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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안즈 : 후궁견환전au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후궁견환전au

박로제 2018. 5. 16. 20:49

​​​



*후궁견환전 드라마 패러디이므로 상황이나 대사가 비슷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캐붕주의.



1.

처음 눈을 떴을 때 안즈는 이곳이 잘 꾸며진 황천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이 자신이 토해낸 피였고, 이정도로 많은 양의 피를 토해냈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죽기 전에 그 사람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한이구나. 우습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보다는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 서러워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안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니 보이는 건 죽기 직전에도 그리워하던 그 사람의 얼굴이라서ー 안즈는 기어코 이 남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온 줄 알았다. 내가 절대로 그러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했는데! 순간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안즈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제 손을 잡고 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정신이십니까?'

그러니까, 독을 마시고 열흘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의식을 찾은 안즈가 대뜸 그런 말을 한 것은 전부 자신이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기쁜데 그와중에 제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가까이 오라 손짓하길래 다가갔더니 대뜸 해주는 말이 저것이라, 레이는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쓰러지는 안즈 때문에 황급히 잡은 손을 놓고 어의를 불러야만 했다. 덕분에 레이는 안즈가 쓰러지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못했고, 안즈 또한 제정신이 아닐 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

어의는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독을 마시고 그만큼이나 피를 토했는데도 살아남은 건 기적입니다.물론 독을 마셨으니 예전만큼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살아가는데 크게 지장은 없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어의가 한 말은 빠르게 후궁 안으로 퍼졌고, 시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우리 폐하가 무서우니 염라대왕도 겁을 먹고 데려가지를 못하신게지, 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말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퍼지고 퍼져서 결국에는 안즈도 듣게 되었고, 그녀는 그럴듯한 논리라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폐하라면 저승사자쯤은 가볍게 제압하실 것 같지 않니? 소문을 부정해야할 당사자가 오히려 맞다며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말까지 끼얹으니 그 소문은 퍼지고 퍼져서 황제의 귀에도 들리게 되었고, 레이는 그것을 듣자마자 재밌는 말이라며 즐거운 얼굴로 웃었다.

감히 염라따위가 다른 이도 아니고 내 비를 욕심내는데 어찌 그냥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특정인을 콕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후궁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그중에서 총애를 받는 이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고, 현재 황제가 아끼는 후궁은 단 한 명 뿐이었다.

**

여태까지 누구하나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지 않으셨습니까. 책망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레이의 귀에는 황후의 그 말이 마치 책망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계속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후궁을 시끄럽게 만든 건 똑같은 애정으로 그들을 대했던 황제가 특별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다른 이에게 줄 애정까지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황후가 그렇게 묻자 레이는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고 답하며 패를 뒤집었다.

그러나 뒤집힌 패에는 다른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오늘도 희비를 선택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라는 얼굴로 황후는 레이를 바라보았고, 그는 웃고 있지만 서운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자기 처지는 생각도 않고 이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기 전까지는 다른 후궁을 부르는 것이 어떻겠냐며 간절히 청하는데 어쩌겠는가. 황제는 애첩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황후는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황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자신이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

얼굴이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니고, 집안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제법 똑똑하고 총명한 것 같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황제에게 총애를 받을리가 없었다. 소란스러운 것은 질색이다. 황제는 늘 그렇게 말하고 다녔고, 후궁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누구도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도 예외가 있다면 황후 정도 뿐이었으나 딱히 두 사람 사이에도 부부 사이의 정 같은 것은 없었다. 황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총애를 욕심내지 않았고, 쓸데없이 서로를 견제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겉으로나마 평화로웠던 후궁을 시끄럽게 만든 건 전부 이제와서 특별한 사람을 만든 황제였고, 본인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는지 태후가 그것을 지적하면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경사방에서 아무리 패를 올려도 관심없다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황제가 매일 밤마다 패를 뒤집었다. 그게 황후일 때도 있었고, 다른 후궁일 때도 있었지만 열에 여덟 번은 희비의 이름이 적힌 패를 뒤집었기에 다른 후궁들은 그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분한 얼굴로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리며 한을 담아 그렇게 외쳤다. 또 희비를 만나러 가셨단 말이냐! 그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앓아누운 자도 있었고, 적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교묘하게 비꼬는 말을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황후는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중간에서 다른 후궁들이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중재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그 많은 후궁을 다 상대할 수는 없었고, 궁을 발칵 뒤집어 놓은 희비 독살사건의 계획 또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에 날이 갑자기 추워지면서 자꾸 기침을 하기에 그것을 걱정한 황제가 내의원에 명하여서 안즈는 꾸준히 약을 먹고 있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 없이 똑같은 시간에 약을 받아 마셨는데, 이상하게도 약의 쓴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의원에서 약을 바꾼 건가. 그리 생각하며 태감을 부르려고 할 때, 입에서 나온 건 목소리가 아니라 검붉은 색의 피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기도 전에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버렸고, 그 소리를 들은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안즈에게 달려왔다. 희비마마! 순식간에 궁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모습을 본 태감들은 어의를 데려오기 위해서 황급히 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그럴려고 했으나 때마침 들어오던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들 움직이지도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웬 소란이냐.

정무를 마치고 온 것인지 가벼운 복장을 한 황제가 눈앞에 서있었다. 폐하, 그것이, 희비마마가. 희비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게냐. 태감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표정이 바뀌었고, 죽여달라는 말만 하며 제 뺨을 치는 태감을 밀치고 궁 안으로 들어간 황제가 본 것은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반겨주는 애첩의 모습이 아니라, 시체처럼 축 늘어져서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모습이었다.


어의는 약을 모두 마시지 않았기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약을 전부 다 드셨다면 손 써보기도 전에 돌아가셨을 겁니다. 독을 마시고, 그만큼이나 피를 토하고도 살아남으신 건 기적입니다. 독을 마신 당사자인 안즈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레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안즈가 살아남은 건 기적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안즈가 자신을 두고 죽을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다시 눈을 뜨기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안즈는 열흘 동안 사경을 헤맸고, 그동안 레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제대로 먹지도 않았고, 언제 눈을 뜰지 모르는데 자신이 속 편하게 잘 수 없다며 뜬 눈으로 몇날며칠 지새웠다. 보다 못한 황후가 달려와서 말렸지만 황제는 그 애원을 듣지도 않았고, 도리어 차가운 얼굴로 황후를 노려보며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명령했다. 희비를 독살하려고 한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무엇을 믿고 황후를 희비의 옆에 둔단 말인가? 서늘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황제에게 황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태후까지 달려와서 그를 말려보았으나 그는 불효를 용서하라는 말만 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기어이 희비가 눈을 뜨고나서야 그 자리를 벗어난 황제는 양심전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쓰러져버렸고, 덕분에 궁이 또 소란스러워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범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황제의 후궁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이런 독을 구할 정도면 어느정도 이름 있는 가문의 여식이겠지. 게다가 내의원에 있는 자를 제 편으로 만들어서 독을 약에 섞었으니 그만큼 연줄도 있어야할 것이며, 또한 이 모든 계획을 몰래 진행 시켰다는 것은 보고도 모른 척 해줄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그 말은 범인의 편에 가담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며 많은 후궁들이 이렇게 따르는 것을 보아하니 낮은 품계의 후궁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범인은 왕부 시절부터 황제를 모셔온 후궁 세 사람이었고, 하나는 죄가 밝혀지자 자살을 했으며, 하나는 끝까지 자신은 폐하를 사랑해서 그랬다며 울며 매달렸지만 냉궁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고, 남은 하나는 똑같은 독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희비를 저주하면서 죽었다.

범인을 어떻게 하셨나요? 안즈는 그렇게 물어보았고, 레이는 그저 모두 죗값을 받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안즈도 더는 그것을 묻지 않았고, 이 사건 이후로 여전히 남은 후궁들은 안즈를 질투하고 시기했지만 그녀의 목숨만은 노리지 않게 되었다.

**

새로 들어온 후궁이 그렇게 오만방자하다면서요. 폐하께서 봉호까지 내려주셨다지 뭐예요. 그렇게 빠르게 귀인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희비마마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라죠? 드디어 폐하께서도 그 평범하기만 한 희비에게 질리셨나봅니다. 새로 들어왔다는 후궁의 이름이 연귀인이던가요. 어쨌든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구는 모습은 거슬리지만 그 희비가 총애를 잃도록 만들었다면 저희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후궁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고, 딱히 숨기지도 않았기에 그 말은 자연스럽게 안즈의 귀에도 들려오게 되었다. 마마는 저런 말을 듣고도 웃음이 나오세요? 시녀들은 분한 얼굴로 안즈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소문의 주인공인 안즈는 그 말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화가 좀 오래 나신 모양이지. 시녀들은 안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게 무슨 말씀이냐 물었지만 안즈는 웃기만 할 뿐 답은 해주지 않았다.


레이는 항상 다툼 후에 화를 가라 앉히지 못하면 안즈가 아닌 다른 후궁의 패를 뒤집어서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갔지만 그것도 하루정도일 뿐, 다음 날에는 안즈를 찾아와서 미안하다 사과하며 그녀를 안아주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인지 궁녀 하나를 침소에 들인 것도 모자라 봉호까지 내려주고, 보란듯이 귀인의 자리에 까지 앉혀주었다. 이러면 질투라도 할 줄 아셨던 건가. 물론 밤이 외롭기는 하였지만, 늘 같이 밤산책을 하며 보던 자양화를 혼자만 봐야 하는 것이 쓸쓸하고 외롭기는 하였지만 어차피 이정도는 후궁이 되면서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자신 혼자서 그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었으니 이번 일로 황제의 총애를 잃는다고 해도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를 그리워하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고 황제 폐하.
쉿. 조용하거라. 희비가 깨지 않느냐.

태감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고, 레이는 한숨을 쉬며 궁안으로 들어갔다. 남의 속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잘도 자고 있구나.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얼굴을 보니 뺨이라도 꼬집어 깨우고 싶었지만 그럴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기에 레이는 침상 위에 걸터앉아서 말 없이 안즈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 속도 모르고 자꾸 다른 후궁을 만나러 가라고 하기에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짜증을 냈더니 그게 당연한 것이라며 도리어 화를 냈다. 저에게 있어서 폐하는 세상에 하나뿐인 낭군님이시지만 폐하에게 있어서는 제가 유일한, 하나뿐인 부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으니 참았던 모든 분노가 터져버려서, 레이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을 빠져나왔다. 제게 있어서 정인은, 마음을 준 유일한 반려는 너뿐이라고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는 안즈에게 화가 나서 이번에는 다른 후궁을 만나러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홧김에 궁녀 하나를 불러서 후궁으로 들이기 까지 했다. 보고 싶은데 보러갈 수가 없으니 눈에 보이는 궁녀 중에 가장 안즈를 닮은 여인을 데려갔을 뿐인데, 괜한 오기가 생겨서 봉호를 내리고 귀인 자리까지 앉혀버렸다.

'희비는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있는데 폐하께서 자신의 위치를 잊고 계신 거 아닙니까.'

황후조차도 그렇게 말을 하고, 한술 더 떠서 태후는 어디서 그런 되먹지 못한 것을 후궁으로 들여서 궁을 소란스럽게 만드냐며 꼴도 보기 싫다 내쫓기까지 했다. 물론 자신의 위치를 레이도 알고 있었다. 안즈가 더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적당히 선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저도 모르게 자꾸 발걸음이 안즈가 있는 쪽으로 옮겨지는데 어쩌란 말인가. 오늘도 달이 밝아서 어화원으로 밤산책을 갔다가 자양화를 보니 그녀가 생각이 나서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던가. 더 사랑하는 이가 진다더니 내 꼴이 딱 그것이구나. 한숨을 쉬며 잡고 있던 안즈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만 나가려고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

설마 잠에서 깬 건가. 그리 생각하며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보니 다행히도 잠에서 깬 건 아닌 것 같았다. 꿈이라도 꾸는 건가. 그녀의 꿈에 자신이 나온다는 것이 기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만 너를 그리워한 게 아니구나. 레이라는 이름은 그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황제의 본명이었지만 안즈만은, 황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 애첩만은 둘이 있을 때만큼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허락되었다. 정작 당사자는 부끄럽다며 자주 불러주지도 않는 것을 꿈속의 자신에게는 맘껏 불러주는 것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그 이름 뒤에 따라오는 말이 가지마세요, 였기에 더 그런 것도 있었지만.

"옆에 있어 줄테니 걱정말거라."

몰래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얼마든지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그 작은 손을 놓고 나갈 수 있었지만 레이에게는 그럴 마음도, 그럴 의지도 없었다. 슬슬 질리기도 했고, 안즈가 보고 싶기도 했으니 이쯤에서 화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구나. 게다가 곧 어화원에 피어있는 자양화가 질 시기이니까, 꽃이 지기 전에 안즈를 데리고 어화원으로 밤산책을 가고 싶었다.



3.

딱히 외모가 제 취향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첫인상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얼핏 보인 눈의 색이 푸른 호수와 똑같은 색이어서 눈길이 가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보면서 가진 감정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때의 자신은 이미 후궁에 여자는 많은데 굳이 수녀간택을 또 해야 하나 싶은 생각에 그다지 기분도 좋지 않았고, 빨리 이걸 끝내고 정무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그냥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며 아무나 고르면 황후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태감에게 꽃을 주라 말하니, 어디에선가 나비 한 마리가 살랑거리며 날아와 머리에 꽂은 살구꽃 위에 앉았다. 꽃인 줄 알고 앉았나 봅니다. 태후가 그렇게 말하며 웃으시니 흥미가 생겨서, 변덕을 부려 그녀에게 꽃이 아니라 향낭을 하사했다.

그러나 단순한 변덕이었기 때문일까. 레이는 그 날의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그런 후궁이 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간혹 아직 시침을 들지 않은 후궁이 있다며 황후가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끌리지도 않았고, 기껏 패를 뒤집어도 몸이 아파서 폐하를 모실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와 흥이 식어서 그냥 황후를 만나러 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잊혀졌고,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신첩이 전해 들은 왕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셔서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죄송하다 말하며 허리를 숙이는 그녀에게 레이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제 정체를 말할 수는 없었다. 리츠가 이 사실을 알면 양심전을 뒤집어 엎는 걸로도 모자라 내 목에 칼을 들이밀겠지. 오늘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야겠다며 다짐한 레이는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저 눈을 보고 있으니 조금씩 그때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녀간택 때의 그 신기했던 일이. 그렇게 끝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는 구나.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인연인가 싶어서 기분이 묘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하였다.


지금 계절은 자양화가 한창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었기에 레이는 정무를 마치자마자 어화전으로 가서 자양화를 구경하며 여유롭게 쉴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어화원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고, 누구인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제 후궁 중 한 명임을 눈치 챈 레이는 그쪽으로 더 다가가지 못하고 숨어서 그녀가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 나와 같이 꽃을 구경하러 온 모양인데, 괜히 내가 가서 분위기를 깰 수는 없지 않은가. 꽃구경이야 굳이 오늘, 이 시간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녀가 화려하게 피어있는 꽃을 보면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듣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었다. 꽃을 대신하여서 좋은 노랫소리를 들었으니 하루 정도는 이런 식으로 계획이 어긋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며 돌아갔는데,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또 같은 시각에 레이보다 먼저 어화원에 와서 꽃을 구경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한 사흘간 이어지자 결국 참다 못한 레이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고, 궁 안에서 제게 이렇게 말을 걸 사람은 황족 밖에 없고, 이 시간에 어화원에 출입할 사람은 황제뿐이라는 걸 알 수 있을텐데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못했는지 도리어 누구시냐고 묻는 것에 당황하여서 얼떨결에 리츠의 이름을 말한 건 그가 두고두고 입단속을 해야 하는 비밀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오해를 하는 것이 당연했다. 외모는 비슷했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고, 말투나 성격 같은 세세한 것들이 달랐으니까, 자신에게 죄송하다 사과를 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오늘만 보고 말테니 거짓말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녀는 자신이 불편하면 더는 이곳으로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레이는 꽃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소주께서는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했고, 그건 진심이었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였으니 이정도의 배려는 해주는 것이 맞겠지. 딱히 다시 만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걸로 끝인 인연이라 생각했다.

'왕야께서 여긴 또 어쩐 일로…'
'…어화원에 꽃이 피었는데 오랜만에 궁에 왔으니 그걸 보고 가는 건 어떻겠냐고 하시기에 들렸소.'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어째선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고, 정신을 차라니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착실하게 그 시간대에 그녀를 만나러 가는 자신이 이상하고 적응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즐거워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편안해지고 웃음이 나와 이런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그녀를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연모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편안하고 즐거운 건 그것과는 다르지. 레이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고, 분명하게 선를 그어두었다. 이 자양화가 지면 그녀도 굳이 이 어화원에 올 이유가 없어지고, 자신이 먼저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관계니까, 그때까지만 저 다정함에 기대자.

그런 자신이 어쩌다가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되었는가. 모든 이유는 레이가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소주께서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형님의 무엇이 그리도 좋으신 겁니까. 수녀간택날을 제외하면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이가 황제의 이야기를 꺼내면 칭찬일색이요, 사랑에 빠진 얼굴로 좋아한다 말하는 게 이상하여 물어본 것이었다. 궁금하세요? 이제는 제법 편해졌는지 장난끼가 가득한 얼굴로 웃던 그녀는 이건 왕야에게만 하는 이야기니 어디가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며, 특히나 폐하에게는 절대 말해선 안된다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궁에 오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평생을 궁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데 누가 좋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고, 제가 가지 않으면 어린 여동생이 가야 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제가 가겠다고 한 것 뿐이지요. 그래서 별로 치장도 하지 않았고, 머리에 장식한 것도 비녀와 살구꽃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수녀간택에서 떨어졌고,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 꽃을 받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나비가 날아와 머리에 장식한 살구꽃 위에 앉지 뭐예요. 태후 마마가 꽃인 줄 알고 나비가 앉았나 봅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폐하께서도 재밌다는 듯 웃으시더니 그러시더군요. 자유롭게 날아가던 나비가 잠시 쉬어 갈 정도로 탐스럽게 피어있는 꽃에게 굳이 이런 걸 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씀하시는 폐하의 얼굴이 궁금하여 결국 고개를 살짝 들고 폐하를 바라보았습니다.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그때 저는 그 분의 얼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웃는 얼굴 때문이라고 해야할까요. 향낭을 하사하시면서 올해는 살구꽃을 여기서 먼저 보는 구나. 그리 말씀하시는 목소리까지 다정하셔서,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많이 부끄러우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별 거 없는 이유지요. 어리석다고 하셔도 좋습니다. 폐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하셔도 저는 괜찮습니다. 그렇게 혼자서 외사랑을 하고 있는게 외롭지 않냐구요? 왕야는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시군요. 그렇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에 후궁이라는 건 보답 받지 못할 외사랑을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그분을 가슴 아프게, 사무치도록 그리워하고 연모한다 하여도 마음을 주는 만큼 받을 수가 없는 게 당연한 게 후궁이니까요. 게다가…신첩은 그분만의 사람이지만 그분은, 황제 폐하께서는 신첩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괜찮습니다. 그분이 저를 봐주시지 않으셔도, 그때의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이 후궁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수줍은 얼굴로 웃는 그녀의 얼굴을, 레이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내일 봅시다 소주. 간신히 그 말만으로 남기고 양심전으로 돌아왔을 때 태감은 자신을 붙잡고 놀란 얼굴로 그리 물어보았다. 폐하. 얼굴색이 왜 그러십니까. 스스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어떻냐고 다시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자신의 기분을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얼굴로도 모자라 귀까지 새빨갛다는 말을 들으니 얼굴에 더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듣는 고백이었다.

자신을 좋다고 한 자는 적지 않았지만 저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연모하고 있다며 그녀처럼 절절하게 고백하는 이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이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적은 없었다. 거기다가 그건 분명히 자신을 향한 고백일텐데도 그 고백을 듣는 또 다른 자신이 부러워서, 그게 질투가 나서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였다. 단순한 호감이 애정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이라더니, 이걸 말하는 거였구만. 연모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자신은 단순히 편안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기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따위 더는 할 수 없었다.

그녀와 똑같았다. 레이는, 반짝거리는 미소로, 하늘 위의 태양보다 더 빛나는 모습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그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안즈에게 희라는 봉호를 내린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으니까, 빛난다는 뜻을 가진 그 글자만이 그녀에게 어울렸기 때문에 레이는 그것을 선택해 안즈에게 선물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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