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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아내에게 미안한 사실이지만 경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매일 다정한 미소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지만 그 ‘사랑해’의 주체가 단 한번도 아내였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경수가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경수가 느꼈던 그 두근거림과 설렘, 그러니깐 사랑을 하며 느낄 수 있는 그 모든 감정들은 23살의 도경수가 모조리 가져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은 피어나지도 못 하고 저버렸지만, 그때 받은 상처는 이미 다 아물어 단단해 졌지만, 경수는 잊을 수가 없었다. 3월의 캠퍼스를, 모르는 사람밖에 없던 강의실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던 저에게 손을 내밀던 그 남자를, 그리고 저에게 인사를 하던 그 남자의 목소리를, 그 목소리에 넋이 나가 아무 말도 ..
싱싱한 채소가 먹고 싶었다. 그것은 백현이 최근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절대 이루지 못할 꿈이기도 했다. 싱싱하고 맛이 좋을 것 같은 채소들은 비쌌고, 변백현은 그것을 살 돈이 없었다. 당장 하루에 세 끼라도 규칙적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가난한 유학생에게 그런 것들은 사치였다. 참다못해 밖에 나가서 사 먹을까도 생각해봤지만 이 빌어먹을 홍콩의 음식들은 모두 기름에 튀기거나 지진 것들뿐이었고, 생으로 야채를 먹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물론 유학생활만 벌써 4년 차였고, 이제는 이국의 음식이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입맛에 맞았지만 가끔은 그런 기름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채소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차찬텡을 가도 가열하지 않은 채소를 먹는 것..
장마가 시작되었다. 빨래를 햇볕에다가 말릴 수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몸이 쳐지고, 비가 쏟아지는데도 시원하기는 커녕 찝찝하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장마 기간이 돌아왔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반기지 않는, 오히려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장마였지만 안즈만은 달랐다. 오랜만에 입궁하는 서방님을 비몽사몽인 상태로 배웅하고, 그 뒤에도 어젯 밤의 여파로 물을 먹은 솜이불 마냥 무거운 몸을 침상에서 일으키지도 못하고 수마에 사로잡혀있던 그녀를 깨운 것은 다름아닌 빗소리였다. 톡, 토독,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안즈는 무거운 몸을 단번에 일으켰고, 마치 한몸처럼 붙어있던 침상에서 벗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창밖에서 세차게 내리는 장맛비를 보며 마치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