯 싶으면 그 원인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싸우셨구나. 사실 싸움이라고 하기엔 미묘한 것이었지만 신하들은 그걸 싸움이라고 불렀다. 일방적으로 레이만 화를 내고 토라져서(이 표현을 써야할지 고민을 했지만 가장 가까이서 황제를 보필하는 재상 하스미는 그 단어가 제일 적당하다고 말했다.) 안즈를 보지 않는 상황은 싸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존심을 세워주고자(물론 황제는 황후의 앞에서 자존심을 세워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신하들은 그렇게 불러주었다. 게다가 이 싸움같지도 않은 싸움은 그다지 오래가지도 않았고, 항상 져주는 것은 레이였다. 드물게 그가 화를 풀지 않고 길게 끌고 가는 일도 있긴 했지만 모란, 자양화, 금목서, 동백. 그 시기에 가장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과 함께 보낸 연서에 얼음이 녹듯이 금방 화가 풀어져 정무를 마치자마자 안즈를 만나러 가곤 했다.

싸우고 난 다음날에는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정무에 임하는 황제는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으며 신하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참다못한 하스미 케이토에 의해서 그것이 황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별 거 아닌 걸로 신하들을 잡는다며 황후의 궁에 출입금지를 당하고나서야 황제는 그 괴롭힘을 멈추었다.

「또 그러실거예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내 약속하마. 그러니까 얼굴 좀 보여다오. 안즈야. 너를 못본지도 벌써 오늘로 보름째다. 지아비를 상사병에 걸려서 죽게 만들 셈이냐?」
「잘못했으면 그에 마땅한 벌을 받으셔야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 아직도 반성을 덜 하신 것 같은데, 이만 물러가세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안즈야!」
「아 참. 태후께서도 허락하신 일이시니 그 방법을 쓰는 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결국 보름이 넘도록 빌고 또 빌어서 용서를 받아낸 황제는 다시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신하를 막 대하지 않았고, 그 뒤로 재상 하스미 케이토는 황제가 고집을 부린다 싶으면 황후의 이름을 꺼냈다. 그런 신하가 괘씸했지만 그때의 독수공방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에 레이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궁안의 모든 이들이 황제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그들에게 황제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으나 자신과는 다른 존재라고 여겼고, 그랬기에 가까운 신하조차도 그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안즈가 옆에 있으면, 그는 신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그런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고 그들은 그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안즈가 레이의 곁에 오래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원으로 가보았더니 금목서 나무 아래에 앉아있길래 그저 잠든 줄로만 알았다. 이만 일어나라며 얼굴을 만졌을 때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높은 온도에 레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작은 몸을 끌어안고 궁으로 달려가면서 아무나 붙잡아 당장 어의를 데려오라 명했고, 어의는 황후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하던 일도 내팽겨치고 급하게 궁으로 달려왔다. 최근에 유독 몸이 좋지 않아 바깥 외출을 삼가하라 그렇게 일렀는데도 말을 듣지 않고 나간 안즈에게 화가 났지만 모든 건 그녀가 눈을 뜨고 난 다음에나 하는 일이었다.

무슨 병이냐 물었더니 어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단순한 열병인가 싶었는데 진찰해보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맞는 약을 처방할 수 있는데 지금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나라에서 제일 가는 명의가 무력한 목소리로, 침통한 얼굴로, 그리 말하는데 화를 내고 싶어도 차마 낼 수가 없었다.

금방 일어날 줄 알았던 안즈는 나흘이 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제 일어날 줄 몰라 그 곁을 떠날 수 없었던 레이는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래도 쌓이는 일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그곳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다. 끙끙 앓던 안즈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정신을 차렸나 싶어서 급히 달려가면 무의식 중에 레이를 부른 것이었고, 허탈하면서도 그리 아픈 와중에도 제 이름을 부르고, 저를 찾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나흘 동안 사경을 헤매던 안즈는 제 아비가 궁으로 들어와 손을 잡아주자 천천히 눈을 떴다. 제가 손을 잡았을 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면서, 그것이 못내 서운하였지만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것이 자신이었기에 레이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질투심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버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시만 자리를 비워주세요. 내가 들어서는 안될 이야기냐며 따져묻고 싶었지만 레이는 마지못해 자리를 비워주었고, 밖에서 부녀의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폐하."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어진 이야기를 마치고 나온 레이의 스승이자 안즈의 아버지인 그는 조용히 레이를 불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다고, 자신은 안즈의 옆에 있어야 한다고 답해줘야 했지만 마치 그 옛날,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을 때와 똑같은 얼굴로 그리 말하는 제 스승의 청을 레이는 거절하지 못했다.



안즈는 죽은 아내가 제게 남기고 간 하나뿐인 보물입니다. 남은 가족이라고는 안즈 뿐이었고, 저는 유일한 핏줄인 그 아이가 행복하길 바랐습니다. ...무엇부터 이야기하면 좋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어디보자... 역시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지요. 안즈가 7살이 되었을 때, 수도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무녀에게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본디 그런 것을 믿지는 않습니다만... 애지중지하며 키운 자식을 보니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변하더군요. 일부러 며칠 전부터 서신을 넣어 만나러갈테 시간을 비워두라 하였고, 그 무녀도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7번째 생일날 그 무녀에게 데려갔더니 대뜸 그런 말을 하더군요. '오래는 못살겠구나.' ...그때의 제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폐하께서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난 날에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어디서 헛소리를 하냐며 소리를 질렀더니 안즈가, 그 어린 것이 저를 말렸습니다. 맞는 말을 했으니 그리 화내지 마시라구요.

'...저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요. 이렇게 예쁘고 착한데, 오래는 못살겠다고. 그래서 너무 아깝다고. 무녀님은 그 이유를 알고 계시나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후에 안즈가 말하기를,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린 것이 그런 소리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견뎌냈다는 것이지요. 걱정끼치고 싶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폐하. 안즈가 이 이야기를 꼭 폐하께 전해달라 하였는데, 저는 도저히 무리입니다. 저는 지금 당신이 원망스럽고, 그때 궁에 안즈를 데려 온 제가 혐오스럽습니다. 폐하. 그 무녀는 아마 폐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녀가 제가 미처 못한 이야기를 해줄 것입니다. 저는...저는 지금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레이는 떠나가는 그를 잡지 못했고, 그 자리에 굳어서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적게 주어진 사실로는 제대로 추론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그는 방안에서 조용히 숨어 이야기를 듣고있던 자를 불러내어 그 무녀를 찾아오라 일렀다. 안즈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자꾸 들어 억지로 지우려고 노력을 해보았으나 조금씩 그를 좀먹기 시작하는 불안은 쉽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레이는 그 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며,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무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그자가 당신께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겁니다. 황후마마의 아비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말도 하지 않고 폐하를 죽이려 들었을테니까요. ...마마께서 오래 살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도 궁금하십니까? 그럼 그것부터 이야기해드리지요.

옛날부터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아마 그 사랑이 한낱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무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마마께서는 필연적으로 신의 사랑을 받을 운명을 타고 나셨고, 그래서 그 잡것들이 너도나도 그 어린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던 것입니다. 그 어린 것이 벌써부터 운명이 정해져서 죽음의 기운을 흘리고 있으니 서글펐던 게지요. 폐하께서는 그 빌어먹을 신의 얼굴을 보고 싶으신 것 같은데...너무 그러지마십시오. 지나친 자기혐오는 상황을 악화시킬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러니까, 저는 지금 스스로를 미워해봤자 해결되는 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마마께서도 견디지 못해 죽어가게 만드는 사랑을 주고 계신 분은 폐하가 아니십니까? 폐하. 당신이 어디 보통 인간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이 천하를, 온 세상을 가질 분이 당신이신데, 그런 당신의 사랑을 한명이 감당하고 있는데 어디 평범한 인간이 버틸 수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버티신 것만으로도 용하지요. 폐하. 당신의 사랑이 이 분에게는 독입니다. 저 분을 죽이고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폐하입니다. 그러니 그 충성심 높은 남자는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도망간 것이지요. 네. 애석하오나 마마를 살릴 방법은 온 세상을 뒤져봐도 없을겁니다. ....평범한 사람을 죽게 만들 정도의 무거운 사랑이, 하루 아침에 사라질리가 없지 않습니까.

숨이 멎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레이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할 말을 끝내고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이 궁을 떠났고, 레이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앉아서 멍하니 창 밖만 내다볼 뿐이었다. 금목서가 피어있는 화원을 보고 있으니 문득 옛날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제가 더 사랑해서 져주고 있다는 안즈의 말이 떠올랐다. 아아, 너는. 안즈야, 너는. 그때는 그걸 웃으며 넘겼었다. 누가봐도 더 안달내고 사랑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레이는 그것이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폐하, 마마께서 폐하를 찾으십니다."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레이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긴 것은 급히 문을 박차고 들어 온 내관의 말 한 마디때문이었다. 만나러 가야하는데,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몸은 정직하게도 안즈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머릿 속은 엉망이었다. 단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인 머리는 터질 것 같았고, 레이는 결국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좀 더 발걸음을 빨리 했다.


"...왜 울고 있어요?"

레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안즈가 한 말이었고, 그는 그때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안즈는 힘겹게 손을 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가도 좋다며 손짓했고, 곧 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레이는 천천히 걸어가 침상 앞 의자에 앉았고, 계속 누워있던 안즈는 그의 부축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전부, 들었어요?"
"...그래."
"뭐 궁금한 건 없어요?"
"..."
"...폐하께서 들은 말은 전부 사실이에요. 덧붙이자면 그걸 다 알고도 당신을 선택한 건 내 의지였어요.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는 마세요."
"내가, 어떻게..."
"레이 씨."

어린 시절, 안즈의 아버지를 피해서 둘이 몰래 만날 때마다 안즈는 항상 그의 이름을 불렀었다. 그러나 레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한 번도 불러준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불러달라 애원할 때는 안된다며 밀어내던 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제 이름을 불러주니 레이는 이미 울고 있지만 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레이 씨, 나 안 볼 거예요? 우리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요. 레이 씨.

"울지마요."
"..."
"바꿀 수 있는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건 나예요. 그리고 한 번도 그 선택에 후회한 적 없어요."
"...나, 는..."
"레이 씨는 나를 사랑한 걸, 후회해요?"
"...그럴리가 없지, 않느냐..."
"그거면 됐어요."

힘없이 웃으며 다시 눕는 안즈를 보면서, 레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를 원망해보았다. 모든 진실을 이야기 해주고 떠난 여자는 끊임없이 당신이 대단하기 때문에,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 신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삶이었다. 그저 이리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살아온 것 뿐이었다. 그 모든 게 당연하다 생각했으나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같은 사람한테서 사랑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그렇게 말하지마. 왜...왜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말하는 거야."
"...인사는 미리 해두는 게 좋으니까요."
"안즈."
"어릴 때는 싫었어요. 왜 오래 못사는거지. 왜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때문에 오래 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는 거야? 다른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온통 이런 생각 뿐이었어요."
"..."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지만 만나면서 알게 됐어요. 아, 이 사람이 다들 이야기하는 그 「신」이구나 하고.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미웠으면서, 그 상대가 레이 씨라는 걸 알게 되니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운명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길 바랐는데 그게 이뤄졌으니까요."

"제가 무슨 생각까지 했는 줄 알아요? 당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라 다행이라고, 이 사랑을 그 누구와도 나눠가지지 않아 정말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런 사랑을,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받을 거라고 생각하니 존재하지 않는 상대에게 질투심마저 들었어요."
"...전부 레이 씨가 죄책감 갖지말라고 하는 말이에요. 정말... 이제 그만 울어요. 우리 폐하는 어쩜 이렇게도 눈물이 많으실까."
"저한테 한이 있다면 하나 뿐이에요. 당신을 두고 먼저 죽는 것. 그것말고는 없어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때문에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사랑해준 「신」이... 아니,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당신이라서, 정말로 다행이에요."

그리 말하며 웃는 안즈의 얼굴은 곧 부서질 꽃과 비슷했다. 사쿠마 레이는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하다못해 자신도 사랑한다는 답이라도 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안즈는 레이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듯, 말없이 그 손을 잡아주었다. 잡고 있는 손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네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이대로 가버리는 게 어디있어. 그리 말했더니 안즈는 졸려서 그런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말라는 답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행히도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고, 아직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금목서 가지를 꺾어다주지 말 것을..."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레이는 지나간 과거를 후회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적어도 이렇게 죄책감을 느낄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안즈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했다. 혼자서 짝사랑을 할 때도 그것에 지쳐서 이 마음을 포기하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속에 담고있던 애정은 커져만 가서 놓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때 금목서 가지를 꺾어주지 않았어도, 레이는 어떻게든 안즈를 사랑했을테니까.

내 곁에 있어줘.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 이대로 계속 내 옆에서 웃어줘. 제발.

부질 없는 기도였지만 레이는 그렇게 빌었다.





**





그녀의 마지막 부탁은 간단했다. 레이는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주겠다 했고, 안즈는 웃는 얼굴로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런 운명이었으니까, 우리는 다시 만날거예요.」

다음 생에 혹시라도 너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운명조차도 너를 데려갈 수 없게 내 품에, 내 새장 안에, 나의 세상에 너를 가둬버릴거다. 레이는 조용히 그렇게 속삭였고, 안즈는 난처한 듯 웃었지만 싫지는 않은 듯 했다. 알았어요. 그러니까 저 따라오시면 안돼요? 다시 한 번 더 저랑 약속해요. 제 마지막 부탁이니까, 꼭 들어주세요. 끝까지 레이를 위했던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고, 그와 동시에 레이의 세상에는 빛이 사라져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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