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12200506

레이안즈 : 밀방화서(密房花序) 본문

안산블루스따즈

레이안즈 : 밀방화서(密房花序)

박로제 2016. 7. 7. 22:16

장마가 시작되었다

빨래를 햇볕에다가 말릴 수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몸이 쳐지고, 비가 쏟아지는데도 시원하기는 커녕 찝찝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장마 기간이 돌아왔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반기지 않는, 오히려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장마였지만 안즈만은 달랐다. 오랜만에 입궁하는 서방님을 비몽사몽인 상태로 배웅하고, 그 뒤에도 어젯 밤의 여파로 물을 먹은 솜이불 마냥 무거운 몸을 침상에서 일으키지도 못하고 수마에 사로잡혀있던 그녀를 깨운 것은 다름아닌 빗소리였다. 톡, 토독,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안즈는 무거운 몸을 단번에 일으켰고, 마치 한몸처럼 붙어있던 침상에서 벗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밖에서 세차게 내리는 장맛비를 보며 마치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작은 마님, 일어나셨어요?"

안즈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던 계집종은 갑자기 하늘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보며 자신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그 방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일어나는 것을 유난히 더 힘들어 하여 좀 더 잘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었지만 빗소리가 들렸으니 더 잘 수 있게 내버려 두고 싶어도 지금쯤이면 일어나서 세차게 내리는 장맛비를 보고있을 것이다. 계집종에게 있어 장마는 찝찝하고 옷이 젖는 불쾌한 기간이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작은 마님에게 있어서 장마기간은 자다가 빗소리만 들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만큼 특별한 날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사랑스러운 작은 마님은 창가에 놓은 의자에 앉아 창문 바깥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쿄코."
"목욕물을 데워놓았으니 먼저 씻으신 뒤에 식사하셔요. 당주님께서 부탁하고 가셨으니 어제처럼 먹기 싫다 하시면..."
"응, 알았으니까, 쿄코,"
"씻고 나오시면 제가 미리 준비해놓을테니 걱정말고 얼른 씻고 오셔요."

부탁하기도 전에 안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들은 쿄코가  그것을 준비해놓았다고 하자 안즈는 고맙다고 말하며 빗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피어 있는 저 자양화처럼 웃었다. 제 어린 주인에게 이런 일을 시키면서 고마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몇번이나 일러두었지만 그녀는 매번 쿄코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마음이 고운 사람이니 그렇게 사랑받으시는 거겠지. 쿄코는 따뜻한 물 속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늘어지는 안즈를 보며 슬며시 미소지은 뒤, 그녀가 부탁한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안즈가 부탁한 일은 그거였다.

<붉은 기모노를 꺼내와줘.> 

서방님의 눈동자처럼 새빨갛고 나비와 자양화가 수놓아져있는 그 아름다운 기모노는 안즈가 시집왔을 때 그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 뒤로도 서방님은 어린 애첩을 위해 여러가지를 선물해줬지만 그 기모노만큼 안즈가 아끼는 것은 없었다. 평소에는 제 보물상자 안에 넣고 소중하게 보관하지만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상자에서 옷을 꺼내 반드시 그것을 입고 서방님을 맞이할 정도로 특별하게 여겼다. 집안의 다른 사람들은 작은 마님이 그 옷을 고집하는 이유를 잘 몰랐지만 계집종, 안즈가 이 집안에 시집 온 날부터 시작해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오래동안 그녀를 봐온 쿄코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왜 장맛비가 내리는 첫 날에는 무조건 그 옷을 입는지. 

아주 사랑스럽고, 낭만적인 이유였다.



***



황궁에서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레이는 비에 젖은 옷을 벗으며 안즈의 종부터 찾았다. 아무리 전날 밤 무리를 해도 아침잠이 없어 레이보다 일찍 일어나 그를 깨우던 애첩은 최근 유독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 했고, 거기다가 입맛도 없어진 건지 식사도 시원찮게 해서 레이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급작스럽게 찾아 온 여름때문에 더위라도 먹은 것인지, 아니면 몸에 탈이라도 온 건지 싶어 오늘도 상태가 나쁘면 의원을 불러야 겠다 마음먹으며 부른 것인데 다행히도 종을 통해 들어보니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작은 마님은 오늘 하루종일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당주님의 귀가만 기다리셨답니다. 식사도 남기지 않고 다 드셨어요. 장맛비가 정말로 좋으신가봐요. 종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레이는 빗소리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 하염없이 장맛비를 바라봤을 애첩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그녀가 보고싶어졌다. 

"서방님."
"이런,"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저를 부르는 고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레이가 보고싶어했던 그녀, 안즈가 서있었다. 최근 침상 밖에 있는 시간보다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 속을 썩이던 그녀는 장맛비에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걱정시킨 것이 괘씸해서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를 혼낼까, 싶다가도 제 옷자락을 잡고있는 작은 손을 보고있자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레이는 안즈의 손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네. 아픈 곳도 없고 밥도 잘 먹었어요. 서방님은 오늘 별일 없으셨지요?"
"골칫덩이 애첩이 밥도 잘 먹지 않고 계속 골골거려서 걱정하느라 황제가 했던 말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빼고는...음, 없는 것 같구먼?"
"으으...! 그건 어젯 밤에!"
"어젯 밤에?"

서방님이, 저를 놓아주시질 않으니까! 입고 있는 옷의 색깔처럼 빨개진 얼굴로 작게 소리치는 안즈를 보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어젯밤은 레이 자신도 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랜만이었고, 사랑스러운 애첩이 제가 주는 자극에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남자가 거기서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안즈가 나쁜 것이라고, 유혹한 것은 너이지 않냐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그래도 울면서 매달리는 그녀를 못본 척 무시한 죄가 있기 때문에 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서방님."
"응?"
"저녁에, 잊지않으셨죠?"
"흐음...이렇게 비가 오는데, 괜찮겠는가?"
"저는 장맛비가 좋은 걸요."

수줍게 웃는 안즈는,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조금 살이 오르고, 더 예쁘게 웃을 줄 알게 되었지만 그 날의 안즈와 똑같은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레이를 사랑하고 있다. 

"서방님."

어서 나가자는 듯 제 손을 잡고 이끄는 안즈를 따라 나서면서 레이는 과거의 일을, 장마의 추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만날 수가 없는 사이였다. 안즈에게 있어 이것은 원치않은 결혼이었고, 원래는 동생을 위해 준비한 '신부'후보였다. 간택을 위해 이 집에 머무르면서 안즈는 레이를 만났고, 의외로 맞는 부분이 많았던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으며 밤에는 몰래 만나기도 했다. 서로에게 호감은 있었으나 안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그 감정을 숨겼지만 레이는 아니었다. 어차피 아직 동생은 그녀를 만나보지도 않았고 안즈의 존재를 아는 것은 집안의 사용인들 뿐이었다. 아랫것들 입을 막는 것은 쉬웠고, 동생이 모른다면 문제는 없었다. 그래서 레이는 망설이지 않고 안즈를 제 첩으로 들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레이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이런 결말을 바라지는 않았다. 생각치도 못했던 상대와의 갑작스러운 결혼과 볼 것 없는 가난한 귀족의 딸이 맘에 들지 않아 무시하고 헐뜯는 집안 어른들, 사정을 아는 사용인들의 비웃음, 그리고 바뀌어버린 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해 결국 안즈는 쓰러졌고, 그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 온 레이에게 더는 버틸 수 없다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돌아, 가고 싶어요, 싫어요, 더는 싫어요...'

제 소매자락을 꽉 쥐고 눈물로 범벅된 얼굴로 애원하는 안즈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면서도, 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이 집을 떠나는 것을, 자신의 곁에서 멀어지는 것을 그는 허락할 수 없었다.

'...그건, 들어 줄 수가 없을 것 같구나. 미안하다.'

레이의 말을 들은 안즈는 힘없이 소매자락을 놓았고, 그런 그녀를 볼 수 없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때부터 레이는 노력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이 화원도 안즈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자양화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색색의 자양화를 심었고 그와 어울리는 옷을 선물했다. 매일 그녀를 찾아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즈는 짧은 대답만 몇 번 내뱉을 뿐 레이 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레이는 그 날 있었던 일, 동생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떤 아이였는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같이 달밤을 산책했던 그 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으며 환하게 웃고 있던 널 보고 반한다는 감정을 오랜만에 느껴보았으며, 그때부터 널 좋아했다고 능청스럽게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사랑한다고, 안즈에게 속삭여주었다. 그런 남자를, 손을 잡는 것도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남자를, 마음대로 한다 해서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안즈가 원하지 않으면 접촉조차 꺼리는 그 남자를, 안즈는 더는 밀어낼 수 없었다. 

변화의 시작은 지금처럼 비가 내리던 장마 기간이었다. 

'...저랑 같이, 산책하실래요?'

안즈는 레이가 선물해준 옷을 입고 곱게 치장한 뒤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산책해요, 그때 그날처럼. 그 산책은 장마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고, 마지막 날 레이는 안즈에게 청혼을 했다. 긴장한 얼굴, 떨리는 손끝, 항상 여유롭던 그 남자가 말을 더듬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은 그 어떤 소설에 나오는 왕자님보다 멋있었다. 떨리는 손을 잡아주며 안즈는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날 그녀는 처음으로 그 남자가 우는 얼굴을 보았다.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자신을 끌어안는 남자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안즈는 저도 사랑한다고 답해주었다.

그녀 한 사람을 위해 만든 그 화원에서 마음도, 몸도 전부 그에게 주었다. 따지자면 두 사람은 그날 비로소 부부가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안즈는 그 날을 소중히 여겼고, 장마가 시작되면 그날처럼 레이가 선물해준 옷을 입고 그가 만들어 준 화원에서 그와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다. 레이에게 있어서 장마란 귀찮고 번거로운, 해가 가려지는 것을 빼면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기간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사랑하는 그녀가 함께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



"내려주세요, 이대로 산책하는 것은 싫습니다..."
"그치만 옷이 더러워지는 걸 막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느냐."
"그래도 이건 싫습니다...내려주세요 서방님..."

안즈는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내려달라 부탁했지만 레이는 역시나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재밌다는 얼굴로 떨어질지 모르니 제대로 안기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 하고 후회해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레이의 얼굴을 보니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내린 비 덕분에 땅은 흠뻑 젖어있었고, 안즈의 기모노 밑단은 금새 흙과 빗물로 젖어 더러워졌다. 날씨가 이러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끼는 옷이라 안즈는 속상했고, 그런 그녀를 위해 레이가 한 일은 빗물과 흙이 더는 옷을 더럽히지 않게 안즈를 안고 산책을 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어쩌냐고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레이는 고집이 쎘다. 무겁지 않아요? 불편하시죠? 팔은 아프지 않으세요? 이런 말로 그를 설득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레이의 품은 따뜻했다. 부끄럽기는 했지만 이 품 안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벗어나기는 커녕 영원히 이 남자의 품 안에서 살고 싶었다.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그가 들려주는 것만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이걸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이라, 안즈는 레이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에게 더 안기는 것으로 이 마음을 표현했다.

"오늘따라 어리광을 부리는 구나."
"그래서 싫으신가요?"
"사랑스러운 애첩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보는 안즈에게 웃어주며 레이는 이마, 코,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췄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워 아이같지 않은 점이 오히려 문제였던 안즈다. 그런 그녀가 제 나이 또래답게 어리광을 부리며 안기는 것이 싫을리가 없었다. 

항상 걷는 화원인데, 오늘은 레이의 품에 안겨서 보기 때문에 다른 것일까. 자양화는 며칠 전 그를 기다릴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더 탐스럽게 피어있는 것 같았다. 전부 레이때문이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사람과 함께 있기 때문에 안즈의 작은 세상도 특별해졌다. 

"안즈야."
"네?"
"이만 들어가야겠구나. 빗발이 점점 거세져서 이대로 계속 밖에 있다가는 다 젖겠어."

이만 들어가야겠다는 말에 안즈는 아쉬운 얼굴이었지만 레이의 한쪽 어깨가 젖은 것을 보더니 당장 들어가자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안즈가 비를 맞지 않게 한쪽으로 기울여서 들고 있다보니 젖을 수밖에 없었지만 안즈는 그것이 너무 미안했다. 제가 기모노가 더러워진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죄책감을 담은 얼굴로 그렇게 사과하자 레이는 엄한 표정으로 그런 말은 하지말라며 그녀를 혼냈다. 하지말라는 그녀의 말도 무시하고 안즈를 안고 산책을 한 건 레이의 고집이었다. 철없는 서방님의 고집을 들어 준 안즈가 잘못한 것은 없다며 그녀를 달래니 완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레이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안즈를 위해 만들어 둔 이 화원은 꽤 넓었고, 돌아가는 길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안즈는 비에 젖어가는 한쪽 어깨를 보며 안절부절했고, 레이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제 얼굴로 돌려서 그것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했다. 신경쓰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됐고, 비에 젖은 차가운 몸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면 되는데 안즈는 서방님이 비를 맞은게 그렇게 속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이가 오래간만에 함께 하는 산책인데 계속 그렇게 속상해할거냐는 말에 안즈도 고개를 저으며 젖은 어깨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저만 바라보는 레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 몸이 아파서 이렇게 밤에 둘이서 함께 나오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그런 시간을 속상함과 미안함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말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있다보니 어느새 자양화가 눈 앞에서 사라져있었다. 내심 조금 더 안겨있고 싶었던지라 아쉬웠지만 안즈는 레이의 품에서 내려왔고, 그도 흔쾌히 안즈를 내려주었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우산을 건네준 레이는 찬바람을 맞아 조금 빨개진 안즈의 얼굴을 보고는 손을 들어 열을 재보았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열이 있었다. 역시 다 낫지않았는데 욕심을 부려 나왔구만. 멀뚱, 멀뚱 저를 쳐다보는 안즈가 얄미워 말랑한 그 볼을 꼬집을까 했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결국 한숨을 쉬며 손을 내렸다. 

"내일은 나가지 말고 안에 있어야 겠구먼."
"...장마가 끝날 때까지는 저와 함께 산책하기로 약속 하셨잖아요..."
"다 나았다고 거짓말하는 애첩과의 약속은 그다지 지킬 필요가 없는 것 같다만"
"그치만..."
"네가 아프면 다 소용없는 일이야. 그러니까 내일은 얌전히 방안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레이와 함께하는 산책을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었지만, 레이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임을 알기에 안즈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방에서 같이 손을 잡고 장맛비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장맛비가 내리는 화원이 안즈에게 특별한 장소임에는 틀림없지만 거기에 레이가 없다면 다 필요없었으니까.

"자, 그럼 이제 서방님을 속이려고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에, 무슨..."
"다 낫지도 않았는데 나았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어디보자...무슨 벌을 내려야 좋을까."
"너무하세요오..."
"그럼 며칠동안 이 늙은 서방님의 속을 썩인 것도 모자라 다 나았다고 거짓말까지 해놓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더냐?"

아픈 건 제 탓이 아니라고 우겨봤자 아직 밤바람이 찬데 늦은 시간까지 화원을 돌아다닌 안즈의 책임이 없지는 않았으므로, 그녀는 레이가 주는 벌을 달게 받기로 했다. 사실 벌이랄 것도 없었다. 목욕시중을 들 것. 자주는 아니지만 레이의 목욕 시중을 드는 일을 아예 안해 본 것도 아니었고, 말이 시중이지 같이 목욕하자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같이 목욕만 하자는 것이지요?"
"흐음...글쎄다. 장담은 못하겠구먼."
"서방님!"

예쁘게 핀 자양화를 보고 왔으니, 나도 한 번 꽃을 피워봐야되지 않겠느냐? 레이는 짓궃게 웃으며 안즈의 손을 잡아 끌었고,  그의 속셈을 읽은 안즈는 부끄러워 새빨개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그를 따라갔다. 물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안즈도 그게 싫지는 않았지만.


장마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저도 뒤를 쓸 수 있으면 좋겠네요... 퇴고안해서 오타 비문 있을 수 있습니다


0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