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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12200506
홍콩의 여름은 덥다. 덥고 습하며 비가 지나치게 많이 내리고, 장마 기간에는 집에 얌전히 쳐박혀있는 게 좋을 정도로 사람이 견디기 힘든 날씨였다. 심지어 스콜과 같은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귀찮지만 우산은 필수였고, 안즈의 가방 속에는 항상 작은 우산이 하나 들어가있었다. 오늘도 일을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심상치않았고, 장을 보고 나오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오늘은 월급을 받아서 먹고 싶었던 토마토를 드디어 샀기 때문에 온몸이 젖어도 이것만큼은 지켜야했고, 결국 안즈는 입고있던 가디건을 벗어 물건을 감싼 뒤 우산을 쓰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사실 택시라도 잡으면 되지만 쓸데없이 거기에 돈을 쓸 이유도 없었고, 안즈의 집 앞까지 친절하게 가 줄 택시는 이 홍콩을 뒤져..
*kalafina의 君の銀の庭(너의 은의 정원)을 들으면서 봐주세요. 무라사키노우에를 처음 만난 겐지의 마음이 필시 이런 것이었겠지. 그것은 사쿠마 레이가 소녀를 처음 만났던 날 밤, 달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황태자의 궁은 유난히도 금목서의 향이 짙었다. 궁의 주인을 닮았나보군요. 그의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레이는 그 말의 뜻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마치 인형처럼 항상 표정이 없어서 불만이었던 제 스승의 얼굴이 다른 때보다 유하게 풀어져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는 화려한 외모가 더 유명했던 황태자의 궁은 자신이 주인을 닮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지, 계절마다 가지각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봄에는 꽃의 왕이라는 모란, 여름에는 장맛비를 품은 ..
안즈는 제 고백을 듣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레이때문에 괜스레 불안해졌다. 빈말로도 지금 그의 얼굴은 제 고백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 고백이 그렇게까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걸까. 자신있게 속마음을 고백했지만 안즈는 이렇게 거절당하면 레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사쿠마 레이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안즈는 레이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갖고 고민해달라고 했지만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이라면 안즈는 레이가 이 자리에서 바로 거절해주길 바랐다. 그의 답이 거절이라면, 쓸데 없이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레이는 드디어 자신의..
나오실 줄 몰랐는데, 꿈만 같네요. 레이와 단 둘이 남았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빨간 동백을 머리에 장식하고 깔끔하고 단정한 단색의 기모노를 입은 그녀는 마치 첫사랑 상대와 이야기하는 연애소설 속의 주인공 마냥 수줍게 웃으며 레이를 맞이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그녀는 뛰어난 미인이었고,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렀다. 건방져 보이겠지만 감히 말하건대 레이가 보기에도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기에 충분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레이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져왔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빗소리와 여름임을 알려주는 풍경소리, 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 등이 공간 안에 울려퍼졌지만 레이와 그녀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
백현씨, 일어나요.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더 자고 싶은데, 누군가가 자꾸 일어나라며 몸을 흔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손에는 얼른 잠에서 깨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나왔다. 징징거림도 상대가 받아줄 때나 효과가 있는 거지, 이 남자를 상대로는 효과도 없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수 있기에 백현은 억지로 눈을 부릅 뜨며 잠에서 깨려고 노력했다. "...경수씨, 저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백현씨." "저는 저언ㅡ혀어 좋은 아침이 아니거든요오..." "하하하. 전 백현씨가 부탁한 대로 했을 뿐인 걸요?" "그건 맞지만..." "자, 얼른 일어나요. 아침은 먹고 나가야죠." 경수는 이불에 돌돌 말려있는 백..
요즘따라 자꾸 어디선가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살고있는 존재는 자신과 레이, 둘 뿐인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처음에는 무서워서 무심코 귀를 막거나 누구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안즈가 혼자 있을 때만 들려왔기 때문에 레이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게 제일 큰 이유였지만 나중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져서,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안즈는 레이와 둘이서 이곳에서 사는 게 싫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있는 건 산이나 들 뿐이고, 조금 더 걸어가면 계절에 상관없이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걸어가면 아주 푸른 바다가 펄쳐져 있었다. 하루일과는 비슷하게 반복되었지만 지루하지도 않았고,..
「거절해도 좋으니 이번만 나가주십시오.」 「인사만 하고 나와도 좋다고 하니 가서 얼굴만 비춰주셔도 좋습니다.」 자신에게 그 사진을 건네주며 했던 말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사진 속의 여자는 단정한 미인이었고, 레이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기를 너무 좋아해서, 그저 인사만 해도 좋으니 그 자리에 나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만한 집안의 딸이면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을 텐데 그런 사람이 제발 나와만 달라고 머리 숙여 부탁했다는 말에 레이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쿠마 레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애정을 받아도 돌려줄 수가 없는데, 왜 그렇게 맹목적으로 구는 것일까. 여자의 사진을 계속 보고 있느니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
이런 상황을 원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이루어지는 걸 원한 건 아니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를 벗어나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레이였다. 다음 페스 장소가 바다로 결정나서 말이야. 신카이군이랑 치아키군, 그리고 내가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카오루군도 알지 않은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의도는 뻔했다. 저 멤버로 갔을 때 통제가 되지 않음이 분명하니 와서 도우라는 말이었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거길 내가 왜 가냐고 따졌더니 레이는 안즈도 함께 간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쿠마 레이는 하카제 카오루가 안즈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있는지 알고 있었고, 도와줄 때도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안즈를 인질 삼아 카오루를 연습에 참여시키거나 오늘처럼 사전조사..
안즈는 레이에게 묻고 싶은게 많았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관계에 의문을 느끼고, 지쳐감에도 불구하고 겁이 나서 차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우리 무슨 사이에요? 그 말 한마디가 이렇게나 어려웠던가. 저를 품에 안고 잠든 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안즈는 한숨을 쉬었다. 어느날부터 갑자기 안즈는 레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옆을 보면 항상 레이가 서있었다. 처음에는 「귀여운 아이들」중 한 명이라서 나를 이렇게 챙겨주는 걸까, 하고 생각했었지만 둘만 남은 경음부실에서 레이와 키스했을 때,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손을 잡거나 포옹을 하는 일은 다른 사람과도 별 생각없이 하는 일이니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키스는 달랐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백물어百物語 : 백가지 괴담이라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촛불을 백 개 켜놓고, 사람마다 돌아가면서 괴담을 하나씩 하며 괴담이 끝날 때마다 촛불을 하나씩 끄는 것. *노래를 들으면서 봐주세요. 여러분은 도플갱어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히비키 와타루였다. 토모야는 청소하다가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며 짜증을 냈고, 호쿠토는 평소처럼 그냥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무시를 했다. 그러나 와타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청소도 곧 끝났고 오늘은 더 할 일도 없으니 괜찮지 않을까. 끝까지 무시하고 청소하던 호쿠토는 한숨을 쉬며 도구들을 치운 뒤 와타루가 앉아있던 자리에 앞에 앉았다. 짜증을 내던 토모야도 호쿠토가 자리에 앉자 더는 뭐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