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안산블루스따즈 (85)
110212200506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그런 운명을 타고 났으니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위치를 알았고, 해야할 일도 알았다. 그러니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울지마요.」 당연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제 운명을 원망했고, 이렇게 태어났음을 저주했다. 레이안즈 : 君の銀の庭(너의 은의 정원) 끝까지 이 혼인은 안된다고 거부했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그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마음대로 하거라. 이제 더는 말리지 않으마. 그 대답을 듣자마자 안즈는 그때와 똑같이 금목서 꽃가지와 함께 그 소식을 전달했고, 아버지를 설득했다는 그 서신을 받자마자 레이는 옆에 신하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만세까지 하며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EXO의 유리어항에서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들으면서 봐주세요. 「세나 군. 잠시 나와 만나줄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사쿠마 레이가 자신에게 대외적으로 쓰는 업무용이 아닌 개인용 휴대전화로 연락을 해왔다는 건 조금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하겠지만 이즈미는 사쿠마 레이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안즈와 있을 때 몇 번 대신 전화를 받아준 적은 있지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따로 연락한 건 앞서 말했듯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쎄... 우리가 만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재밌는 소리를 하는 구먼. 만날 이유라면 있지 않은가?」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기분 나쁜 예감이 들더니, 어째서 그런 예감은 틀리지가 않는 걸까. 이즈미는 얌전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새봄 - 꽃, 그대를 꼭 들으면서 봐주세요. 모든 일이 해결된 후 사정을 모두 들은 리츠가 두 사람을 찾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굽이 있는 워커를 신고 레이를 걷어차는 것이었다. 정통으로 맞은 레이는 그대로 바닥에 허리를 부여잡고 쓰러졌으며 리츠는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서 이제 좀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며 해맑게 웃는 얼굴로 안즈에게 인사했다. 안즈와 단 둘이 먼저 만났을 때 그 인간 만나면 어디 한군데는 부러뜨려주겠다고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은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세게 걷어찰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안즈도 조금 놀란 얼굴로 레이와 리츠를 번갈아보았다. 물론, 리츠가 레이를 때리는 건 이미 안즈도 동의했던 일이기 때문에 그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주위 사람..
*316 - 망향을 들으시면서 봐주세요. 할머니의 작은 화원에는 갖가지의 꽃이 심어져있었고, 계절에 맞는 꽃들이 피어났지만 수국은 원래 없던 꽃이었다. 할머니는 수국을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그 꽃을 기르려고 한 적은 없었다. 좋아하는데 왜 기르지않아요? 그렇게 물었을 때, 할머니는 누군가가 생각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에게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제게만 말해주길래 츠바키는 여태까지 그 수국이 첫사랑을 생각나게 하는 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봄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 남자와 함께 보내는 첫 여름이 시작되고 장맛비가 내리면서 할머니의 작은 화원에는 탐스러운 수국이 피기 시작했다. 아, 혹시. 문득 그때의 대화가 생각이 나서 츠바키는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왜 수국을 기르..
소녀는 자신의 할머니를 굉장히 좋아했다. 할머니의 집은 매우 가까웠기에 소녀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벗어던진 뒤 가까운 할머니의 집으로 달려갔다. 소녀는, 친구와 노는 것보다 할머니와 함께 마루에 앉아 이야기 하는 걸 더 좋아했다. 꽃처럼 고운 소녀의 할머니는 왠지 모르게 할머니보다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같다는 느낌을 많이 주었다. 할머니가 우리 언니였으면 좋겠어요. 형제가 없어 혼자서 지내고 있는 소녀는 제 할머니와 같은 자매가 갖고 싶었고, 부모님은 그걸 듣고 버릇이 없다며 화를 냈지만 할머니는 자신도 너같은 귀여운 여동생을 갖고 싶었다며 유쾌하게 웃어주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고, 자주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다. 한 번도 소리 높여서 싸운 적도 없었고 ..
홍콩의 여름은 덥다. 덥고 습하며 비가 지나치게 많이 내리고, 장마 기간에는 집에 얌전히 쳐박혀있는 게 좋을 정도로 사람이 견디기 힘든 날씨였다. 심지어 스콜과 같은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귀찮지만 우산은 필수였고, 안즈의 가방 속에는 항상 작은 우산이 하나 들어가있었다. 오늘도 일을 마치고 나오니 하늘이 심상치않았고, 장을 보고 나오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오늘은 월급을 받아서 먹고 싶었던 토마토를 드디어 샀기 때문에 온몸이 젖어도 이것만큼은 지켜야했고, 결국 안즈는 입고있던 가디건을 벗어 물건을 감싼 뒤 우산을 쓰고 천천히 집으로 걸어갔다. 사실 택시라도 잡으면 되지만 쓸데없이 거기에 돈을 쓸 이유도 없었고, 안즈의 집 앞까지 친절하게 가 줄 택시는 이 홍콩을 뒤져..
*kalafina의 君の銀の庭(너의 은의 정원)을 들으면서 봐주세요. 무라사키노우에를 처음 만난 겐지의 마음이 필시 이런 것이었겠지. 그것은 사쿠마 레이가 소녀를 처음 만났던 날 밤, 달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황태자의 궁은 유난히도 금목서의 향이 짙었다. 궁의 주인을 닮았나보군요. 그의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레이는 그 말의 뜻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으나 마치 인형처럼 항상 표정이 없어서 불만이었던 제 스승의 얼굴이 다른 때보다 유하게 풀어져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름대로 기분이 좋았다. 가지고 있는 재능보다는 화려한 외모가 더 유명했던 황태자의 궁은 자신이 주인을 닮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지, 계절마다 가지각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봄에는 꽃의 왕이라는 모란, 여름에는 장맛비를 품은 ..
안즈는 제 고백을 듣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레이때문에 괜스레 불안해졌다. 빈말로도 지금 그의 얼굴은 제 고백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 고백이 그렇게까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걸까. 자신있게 속마음을 고백했지만 안즈는 이렇게 거절당하면 레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사쿠마 레이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안즈는 레이의 생각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갖고 고민해달라고 했지만 받아줄 수 없는 마음이라면 안즈는 레이가 이 자리에서 바로 거절해주길 바랐다. 그의 답이 거절이라면, 쓸데 없이 희망을 갖고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레이는 드디어 자신의..
나오실 줄 몰랐는데, 꿈만 같네요. 레이와 단 둘이 남았을 때 그녀가 한 말이었다. 빨간 동백을 머리에 장식하고 깔끔하고 단정한 단색의 기모노를 입은 그녀는 마치 첫사랑 상대와 이야기하는 연애소설 속의 주인공 마냥 수줍게 웃으며 레이를 맞이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도 그녀는 뛰어난 미인이었고,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렀다. 건방져 보이겠지만 감히 말하건대 레이가 보기에도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기에 충분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레이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오랫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져왔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빗소리와 여름임을 알려주는 풍경소리, 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 등이 공간 안에 울려퍼졌지만 레이와 그녀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
요즘따라 자꾸 어디선가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살고있는 존재는 자신과 레이, 둘 뿐인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처음에는 무서워서 무심코 귀를 막거나 누구냐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는 안즈가 혼자 있을 때만 들려왔기 때문에 레이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게 제일 큰 이유였지만 나중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해져서,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안즈는 레이와 둘이서 이곳에서 사는 게 싫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있는 건 산이나 들 뿐이고, 조금 더 걸어가면 계절에 상관없이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걸어가면 아주 푸른 바다가 펄쳐져 있었다. 하루일과는 비슷하게 반복되었지만 지루하지도 않았고,..