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땅을 기어와 제 앞에 또아리를 트고 서있는 뱀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뱀은 또 다시 소녀에게 경고했다. 당장 이 마을을 떠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 썩은내가 나는 시체가 널 보기 전에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노랗게 반짝거리는 눈은 다시 한 번 소녀에게 경고했다.
안즈에게 있어서 뱀은 무섭지 않은 동물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뱀은 제게 친숙한 동물이었고, 기이하지만 그들에게도 안즈는 좋은 사람이었는지 단 한 번도 뱀에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 뱀은 위협하는 게 아니라, 소녀가 걱정되어 경고를 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안즈도 그 뱀의 경고를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 돌아갈 곳이 없어요.
소녀는 그 뱀의 눈높이를 맞춰서 무릎을 굽혔고, 걱정된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게 뱀에게 그리 말했다. 부모님이 죽었어요, 동생도 같이요. 저를 맡아 줄 친척은 이 마을에 살고 있고, 아직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나는 친척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뱀은 아주 곤란한 얼굴을 했고,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다. 야단났어, 큰일이야. 뱀은 안즈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고, 소녀는 기다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뱀은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고, 안즈는 그 뱀이 사라진 숲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오는 곳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곳에서 살았었고, 소녀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안즈는 이 마을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하면 머릿속에 안개가 끼인 것처럼 뿌옇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그다지 기억하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즈.
멍하니 돌로 탑을 쌓고 있을 때, 안즈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고있던 것을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의 형체와 그의 곁을 지키는 수십마리의 뱀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그는 항상 이렇게 안즈의 앞에 나타났었다. 자신이 뱀에게 익숙해진 것도 전부 이때문이었다. 매일매일 수십마리의 뱀과 나타났는데 그 어언 사람이라고 뱀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은빛머리, 저와 비슷한듯 하면서도 다른 푸른 눈동자, 한쪽 어깨와 팔을 내놓은 유카타 차림과 항상 짓고있던 짜증난다는 표정. 몇 년만에 보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안즈는 기쁜 마음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갔다.
이즈미 씨!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풀어지며 웃다가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에 다시 표정을 굳힌 그는 제게 달려오는 소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누가 여기 오라고 했어?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는 귀찮음과 짜증, 그리고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치만...어쩔 수가 없었는 걸요"
"그래, 기회가 생겼으니 그 녀석도 시체처럼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겠지. 온 마을에 썩은내가 진동하겠어."
안즈가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만든 것도 아마 그녀석의 짓일게 분명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었다고 했지. 안즈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불의의 사고처럼 겪을 수 있게 만들 사람은 그 시체 뿐이었다. 산 밑의 그 늙은이는 기본적으로 방관자이니까, 그자가 관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안즈는 우연히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보았을 땐 이건 우연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너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구했을까. 답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너를 구하기 위해 이렇게 달려가는 것처럼, 너도 나를 구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건 분명히 너이고, 그때의 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였으니까.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달리고 달려서, 넘어지고 다치고 피가 났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갔다. 네가 있는 곳으로.
'얏호~ 역시, 안즈가 올 줄 알았어.'
샛별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얼굴로 웃고있는 자신의 반쪽을 보면서, 안즈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고 말았다. 살아있는 스바루 군이야. 이제는 말랐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이 세계가 아니라 안즈니까. 그래서 안즈도 이렇게 나를 구해주러 온거지?'
스바루는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 안즈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계속 안즈를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 반쪽의 그런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제멋대로 일을 처리해서 안즈를 곤란하게 만들 때, 스바루가 습관처럼 하던 행동이었다.
'처음에는 왜 하필 그게 나여야 했는지에 대한 분함도 있었는데, 그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그런 사람 아니었잖아, 너는. 주어진 운명도 바꾸려고 했던 사람이었잖아 너는.
'...다른 방법을 찾아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 뿐이었어. 그러니까, 안즈라면 이해해줄거라고 생각해.'
정말로 분하지만, 안즈는 스바루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그런 답을 선택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차라리 모르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 세상에서 아케호시 스바루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안즈였으니까,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
'안즈. 나, 안즈를 만나서 정말 기뻤어.'
조금 더 빠른 건, 안즈가 아니라 스바루였다.
시간을 달려서 겨우 너를 만났고, 그런 너를 내 손으로 구하기 위해서,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뛰어왔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넘어졌을 때 까졌던 무릎이 아파왔다. 바닥에 쓰러지는 스바루를 보면서 안즈는 아무 말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 나면, 너는 분명히 나를 죽이러 올거다.」
그리고 이제서야 이곳으로 저를 보내며 그 남자가 제게 했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저도 아니고, 강아지인 슈가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인 엄마도 아닌 아빠입니다. 인기 아ㅡ이ㅡ돌인(사실 저는 아이돌이라는 게 뭔지 잘 몰라요.) 아빠는 일이 늦게 끝나 늦게 들어올 때가 많은데도 매번 1등으로 일어나 저와 엄마를 위해서 아침밥을 준비해요. 아빠. 안 졸려? 얼른 잠깨고 밥먹자며 세수하는 것을 도와 준 아빠에게 그렇게 물었더니 아빠는 하나도 피곤하지 않다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어요. 엄마는 그런 아빠가 걱정되는 것 같았지만 말려봤자 듣지 않는다며 포기를 해버렸습니다.
아빠가 만들어주는 아침은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지만 맛은 있어요. 그중에서 우리 아빠가 가장 잘 만드는 건 달걀말이인데, 푹신푹신하고 말랑말랑해서 저랑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기도 해요. 게다가 굉장히 달아서, 먹고 있으면 달걀말이가 아니라 카스테라를 먹고 있는 게 아닌지 의ㅡ심이 갈 때도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아빠가 만들어 준 것만 먹어봤기 때문에, 모든 달걀말이가 다 이렇게 달달하고 푹신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엄마. 엄마가 만들어 준 달걀말이는 왜 이렇게 짜요?'
아빠가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서 한동안 집에 없을 때,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만들어준 아침을 먹은 적이 있었어요. 뭐가 먹고 싶냐는 말에 달걀말이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그때 엄마가 만들어 준 것이 바로 그 짠맛나는 달걀말이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물었더니 엄마는 실수했다며 한숨을 쉬었고, 아빠에게는 비밀이라며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사실 엄마는 짠 게 좋은데... 아빠가 엄마는 단 걸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어.'
제가 태어나지 않은 아주 먼 옛날에, 아빠가 엄마를 위해서 도시락을 싸온 적이 있다고 해요. 그때 만들어 온 달걀말이가 제일 맛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아빠가 착ㅡ각을 하고 있다고 해요.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매일 웃으면서 좋아하는 거지? 라고 물어보는 아빠를 보고 있으면 진실을 밝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숨겨왔다고 해요.
'엄마는 아빠가 그렇게 좋아요?'
'그럼. 엄마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
'그럼 나는요?'
'엄마가 아빠를 좋아하는 거랑 우리 공주님을 좋아하는 건 조금 다른 걸.'
그러니까 엄마에게는 우리 공주님이랑 아빠 둘다 일등이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서, 저는 아빠가 조금 부럽다고 생각했답니다.
엄마는 아빠 앞에서 비밀이라고 했지만 저는 엄마가 만들어 준 짭짤한 달걀말이가 너무 맛있어서,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달달한 건 그만 먹고 엄마가 만들어 준 게 먹고 싶어졌어요. 엄마에게 만들어 주는 것과 달리 아빠가 제게 만들어 주는 건 어린 아이는 단맛을 좋아한다는 편견(자세한 뜻을 몰라서 엄마에게 물어봤는데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려운 단어인 것 같아요.)이 있어서 일부러 제 것만 더 달콤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에요. 저도 내년이면 초ㅡ등ㅡ학ㅡ교에 들어갈 만큼 다 컸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엄마와의 약속을 어기고 아침 시간에 말해버리고 말았어요. 달달한 달걀말이는 먹기 싫다고 말이에요.
'나는 어린 애가 아닌 걸요. 다 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빠가 만들어 주는 달달한 달걀말이는 안 먹을 거예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던 아빠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들고있던 국자를 떨어뜨렸고, 마침 씻고 나온 엄마는 무슨 일이냐며 쓰러지려는 아빠를 붙잡았습니다.
'안즈 쨔아아앙...'
어린 아이처럼 우는 아빠가 엄마한테 안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을 들은 엄마는 한숨을 쉬면서 아빠를 달래주었습니다. 아이 참, 아빠는 어른이면서 아직 어린 저보다도 눈물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저렇게 달달한 달걀말이를 좋아하는 거겠죠? 저는 이제 어른이라서 이제 이런 건 먹지 않지만, 아빠를 위해서 조금 정도는 더 먹어주기로 했습니다.
결혼할까?
둘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고, 내일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로 폭탄발언을 내뱉은 레이 덕분에 안즈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안즈를 잠깐 쳐다본 레이는 이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결혼하자고 했다네."
"네?"
"다른 젓가락을 줄테니까 그건 한쪽으로 치워두게나."
"아니 괜찮아요...그보다 뭐라구요?"
"결혼..."
"잠깐만. 멈춰요. 그만."
떨어뜨린 젓가락을 다시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안즈는 컵을 들어 찬물을 들이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 같긴한데, 그걸 다른 곳도 아니고 이런 요정에서 들어도 되는 건가? 프러포즈라는 게 다 이런 건가? 수만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안즈는 이 남자가 자신에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몰래 카메라?"
"실례구먼."
"그러면 뭐예요? 아...방송에서 뭐하는 건가요?"
"안즈."
"여기 장소랑 상황을 생각해봐요. 제가 지금 이런 반응을 안하게 생겼나."
"흠...아가씨가 그런 로맨틱한 것들을 원할 줄은 몰랐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결혼이란 게 가벼운 것도 아니고, 인생에서 중요한 일인데 그걸 이렇게 가볍게 흘리듯이 이야기해도 되는 거냐구요..."
"가볍게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다만."
"그치만 제가 그런 오해를 하게 만들었잖아요."
레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곧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 안즈의 말에 어느정도는 동의를 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기는 했지만 가볍게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허나 자신의 이런 마음을 모르는 안즈가 충분히 다르게 오해할 수 있다 생각했기에 그 부분은 인정하는게 맞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혼에 대해서 충동적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이 몸은 진심이라네 아가씨."
"...그러니까...레이 씨 원래 결혼에 관심 없었잖아요. 이유가 뭐냐구요..."
"이유라..."
이렇게 특별히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매일 마주앉아서 함께 밥을 먹고 싶어서, 라고 하면 그런 가벼운 이유로 결혼을 생각하지말라며 화를 낼려나. 이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그럴싸하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며, 사쿠마 레이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안즈,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안즈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돌아올려면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한다는 전화에 너무 실망해서 이렇게 꿈에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꿈이니까 상관 없겠지. 안즈는 뺨에 닿는 차가운 손을 붙잡고 어제 전화로 하지 못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보고 싶어요 레이 씨... 귓가에 레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꿈인데도 왜 이렇게 현실같지, 라는 생각이 들어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사람의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잠이 덜 깨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잘못봤을리는 없으니까 확실했다.
"레이 씨...?"
분명히 코타츠에 누웠을 때는 태양이 높게 떠있는 한낮이었는데, 꽤나 오래 잤는지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어두웠다. 낮잠을 잘 생각은 없었는데 요즘 부쩍 잠이 많아져서 저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니 거실의 불을 켜고 온 레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안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서 말이야... 계획도 없이 이렇게 돌아온 건 아니니 걱정말게나."
"응..레이 씨가 그런 사람 아닌 건 알고 있으니까요..."
"아직도 잠이 덜 깼구만..."
사정없이 흔들리는 고개와 떠지지 않는 눈을 보면서 레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일정이 바뀌어서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더니 코타츠에서 자고 있길래 감기라도 들면 어쩔려고 이런데서 자고 있는 거냐고 혼낼 생각이었으나 저렇게 졸려서 자리에 누워버리는 안즈를 보고 있으니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 어쩔 수 없구먼.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 할 이야기도 많았고, 거기에서도 네 생각이 나서 무심코 사버린 선물을 보여주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 당사자가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그것들은 모두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뭐, 졸린 건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정리하지 못한 물건이나 캐리어같은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얼른 안즈를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이런데서 자면 감기 걸릴텐데, 하루정도는 괜찮겠지. 쓰고있던 안경과 모자를 벗어 대충 탁자 위에 올려둔 뒤 레이는 그대로 코타츠 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잠들어있는 안즈를 끌어안았다. 레이 씨이... 또 꿈에서 자신을 만나고 있는 건지 안즈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안겨들었고, 사쿠마 레이는 그제야 정말로 자신이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이드와 집사의 싸움이라니, 후시미 유즈루는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우습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상대 메이드의 손에 들린 것은 저택의 바닥을 청소할 때 쓰는 대걸레였고 유즈루의 손에 들린 것도 저택에서 쓰는 예비용 은식기였다. 둘다 모시고 있는 주인을 생각하면 단순히 식사에 쓰여야 할 은식기와 청소에 쓰여야 할 대걸레를 전투 중에 사용하는 무기로 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허나 저런 청소도구에 은식기를 사용하자니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 결국 은식기를 치워두고 유즈루가 소환해낸 것은 전기톱이었다. 도련님의 티타임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얼른 해치워야겠죠? 회중시계로 현재 시각을 확인하니 어느새 애프터눈 티를 마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집사된 자로서 제가 모시는 도련님의 하루일과를 망칠 수는 없었다. 유즈루! 오늘 에이치님이 오기로 했으니까 늦으면 안돼! 뒤에서 토리가 그렇게 외쳤고, 제 어린 도련님의 잔소리를 대충 한 귀로 흘려들으며 후시미 유즈루는 전기톱의 스위치를 켰다. 이 전기톱은 바쁜 유즈루를 위해서 가장 알맞은 무기였다.
상대가 전기톱을 소환한 걸 보자마자 안즈는 들고있던 대걸레를 바닥으로 집어던졌고, 뒤에 서있던 레이가 웃으면서 그건 쓰지 않냐고 물었다. 전기톱에 이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얼핏 들어도 주인에게 굉장히 무례한 말투였으나 안즈의 주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안즈야. 빨리 돌아가서 자고 싶구나. 그 뒤에 덧붙이는 말은 없었지만 그 말이면 충분했다. 안즈는 싸우기 위한 무기로 머스킷을 소환해냈다. 빨리 해치우고 돌아가야 하는 입장에서 이것만큼 귀찮은 무기는 없었으나 가장 손에 잘 맞는 것들로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이 메이드의 도리였다. 안즈의 주인은 낮에는 움직이는 게 힘든 흡혈귀였고, 원래라면 지금 이 시간 저택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어야 했다. 허나 나와야 할 일이 생겨버렸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었는데 그걸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런 문제가 생겨버렸다.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마주칠게 뭐야. 저 집사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안즈는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어디에 바람구멍을 내줄까? 저 뒤의 어린 도련님이 불쌍하기는 했지만 먼저 싸움을 건 쪽은 그 도련님이니까, 안즈는 그 대가를 치루게 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움직였고, 공중에서 머스킷의 총신과 전기톱의 날이 부딪혔지만 둘 다 마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딪혀봤자 별 효과는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땅에 착지한 후 안즈는 유즈루를 향해 머스킷을 쐈으나 탄환은 전기톱에 의해 반으로 갈라져서 별 소용이 없었다. 히메미야 가문의 집사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주로 은식기를 이용하는 다른 집사들과 달리 커다란 전기톱으로 싸운다는 걸로 소문이 난 유명한 자였다. 그 커다란 걸 자유롭게 다룬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저 날로 탄환을 아예 반으로 갈라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래서는 탄환이 소용이 없겠는 걸. 잠시 그런 고민을 한 안즈는 치마를 들어 가터에 넣어 둔 발터사의 자동권총을 꺼냈다. 전기톱을 든 집사는 저를 노리는 줄 알고 총을 쏘기 전에 달려들었지만 안즈가 노리는 건 그 집사가 아니었다. 마법으로 강화시킨 머스킷으로 그 전기톱을 막아냄과 동시에 온 힘을 다해서 그걸 쳐낸 안즈는 설마 자신을 받아칠 줄을 몰라서 중심을 못잡고 주저 앉은 그가 제게 다시 달려들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권총을 쥐고 있는 손을 들어 짜증을 내며 집사를 바라보고 있는 그 꼬마 도련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제대로 목표물을 보지 않았지만 양손으로 사격하는 건 레이의 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배운 것이었고, 설마 그 상황에서 제 도련님을 향해 총을 쏠 줄은 몰랐던 유즈루는 토리를 향해 당장 고개를 숙이라며 소리쳤다. 그 상황에서 유즈루는 등을 보였고, 애초에 처음부터 그 도련님에게 총을 쏠 생각이 없었던 안즈는 곧바로 기관총을 소환해내 그 집사를 향해 쏘기 시작했다.
뭐, 그쪽도 프로인지라 탄환이 날라오는 걸 눈치채자마자 제 도련님을 끌어안고 몸을 숙여 피했지만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쳐서 무력화시키는 게 안즈의 계획이었기에, 얻어걸리라는 식으로 무작정 탄환을 쏘아댔던 것이며 운좋게도 탄환 중 하나가 그 집사의 팔을 통과한 모양이었다.
"계속 하실 건가요?"
이쯤하고 지나가죠. 그쪽 도련님 지금 기절할 것 같은데.
제 성격같았으면 감히 이딴 짓을 메이드를 전기톱으로 갈아버렸겠지만 지금 후시미 유즈루 본인이 최우선으로 두어야할 것은 제 도련님이었다. 피를 보자마자 울면서 어떡하냐고,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토리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자신이 물러서야 할 때였다.
"...오늘 진 빚은 나중에 배로 갚아드리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다음을 기약하며 그는 제 주인과 사라졌고, 안즈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레이에게 걸어갔다.
"할 말이 있다면 어디 한 번 해보게나."
무슨 변명을 할지 기대되는구먼.
레이는 그를 잘 모르는 누군가가 봤을 때는 지금 굉장히 기분이 좋은가보다, 하고 생각할정도로 환하고 인자하게 웃고 있었지만 안즈는 차마 레이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알고 지낸지도 10년이 넘었고, 그 시간동안 제일 가까운 자리에서 레이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안즈는 저 웃는 얼굴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목소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서늘함과 웃고있지만 차가운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 붉은 눈까지. 레이는 지금 엄청나게 화가 나있었고, 그가 화를 내는 원인은 모두 저때문이었기에 변명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잘못했어요..."
"아가씨가 뭘 잘못했는지 이 몸은 도통 모르겠구먼."
"조심하라고 했는데..."
"...했는데?"
"한 귀로 흘려듣고 다니다가 부주의로..."
"부주의로?"
"...제가 잘못했어요...레이 씨..."
"말은 끝까지 하게나."
끝까지 하고 싶어도 그런 얼굴로 자꾸 되물으면 할 말도 까먹게 된다구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안즈는 그럴 수가 없었고, 레이는 그녀의 다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학창시절에도 그렇게 덜렁거리다가 부딪히고 다치더니 성인이 되서도 그걸 고치지 못해 꼭 이렇게 다쳐서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혼자서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설명했는데도 까먹고 분주하게 혼자서 일을 처리하다가 자신의 부주의로 안즈는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게다가 운나쁘게도 오늘은 한달에 며칠 되지도 않는, 안즈가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온 날이었고, 구두굽은 장렬하게 부서졌으며 거기다가 안즈의 오른쪽 발목도 그 굽처럼 아주 제대로 망가져버렸다. 넘어진 상태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사람이 잘 오지도 않는 장소에서 쓰러져 끙끙 거리다가 그녀가 오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한 스태프에 의해 발견되어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고, 음악방송이 끝나자마자 소식을 전해들은 레이는 다음 스케쥴을 다른 멤버에게 미뤄두고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 안전을 제외하면 뭐가 중요하냐고? 당연히 건강이지 않은가. 하루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안즈에게 레이가 한 충고였고, 안즈는 그걸 최대한 지킬 수 있도록 노력했다. 물론 제 몸을 생각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자신이 아프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이나 피해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에 가까웠다. 물론 레이는 안즈의 그런 선택을 엄청나게 싫어했지만 그래도 안전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이유라도 괜찮았기에 불만이 많았지만 조용히 넘어가주었다.
그런 와중에 이런 일이 터졌으니 레이가 안즈에게 화를 내지 않을리가 없었다. 깁스까지 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는 안즈를 보고 있으니 화가 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지만 여기서 이성을 잃고 안즈에게 화를 내서는 안됐다.
"아가씨. 저번에 나와 한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어...설마...그거, 요?"
"그때 계약서까지 쓰지 않았나.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답해보게나."
"...레이 씨이..."
"그런 표정으로 봐도 소용없다네."
필사적으로 제 얼굴을 무기로(이유는 모르지만 안즈는 자신의 얼굴이 가끔 레이에게 먹힌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그것만은 안된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레이는 단호한 얼굴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제 몸을 사리지 않고 일을 하는 안즈를 두고볼 수 없었던 레이는 과로로 쓰러져 입원한 그녀에게 앞으로도 이렇게 제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지 않고 안즈가 일을 한다면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으로 안즈를 강제로 이사시켜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간섭 하겠다며 협박아닌 협박을 해왔고, 차마 레이에게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었던 안즈는 그때부터 제 건강과 다른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게 조금 아쉬우면서도 예전보다 쓰러지는 일도 줄어들고 다치는 일도 줄었기에 만족하면서 그 약속은 잊고 살았는데. 어차피 걷지도 못해서 안즈는 한동안 모든 스케쥴에서 제외되었고, 오늘로 이번 앨범의 마지막 무대에 선 레이는 당분간은 오프였다.
집안이 뒤집혔다. 아침 식사 시간에 무심코 안즈가 흘린 말 한 마디에 그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아직 잠이 덜 깨서 멍한 얼굴로 찬물만 들이키고 있던 레이는 안즈의 말을 듣자마자 마시던 물을 뱉어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저도 문신, 하고 싶어요."
"다시...한 번만..."
"저도 레이 씨처럼 문신 하고 싶어요."
담담한 목소리로 안즈는 그렇게 말했고, 그 말과 동시에 고정되어 있던 식탁이 그대로 뒤집히고 안된다며 울부짖는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갑작스러운 비명소리에 안즈는 놀라서 흠칫거리며 레이의 옆에 달라붙었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안즈의 충격발언과 소음 덕분에 머리가 아파진 사쿠마 레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일단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안즈를 방안에서 내보냈다. 강의시간 늦겠구만. 얼른 가서 준비하게나. 억지로 웃으며 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안즈에게 그리 말한 레이는 그녀가 그럼 이따 보자며 그의 뺨에 키스한 뒤 방을 빠져나갈 때까지 그 일그러진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러나 방을 나간 안즈의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얼굴에 웃음을 지우더니 들고있던 유리잔을 벽에다가 집어던졌고, 소란스러웠던 방은 귀신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조용해졌다.
"..."
숨도 못쉬고 떨고있던 코가는 마찬가지로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 상황에서도 평화롭게 밥을 먹고 있는 아도니스의 숟가락을 빼앗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고, 이 상황을 그나마 중재시켜줄 카오루는 아침에 저기압인 사쿠마 씨랑 같은 자리에서 밥 먹는 거 사양하고 싶어서~ 라는 말만 남기고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리고 저렇게 화가 난 레이를 진정시켜줄 이 집안의 서열 1위는 방금 전에 이 방을 나갔다. 그말인즉슨 저 나찰과 같은 얼굴로 자리에 앉아있는 레이와 맞서서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걸 뜻했고, 그건 곧 아침부터, 그것도 밥먹다가 피바람이 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침의 사쿠마 레이는 그 안즈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예민하고, 무서웠으며, 더러웠다. 얼굴이고 성질이고 하는 말같은 게 전부다. 자는 걸 방해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며 그걸 몰랐던 이들의 실수로 이른 아침부터 안면을 방해받은 레이가 야차같은 모습으로 방에 장식되어있던 진검을 꺼내와 이 집안에서 자신이 지켜야하는 규칙도 기억하지 못하는 머리따위 그만 달고 다녀도 괜찮지 않냐며 그대로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아침부터 피바람이 분 적이 있었고 그 날 이후로 아무도 사쿠마 레이를 아침에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가끔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안즈에게도 난폭하게 굴 때가 있을 정도로(물론 정신차린 후에는 도게자까지 하며 사과를 했다.) 어쨌든 아침의 레이는 거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그걸 까먹고 심지어 안즈가 보는 앞에서 그런 추태를 부렸으니 그들은 저 젓가락이 제 이마에 꽂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이 씨."
숟가락이냐 물컵이냐 그도 아니면 벽에 걸린 저 진검이냐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밖에서 안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 씨. 저 오늘 휴강이래요. 저 때문에 일찍 일어난다고 피곤했죠. 다시 자러가요. 컵을 들고있던 레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조심스레 그것을 내려놓았고, 깨진 유리 조각은 빨리 치우라는 말만 남긴 채 방을 나갔다. 살짝 문이 열린 틈 사이로 안즈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안심하라는 듯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얌전히 안즈에게 기대서 방을 빠져나가는 레이를 보면서 그들은 사쿠마 집안의 서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아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머리가 아픈듯 투덜거리는 레이를 다독여주며 안즈는 그와 같이 이불 위에 누웠고, 누가 보면 닭살이 돋을 정도로 달라붙어서 사이좋게 잠들었던 두 사람이 일어난 것은 늦은 점심시간 때였다. 못일어나겠다는 레이를 일으켜서 점심까지 챙겨먹은 뒤 잠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던 그가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 안즈의 생각이 정리됐을 때, 아침에 하다 말았던 그 이야기를 다시 이어서 하기로 했다.
안즈의 의견은 그대로였다. 문신하고 싶어요. 두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인 것 같았다. 이 집에 오고서는 안즈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 많아서 온 첫 날부터 다양한 표정을 보여줬었지만 기본적으로 안즈는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그 표정이 변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 안즈가 저런 얼굴로,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진심이 아닐리가 없었다.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던가. 혹시라도 관심을 가질 까봐 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의 표정을 봤을 때 문신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은 것 같았는데. 레이는 한숨을 내쉬었고, 제 눈치를 살피는 안즈에게 물어보았다. 갑자기 하고 싶게 된 이유가 뭐냐고.
"...그냥...레이 씨도 했으니까..."
"나도 했으니까?"
"공통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흐음..."
"요즘 문신은 그냥 패션으로도 많이 한다니까..."
"그래서?"
"레이 씨 이름같은 거 새기면 어떨까 하구..."
미쳐버리겠네. 레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속으로 비명아닌 비명을 질렀고, 안즈는 혹시라도 자신이 말실수를 했나 싶어서 안절부절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 것도 봤는데, 그래도 레이 씨때문에 하는 거니까 이름이 좋지 않을까해서요. 싫으면 말씀해주세요. 안즈는 그렇게 말했지만 레이는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고 몹쓸 파렴치한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 이름을 새기겠다는데. 그걸 싫어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물론 싫어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쿠마 레이는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안즈쪽에서 먼저 그런 말을 해줘서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좋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고, 자신은 어쨌거나 그녀의 보호자이기도 했으니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몸에 화려하게 이것저것 새겨넣은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안즈야. 조금만 더 고민을 해보는 건 어떻겠누? 나는 네가 후회할까봐 걱정되는구나."
"저도 고민 많이 해보고 결정한 일이예요."
"하아..."
아무리 설득해도 안듣겠구만. 레이는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고, 안즈가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 누가와도 꺾을 수 없었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니 이미 그에 대해서도 찾아봤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어쩔 수 없나. 어차피 안즈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주는 게 레이였고, 가까스로 이성적으로 생각은 하고 있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었기에 애초에 처음부터 안즈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좋다고, 그치만 이왕할거면 함께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꺼내려고 할 때 큰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더니 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부하들이 몰려와 제발 문신만은 참아달라고 무릎까지 꿇고 빌기 시작했다.
누님. 문신새기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말도 못할정도로 아프단말입니다. 맞슴다. 최대한 안아프게 한다고 해도 결국은 울게 된다 말임다. 저녀석은 등에 용하나 새긴다고 눈물을 한 바가지나 쏟아냈슴다! 아이고 누님. 사랑의 증표같은 건 반지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뭣하러 문신까지 하세요. 애초에 그런거면 형님도 누님의 이름를 새기는게 공평하지 않습니까? (맞아. 형님도 같이 해야한다고!) 누님. 지금이야 좋지만 문신은 지울 때도 고생한단 말입니다. 형님이랑 천년만년 살 거도 아니고 이혼할 수도 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이름으로 문신은 너무 이르지않나요?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방이 또 다시 조용해졌고, 가만히 그들의 설득과 충고와 회유를 들어주던 안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 씨 밑에는 왜 이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많을까. 예전이라면 놀랐겠지만 이런 일도 하루이틀이 아니니 안즈는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고 있고, 안즈도 그 의견을 딱히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문신에 대해서 찾아볼 때 그런 이유로 해서는 안된다며 충고하는 사람도 많았고 스스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딱히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레이가 지금 자신의 옆에 없었더라면, 같은 조건이 붙었을 때의 이야기다. 사쿠마 레이가 그걸 들어버렸다. 저놈의 자유로운 재앙의 주둥아리는 누님이 처음 여기 왔던 날에도 날뛰더니 그 사이에 배운 게 없는거냐. 이쯤되면 학습능력이라는 게 생겨야 할텐데 몇년이 지나도 그대로인지 레이는 화가 나면서도 안타까웠다.
"...혼자 가는 건 안되니 반드시 나와 함께 갈 것. 이것만 지켜주면 내 더는 반대하지 않으마."
"정말요?"
"그래. 일단은 예약을 해야할 것 같은데... 늙어서 그런가,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먼."
레이는 카오루가 알고 있을테니 물어보고 예약을 잡으면 그에 맞춰서 자신도 시간을 비우겠다했고, 안즈는 알겠다면서 같이 가자고 그의 손을 잡았지만 레이는 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보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도와주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무리인가. 안즈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들에게 사과하며 그래도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아주 천천히 걸어서 방을 빠져나갔다. 사실 같이 가자고 몇 번만 더 이야기하면 레이는 부탁을 들어줄테고, 지금 당장은 이 위기상황을 피할 수 있겠지만 그건 딱히 좋은 해결책은 아니었다. 분명히 저 모르는 사이에 불러내서 카오루에게 들었던 그 수많은 유치한 행동(하카제 카오루는 남아있는 한톨의 양심으로 레이가 저지른 짓들을 그나마 검열해서 들려주었기에 안즈는 그걸 유치한 행동이라고 불렀다.)을 할 게 뻔했고, 그게 나중으로 미뤄져서 괜히 희망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안즈가 나가자마자 레이는 당장 튀어나오라며 손가락을 까딱했고, 문제발언을 한 당사자는 무릎으로 기어나와 땅바닥을 파고 드는 드릴마냥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자신이 실언을 했다며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레이는 무표정한 얼굴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말도 없었고, 그 침묵을 깨고 그가 내뱉은 말은 조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선택해라."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할래, 시멘트랑 같이 바다에 뛰어들래. 아니면 산채로 머리까지 전부 파묻힐래, 그것도 아니면 산 정상에서 굴려질래? 빨리 선택해라. 기타는 없어. 저 넷 중에 골라. 왜 대답을 안해. 전부 싫다고 지금 반항하는 거냐?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기는 했어. 가족인데, 가족을 그렇게 험하게 다룰 수는 없지. 녀석... 역시 너도 내가 직접 때려주길 바랐던 거구만. 어금니 물어라. 젊은 나이에 그 하얗고 고르게 난 예쁜 치아 싹 다 갈아치우고 새로 하고 싶은 거 아니면.
...그 뒤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은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였고, 문신 하나 반대하자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레이의 심기를 건드리고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던 재앙의 주둥아리는 그딴 입 꿰매는 게 맞지 않냐며 바늘까지 챙겨 온 레이에게 빌고 빌어서 입술에 박음질을 당하는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다시는 이런 옷 안 입을 거예요."
혼자서 벗어보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결국은 포기했는지 안즈는 분하다는 얼굴로 레이에게 걸어와 그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내 도움따윈 필요없다더니? 모른 척 웃으며 그렇게 말했더니 살벌한 눈빛으로 안즈가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걸 입으라고 가져단 준 사람은 레이 씨니까 책임지세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방 문을 열고 나가버리겠다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안즈 덕분에 레이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온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한 가득이었기에 안즈는 반항의 의미로 신고있던 높은 하이힐을 벗어 힘차게 방 한 쪽 구석에다가 집어던졌다.
오늘, 에이치가 주관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었다. 안즈는 에이치가 가장 첫번째로 초대장을 보낸 상대였고, 그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파티에 초대되었으므로 레이도 함께였다.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따지면 동창회에 가까운 크리스마스 파티였기에 복장에 대해서는 자유로웠지만 안즈는 무엇을 입어야 할지 초대장을 받은 그 순간부터 고민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그런 안즈의 고민을 눈치챈 레이가 의상은 자신이 준비할테니 그에 대한 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안즈는 그를 믿고 파티 전 날까지 이 일에 대해서는 까먹고 있었다.
'...제 정신이에요?'
'하하.'
'벌써부터 취한 건 아닐테고.'
'아가씨가 입어주길 바라고 사온건데...'
슬프게도 안즈는 이게 싫은가보구먼.
저건 연기다. 저 교활하고 얍삽한 인간에게 넘어갈 수 없다고 수백번을 되내였으나 시무룩한 얼굴로 자신을 위해 사왔다고 말하는 레이를 안즈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입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얼굴 하지마요. 결국 진 사람은 안즈였고, 레이는 답지 않게 들뜬 얼굴로 안즈가 옷을 입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웬만하면 혼자서 입었겠지만 등 뒤에 지퍼가 달려있는 이 드레스는 안즈 혼자서는 입을 수가 없었고, 마무리를 장식하는 목의 리본 또한 스스로 묶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디자인이었다. 저번부터 어디서 뭘 봤는지 출근하는 저를 붙잡고 자신이 입혀주겠다고 난리를 치길래 억지로 떼어놨더니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안그래도 오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이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옷마저 이래야한다니. 한숨이 나왔지만 신이나서 제 발에 구두를 신겨주는 레이를 보고 있으니 안즈도 기분이 좋았기에, 얌전히 그가 원하는 대로 있어주었다.
그치만 벗는 건 안됐다. 입혀주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했지만 벗는 것만은 절대로 싫었다. 그래서 안즈는 레이의 도움없이 해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저 혼자서 이 옷을 벗는다는 건 조금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걸 노리고 그랬던 거죠. 억울해서 눈물까지 나온 안즈가 저를 노려보자 레이는 웃기만 할 뿐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목의 리본을 풀었다. 그저 옷을 벗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거지. 그 다음은 안즈가 잘 하지 않는 화려한 귀걸이였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장을 지워주는 손길이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건 자신이 할 수 있다고 했으나 레이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고집을 부렸다. 올려묶었던 머리를 풀었고, 손에 하고 있던 무거운 악세사리도 벗을 수 있었다. 정말 단순히 도와주는 것일 뿐인데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의, 전초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메인인가. 그렇게 말하며 레이는 안즈의 등 뒤에 서서 지퍼를 잡았다. 그걸 잡고 망설임없이 내리기만 하면 이 긴장감도 끝인데, 레이는 그대로 서있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어요?"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네."
"또 이상한 생각한 건 아니죠."
"흐응...."
"장난치지말고 빨리 내려줘요..."
안즈는 얼른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레이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지퍼를 아래로 내리던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드러난 등에 입술을 갖다댔고, 안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레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으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니잖아. 묘하게 달라진 어조로 그렇게 말하며 목선을 따라서 입술을 움직이는 레이 덕분에 안즈는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으나 그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어서, 생각만 그렇게 할 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게 느껴졌는지 레이가 작게 웃었다. 지금 당장 몸을 돌려서 얄미운 그 얼굴을 확인하고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의도를 갖고, 명백하게 흑심을 담아 제 등을 쓸어내리는 그 손길부터 어떻게 해야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이런 상황이 될까봐 레이의 도움을 받기 싫었던 건데. 물론 이미 후회해도 늦은 일이었다.
옷의 지퍼가 끝까지 내려갔고, 레이는 그제야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있던 안즈의 어깨를 놔주었다. 긴장이 풀리자 안즈는 크게 숨을 내쉬었고, 이제 이 남자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물론 한 집에서 살고 있으니 도망갈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제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여길 벗어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고. 그러나,
"내가 말했지 않았나?"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니라고. 다시 안즈가 일어나지 못하게 붙잡은 레이는 설마, 하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예쁘게 웃었다. 이제 겨우 지퍼 하나 내렸을 뿐인데, 일어나면 안되지. 이제야 이 남자의 계획이 무엇인지 눈치챈 안즈는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해봤지만 늘 그렇듯이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이젠 저도 몰라요..."
... 레이 씨 마음대로 해요. 항복을 선언한 안즈가 마음대로 하라며 잡고있던 레이의 손을 놓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