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땅을 기어와 제 앞에 또아리를 트고 서있는 뱀의 눈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뱀은 또 다시 소녀에게 경고했다. 당장 이 마을을 떠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그 썩은내가 나는 시체가 널 보기 전에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노랗게 반짝거리는 눈은 다시 한 번 소녀에게 경고했다.
안즈에게 있어서 뱀은 무섭지 않은 동물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으나 뱀은 제게 친숙한 동물이었고, 기이하지만 그들에게도 안즈는 좋은 사람이었는지 단 한 번도 뱀에게 위협을 받은 적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이 뱀은 위협하는 게 아니라, 소녀가 걱정되어 경고를 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안즈도 그 뱀의 경고를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 돌아갈 곳이 없어요.
소녀는 그 뱀의 눈높이를 맞춰서 무릎을 굽혔고, 걱정된다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게 뱀에게 그리 말했다. 부모님이 죽었어요, 동생도 같이요. 저를 맡아 줄 친척은 이 마을에 살고 있고, 아직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나는 친척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뱀은 아주 곤란한 얼굴을 했고,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다. 야단났어, 큰일이야. 뱀은 안즈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고, 소녀는 기다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뱀은 다시 숲 속으로 사라졌고, 안즈는 그 뱀이 사라진 숲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오는 곳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이곳에서 살았었고, 소녀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안즈는 이 마을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하면 머릿속에 안개가 끼인 것처럼 뿌옇게 변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게 문제기는 했지만 그다지 기억하고 싶다고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안즈.
멍하니 돌로 탑을 쌓고 있을 때, 안즈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고있던 것을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람의 형체와 그의 곁을 지키는 수십마리의 뱀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그는 항상 이렇게 안즈의 앞에 나타났었다. 자신이 뱀에게 익숙해진 것도 전부 이때문이었다. 매일매일 수십마리의 뱀과 나타났는데 그 어떤 사람이라도 뱀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은빛머리, 저와 비슷한듯 하면서도 다른 푸른 눈동자, 한쪽 어깨와 팔을 내놓은 유카타 차림과 항상 짓고있던 짜증난다는 표정. 몇 년만에 보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안즈는 기쁜 마음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갔다.
이즈미 씨!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찡그린 얼굴을 풀고 웃다가도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표정을 굳힌 그는 제게 달려오는 소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누가 여기 오라고 했어?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는 귀찮음과 짜증, 그리고 걱정이 담겨있었다.
"그치만...어쩔 수가 없었는 걸요"
"그래, 기회가 생겼으니 그 녀석도 시체처럼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겠지. 온 마을에 썩은내가 진동하겠어."
안즈가 이곳으로 올 수 있게 만든 것도 아마 그녀석의 짓일게 분명했다. 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죽었다고 했지. 안즈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불의의 사고처럼 겪을 수 있게 만들 사람은 그 시체 뿐이었다. 산 밑의 그 늙은이는 기본적으로 방관자이니까, 그자가 관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안즈는 우연히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보았을 땐 이건 우연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팔 내밀어봐."
왜요? 그렇게 물어보자 여전히 궁금한 것도 많다며 웃은 이즈미는 안즈가 왼팔을 내밀자 염주와 비슷한 디자인의 팔찌를 손목에다가 끼워주었다. 이즈미 씨 눈색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나보다는 너랑 비슷하지. 이거 계속 하고 있어. 장갑 안에 숨겨놓으면 더 좋고. 그 시체한테 들키면 안돼. 별로 효과도 없는데 그 인간이 알아버리면 아예 쓸모가 없어지니까.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돌아온 걸 환영한다.
그제야 웃는 얼굴로 제게 환영인사를 전하는 이즈미에게, 안즈도 웃는 얼굴로 답해주었다.
이 마을의, 올라가는 것이 금지된 산 아래에는 노인이 한 명 살았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린시절에 그 노인의 집에 놀러가서 그가 주는 간식을 먹어본 적이 있었고, 그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무더운 여름을 보내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손자와 손녀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다 그 노인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체불명의 존재는 노인이라고 불리는 것치고는 엄청나게 젊은 모습이었으나 마을의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에 위치하여 스산한 기운과 이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커다랗고 고풍스러운 집, 평범한 인간에게서는 느껴볼 수 없는 아우라, 항상 화려하지만 단정한, 그런 상반되는 분위기의 기모노를 걸치고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노인의 말투를 쓰는 남자.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된 사람들도 기억하고 있는 그 노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못했다. 그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애초에 요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죠. 제 눈엔 아무것도 안보이는데. 무언가가 있나요? 어릴 때는 보였는데 지금은 안보이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이유야 어쨌든간에 그 노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있었다.
그는 다시 만났을 때 소녀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보자마자 제 이름를 불러주며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고 기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작았던 아이가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구나. 이 늙은이 무릎에 앉아서 별을 봤던 건 기억하누? 우리 꼬마 아가씨는 내 무릎을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그러한가? 노인은 옛추억을 늘어놓았지만 소녀는 그 중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다. 난감한 얼굴로 저는 당신을 기억 못하는데. 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노인은 서럽다면서 우는 시늉을 했지만 정말로 기억이 안나서 위로조차도 해주지 못했다.
"뭐,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어째서 돌아왔나?"
"이즈미 씨랑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호오? 그 뱀이 먼저 선수를 쳤구먼. 몇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교활한 녀석이야."
"돌아온 이유는 별 거 없어요. 지낼 곳이 여기 뿐이니까 돌아온 것 뿐이예요."
"그래, 그 시체녀석은 지금 죽기 싫어서 발악을 하는 중이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데려오고 싶었을 게다. 그러니 아가씨가 지낼만한 곳도 모조리 없애버렸겠지.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들려고."
"...절 이곳에 둬서 그 사람이 얻는 게 뭔가요?"
"많지. 너무 많아서 문제라네."
노인은 자세한 건 가르쳐줄 수 없다고 말했다. 소녀는 그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고,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으로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사건과 사고를 해결해주기도 하였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방관자였다. 아니다, 방관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어떤 단어로 그를 표현하면 좋을까.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미 돌아온 걸 다시 내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조심하게나.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그 살아있는 시체가 아가씨를 잡아먹을게야."
"...이즈미 씨는 당신도 위험하다고 했는 걸요."
"그놈의 뱀자식이, 여전히 성격이 고약하구나."
산 아래의 그 늙은이는 만나러가지마.
왜요?
속이 시꺼먼 그 늙은 영감이 주제파악도 못하고 어린여자애를 신부 삼을 생각만 하고 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누구를요?
하아? 그야 당연히 너잖아. 그게 아니면 내가 뭣하러 그렇게까지 말하겠어. 안즈. 너 제대로 기억 못한다니까 다시 말해주는데, 그 늙은이는 만나러가지마. 알겠어? 스스로는 모든 걸 지켜보는 관찰자라고는 하지만 자꾸 네 일만 되면 끼어들고 간섭을 하니까 말이야.
이즈미와의 대화가 떠올랐고, 노인은 타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마냥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모르는구나. 물론 틀린 말은 없다만.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소녀는 그것을 흘려넘겼다. 중요한 건, 이제 이곳을 떠나 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저택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크게 효과는 없겠지만 아가씨에게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겠네. 세나 군에게도 받은 게 있을테지? 그것과 비슷한 것이니 받아주게나. 부담스러워 할 필요는 없네. 이 늙은이는 그저 아가씨가 저 시체에게 잡혀서 지옥으로 끌려가는 것만은 막고싶을 뿐이니까.
붉은 돌이 박혀있는 반지는 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고, 소녀는 그에게 고맙다며 고개숙여 인사했다. 별로 감사인사를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구먼. 이것도 어차피 내 욕심이니까 말일세.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집안으로 사라졌다.
오랜만에 온 것이지만 이 저택은 그때처럼 변함없이 불길하고 우울한 기운을 풍겼다. 일을 하는 사용인들은 모두 얼굴에 표정이 없었고, 발소리도 내지 않고 유령처럼 다녔다. 이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모든 일에 결정권을 갖고 있는, 당주의 대리인으로 마구잡이로 권력을 휘두르던 조모가 쓰러지면서 안그래도 어두운 저택이 죽음의 기운까지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택의 정원은 그렇게나 아름다운데, 이런 음산한 기운에 그 꽃들이 시들지 않은게 이상할정도였다. 아가씨의 방은 이쪽이랍니다. 당주님의 옆방이지요. 그렇게 가까이 하지말라는 경고를 들었는데, 하필이면 안즈가 지내는 방의 위치는 그 남자의 옆 방이었다. 그러나 얹혀사는 입장에서 겨우 이런 걸로 불평을 할 수가 없었기에 안즈는 그 옆 방에서 제 짐을 푸는 수밖에 없었다.
갖고 온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책과 앨범, 옷과 제 소중한 물건을 담은 보석함. 그외에 가족이 남긴 유품 몇개. 누군가가 보면 너무 간소하지 않겠냐고 한 소리 할 법하지만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게 필요한 것만 챙겨온 것이니 당연히 타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장례식장을 찾아왔던 텐쇼인 가의 당주 대리인, 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남자에게도 분명히 제 물건을 갖고 간다고 전했을텐데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가 지낼 곳이 여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과도하게 모든 것이 채워져있는, 그래서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옷장에는 제 사이즈로 보이는 수많은 여성복들이 들어가 있었고, 그 밑의 서랍에는 장갑과 속옷, 실내복과 여러 종류의 신발이 들어가 있었다. 죽어도 입지 말아야지. 뭘 모르는 사람이라면 기뻐했겠지만 안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대충 제 짐을 정리한 뒤 간만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현 당주의 조모를 보러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늙어서 말라 비틀어진 손으로 안즈의 뺨을 어루만지던 노인은, 빨리 제 손자와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아달라고 말했다. 역시 그런 용도로 날 부른 거구나. 본가와 분가의 아이들을 전부 다 합쳐도 현 당주와 비슷한 나이 또래는 안즈밖에 없었다. 아무에게나 이 집안의 부와 권력을 물려줄 수 없지. 아가야. 너는 내 손자와 잘 맞을게다. 그 녀석과 결혼해서 이 집안의 모든 걸 가지렴.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웃었다.
"노망난 늙은이가 아직도 살아있었네."
그때 조용히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더니, 천사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노인은 듣지 못한 것 같았으나 안즈는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안즈 쨩. 안녕? 그는 소녀의 옆에 앉으며 그렇게 인사했고, 안즈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텐쇼인 가문은 교토 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집안이었는데, 딱히 돈이 많아서라던가, 집안의 사람들이 정재계의 중요한 위치에 앉아있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거나, 뭐 그런 것들 때문에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집안 대대로 저주라도 받은 것마냥 남자인 후계자는 단명을 하고, 그 후계자의 어미나 아내가 그 모든 걸 이어 받아 장수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그래서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계자의 생명을 제물삼아서 지내고 있다는 걸로 유명했고, 텐쇼인 또한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사실이었으니까. 후계자는 일찍 결혼을 하고, 일찌감치 아이를 낳는다. 태어난 아이는 무조건 남자아이이며, 그 아이가 자라기 시작하면 당주는 점점 건강을 잃게 되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 거기다가 애초에 건강하지 못하게 태어났으니 후계자니, 집안의 당주니, 그런 것들은 허울 좋은 눈속임에 불과할 뿐 실제로 모든 걸 결정하는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다. 현 당주인 텐쇼인 에이치의 조모기가 죽으면 그의 모친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을텐데, 안타깝게도 한달 전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사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교통사고로 함께 목숨을 잃은 당시 차를 운전하고 있던 운전기사는 텐쇼인 에이치를 존경하고 있었고, 그는 에이치만이 이 집안을 바꿔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텐쇼인 에이치는 저를 따르는 이들을 어떻게 이용해야하는지 알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들 그렇게 생각만 할 뿐 그 누구도 입밖으로 그것을 꺼내지 않았고, 제 밑을 이을 말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했던 조모는 전국을 뒤져서 순하고, 아직 세상물정을 몰라 제 말을 거역하지 않을 어린 여자아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제 조모의 계획을 일찌감치 눈치챘음에도 텐쇼인 에이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늙은 여우와 원하는 것이 같았을 뿐이었다.
방 안에 시체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구나. 하기사 죽어야 할 인간이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있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이즈미와 레이는 안즈에게 계속 시체 썩은 내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체가 저를 잡아먹을테니 조심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막상 집에 와보니 죽어가는 시체는 이 남자가 아니라 누워있는 노인이었고, 오히려 그는 생기발랄한 얼굴로 웃으며 그 어떤 생물보다도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둘이 말했던, 가까이 가지말라고 경고했던 존재는 대체 누구였을까. 소매와 장갑에 가려진 반지와 팔찌를 다시 한 번 숨기며, 안즈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소녀는 아주 어릴 적에, 이곳에서 산 적이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그때는 부모님도 건강하게 살아있었고, 동생도 살아있었다. 도쿄에서 살다가 갑자기 교토의,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도 불만이었지만 사실 가장 싫었던 이유는 본가의 가장 나이가 많은, 당주의 어머니가 어린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저를 불쾌하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요사스러운 눈을 하고 저를 쳐다보는 얼굴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그녀는 안즈를 예뻐하며 자꾸 방에도 부르고 손에 화과자같은 것도 쥐어주기도 했지만 한 번도 그걸 먹은 적은 없었다. 동생은 누나가 먹지 않을 거면 제게 달라고 했지만, 예쁘고 고운 화과자에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서 동생에게도 주지 않고 매일 저택의 뒷산에다가 묻어버리곤 했다.
처음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안즈가 기억하는 건 이즈미 뿐이었으나 레이를 만나고, 이 저택을 다시 마주하고, 다시 에이치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안즈의 기억 속의 에이치는 과거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었는데, 어릴 적에도 제 아비의 목숨을 빨아먹고 산다는 말을 듣고 자랐던 어린 후계자는 천사같은 얼굴로 제 모친과 조모에게 얼른 죽어버리라고 악담을 내뱉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저 아귀들이 죽어야 이 집안도 바뀌겠지. 특히나 그는 제 조모가 안즈를 자꾸 불러내는 걸 불쾌하게 여겼는데, 그 노인이 죽는 건 절대 먹어서는 안된다며 경고한 것도 에이치였다.
'먹으면 기생충이 안즈 쨩의 몸을 갉아먹어버릴 거야. 그리고 마치 자기가 안즈 쨩인 것 처럼 행동할 걸? 그러니까 먹으면 안돼.'
'자기가 보는 앞에서 먹으라고 하면 어떡해요?'
'그럴리는 없을 거야. 자기 앞에서는 과자같은 건 먹지말라고 항상 말하고 다니니까.'
그 집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제 가족도 아닌 에이치였다. 그 분위기에 주눅들어 떨고 있으면 항상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을 도와줬던 에이치를 안즈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동생이 없어서, 안즈 쨩이 내 동생같아. 그러니까 너도 나를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상냥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에이치가 좋았기 때문에 안즈는 그를 오빠라고 불러주었고, 텐쇼인 에이치는 그때 처음으로 아이처럼, 제 나이에 걸맞게 웃으며 기뻐했다.
'안즈 쨩. 이 집에서는 아무도 믿으면 안돼.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전부 널 잡아먹으려고 할테니까, 절대로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돼. 알겠니?'
그럼 에이치 오빠도 믿으면 안되나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답이 날라올지 몰랐기 때문에, 안즈는 무서워서 단 한 번도 그에게 그렇게 물어보지 못했다.
소녀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던 세나 이즈미는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뱀을 모시고 있는 신사에서 살고 있는 신이었다. 보통 뱀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있어서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혐오가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었고, 그 누구도 뱀을 죽이지 않았으며, 그 아무리 사나운 독사라도 저를 공격하지 않는 인간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즈미는 인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자신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기에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자비롭게 봐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도 그런 신의 자비를 알았기에 그가 살고 있는 신사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며,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혹시라도 거길 갔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그럼 저는 왜 그냥 보내줬어요?'
'하아? 그게 불만이면 지금이라도 시체로 만들어서 뱀굴에 집어던져줄까?'
그러나 이즈미는 길을 잃고 자신의 신사로 찾아 온 안즈를 죽이지도 않았고, 단 한 군데도 건드리지 않고 멀쩡히 살려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산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보답이라며 공물을 들고 온 안즈를 내치지도 않았고, 신사 안으로 들여서 귀찮다고 말하면서도 놀아주기까지 하였다. 이유,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얼굴이 귀여웠을 뿐이다. 어딘가의 영감처럼 어린 애를 신부로 삼고 싶다는 파렴치한 욕망같은 게 아니라, 저와 비슷한 눈을 하고 도와달라고 제 옷자락을 잡는 손이, 간절한 얼굴이 그냥 취향이었을 뿐이었다. 그게 더 파렴치하지 않아? 이야기를 전해 들은 텐구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이즈미는 자신이 그 영감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이 작은 소녀의 보호자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돌아오면 노인은 항상 안즈를 불렀고, 그게 싫었던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집이 아니라 이 산으로 와서 이즈미를 만났다. 그리고 텐쇼인 집안의 그 노망난 늙은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그는 안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숨을 쉬면서 뱀을 보내 아이가 좀 더 쉽게 신사로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간을 싫어한다는 뱀신은 상냥하고, 다정했으며, 안즈는 집에 있는 것보다 그와 함께 있는 게 즐거웠다. 뱀은 무서웠지만, 그들은 안즈를 해치지도 않았고 아직 이곳에 적응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아이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켜줄테니까, 그 누구도 믿지말고 나를 믿어.'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사실 그렇게 믿지 않아도 안즈는 자기 스스로보다 이즈미를 더 믿고있었지만, 굳이 그걸 말하지는 않았다.
이 할애비한테 시집오지 않겠누?
사쿠마 레이가 안즈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고, 시집이란 단어를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옆에 있던 강아지가(코가는 늑대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안즈는 그가 강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애한테 무슨 말을 하냐며 큰소리를 내길래 안좋은 거구나 싶어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거절했다. 멍멍아, 내가 오늘이 오기까지 몇백년을 기다렸는지 아느냐? 몇백년이고 나발이고 얘는 아직 어린 아이라고! 레이와 코가가 왜 그런 걸로 싸우며,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별로 그 싸움이 저와는 상관없다 결론을 내린 안즈는 커다란 눈깔사탕을 손에 쥐어주며 폭신한 제 꼬리를 내주는 여우의 무릎에 누워서 낮잠을 잤었다. 그게, 레이의 집으로 갔던 첫 날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레이는 손녀처럼 안즈를 대했다. 그리고 간간히 제게 시집오지 않겠냐고 물어보았지만 이제는 그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안즈는 거기에 단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다. 시집 갈 거면 저기 저 산의 이즈미오빠한테 갈 거예요. 그때마다 그는 빌어먹을 뱀새끼라며 이즈미를 욕했다.
'이 늙은이는 널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고작 몇백년 밖에 살지 못한 뱀새끼가 무얼 했다고 우리 꼬마 아가씨에게 이리도 예쁨 받는지 이해를 못하겠구나.'
'저를 태어날 때부터 알았어요?'
'그럼. 나를 위해 태어난 아이인데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그는 가끔 핀트가 어긋난 말을 했다. 현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먼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거기서 느껴지는 서늘함이 안즈는 무서웠으나 레이는 재밌는 사람이었고,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기에 자주 그 집으로 놀러를 갔었다. 그의 무릎에 앉아 기이한 괴담을 듣기도 했고, 별을 보면서 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한 여름의 밤. 무더위와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특유의 서늘함, 풀벌레가 우는 소리, 은은한 달빛,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의 소리, 모기향, 차가운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무섭고도 신기한 이야기. 돌이켜 생각해보면 안즈가 이때의 추억을 쉽게 잊을 리가 없음에도 지금까지 잊고 살았던 것이 신기할정도였다.
제 손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던 안즈를 위해서 장갑을 선물해준 것도 레이였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이게 있으면 괜찮을 게다. 그렇지? 그에게 선물받았던 장갑은 안즈의 보물함에 소중하게 보관되어있었다.
'이 몸은 그다지 착하지 않아서, 우리 아가씨에게도 종종 거짓말을 한단다. 그러니 내 말을 너무 믿지는 말게나.'
레이는 그렇게 말했고, 안즈는 그가 제게했던 말 중 무엇이 거짓말인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인간이 있다.
인간들은 신이 이곳에 남아 자신을 지켜주길 원했고, 그 신을 이 땅에 붙들어두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신을 이곳에 붙잡아둘 수 없었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아등바등하며 방법을 찾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던 신은 자비를 베풀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인간들이 누리는 부귀영화는 관심이 없다. 언제든지 가질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부와 권력따위가 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붉은 눈을 빛내며 신은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인간은 다르지. 나는 너희들을 지배할 수 있고,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지만 온전히 가질 수는 없지. 나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온전히 나를 위한 인간을 만들어내보거라. 그게 내 마음에 든다면, 얼마든지 붙잡혀줄테니. 그 말만을 남긴 뒤 신은 사라졌고, 그때부터 마을의 사람들은 오직 신만을 위한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주술을 걸어 계속 태어날 수 있도록, 계속 태어나서 저 신을 이곳에 영원히 붙잡아둘 수 있도록, 그래서 이 마을에 평화와 부귀를 가져올 수 있도록.
신은 그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드디어 그 아이가 태어났구나. 그런 생각만이 머리에 맴돌 뿐이었다. 허나 아이가 점점 자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하면서 제게 보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이는 곧 신의 전부가 되었다. 내가 졌구나. 그래, 너희들을 소원을 들어주마. 신은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그 마을에 남았고, 한낱 인간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갔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냐. 너만 내 옆에 있으면 나는 몇 번이고 이런 내기에서 져도 상관이 없단다. 그 말을 들었던 제 아이의 반응은 어땠는가, 사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신의 사랑을 받고있다지만 그 아이도 결국은 인간이었기에 결국은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눈을 감은 그 인간을 신은 기다렸다. 당신을 위해 만들어졌으니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만나러오겠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기다림은 지루했지만 그 말만을 믿으며 신은 인내심을 갖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신의 앞에 나타났다. 그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이런 것들이 지루할 법도 한데, 신은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너를 만나기 위한 그 기다림이 지루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래도 걱정이 된다면...흐음, 조금 더 빨리 올 수 있도록 노력이라도 해보거라. 신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리 말했고,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다음에는 더 빨리 오겠다며 약속을 했다.
'나야말로 궁금하구나. 한 번쯤은 도망갈 법도 한데, 어찌 매번 새로 태어날 때마다 꼬박꼬박 나를 찾아오는지. 그리도 내가 좋은게냐?'
'싫었으면 진작에 도망갔겠지요. 저를 못믿으세요?'
'믿는 것과는 별개라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용서해주마. 내가 너를 위해 그정도는 해줄 수 있단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 걱정마세요.'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딜 가겠어요. 나는 당신을 위해 태어난 인간인데.
그러나 그렇게 말했던 그녀가 죽고 다시 태어났을 때, 이번에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신은 그녀를 잡아오지 않았고, 그때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그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녀가 죽고 또 다시 태어났을 때, 신은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여기에 붙잡아두는 것에 가장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 가장 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던 가문의 후계자가, 감히 신의 사람을 탐내서 붙잡아두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전생에 이미 두 사람이 부부의 연까지 맺었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분노는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제가 사랑하는 그녀가 붙잡혀있었기에 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허나 먼저 약속을 깬 쪽은 너희들이니 나도 이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겠지. 보호가 사라진 마을은 금세 온갖 이매망량들이 날뛰는 지옥이 되어버렸으나 신은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